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 태양이 죽어가는 시간의 색
그렇게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내게 문을 열어주었다. 사실 내가 그에게 다가가는 것
을 허락하는 것은 그로서 쉽지 않은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사실 낯선 피부색의 외국인에,
첫인상은 말할 것도 없고 건방지기까지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향한 나의 첫
발을 허락했다. 서로 길들여지기 위한, 이 세상에서 단 하나의 존재가 되기 위한 섬세한 시
간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나를 기쁘게 했다.
나는 문득 미쉘이 언제부턴가 어떤 한 곳을 무서운 눈으로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
다. 나는 그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의 끝이 닿은 곳은 이런 문구가 쓰인
전광판이었다.
『Benjamin, 그는 누구인가?』
벤자민. 성도 없이 그냥 벤자민이다. 그것은 내가 국내외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
의 이름이다. 재즈, 클래식, 동·서양의 전통 악기들, 거기다 전자음까지 탁월하게 믹싱해
서 미묘한 음색과 멜로디를 보여준 뉴에이지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그는 6개월 전에 빠리에서 첫 앨범을 발매했다.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없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성은 무엇인지. 더더욱 묘한 건, 딱 20만장만
발매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모른다. 재발매에 대한 요구가 쇄도하자 계약음반사측은 벤자
민과의 계약 조건에서 그가 전액을 투자하는 대신 추가 발매 권한을 포함한 몇몇 권한을
전적으로 그에게 맡기기로 했다고 설명할 뿐이었다. 덕분에 일찍 그 사람의 천재성을 알아
본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있다고 한다. 그 희소성은 그만큼 더 가치를 높이고 있었던 것
이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실제로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그의 음반은 한국 돈으로는
100만원까지 웃도는 거래가 이루어진다고도 한다. 발매한 지 6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은 최
신 음반이 이렇게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 등을 뒤흔드는 건 정말 예외라 할 수 있었다. 그
만큼 벤자민의 음악은 신선했고, 그의 출현은 현 음악계에서 굉장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
는 것이었다. 이런 파장을 일으킨 당사자인 벤자민을 주변에서 가만 둘리 없었다. 문화계
소식을 전하던 그 전광판은 파파라치들이 끈질기게 벤자민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사방으
로 돌아다니고 있지만 워낙 보안이 심해서 번번이 허탕을 치고 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었
다.
이 사람의 음반을 처음 알게 된 건 그가 나타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뒤의 일이었다. 6개
월 전 독일로 연수 다녀온 음악학도 친구는 ‘엄청난 음반을 구해왔다’며 내 앞에서 호들갑
을 떨었었다. 나도 연출을 지망하는 사람이라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기에 안목이 제법 좋다
고 생각한 녀석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 그 음반이 궁금해졌다. 그가 건네준 시디 표지엔 흰
바탕에 눈동자를 연상시키는 푸른 점 하나가 찍혀 있었고, 그 속엔 흰색으로
「Benjamin」이란 이름이 작게 써져있었다. 한 장 뿐인 속지에는 다른 연주가들의 이름
과 함께 쓰여 진 피아노부분의 벤자민이란 이름뿐이었다. 그것이 벤자민에 대해 알려진 모
든 정보였다.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1번 트랙 「무아Moi(나)」라는 음악을 들었을 때 볼을 타
고 부질없이 흘러내렸던 눈물을. 난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외로운 영혼을 가지
고 있다고. 나와 같은. 나는 눈물을 닦으며 1번 트랙을 다 듣기도 전에 재생을 꺼버렸다.
갑자기 눈물을 쏟아내는 나를 친구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기 때문이다. 당시 그래픽작업
중이던 나는 그것을 바로 컴퓨터에 복사해버렸다. 그리고 복사시디는 내 CD플레이어에
서 단 한 번도 벗어나지 않은 채 지금까지도 들려지고 있었다.
“지노?”
“…아, 죄송합니다.”
정신없이 그에 대해 생각을 하다 보니 미쉘이 나를 부르는 것에도 눈치 채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느라 정신을 빼놓고 있어요? 아까부터 쳐다보고 있어도 멍하
게 앉아만 있고.”
