소설리스트

4화 (5/23)

# 04. 정오에 반짝이는 비즈커튼의 색

“개강한 지 2주일 정도 지났고, 개인 과제를 비평하는 시간도 가졌으니 이제 서로 어느 정

도 눈에 익었겠죠? 이제 슬슬 영상제 준비를 위해 그룹을 구성하도록 하죠. 다음 주 강의 

전까지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다섯 명 내외로 그룹을 짜서 명단에 팀원과 팀장을 적어

서 제출해주세요. 팀을 못 정하겠으면 역시 다음 주 강의 전에 제게 찾아와주시고요. 앞으

로 이 다섯 명은 2개월 정도라는 짧은 시간 안에 3분이내의 영상물을 제작하고 전시하는 

시간을 가질 겁니다. 자문이 필요하면 상담시간에 언제든 찾아와주세요. 나는 평가하는 사

람이 아니라, 여러분의 작업에 함께 도움을 주고 참여하는 사람이니까. 그럼 오늘은 이

만.”

쥐나뻬 교수는 말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갔다. 주변은 벌써부터 부산한 움직임을 보였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속에 혼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지난 번 첫 개인 과제를 모아놓

고 서로 비평을 하는 시간동안 쌓였을 나의 이미지 때문이었다. 내 과제 때 쥐나뻬 교수의 

비평에 학생들마저 동의한다는 듯 술렁거렸었다. 그날 이후 나는 쥐나뻬 교수의 수업시간

엔 언제나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주변은 벌써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과제가 마음에 들었

던 친구들은 꽤 있었지만 어쩐지 자꾸 주눅이 들어서 먼저 같이 하자고 말하기가 어려웠

다. 나는 주변을 어정쩡하게 둘러보다 한숨을 내뱉었다. 부끄러워도 어쩔 수 없이 쥐나뻬 

교수에게 부탁해 그룹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문득 내 앞에

서 머뭇거리는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림자의 주인은 미사 우에하라였다. 미사, 바로 

강의실 앞에서 마주친 동양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귀여운 얼굴을 생끗 웃어 보이며 내게 

말했다. 

“저, 지노? 아직 속한 팀이 없다면 우리와 함께 작업하지 않을래?”

“뭐……?”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하며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때 쟈끄가 뒤에서 내 어깨에 팔

을 두르면서 말했다.

“그래, 지노. 우리 팀에 들어왔으면 좋겠어.”

“저어…, 괜찮겠어? 내가 들어가도.”

나는 조심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번갈아 보자, 쟈끄가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설마, 저번 주에 있었던 네 발표수업 때 일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야, 그런 걸로 일일

이 신경 쓰면 학교생활 못해. 네가 모르나본데 원래 쥐나뻬 교수는 깐깐한 성격과 독설로 

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해. 내가 작년에도 이 교수한테 수업을 들어봤지만 학생들한테 좋은 

소리 하는 걸 거의 못 봤어. 언제나 트집 못 잡아서 안달이지. 틈만 보이면 그대로 악어보

다 더 독하게 물고 늘어진다니까. 네 대답이 확실히 혼날 만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뭐 그

런 일로 의기소침해 할 건 없어. 솔직히 네 스토리 듣고 속으로 괜찮다고 생각한 애들 많

을 걸. 물론 나도 그랬고.”

“…….”

“그래, 맞아. 그러니까 지노, 괜찮다면 우리와 같이 팀을 하는 건 어때? 우리팀은 끌로드 

까지 합해서 아직 네 명이야. 한 사람이 더 필요한데.”

쟈끄 옆에 서 있던 조제뜨라는 여자애가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들을 잠시 둘러보다가 천

천히 입을 열었다.

“……고맙게 받아들일게. 앞으로 잘 부탁해.”

그렇게 한동안 내 머리를 괴롭혔던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팀을 적어 넣은 

쪽지에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적어 넣고 나는 강의실을 나왔다. 왠지 모르게 얼굴이 자꾸 

웃으려고 했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거야?”

뒤돌아보니 미사가 내 뒤를 좇아오고 있었다. 나는 살갑게 미소 짓는 얼굴을 어색하게 마

주보며 말했다.

“아니…. 학교 카페에서 점심 먹고 쉬었다가 다음 미학수업 들어가려고. …그런데 나 기

숙사에서 사는 걸 어떻게 알았어?”

