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23)

# 03. 센느강의 밤바람에 섞인 기타소리의 색

학교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그날은 개강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자 「애니메이션 팀워

크」수업의 첫 날이었다. 나는 강의시간까지 여분의 시간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벤치에 앉

아 기다리기로 했다. 이른 10월의 플라타너스나무는 마지막 푸른빛을 끝까지 담은 채 기특

하게 뻗어있었다. 끝이 노랗게 타들어가고 있었지만 여직 줄기에 옹골차게 붙어있는 나뭇

잎을 보며 대견하게 여겼다. 그러나 한편으론 당연한 순리로 다가올 그들의 미래에 벌써부

터 처연한 생각이 들었다. 나무는 거센 겨울을 맞아 곧 이파리에게 수액공급을 멈출 거야. 

그럼 저 고운 빛깔도 시체의 손처럼 메마르고 빛바랜 모양을 하고 그대로 추락하겠지.

나는 고개를 쳐든 채 한동안 넋을 잃고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그들

의 마지막 생의 빛을 나라도 지켜봐주어야겠다는 의무감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미풍이 나

뭇잎들 사이를 간질이며 스치자 그것들은 서로 부딪히며 재잘대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

는 문득 비어있던 머릿속에 미쉘의 얼굴을 떠오르게 했다. 

미쉘과 만난 첫날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내 기억 속에 오롯하게 남아 있다. 수상하

고 괴팍한 화가라는 게 그의 첫인상이었다. 곧 그 오해가 풀리고 조금은 친숙함을 느낄 때

쯤에 벤자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벤자민의 음악을 해석하는 태도에-사실 음악이 아

닌 그의 인격자체를 침범하는 해석에 가까웠지만- 나는 그가 몸서리 칠만큼 극도의 염세

주의로 점철된 남자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런 차가운 말을 하면서도 어딘가 모를 답답해

하는 것 같은 그 눈빛은, 내게 자신의 생각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그게 일순 두

려움과 거부반응으로 작용했다.

만약 그가 날 붙잡지만 않았다면 나는 아마 그대로 미쉘과의 관계를 단편적인 만남으로 

끝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럼 다음날의 그와 함께 경험한 생경한 감정들을 얻지도 못했겠

지. 그에 대한 첫날의 들쭉날쭉했던 감정은 다음 날 빠리의 후미진 골목에서 특별한 형태

로 재배열되었다. 그곳에서 함께 느낀 원초적 데자뷰와 서로에 대한 알 수 없는 이끌림. 

그 미묘한 감정들의 교차는 지금껏 우리의 관계를 특별하게 유지시키고 있었다.

미쉘과 나는 개강하기 전까지 거의 매일 만나 빠리 곳곳을 돌아다녔고, 급속도로 친해졌

다. 함께 다녔던 곳들은 특별한 곳이 아니었다. 그가 애착을 가지고 있는 가게라던가, 거

리, 도서관, 공원 같은, 평범한 생활이 묻어있는 곳이었다. 그래서일까, 미쉘은 얼마 시작

하지도 않은 나의 유학생활에 이미 당연한 존재처럼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이젠 별일 없

어도 내게 전화해 안부를 물어오는 그의 목소리가 당연한 일상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미

쉘 역시 나를 진심으로 대하는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그는 나에 대한 호칭을 부vous(당신)에서 뛰tu(너)로 바꾸었고, 함께 걸을 때

의 어색한 거리감도 이젠 거의 없어졌다. 미쉘은 프랑스인 치고 조용한 편이지만 같이 있

는 시간이 지루하진 않았다. 때때로 프랑스인 특유의 독특한 성격이나 문화적 차이 때문

에 이질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함께 있으면 한국인 친구들 이상으로 편안함과 안온함을 느

꼈다. 사실 나는 아직도 그 녀석에 대해 잘 아는 게 없다. 첫날 소개한 이야기 외엔 그 어

떤 것도 아직 꺼내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놀라는 부분은 이렇게 잘 모르는 그에게서 친숙

함이 든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이전에 타인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특별한 친밀함 말이다.

나는 그렇게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다가 문득 썩 괜찮은 스토리를 

떠올렸다. 특히나 벤자민에 대한 미쉘의 인상 깊은 반응이 창작욕을 자극했다. 머릿속에

서 정신없이 쏟아지는 스토리를 받아 적기 위해 나는 급하게 바지주머니에서 펜과 종이를 

꺼냈다. 언제든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바로 기록해둘 수 있도록 펜과 A4용지 한 장을 

접고 다니는 것은 내 오랜 습관이었다. 스토리를 모두 간단하게 휘갈겨 적었을 때에서야, 

나는 수업이 5분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했다. 나는 스토리를 적어둔 쪽지를 후드티

셔츠 주머니에 구겨 넣고 부리나케 달리기 시작했다. 서두르면 제시간에 엇비슷하게 도착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없는 뜀박질로 겨우 강의실 문 앞에 다다랐다. 1, 2분정도 늦었지만 강의실 내의 번잡

한 분위기는 아직 교수가 도착하지 않았음을 암시했다. 급하게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

던 중이었다.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점점 

더 뚜렷해지는 그 인영의 주인은 극동아시아계의 여자아이였다.