“아- 저기 아까 미쉘이 본 벤자민에 대한 생각 좀 하느라고요.”
“…당신도 벤자민을 아십니까?”
“그럼요! 그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뮤지션인 걸요!”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크게 외쳐버려서 그런지 그는 내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떤 점이?”
“음…, 처음 그의 음악을 들었을 때… 그냥 왠지 모르게 저랑 많이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
어요. 아, 물론 생긴 건 모르지만…….”
“……뭐가 닮았다는 거죠?”
“흠, 설명하긴 어렵지만… 굳이 말하자면 영혼이요.”
“…영혼?”
“네, 영혼.”
“…영혼이라…?”
“……벤자민에겐 음악밖에 없는 것같이 보였어요. 제겐 애니메이션밖에 보이지 않는 것
처럼. 벤자민은 세상으로부터, 주변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은 것 같았어요. 제가 그
랬던 것처럼. 그리고…… 첫 번째 곡 무아를 들었을 때 전 확실히 깨달았어요. 그 사람은
외로움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산채로 심장을 찢기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이죠.
그 고통이 제 가슴에 너무도 확실하게 전해지더군요. ……저도 그 외로움을 알고 있기 때
문이겠죠.”
“…….”
“하하,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으실 건 없잖아요, 부끄럽게. 이건 순전히 제 느낌일 뿐이
니까요.”
나의 어설픈 음악해석에 미쉘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날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건 놀란
것 같은 표정처럼 보이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왠지 머쓱
해져서 시선을 거리를 향해 던져버렸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조용했다. 그 입가에선 작게
외로움이란 말이 곱씹어졌지만 어떠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 때문에 분
위기가 무거워진 것 같아 말을 돌리기로 했다.
“근데, 그 사람…어째서 20만장밖에 음반을 내지 않은 걸까요? 저, 그거 정말 갖고 싶은
데.”
“…두려워서 그런 게 아닐까요.”
“두렵다니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봐주지 않을 테니까. 사생활도 쉽
게 노출될 테고.”
“그럼, 애초에 왜 음반을 낸 겁니까? 그런 게 무서운 거라면 말입니다.”
“…….”
“……만약 벤자민이 은둔하는 이유가 그런 거라면 정말 실망할 겁니다. 자기 마음만 편하
고 싶어서 이리저리 피하는 거라고요, 그건!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싶으면
그만큼 책임이 따르는 겁니다. 관심이 두려워서 음악만 내놓고 도망치다니, 그건 너무 이
기적인 태도 아닙니까?”
“…….”
“자기가 스스로 자신을 지워버리거나 잃어버리지 않는 이상, 우리는 온전히 자신을 인식
하고 자아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숨어 지내다니,
말도 안 됩니다.”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요.”
“뭐가 말이죠?”
“벤자민이 자신을 스스로 지워버렸다면 어떨까요. 혹은 잃어버렸거나 말입니다.”
“…….”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으니 다른 사람들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겠죠. 자기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타인이 두려운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언제 깨질지 모르는 가
면을 쓴 것이 그렇게 이기적인 겁니까?”
“그만두세요.”
“…….”
“어차피…, 어차피 그건 당신의 망상일 뿐입니다.”
“…맞아요. 어디까지나 지나친 망상일 뿐이죠.”
나는 결국 그의 말을 막아버렸다.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쏟아내는 말
들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내 말에 미쉘도 이내 입을 다물어버리곤 차게 식어버린 커
피를 마저 들이켰다. 더 이상의 말은 아끼려는 듯이. 나는 머리에서 맴도는 그 잔혹한 동
화 같은 미쉘의 이야기를 잊으려고 애썼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되뇌면서. 하지만 그
이야기는 한참이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벤자민이 정말 그런 사람일지 모른다고 생각
하자 가슴속 어떤 것이 희미한 빛을 잃고 침잠하듯 꺼져가는 것 같았다. 사라진 빛의 여운
은, 그렇게 한참이나 내 심장을 파헤치고 들어갔다.