“어머, 기숙사 내에서 몇 번이나 스쳤는데 기억도 못하는구나.”

그녀는 제법 섭섭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조금 미안해져서 다시 물었다.

“너도 우리 건물을 쓰고 있었어?”

“응, 넌 3층 살지? 난 바로 아래층에 살거든.”

“그랬구나, 미안. 내가 걸어 다닐 때 사람 얼굴을 잘 안 봐서 몰랐어.”

“뭐, 그런 거 같긴 하더라. 어쨌든, 내가 얼마 전에 불고기 재료를 사왔는데 괜찮다면 같

이 먹어줄래? 너무 많아서 처치곤란한데.”

“불고기?”

일본인 특유의 데데거리는 말투가 섞인 그녀의 프랑스어 사이에서 친숙한 ‘불고기’라는 

단어가 나오자 나는 깜짝 놀라 조금 큰 소리를 질러버렸다. 그녀는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응. 형부가 한국인이거든. 그래서 언니 옆에서 한국 음식 요리하는 걸 이것저것 배웠어. 

특히 한국음식을 꽤 좋아해서 여기서도 가끔 혼자 해먹었어.”

“그렇구나…, 이거 정말 놀라운데.”

“한국말도 조금 할 줄 알아. 뭐, 내세울 정돈 아니지만. 어쨌든 같이 먹어줄 수 있어?”

“아, 초대만 해준다면야 나야 영광이지.”

미사는 기분 좋은 대답을 들은 듯 내 말에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안 그래도 슬슬 빵조각과 

치즈에 질려가고 있었는데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선지 그 순간만큼은 그녀

가 꼭 숨겨졌던 우렁이각시처럼 보였다.

본래 프랑스 기숙사란 학교에 개별적으로 있다고 하기보단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개념이

기 때문에 거리 차가 상당히 나기도 한다. 다행히 내가 지내는 기숙사는 학교에서 자전거

로 10분 내외면 갔기 때문에 2시간의 점심시간동안 다녀오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같이 타자. 이편이 훨씬 빠르잖아.”

나는 얼마 전에 산 자전거를 보관소에서 끌고 오며 그녀에게 말했다. 미사는 조금 부끄러

운 듯 고개를 숙인 채 곁눈질을 하다가 이내 달려와 내 뒤에 올라탔다. 얼마나 내 허리를 

꼭 붙잡는지 나는 등 뒤에 닿은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자꾸 의식되어 몇 번이나 휘청거렸

다.

그렇게 기숙사에 도착해 처음 들어가 본 그녀의 방은 참으로 여자가 사는 느낌이 가득한 

방이었다. 창가엔 보라색 비즈 커튼이 쳐져 있었고 침대시트는 수줍은 핑크빛 튤립 봉오리

가 프린트 되어 있었다. 같은 구조임에도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은은하게 방에 배어있는 

화장품 냄새를 맡으며 역시 여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방 이곳저곳을 둘러보

며 서성이는 나를 보며 말했다.

“거기 앉아 있어. 조리실 가서 빨리 요리해올 테니까.”

“같이 가자. 내가 좀 도와줄게.”

내가 재킷을 벗으며 말하자 그녀는 의외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할 수 있겠어? 그런데 한국 남자들은 요리 하는 거 싫어하고 받아먹기만 한다던데, 지

노는 다르네.”

“누가 그런 소릴 해?”

“뭐, 우리 형부만 봐도 그랬고, 한국인을 아는 주변의 친구들도 그랬고. 어떤 집은 남자

는 부엌에도 못 들어오게 한다고도 하던데?”

나는 한국남성에 대한 오해에 약간 발끈하며 말했다.

“그건 사람마다 달라. 한국에도 요리를 좋아하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게다가 예전에

야 남자가 부엌에 들락거리는 걸 막았을 테지만, 요즘은 그러는 집 아예 없다고 봐도 되

고.”

“어머, 그래?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보구나. 그럼 일단 나가자.”

미사는 내 말에 관심 없는 듯 가볍게 대꾸하며 밖으로 나갔다.

공용조리실에서 나는 그녀와 함께 식사준비를 했다. 마음속으론 최대한 대한민국 남아의 

이미지에 먹칠하지 않도록 자취할 때 갈고 닦았던 멋진 칼놀림을 보이겠다는 비장한 다짐

을 했다. 나는 양파의 매운 기운에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는 걸 견디면서 빠르게 썰어나갔

다. 