그녀의 첫인상은 가쁜 숨과 함께 달릴 때마다 크게 일렁이던 가슴이 무척이나 동양인답

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젖가슴은 몸에 달라붙는 검은 나시티에 의해 육감적으로 드러

나 있었고, 브라를 하지 않았는지 양 중앙엔 작은 돌기가 솟아있었다. 그 풍만한 가슴 골짜

기 사이로 드러난 분홍빛을 띤 작은 조개 목걸이가 제법 앙증맞게 보였다. 내가 문에 들어

가다 말고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 그녀 역시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천천히 속

도를 늦췄다. 동그랗게 뜬 눈동자는 치와와처럼 까맣고 호기심어려 보였고 짧게 층을 내

어 잘라낸 머리카락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명쾌하고 생기 있게 찰랑거렸다.

외국에서 동양인과 마주치는 일은 생각 이상으로 반갑게 느껴진다. 비단 프랑스만 그런 

것이 아니고 동북아시아계를 떠나면 다들 느끼는 바일게다. 이질적으로 생긴 사람들 사이

에서 가끔 나와 비슷하게 생긴 동양인들을 발견하면 이유 없이 밀려오는 친밀감에 괜히 말

이라도 한 번 걸어보고 싶어진다. 그게 바로 동양인들 간의 미묘한 심리적 유대인 것이다.

그녀와 나는 한동안 그렇게 말없이 상대방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조그마한 입은 무언

가 말하려는 듯 작게 움직였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녀가 문득 말을 하기로 결

심한 듯 숨을 들이쉬려는 순간이었다. 그녀 뒤에선 교수처럼 보이는 여성이 다가오고 있었

다. 나는 그녀에게 눈짓을 한 번 주고는 그대로 열려있던 문으로 먼저 들어가 버렸다. 그런

데 그 여자는 무엇인가 떨어뜨렸는지 문 앞에서 몸을 숙인 채 계속 꾸물거렸고 걸어오고 

있던 여교수는 이미 뒤에 서서 그녀가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떨어뜨린 물건을 챙겨

들곤 교수에게 머쓱한 듯 인사하며 자리를 잡았다.

교수는 라틴계의 검은 직모와 짙은 눈썹을 가진 젊고 지적인 분위기의 여성이었다. 교수

는 커리큘럼이 적힌 프린트를 한 사람씩 직접 건네주더니 다시 강단에 섰다. 그녀의 엷은 

미소를 띤 입술이 성우처럼 정확한 발음과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셀린느 쥐나뻬라고 합니다. 이번 ‘애니메이션 팀워크’수업을 진행할 교

수이고요. 방금 나누어 준 것은 이 수업의 간단한 커리큘럼이고, 수업의 특성상 우리가 한 

학기동안 무엇을 얼마만큼 얻어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우선 이 수업의 시작은 일주일 안에 개인과제를 준비해 담당 교수와 학생들에게 설명을 

하며 비평과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가질 겁니다. 이 개인과제는 학생들 각각 개인의 성향이

나 작품적 성격을 파악하고 서로 팀을 짜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이 팀은 3개월 간 공동 작

업을 통해 작품을 하나 완성해 내야해요. 각 팀과 교수와의 지속적인 피드백과 비평이 수

업의 중심이고 12월 중순, 그러니까 *노엘 바캉스가 시작되기 전주에 그 공동작품을 발표 

할 계획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이미 각자 기술적인 것을 익혀 왔으리라 생각하지만 기술적

으로 난관이 생기는 경우엔 저보단 테크니시앙들과 상의해보도록 하시고요. 그것은 차후

에 다시 이야기 하죠.

어쨌든 겉보기엔 작품을 만드는 것이 목표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 수업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배우는 기간입니다. 토론과 비판을 통해 서로의 아이디어를 보완하고 발전시켜서, 

그것을 각 팀이 얼마나 독창적이고 효율적으로 만드느냐가 이 수업의 목표입니다. 2학년 

수업이고 공동 작업이지만 3학년 때 개인 졸업 작품을 만들 때에도 도움을 받을 것입니

다. 그러니 충분히 이런 과정에 익숙해지도록 각자가 노력해주세요. 그럼 일단 발표할 순

서를 정해볼까요……?” 