*
벤자민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둘 다 침묵한 채 카페에서 일어났다. 나는 일
찌감치 호스텔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피곤했다. 시차적응 때문인지 아니면 그 대화 때문
인지는 모르겠으나 몸은 강렬한 태양의 열기에 그만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나는 그에게
이만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다. 처음 다가갈 때의 당돌함은 더 이상 사라지고 없었다. 아까
까지만 해도 미쉘에게 가지고 있었던 호감은 어느새 알 수 없는 두려움의 형태로 변해있었
다. 나는 그에게 만나서 즐거웠다며 인사했다. 참 깔끔하게 정돈된 헤어짐이었다. 그가 말
했다.
“…저, 지노.”
“네?”
“……그러니까,”
미쉘은 한참이나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답답하
다고 생각할 즈음 그가 천천히 내게 시선을 맞췄다.
“또……또 만날 수 있을까요?”
“…네?”
“이유는… 당신 그림도 아직 마저 못 그렸고, 그건 원래 그리기로 한 거였으니까… 그러
니까 전… 당신과 좀 더…….”
미쉘은 두서없는 말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눈치 없는 나로선 도무지 무
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그에게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죄송하지만 무슨 말인지……”
“다, 당신과 계속 만나고 싶다고요!”
“…아.”
그는 결국 될 대로 되라는 듯 눈을 질끈 감으며 마지막 말을 큰소리로 털어놓았다. 흰 얼
굴은 마치 고백이라도 한 것 마냥 귓불까지 장밋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에 나
는 그만 웃음이 나올 뻔 했다. 잘생긴 얼굴에 비친 홍조는 보고 있는 내 얼굴까지 붉게 물
들일 것만 같은 간지러운 색이었다. 그런 미쉘의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보였다. 나보다 머
리 하나만큼 큰 남자가 나 때문에 저렇게 긴장하고 있다니 조금은 으쓱해진 기분이었다.
사실 여자도 아닌 내게 계속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게 뭐가 그렇게 얼굴 빨개질 일인지
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미쉘의 얼굴은 마치 사형선고라도 기다리는 듯 꽤 심각했다. 대답이 곧바로 나오질 않자
다급해 졌는지 내 얼굴을 샅샅이 살피며 어떤 메시지라도 읽어내려는 것 같았다. 나는 입
을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그 진지한 얼굴을 향해 짓궂은 웃음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그리
고 기다렸다는 듯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럼, 언제 다시 볼까요?”
*
다음날 늦은 오후, 미쉘은 호텔 앞으로 나를 마중 나왔다. 어제와 다를 바 없이 후줄근하
고 폐쇄적인 차림이었다. 두 번째 만남 역시 이런 상태로 나타나자 나는 구제를 입는 것이
이 사람의 옷 입는 스타일인가 생각했다. 어제 헤어지면서 그는 빠리의 어딜 가고 싶은지
물었고 나는 망설임 없이 개선문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따로 이야기 하겠지만 어제 갔던
테르트르 광장 다음으로 가고 싶었던 곳이 바로 개선문이었기 때문이다.
개선문으로 향하기 전 우리는 잠시 우리는 샹젤리제의 어느 찻집에 들렀다. 사실 개선문
으로 바로 갈 생각이었으나, 개선문으로 뚫린 지하통로로 막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단체관광을 온 수십 명의 중국인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왁자지껄하게 중국어로 떠들어대는 소리에 나는 인상을 찌
푸렸다. 그 울렁거리는 성조로 이루어진 수다스런 언어는 비언어권자들에겐 상당히 신경
을 곤두세우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도무지 그네들과 함께 개선문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속내를 미쉘에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는 “그럼 근처의 카페에서 시
간을 때우다 가는 건 어때요?”하고 제안했다. 이 상태에서 그 카페인농축액을 또 마셨다
간 성질만 버릴 것 같아 불안했는데 다행히도 그가 데려간 곳은 이 아담한 찻집이었다. 의
도적인 것이었다면 미쉘은 보기보다 상당히 배려 깊은 사람일 것이다.
간단히 케이크와 차를 주문한 뒤 나는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실내는 작은
편이었지만 장미 벽지에 은은한 조명엔 오히려 그편이 더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았다. 케이크를 준비하는 나무 선반 역시 고풍스럽기 그지없었다. 한국에도 이런 분
위기의 조용하고 아늑한 찻집이 많다면 얼마나 좋을까, 혼자 생각해보았다.