“오, 제법이네? 아까 한 말이 헛소린 아니었나봐?”

미사가 쌀을 씻다가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그 말에 나는 양파 때문에 핑 도는 눈물도 꾹 

눌러 넘겼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맛있는 불고기가 완성이 되었다. 우리는 간단히 일본식 밑반찬

과 함께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했다. 설거지까지 마친 뒤, 우리는 다시 그녀

의 방으로 돌아왔다. 커피포트로 커피를 끓이던 중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왔다.

“근데 지노 너는 어쩌다 애니메이션을 공부하러 프랑스까지 올 생각을 한 거야?”

먹자마자 소화시키게 생겼군. 나는 그녀의 질문을 듣자마자 그렇게 생각했다. 그동안 여

기까지 오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던 이야기를 하나하나 꺼내보자면 하루 종일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는 목구멍에 음식들을 눌러 삼키고 물 한 컵을 단번에 들이

켰다. 그리곤 한 번 심호흡을 크게 들이킨 뒤 입을 열었다.

“음, 그러니까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즈음부터

였을 거야. 꽤나 갑작스런 마음의 변덕이었지. 어릴 적부터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관심은 

많았지만 이전엔 한 번도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으니까. 그저 

내가 연습장에 그린 만화를 친구들에게 돌려 읽히는 재미를 느끼면서 만화가나 해보면 어

떨까 싶은 정도였어. 그 이전까지 접한 애니메이션이라고 한다면 디즈니나 일본 애니메이

션정도였고, 그것들이 어쩐지 만화처럼 직접 와 닿는 매력은 없었어.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친구의 이끌림에 우연히 유럽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상영하는 특별

전에 가게 됐어. 기존에 봐왔던 애니메이션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지. 애니메이션에게 이

런 힘이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어. 그야말로 하나의 컬쳐쇼크라고나 할까? 그것들을 보

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의 꿈은 어느새 바뀌어있었던 거야. 언젠간 유럽으로 유학을 

가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고 싶다는 소망이 내 마음 속엔 미미하지만 확고하게 자리 잡은 

순간이었지.”

“일종의 인생의 전환점이었구나.”

그녀는 제법 흥미진진하다는 태도로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인 채 듣다가 한마디 거들었다.

“음,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구체적으로 들기 시작한 건 내가 고등학교에 다

닐 때였지. 그때 내가 제 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배웠었는데 그때부터 프랑스문화의 매력

에 심취하기 시작했어. 그들의 문화 전반에 걸쳐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너무도 부러웠

고 공유하고 싶었지. 무엇보다도 그들의 교육 시스템이 나의 관심을 끌었어. 너도 알다시

피 다른 나라에 비해 프랑스 국립대학 학비는 정말 파격적이잖아. 자신의 능력만 충족 된

다면 돈 때문에 공부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게 마음

에 들었지. 그 이후 나는 대학에서 불어와 불문학을 배우면서 개인적으로는 포트폴리오를 

준비해 2년 후엔 애니메이션과로 편입했어. 연애, 술, 다양한 대학 활동 등, 대학 생활의 

즐거움을 모두 포기하면서까지…정말 열심히 공부했어. 덕분에 대학생활을 한 4년 동안 

딱 2번 빼고 모두 전액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녔지. 그리고 올해 학교를 마치고 이 학교에 

지원한 게 덜컥 붙어버려서 그대로 오게 된 거고.”

때마침 커피포트에 있던 물이 다 내려왔다. 그녀는 진득한 헤이즐넛 향을 가로질러 머그

잔을 준비했다. 미사는 분홍색과 하늘색의 꽃돼지가 그려진 커플머그잔에 커피를 따르며 

말했다.

“진짜 그렇게 되기 힘들었을 텐데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다. 설탕이나 프림 필요해?”