과제의 주제는 자유였다. 어떤 것이든 모두에게 도움이 될 만한 논제를 준비하던가, 자신

이 추구하는 작품적 성향을 보여줄 수 있는 것으로 10분 내외의 발표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녀는 이번 프로젝트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간단한 방법으로 자신의 성

향과 자질을 평가받는 자리이므로 신경 써서 준비하라고 당부했다. 교수의 말을 들으면서 

내 속에선 상반된 이 두 감정이 서로 상충되며 격렬하게 촉발하는 것을 느꼈다. 마음 한편

에선 새로운 유학생활에 대한 기대감과 의욕이 넘치면서도, 마음 깊숙한 곳에선 내가 과

연 잘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짙게 깔리고 있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런 모순된 감정의 범람 속에서 오리엔테이션을 겸한 첫 수업을 마쳤다. 머

리에서 태풍이 한차례 휘몰아치고 간 것 같은 어지럼을 느꼈다. 아까 뜀박질해서 배가 고

파서인지도 모른다. 식사나 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강의실을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거기, 동양인 소년. 이거 네 책 아냐?”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2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붉

은 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사실 그를 돌아보기 전엔 갹송Garcon(소년)이라는 말에 순

간 울컥했지만 사실 그 남자는 내게 그렇게 말해도 어울릴 만한 존재감이라 그러려니 해

야 했다. 그는 그 커다란 덩치에 당치 않는 귀여운 웃음을 지으며, 내가 앉던 자리에 남겨

진 책을 집어 내밀었다. 나는 다시 발길을 돌려 그 책을 건네받았다.

그 책은 며칠 전에 도서관에서 빌린 것으로, 반납하는 것을 까먹을 까봐 수업 전에 책상 

한쪽에 놔두었던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었다. 고맙다

는 인사와 함께 시선을 마주치려는데 순간 난감했다. 얼마나 키가 큰지 마치 하늘을 우러

러보는 기분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어야만 그 얼굴이 겨우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무의식적

으로 목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한 발짝 물러서서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내가 알려줘서 고맙

다고 말하자 그의 처진 눈은 내 말에 기분 좋게 휘어졌다. 그는 곧 덩치와 비례하는 커다

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쟈끄라고 해. 이전에 못 보던 얼굴인데, 이번에 편입 했나보지?”

“응. 난 지노야. 지노 장. 앞으로 잘 부탁해.”

나는 그가 내민 커다란 손을 마주 잡았다. 안 그래도 작은 편에 속했던 내 손은 그의 것과 

맞잡아지자 그 커다란 손아귀에 전부 감겨들어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책은 얼마나 읽었어?”

“이거? 다 읽었어. 점심 먹고 반납하려고 가져온 거야.”

“그래? 어렸을 때 그 책을 무척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넌 어때? 그 책을 읽고 특

별히 느낀 점이라면?”

쟈끄는 상당히 호기심 섞인 목소리로 내게 물어왔다. 나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조금 당황

했으나 어떤 식으로든 대답을 해야 했다. 논쟁을 좋아하는 프랑스에선 자기 의견을 제대

로 드러내지 못하면 바보취급 당하기에 딱 이기 때문이다. 나 때문에 한국인 모두가 자기

주장도 할 줄 모른다는 이미지로 남아서는 안 되었다. 유학생의 삶이란 별 거 아닌 것에도 

애국심을 발휘하는 유치함이 항상 수반 되는 것 같다.

“…글쎄, 처음에 읽을 때엔 탐미와 도덕적 가치관에 대해 작가가 취한 이중적인 태도 때

문에 조금 거슬렸어. 오스카는 거기서 탐미와 쾌락, 범법을 따르는 삶을 찬미하면서도 결

국엔 그런 삶을 산 주인공 도리언을 도덕의 심판 아래에서 처벌하지. 아이러니컬하지 않

아? 자기주장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건지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건지 의도가 어중간하

잖아. …뭐, 어떻게 보면 바로 그 모순적 태도가 오스카 스스로의 삶에서 안고 있던 고뇌

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기도 하고.”

그는 내 말에 흥미가 생겼는지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눈을 빛내며 되물었다.

“그의 삶에서의 모순점이라,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줄래?”

“…으음, 지금 여기서 말하기엔 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신이 난 표정을 한 녀석의 앞에서 나는 말끝을 흐렸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학생들은 모

두 빠져나가 강의실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런 류의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기엔 영 어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긴 하네. 그럼 같이 식사하는 건 어때? 이야기를 마저 듣고 싶은데.”

“…뭐, 좋아.”

나는 특별히 거절할 것도 없어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과 친해져

서 손해 볼 일은 없지 않은가. 더구나 이 수업은 오리엔테이션의 설명처럼 공동 작업과정

을 배워가는 팀워크 수업이고 하니 말이다.

나와 쟈끄는 함께 학교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이나 도

리언 그레이의 초상과 관련한 다양한 해석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쟈끄는 오스카 

와일드에 대한 사생활이나 심리까지도 줄줄이 꿰고 있었다. 내게 그 의견을 물었던 이유

는 한때 오스카 와일드의 삶과 작품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나의 오스카 와일드와 그의 소설에 대한 해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금껏 많은 사람들에게 오스카의 작품에 대해 의견을 물어왔지만, 너처럼 오스카 

와일드를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받아들이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하는 사람은 처음이야.”

현대미술의 경향에 대해서도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는 꼭 습관처럼 그것을 마케팅이

나 산업과 연결 지어 이야기를 했다. 내가 넌지시 경영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 보인다고 말

하자 쟈끄는 이전에 경영학을 공부했노라고 대답했다.

“애니메이션 사업을 해볼까 하거든. 미국처럼 지나친 상업주의에 찌들지도 않고, 다양한 

문화와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예술성 있는 작품을 만드는 회사를 만들고 싶어.”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번뜩이며 강하게 동의했다. 뒤이어 애니메이션 뿐 아니라 대부분의 

문화콘텐츠산업을 독식하며 획일적인 문화를 세뇌시키고 있는 미국에 대한 것이 화두로 

오르자 우리의 대화는 더욱 열기를 더해갔다. 우리는 단 한나라 외엔 거의 모든 나라의 ‘문

화적 공공의 적’인 미국에 대해 경쟁하듯 비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함께 남을 헐뜯어야 

서로 동질감에 친해진다고 했던가. 이야기를 마치자 우리는 마치 앞으로 생사를 함께할 전

우처럼 서로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쟈끄는 “미국의 문화적 독점욕이 준 유일한 이점은 오늘 우리가 먹은 끔찍한 생선요리를 

단시간에 소화시켜 화장실 청소부 아줌마의 수고를 덜었다는 것”이라고 말했고, 나는 그 

말에 감탄하며 웃어재꼈다. 그는 그렇게 자기주장을 할 때는 물론 평범한 대화 속에서도 

반짝이는 재치를 발휘해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제법 재미있는 녀석이었다.

주) 노엘 바캉스 : 프랑스 대학은 여름방학이 길지만 겨울방학은 특별

히 없다. 대신 12월과 1월 초에 걸쳐 2주정도 노엘 바캉스(크리스마스 연휴)가 있고, 2월

에 1주일 정도 스키 방학, 그리고 4월에 2주간 부활절 바캉스가 있다.

주) 테크니시앙 : ‘전문기술자’라는 의미. 학생들에게 기술적인 면을 지원

하는 담당자들이 있어 제작에 있어 분야별로 학생들의 작업에 도움을 준다.

*

그렇게 팀워크 수업이 있던 뒤로 일주일이 지났다. 저녁 먹을 시간이 훨씬 지났지만 나의 

몸뚱이는 늦은 오후부터 쭉 침대위에 시체처럼 엎어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나뭇잎이 바람

에 쓸리는 소리는 그대로 창가에 밀려와 진청색 커튼을 살풍경하게 흔들었다. 커튼 사이

로 들어온 메마른 바람은 내 볼에 닿아 흐르고 있던 눈물을 차갑게 식혔다. 나는 그런 상태

로 한참이나 스스로를 방치하고 있었다. 오늘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이 내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확연하게 재생되면서 심장을 죄어왔다. 어쩌면 좋지? 나는…나는 어떻게 해야 하

지? 그렇게 청자 없는 질문을 무의미하게 반복하고 있었다. 갑자기 울린 전화벨 소리가 경

련을 일으키듯 고막을 파고들었다. 한참이나 무시해도 반복되는 그 신경질적인 소리에 나

는 힘없이 팔을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미쉘이었다. 개강 하고 난 뒤에 처음 받아본 전화 

같았다. 아까의 일만 아니면 무척이나 반갑게 받았을 텐데. 나는 잔뜩 잠긴 목소리를 억지

로 끌어올렸다.

“미쉘, 다음에 전화해줄래? 오늘은 아무하고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미안.”

나는 그렇게 말하고 그대로 끊어버렸다. 또다시 밀려오는 참담함에 푹 하고 베개에 얼굴

을 묻어버렸다. 얼마간 식어있던 베갯잇은 상처받은 눈물로 다시금 뜨겁게 젖어들기 시작

했다. 차마 목 놓아 울어버리면 좋으련만, 나는 미련하게도 그것을 끅끅 눌러 삼켰다. 뱉어

지지 못한 슬픔의 응어리는 어깨를 들썩이며 내안에 다시 가두어졌다.

오늘은 몇 시간 전 나는 팀워크 수업에 첫날에 언급됐던 발표를 했었다. 자신의 스타일을 

함께 수업 듣는 학생에게 보여주고, 나중에 조를 편성할 때 도움을 주려는 목적을 가진 발

표과제였다. 나는 처음 준비하는 것인 만큼 정말 입이 쩍 벌어지게 잘해내고 싶었다. 학생

들은 물론 교수에게도 특별하게 인식되고 싶었다. 가능성은 제쳐두고서라도 적어도 의욕

만큼은 그러했다는 것이다.