“…아, 아니 아무것도 넣지 말고 그대로 줘. 음, 그동안 정말 힘들었지. 특히 주변에서 나

를 보는 시선도 꽤 힘들었어. 일본이나 미국으로 가지 무엇 하러 애니메이션을 공부하러 

프랑스를 가냐는 말도 있었고, 예술은 능력도 능력이지만 특출 나지 않으면 돈 없이 인정

받기 힘들다는 말도 많았고. 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들은 모두 나

의 결심을 굳게 하고 억척스럽게 만들었지. 대학에 다니면서도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한 번

에 몇 개씩 뛰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어. 공모전 따위에서도 돈 좀 받았고. 유학미술학원비

용에도 쓰고 유학자금으로도 모으고. 그런 식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내가 홀가분한 태도로 말을 마치자 그녀는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아직 스물 둘이라고 했지?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데도 대단하네.”

“…그게 정말이야? 정말 스물다섯?”

“뭐 하러 나이를 속이겠어.”

그녀는 내 물음에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는 정말 의외라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

“정말 어려보이네. 나랑 동갑정도인줄 알았는데.”

“그래? 난 딱 보기에도 네가 좀 어려보이긴 하던데.”

“…….”

“참, 군대는? 한국 남자들은 스무 살 넘으면 군대에 의무적으로 가야 하지 않아?”

“잘 아네. 군대걱정도 있었지만 일단 늦출 수 있을 때까진 늦추기로 마음먹었어. 사실 이

번에 합격하지 못했다면 바로 군대에 가야했을 거야.”

“흐음.” 

그녀는 내 말에 흥미롭다는 듯 비음으로 동조하며 커피 잔을 내밀었다.

“아, 고마워.”

나는 따끈따끈한 커피를 후후 불며 입 속에 들이켰다. 나는 문득 나 혼자 한참이나 떠들어

댄 것 같아서 궁금하진 않지만 그녀에게도 그런 질문 따위를 던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는 어때? 갑자기 프랑스로 애니메이션을 공부하러 온 이유.”

“음, 그냥 내 경우는 어쩌다 보니 오게 된 거였어. 근데 말이야, 너 한국인 유학생들과는 

전혀 모르고 지내니?”

미사는 그렇게 대충 대답하곤 내게 또 설명하기 복잡한 질문을 던졌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

“아니, 내가 아는 한국인 친구랑 학교를 걷는데 네가 지나가더라고. 내가 그 친구한테 너

에 대해서 물었더니 한국인이었냐고 오히려 나에게 되묻더라고? 그래서 조금 의아하긴 했

지. 대체 왜 다른 유학생과 교류하지 않고 혼자 다니는 거야?”

“…뭐, 그냥 그럴 필요성을 별로 느끼질 못해서.”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외롭지 않아? 혼자 지내면 모국어도 못쓰고 아무래도 이런저런 

도움을 받기도 어렵잖아.”

“뭐…아직까진 딱히 외로운 것도 못 느끼겠고…, 워낙 한국에 있을 때에도 혼자 지내는 

시간을 좋아했었거든. 수다 떠는 걸 좋아하는 타입도 아니어서 한국어를 쓰고 싶다는 생각

도 그다지 강하게 안 들고, 한국말 너무 자주 쓰면 프랑스어가 잘 늘지도 않을 것 같아서. 

뭐, 그래도 가끔 욕하고 싶을 때 한국말로 하면 좋긴 하더라. 언제 한 번은 관공서에서 서

류 처리할 게 있어 갔는데 말이야. 그 공무원이 고질적인 프랑스 공무원타입인거야. 느려

터지고 불친절한데다 확실하지 못한 일처리까지.”

“아, 맞아. 나도 처음 왔을 땐 정말 적응 안 되더라. 프랑스 공무원들, 정말 프랑스에서 여

기저기 들끓는 마피아 다음으로 사라져야 할 종족들이야.”

“하핫, 정말 그래. 아무튼 그 공무원은 한 번에 끝날 일을 네 번인가 다섯 번인가 날 드나

들게 하며 겨우 서류를 통과시키더라. 나는 그 며칠 동안 진정 내 인내의 끝이 어디인가 확

인할 수 있었지. 겨우 일이 처리됐던 날엔 내가 그 남자를 향해 싱글싱글 웃으면서 대놓고 

한국말로 갖은 욕지거리를 했어. 정말 평소엔 입에 올리기 힘들 정도로 상스러운 말들을 

했는데 그 프랑스인은 왠지 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으니 함부

로 화도 못 내더라고. 그땐 정말 통쾌하더라.”

“후훗, 정말 그랬겠다.” 

그녀는 절대적으로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나는 역시 비슷한 문화권이라 이

야기가 통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서 다시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이었다.