나는 예전에 20분 분량으로 생각하고 짜뒀던 단편용 스토리를 사용하기로 했다. 스토리

의 주인공은 선사시대에 사는 소녀였다. 나는 그녀를 통해 청소년기의 어른도 아니고 어린

이도 아닌 단계의 정체성 혼돈과, 성, 사회 반감, 근친상간 등의 터부에 대한 주제를 그리

고자 했다. 며칠 밤을 새서 컬러화작업까지 한 이미지 보드를 완성했다. 기획한 발표문을 

보니 기존에 다른 학생들이 해왔던 것보다 반 이상은 더 한 것 같았다. 다 만들어 놓고 반 

정도를 버린다는 게 아깝긴 했지만 제한된 시간에 맞추려면 필요 없는 부분은 잘라내야 했

다.

그리고 오늘 발표할 학생들 중 마지막 차례로 발표를 하게 됐다. 처음 하는 발표라 조금 

긴장되긴 했지만 워낙에 철저하게 준비한 터라 발표를 하면서도 한편으론 칭찬을 들을지

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졌다. 그만큼 그건 내 야심작이었다. 그런데……

“이걸 왜 만든 거죠?”

그것이 내가 발표한 작품에 대한 쥐나뻬 교수의 첫마디였다. 이전까진 학생들의 질문을 

먼저 받고 난 뒤에 교수가 덧붙여서 평을 하거나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었는

데, 쥐나뻬 교수는 내 발표가 끝나자마자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

“……네?”

나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대충 보니 15분은 넘을 것 같은데, 이 스토리를 어떤 목적으로 언제 만들려고 짠 거냐는 

겁니다. 학생 작품으로 만들려고 한 거 아닌가요? 그렇다면 만들 수 있는 작품 분량이 그

렇게 긴 내러티브를 담을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지 않나요?”

“…솔직히 제가 학교 다니면서 만들 목적으로 기획한 건 아닙니다. 그냥 제가 생각했던 

스토리 라인을 애니화 했을 경우를 구체화해서 이번 발표회 때 보여드리고 싶어서 개별적

으로 만든 겁니다.”

“만들지도 않을 작품을 발표용으로 기획했단 말이군요?”

“…….”

그녀의 말투는 이미 비위가 틀어졌음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뭐, 좋아요. 그럼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여기서 소녀는 어른도 어린아이도 아닌 중간

에서 어떤 쪽으로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했죠. 개구리가 물과 육지 사이에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이용해 개구리를 소녀로 상징화 한다는 의도까진 좋습니다. 하지만 관

객들이 쉽게 그 내부적 의미를 받아들일까요? 과연 관객들이 작품을 보자마자 ‘아, 저 어

중간한 개구리의 위치가 곧 소녀의 위치구나’라는 걸 알아 들일까요? 학생은 자신만의 

상징법을 어떤 식으로 설득 시킬 거죠?” 

“…그건,”

그녀의 지적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껏 그런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막연하게 당연히 알아들을 것이라고만 단정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나는 결국 솔직한 내 심정을 밝혔다. 부끄럽긴 했으나 지금 와서 어줍지 않은 말장난으로 

대충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생각해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했나요?”

쥐나뻬 교수는 내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그녀의 잿빛 눈동자가 나를 날카

롭게 쏘아보았다. 앉아있던 학생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학생은 어떻게 보여줄 건지 생각도 해보지 않고 만들지도 않을 스토리를 짰다는 말입니

까?”

“…그, 그게 아니라 제 말은,”

“정말 실망스럽군요.”

“…….”

“연출을 목적으로 시나리오를 짤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스토리를 위한 

스토리를 짜지 말라’는 것입니다. 문서상으로 스토리 짤 때엔 어디에든 부가적인 설명을 

집어넣어 동료들에게 의도를 이해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영상으로 옮기는 작업

은 전혀 별개의 문제예요. 글이 아닌 이미지의 연속과 음향으로 자신의 제작의도와 메시지

를 암시해야 합니다. 지금 지노 학생의 경우엔 보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전혀 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든 겁니다. 관객이 당연히 자신

의 메시지를 읽을 거라는 착각과 아집 속에서 말이죠. 학생은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

인가에 대한 고찰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군요. 그 고찰은 제작자의 기본중의 기본이며 그

것을 묵과하는 것은 관객들을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아니면, 어차피 실체화 하려고 만든 

게 아니니 관객들을 이해시킬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겁니까?”

“…….”

“끝날 시간이 다 되었군요. 오늘은 이만 하죠.”

주변 학생들은 아직 5분이나 남았잖아, 보통은 항상 끝날 시간을 넘기는데 라는 둥의 이

야기를 웅성거리면서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섰다. 몇몇 학생들은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

며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그 분주함 속에서도 꿈쩍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대로 멍청하

게 서있던 나를 말이다. 내 머릿속엔 쥐나뻬 교수의 말이 몇 번이나 메아리치고 있었다. 구

차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나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꼭 쥔 주먹 때문에 살을 파고드

는 손톱 보다 더 잔인하게 나를 상처 입힌 건 나. 나 자신에 대한 한없는 환멸이었다. 세상

에 태어나 이렇게 참담한 기분은 처음인 것 같았다. 곧 팀을 짜야 할 텐데 다른 학생들의 

반응도, 이 수업을 계속 해야 한다는 것도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두려웠던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는 것이었다. 내가 되고 싶었

던 것은 사람들에게 감흥을 주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감독이었다. 그것을 내 존재의 이유

로 삼고 살았고 꼭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라 믿어왔다. 그런데 나는 관객의 시각을 헤아릴 

생각도 안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작자의 기본적 소양의 부재. 그것이 나를 한없이 위축되

게 만들었다. 지금껏 꿈을 좇아 발버둥 쳐왔는데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지탱해온 인생이 교

수의 몇 마디에 부질없이 무너져버리는 것 같았다. 절벽 아래로 홀로 던져진 채 끝없이 추

락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때 이후 지금껏 그대로 기숙사로 돌아와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다음날 과제도 

미뤄둔 채 침대 속에서 몸을 말아 숨겨버리고 세상의 빛을 막아버렸다. 그렇게 울어본 것

은 그날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며 내 보잘 것 없는 능력에 대해 

자책하고, 스스로에게 상처 입혔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가던 중 미쉘의 전화가 온 것

이다. 죽어가는 내 목소리에 미쉘은 걱정스러운 듯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나는 소탈하

게 털어놓을 자신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대충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둘러대

고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그대로 한동안 슬픔을 주워 삼키다가, 정신없이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뜬 건 밤 11시가 다 되어서 울린 전화벨 때문이었다. 스탠드를 켜놓지 않은 채

로 잠이 들어서 전화기의 빨간 불은 칠흑 같은 방에서 을씨년스럽게 번쩍거렸다. 나는 인

상을 찌푸리며 다시 수화기를 향해 천근같은 몸을 움직였다.

[지노, 나 지금 기숙사 앞이야. 잠깐만 나와 줄래?]

다시 미쉘이 전화를 건 것이었다.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아까 말했잖아.”

[알아, 그런데…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아무 말도 안 해도 되니까, 잠깐만 시간을 내

줘.] 

“…….”

[부탁이야.]

나는 말없이 수화기를 내렸다. 커튼 사이로 슬쩍 창밖을 보니 그가 차 앞에 서서 나를 올

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주인을 흔들림 없이 기다리는 커다란 강아지 같아 보였

다. 나는 그런 미쉘을 보자 차마 매정하게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힘이 빠

져버린 몸을 억지로 움직이며 나갈 채비를 했다. 몸은 움직일 때마다 쓰디쓴 소리를 내며 

뼈마디를 시리게 했다.

“…….”

“…….”

퉁명스런 발걸음을 질질 끌고 걸어와 팔짱을 낀 채 그 앞에 섰다. 내 얼굴은 불편한 심기

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겠지만 굳이 억지로 좋은 표정을 짓고 싶진 않았다. 반강제적으로 

끌려온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미쉘은 내 뾰로통한 표정에도 아무 말 없이 차의 조수

석에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그의 얼굴과 문이 열린 좌석을 한 번씩 번갈아 본 뒤 역시 침

묵한 채 그의 차에 올라탔다. 

나는 창밖에 스쳐지나가는 빠리 시내의 화려한 불빛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역시 아직

도 괴리감이 사라지지 않은 풍경이었다. 그래서 그 풍경은 더더욱 혈혈단신의 고립감이나 

외로움을 뼛속 깊이 사무치게 하는 것 같았다. 

그가 차를 세워 도착한 곳은 인적이 드문 센느 강가였다. 지나오던 길엔 강의 야경을 즐기

러 온 연인들과 오붓한 가족들이 제법 눈에 띄었지만 도착한 곳은 인적이 거의 드물었다. 

미쉘은 얼른 자리에서 내려 내게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의욕 없는 동작으로 마지못해 차

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지친 듯이 한쪽에 털썩 앉아버렸다. 빠리의 야경은 화려한 

불빛으로 언제나 가득했지만, 그 불빛에 금빛으로 반짝이는 센느강은 화려해 보이면서도 

넘실거리는 검은 강물 때문인지 어딘가 모르게 애수에 젖어있어 한없이 슬퍼보였다. 