“이야기가 딴 데로 새긴 했지만 어쨌든 다른 한국인들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이유라

면…, 워낙 한국인들이 유독 술자리도 좋아하고 서로 잘 뭉치잖아. 같이 잘 놀러 다니고, 

술도 잘 마시고, 심지어는 숙제도 대신 해달라고 한다더라. 다들 고단한 유학 생활인데 그 

결속력은 더 심할 테고 난 애초에 그런 문화를 별로 즐기지도 않아서 끼지 않은 거지. 종교

가 없어서 그런 쪽으로 만날 계기도 없고.”

“그래도 그렇지, 너 진짜 독종이다. 아님 마음이 정말 차갑다든가. 나 처음 프랑스 왔을 

땐 친구할만한 일본인이 주변에 없어서 무척 외로웠는데.”

그녀는 다소 정이 떨어진다는 듯 손을 휙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 다른 한국인들

을 굳이 만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순 없었다.

“그런가? 그래도 항상 나 혼자 지내는 건 아니야. 굉장히 친해진 프랑스인 친구가 있거

든.”

“우리 학교?”

“아니, 다른 학교. 빠리 국립음악대학에서 작곡을 공부하는 애야. 처음 빠리에 도착한 다

음날 만났는데……아마 그 친구가 있어서 외로움을 덜 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애초에 한

국에 있을 때에도 가볍게 여럿 사귀는 것보단 깊은 관계를 맺은 한두 명의 친구면 충분했

거든. 지금의 나로선, 그 녀석과의 관계정도면 충분해.”

“흐음… 그렇구나. 어떤 애야?”

“그냥…, 좋은 녀석이야. 나보다 네 살이나 어린데도 마음씀씀이도 넓고, 나한테 신경써

주는 마음도 정말 감동적일 정도고…….”

“…….”

갑자기 미쉘을 떠올리자 나는 단단하게 둑으로 막아놓은 마음 한구석이 울컥하며 무너져 

그곳에서 격정적으로 물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기묘한 만남, 특별한 교감, 따뜻한 감정. 

평소 타인에게 잘 얻지 못한 단어들이 하나하나 물속에 섞여 나왔다. 나는 애써 범람하는 

감정을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모르겠어. 그냥, 좀 내겐 특별한 사람이야. 그 녀석은.”

“그렇구나. 좋겠다. 그런 사람을 만나서.”

“응.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

그녀가 예의상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진심을 담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 

말을 내뱉으며 나는 문득 미쉘에 대한 그리움에 갈증과 허덕임을 느꼈다. 미쉘은 내게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발표수업 날, 쥐나뻬 교수의 심장을 관통당하는 것 

같은 비평에 잠깐이었지만 극심한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나를 구원해준 것도 미쉘이었다. 

아무리 오기 이전에 미리 공부해 온 곳이었지만 프랑스라는 나라, 빠리라는 도시는 처음

엔 내게 낯설게 다가왔다. 물론 이곳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이라 한국과 완전 다른 것은 아니

었지만 교통이나 생활방식, 법, 예절, 인간관계 등 모든 것을 몸에 새롭게 익혀야 했다. 그

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정말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낯선 땅에 나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해줘서 정신적으로 참 많은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와의 관계

만으로, 나는 유학생 생활에 언제나 동반한다는 외로움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엔 까트린느, 롤리타와도 함께 피크닉도 다녀왔다. 그런 미쉘의 배려로 나는 그녀들과

도 예전보다 한층 더 가까워졌고 동성애 문화 또한 거부감 없이 다가왔다. 정말 무의식중

에 그는 내 모든 생활에 영향을 주었다.

돌아가면 전화를 해서 오늘 저녁에 만나자고 말해야겠다. 지난번에 깜짝 놀랄만한 방법으

로 내 우울한 기분을 달래주었으니 멋진 저녁식사로 보답해야지. 그 생각을 하자 내 마음

은 갑자기 구름 위를 걷듯 퐁글퐁글 떠다니는 것 같았다.

시계를 보자 벌써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나는 늘어나는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

다.

“가야겠다. 덕분에 맛있게 잘 먹었어. 초대해줘서 고마워.”

“답례를 하고 싶다면 오늘 저녁 식사 초대는 어때? 아직 과제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이니 그나마 여유 있잖아.”