센느강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다시 솟구쳐오는 참담한 우울감에 나는 눈물이 찔

끔 나오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갑자기 기타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미쉘은 차에 기대어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예상치 않은 그의 연

주에 고장 났던 눈물샘은 이내 멈추었고 미쉘은 간주에 이어 노래하기 시작했다.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And in my hour of darkness

She is standing right in front of me Speaking words of wisdom, …

내가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어머니 메리는 내게 다가와 현명한 말을 한다. 내버려둬라.

그리고 내가 어둠 속에 빠져있을 때, 

그녀는 바로 내 앞에 서서 현명한 말을 한다. 순리를 따르라. …

센느강의 밤공기 속에 그의 연주와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쉘은 그대로 노래를 부

르면서 옆에 다가와 앉았다. 미쉘은 나를 보며 같이 부르라는 듯 눈짓을 보내며, ‘Let it be’

부분을 남기고 기타와 함께 노래를 멈추었다. 나는 픽하고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지

만, 미쉘은 내 어깨를 붙잡고는 장난스럽게 ‘렛 잇 비’라고 입을 뻥끗거렸다.

“Let it be.”

내가 마지못해 동일한 톤으로 그 말을 내뱉자, 그는 만족한 듯 한껏 멋들어지게 음을 꺾으

며 기타를 치며 후렴구를 불렀다.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의식했을 땐 나도 이미 Beatles의 노래 「Let it be」의 후렴구

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내버려둬라, 순리를 따르라…… 그것을 나는 있는 힘껏 따라 부르

면서 나는 꽁꽁 싸매고 있던 마음의 고통을 토해냈다. 마음이 훨씬 가벼웠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아파하거나 슬퍼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지노.”

미쉘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마 그는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위로는 지

금 까지 받아온 그 어떤 것보다 진심으로 다가왔다. 그의 따뜻한 말과 위로에 또다시 눈물

을 주르륵 흘렀다. 

“다 잘 될 거야…….”

그는 그렇게 마지막 말을 다시 한 번 말하면서 다정한 손길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의 

주문처럼 반복하는 그 말에 나는 그를 와락 껴안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미쉘을 껴안은 채 

목 놓아 엉엉 울어버렸다. 그 어떤 말로도, 그의 행동에 답할 수 없었다. 위로해 주어서 고

맙다는 말로는 그에게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힘내라고 준비한 건데 더 울면 어떻게 해.”

투덜거리는 미쉘의 말에 나는 눈물이 젖은 얼굴로 바보 같은 웃음을 흘렸다. 말로 표현하

지도 못할 그 고마움을 대신 표현할 방법이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소매로 눈

물을 눌러 닦고 짓궂게 그의 기타를 뺏어 들었다. 내가 몇 개의 코드를 쥐어보며 줄을 퉁기

자 미쉘은 놀랍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타 칠 줄 알아?”

나는 그 모습에 빨개진 눈으로 싱긋 웃어 보였다.

“위로해줬으니 답례를 해줘야겠지? 흠흠, 오랜만에 하는 거라 잘은 못 할 거야.”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손가락을 쥐락펴락 해본 뒤 노래의 간주를 연주하기 시작했

다. 미쉘은 그 간주를 듣자마자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곡은 비틀즈의 「미쉘

Michelle」이었다. 비틀즈의 곡 중에서 유일하게 프랑스어가 들어간 노래로, 여기서의 미

쉘은 여자였지만 나는 여성형으로 쓰인 ‘Ma 마 벨belle’ 부분을 ‘몽 보Mon beau’로 바꿔

서 부르기 시작했다.

Michel, Mon beau

These are words that go together well

My Michel

미쉘, 내 아름다운 사람

이 두 말은 정말 참 잘 어울리는 말이야 

나의 미쉘

Michel, Mon beau

Sont les mots qui vont tres bien ensemble

Tres bien ensemble

미셸, 내 아름다운 사람

이 두 말은 정말 참 잘 어울리는 말이야 

정말 잘 어울려.

“I…”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노래를 부르다가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턱 하고 멈췄다. 이 노래는 

미쉘이란 여자에 대한 사랑을 담은 노래였다. 본래 이 부분에선 ‘I love you’를 세 번이나 

외쳐대면서 바이브레이션을 주어 불러야 한다. 나는 단지 이름이 미쉘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른 거였는데 어떻게 불러야 할지 난감했다.

“I… I… I like you, I like you, I like you~~”

나는 연주를 멈추고 그 부분을 몇 번이나 더듬다가 제멋대로 소리를 질렀다. 내 어설픈 개

사에 그는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어쩐지 부끄러워서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

래서 일부러 더더욱 목청을 돋워 열창을 했다. 사랑하면 어떻고 좋아하면 어떠냐. 기댈 곳 

없는 이곳에서 날 위로해주는 유일한 사람인데, 미쉘은.

“…지노, 사랑한다는 말을 한국말로 어떻게 해?”

내 어설픈 노래가 끝나자, 그는 행복한 미소를 걸친 채로 불쑥 이런 질문을 했다. 

“어…? 갑자기 왜?”

“…그냥.”

“음…, 그러니까……”

나는 왠지 '사랑해'란 말을 마주보며 가르쳐주기가 조금 낯간지러웠다. 그래서 뜸을 들이

고 있었는데 그때 불현듯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 이렇게 하면 돼. 잘 들어봐. 한국에선 이 말을 할 때에도 절차라는 게 있어. 우선 공

손하게 상대방의 손을 잡아서, 이렇게 자신의 심장 위에 얹어. 그리고 아련한 눈빛으로 상

대방을 바라보는 거야.”

“오…, 뭔가 엄숙한 의식 같은데?”

“…….”

내 말에 미쉘은 엉뚱한 해석까지 붙여가며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나는 자꾸 나오려

는 웃음을 억누르기 위해 애쓰며 마저 말을 이었다.

“그렇게 가슴에 손을 얹고 눈빛으로 서로를 교감한 다음에, 그때서야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야.” 

“뭐라고 하면 되는데?”

“내 안에 너 있다.”

“…….”

“…….”

“……내아네…뭐? 뭐 이렇게 길어.”

그가 코에 주름을 씰룩 잡으면서 불평을 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고 한 건데 나

오는 목소리는 미묘하게 떨렸다. 미쉘이 은연중에 이상하다는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좀 더 뻔뻔한 태도로 계속 부추겼다.

“아냐 쉬워. 그러지 말고 따라 해봐, 내 안에, 너 있다.”

“내 아네, 너 이따. 맞아? …내 아네 너 이따….”

그는 가르쳐준 말을 혼자 되뇌어 보면서 연습에 열중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자꾸 

웃음이 나오려고 해서 입과 연결된 모든 근육에 최대한 단단히 힘을 주어야만 했다. 미쉘

은 그렇게 몇 번을 혼자 중얼거리더니, 이제 됐겠다 싶었는지 단호한 표정으로 내게 고개

를 돌렸다. 그리곤 내 손을 덥석 잡아 자신의 가슴에 얹고 진심어린 눈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지노, 내아네 너이따.”

“…푸흡, 푸하하하하하~!”

머릿속에서 ‘너를 사랑해도 되겠니~’라는 모드라마의 타이틀곡이 흐르고 있던 중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대로 장렬하게 쓰러지며 웃음보를 터뜨렸다. 한때 유행어이기도 했

던 빠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의 대사를 진짜 금발벽안의 프랑스인이 말하면 어떨까 싶어

서 시킨 거였는데 그 모습은 예상 외로 진짜 가관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그의 나

름대로 진지한 태도가 한층 더 웃음을 자아냈다. 너무 웃겨서 나의 손목을 붙잡았던 미쉘

의 손에서 느껴진 미미한 열기와 그의 가슴에 맞닿았던 손에서 느껴진 미묘한 진동조차

도 웃음과 함께 무심코 흘려버렸다.

“뭐…, 뭐야? 왜 그렇게 웃고 그래? 틀렸어?”

웃다가 사래가 들 정도로 자지러지는 나를 보며 미쉘은 순진함과 당혹감이 묻어있는 표정

을 지어 보였다. 한편으론 미안하기도 했지만 어색한 억양을 너무도 진지한 표정으로 내뱉

는 게 너무 웃겼고,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귀여워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 우울했

던 마음이 단숨에 날아가 버리는 순간이었다. 미쉘은 여전히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는 순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한참이나 웃어재끼다가 

겨우 숨을 돌리고 말했다.

“크큭, 아니야, 아니야. 너무 잘했어. 작업 걸고 싶은 한국 여자를 만나면 꼭 그렇게 말해

봐. 여자들이 정말 단번에 넘어올걸.”

내 말에도 그는 한동안 의심의 기운을 걷지 않은 채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제 말에 그렇게

도 우울해 하던 내가 깔깔대며 웃어대는 것이 나쁘진 않았는지 그는 더 이상 채근하지 않

고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렇게 한참이나 미쉘 때문에 웃음보를 제어하질 못했고, 

그 덕분에 그날의 우울했던 기억은 한 번에 날려버릴 수 있었다. 그래서 다음날도 평범한 

일상으로 이어갈 수 있었다.

그땐 잘 몰랐지만 나중에 지나서야 그에게 큰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게 혼

자 남겨져 있었다면 나는 아마 한동안 자괴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렇게 날 

위로해준 따뜻한 마음에 고마움을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다음에 또 우울해지면 그땐 ‘애기

야 가자’라는 말도 가르쳐봐야겠다고 강하게 다짐했다.

사랑은 눈이 멀어 앞이 보이지 않는 것,

이 기분 좋은 어리석음이여.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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