나는 그녀의 말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미사 그녀 역시 보통의 일본인이라기엔 조금 특이

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상대방이 먼저 청하기도 전에 답례를 요구하다니 어떨 때 보면 그

녀는 깜짝 놀랄 만한 구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나는 조금 불편한 표정

으로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저녁?”

“왜, 약속 있어?”

“아니… 약속이 있다고 해야 하나, 없다고 해야 하나…….”

“무슨 소리야?”

“아니, 실은… 아까 그 친구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이전에 빚진 것에 대해 갚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거든. 그런데 아직 약속이 잡힌 게 아니라…….”

“…….”

“지금 연락해 볼 테니 조금만 기다려줄래? 만약 녀석이 시간 없다고 하면 네게 다시 연락 

줄게.”

“…알았어. 그런데 말이야, 지노.”

“응?”

“데이트 신청하는 여자 앞에서 누구 대신 만나겠다는 말, 하는 거 아니야.”

“…….”

“네가 악의 없이 순수한 의미로 말했다는 거 알아. 그러니까 네 제안을 받아들이는 거고. 

그렇지만 앞으론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하는 말이니까 곡해해서 듣지는 마.”

“…그래, 알았어. 화났다면 미안해.”

“아니야, 됐어.”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혹시 바람 맞으면 꼭 연락해줘. 위로해줄 테니까.”

“하핫, 알았어. 전화해보고 바로 연락 줄게.”

나는 그렇게 복잡한 마음으로 그녀의 방을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맛있는 한국음식을 먹었

음에도 돌아올 때의 뱃속은 어쩐지 불편했다. 나는 내 방에 잠깐 들러 시디플레이어를 가

져왔다. 갑갑한 가슴은 벤자민의 음악을 불러냈다. 그의 음악을 위로를 받으며 학교로 돌

아가다 공중전화가 눈에 띄었다. 미쉘에게 당장 전화를 하기로 했다.

[…여보세요?]

“미쉘, 나야.”

[지노? 웬일이야? 네가 먼저 전화를 다하구.]

“그냥… 저, 오늘 저녁에 괜찮으면 만날래? 지난번에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한 것 같

은데 식사나 함께 하고 싶어서.”

[아……, 어쩌지? 오늘 저녁은 안 될 것 같아. 선약이 있어서.]

“그래…….”

[…정말 미안해. 중요한 약속이라서.]

“아냐, 뭐 내가 갑자기 약속을 청한 게 잘못이지. 그럼 나중에 또 연락하자.”

그가 무척 미안해하는 것 같아서 나는 금방 말을 끊고 전화를 끝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사의 제안을 그냥 받을 걸 그랬다. 되돌려 생각해보자 내가 그녀에게 한 행동은 무척이

나 건방진 태도였다. 아직 잡지도 않은 약속을 제가 먼저 만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나중

으로 미루다니, 그건 비단 여자 뿐 아니라 보통의 사람에게도 무척 큰 실례였다. 나는 내 

이기적인 태도를 후회하며 강의실로 걸어갔다. 그녀에게 약속이 취소되었다고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혹시 정말 말하라고 한 게 우회적 거절이었는데 덜컹 연락을 하면 완

전 바보취급당하는 게 아닌가. 그 걱정이 내 머리에서 줄곧 떠나질 않았다. 그러나 그 걱정

은 쓸데없는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녀가 먼저 전화를 한 것이다. 꽤나 당혹스러웠지만 

나는 사실대로 이야기 했고 그녀는 담담하게 한 시간 뒤에 보자고 말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나와 생-미쉘거리로 나왔다. 대충 이곳 주변에서 저녁식사를 대접하려

고 했는데, 미사는 갑자기 가고 싶었던 음식점이 생각났다며 샹젤리제까지 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여성 잡지에서 본 토끼고기 요리를 꼭 한 번 먹어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점심 

때 신세진 것도 있는데다가 중간에 실수까지 한 탓에 나는 한 마디 거절도 하지 못하고 그

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녀와 나는 그 싸지 않은 레스토랑에서 거나하게 식사를 마치

고 소화를 시키기 위해 잠시 걷기로 했다. 우리는 걸으면서도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아

니, 그건 나에게만 속하는 말일 것이다. 미사는 쉼 없이 재잘거리며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

녔지만 그런 게 익숙하지 않은 나로선 그저 불편한 감을 속에 감추고 따라다녀야만 했다. 

몸은 피곤했고 집에 돌아가 바로 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내일 제출할 과제를 

한 번 더 살펴보려면 집에 가서도 쉬이 잘 수 없는 신세였다. 정신을 바짝 깨기 위해선 농

도 짙은 카페인이 필요했다. 나는 쇼윈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그녀에게 카페에 가

자고 말했다. 그녀는 더 돌아다니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내가 피곤한 기색을 보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근처의 후미진 카페로 발을 옮겼다. 대로에 있는 카페들은 대부분 관광객들

이 많이 자리를 장악하고 있었고 그렇게 각 나라의 말이 뒤섞인 곳에서 정신없이 있는 것 

보다야 조용하고 단출한 카페에서 몸을 쉬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빈자리를 향해 걸어가는 미사를 따라가던 중, 나는 우연히 익숙한 옷차림에 발걸음을 멈

추고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방금 지나쳤던 남자의 인영. 그 초라하기 그지없는 차림새, 푹 

눌러쓴 카키색 빵모자와 그 아래에 흘러나온 백금발의 머리. 그것은 분명 내가 미쉘을 처

음 만났을 때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사실 두 번째 만남 이후, 미쉘은 처음 만났을 

때와 이미지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어느 날부터 그 이상한 옷차림에서 벗어나 멋을 아는 

빠리지앵으로 완벽하게 환골탈태했던 것이다 -나를 위해 기타를 쳐준 날 역시 찢어진 아

이스진에 몸매가 드러나는 소매 없는 터틀넥 티셔츠로 한껏 멋을 내고 나타났다- 도수 없

는 안경 또한 벗어버렸다. 그 이전엔 어째서 그런 차림을 해왔는지 물어볼 순 없었지만 나

는 그때 진짜 미쉘의 모습에 반해 다시 한 번 그의 빼어난 외모에 감탄하며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또 갑자기 이런 옷을 꺼내 입은 걸까? 나는 혹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슬쩍 스친 그의 옆모습은 분명 미쉘 그였다. 하지만 나는 쉽사리 그

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또다시 어울리지 않는 복장으로 잔뜩 가리고 있는 미쉘도 그랬지

만 맞은편에는 낯선 남자가 무척이나 심각한 표정으로 그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

기 때문이다.

미사는 그가 있는 자리에서 두 칸 쯤 떨어진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조용히 그 쪽

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와 비슷하게 왔는지 우리의 주문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쪽 테이블에 먼저 커피가 나왔다. 나는 때때로 끝없이 조잘대는 미

사와 눈을 마주치며 웃어주면서도 미쉘의 테이블에 한시도 신경을 뗄 수 없었다. 그는 분

명 내게 ‘중요한 약속’ 때문에 오늘 저녁 나를 만날 수 없다고 했다. 저 남자를 이상한 차림

새로 만나는 일이 그리도 중요한 것인가? 저 남자가 대체 누구 길래? 그들은 계속 저희들

만 들리도록 소곤거렸다. 그리고 내가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워보기도 전에 그대

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지노? 왜 그래, 아까부터?”

내가 연신 다른 곳에 집중을 팔고 있는 것을 눈치 챈 미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아? 아니, 그냥……. 오랜만에 시내에 나와서 그런지 조금 피곤한 것 같네.”

“그래? 내가 괜히 멀리까지 나오자고 했나보다. 나도 내일 발표 수업 있는데. 조금만 쉬었

다가 곧 일어나자.”

우리는 미쉘과 그 남자가 빠져나간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그 카페를 나왔다. 나는 혹여

나 해서 계속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들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미사는 피곤하다며 내 

팔에 몸을 기대고 지하철로 향했다. 때때로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내 팔을 자극적으로 건

드려 왔지만 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대체 미쉘과 그 남자와의 관계는 무

엇이며 어째서 그는 또 어울리지도 않는 복장으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나타난 것일까? 나

의 쓸데없는 궁금증은 점점 더 부풀어 올라가기만 했다.

가끔 라디오에서 좋은 노래가 나올 때가 있어.

노래를 듣고 나선 들은 것만으로도 행복해지기도 해.

만약 평생 동안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면 넌 그런 노래일거야.

-영화 "You call it love"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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