미쉘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작은 연습장에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궁금해서 뭘 하는 거
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말없이 그것을 건네주었다. 거기엔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는 내
모습이 스케치되어 있었다. 그 크로키에서 나타난 표정은 마치 구멍가게에서 싸구려 장난
감에 혹하던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그것이 썩 마음에 들어, 가져도 되냐고 묻
자 “당신도 내 그림을 그려준다면 맞바꿀 용의는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잠시 망설
이다 그러겠노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아직 내 그림을 갖지 못했다며 자신이 가질 내 초상
화를 위해 마주 보며 그리기로 했다.
우리는 그렇게 다즐링 티의 은은한 향에 유혹을 받을 틈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이 꽤 신선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미쉘의 모습을 그려나갔다.
이렇게 하나하나 뜯어놓고 봐도 참 잘생긴 얼굴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옷이 좀 후줄근해서
그렇지 그의 외모만 두고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여느 잘 나가는 모델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다만 그 사람들과 다른 것이라면 그 파란 눈동자를 바라볼 때마다 은연중
에 느껴지는 처연함이었다. 기억 속에 새겨진 바다색과 닮아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
의 눈동자는 심해에 감춰진 진주 같다는 인상을 준다. 벌어진 조개 사이에서 신비한 빛을
내고 있는 참을 수 없는 아름다움. 하지만 그 아름다운 눈빛은 때때로 잔인하리만치 우울
한 빛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럴 때의 푸른 눈동자는 나르시스가 빠져든 샘을 연상시켰다.
그걸 보고 있으면 한없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 두려우면서도 자꾸 돌아보게 된다. 사실
은 방황하던 시절의 내 것과 닮아있다고 생각되어서 외면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도리질을 치며 뜬구름 같은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리
고 다시 그를 그려내는 것에 집중했다. 나름 똑같이 그린다고 노력한 거였는데 완성된 미
쉘의 초상화는 순정만화 주인공을 그린 일러스트와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의 눈에다
은연중에 표현한 내 솔직한 느낌을 남겨둔 것 빼고 말이다. 내가 그린 미쉘의 눈은 실제보
다 훨씬 물기를 많이 머금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었다. 나는 내심 부끄러운 기분으로 그 그
림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가 내 그림을 보곤 슬쩍 눈빛에 변화를 보이려던 찰나였다. 갑자
기 등 뒤에서 튀어나온 어떤 여자의 목소리는 느리게 잔류하던 공기를 단번에 갈라냈다.
“oh la la! 정말 미쉘이잖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반가움이 묻어난 여자의 목소리에 미쉘 역시 친근하게 웃어 보였다.
“이거 정말 반가운 우연이네, 까트린느. 롤리타도 같이 왔네.”
“응, 그러고 보니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
“미쉘이야 워낙에 두문불출이니까. 옷은 그게 또 뭐야? 새로운 스타일이야? 노숙자 스타
일?”
“하하, 그냥 좀…. 아, 소개할게요. 지노, 이쪽은 까트린느와 롤리타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까트린느 랑베르라고 해요.”
“롤리타 밀랑이에요.”
미쉘은 두 여자와 비쥬를 나누며 반갑게 인사하고 내게 각자를 소개시켜주었다. 까트린느
라는 여자는 나를 보며 미쉘에게 “미쉘, 이쪽은 혹시…….”라고 말하자, 미쉘은 여자의 말
이 끝나기도 전에 그런 게 아니라며 말을 잘랐다. 까트린느는 그런 미쉘을 보더니 어쩐지
흐뭇해 보이는 미소를 걸친 채 “그럼 무척 친한 친구인가보네. 네가 다른 사람과 이런 곳
에서 사적으로 만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라고 말했다.
까트린느는 눈에 띄는 미녀는 아니었지만 묘한 매력이 풍기는 여성이었다. 그녀가 입은
심플한 검은색 원피스는 그녀의 늘씬한 실루엣에 잘 어울렸다. 밤색 머리칼은 자연스럽게
묶어 올려져있었고, 무테안경 안의 진녹색 눈동자는 이지적으로 빛났다.
반면 그 옆에 팔짱낀 채 붙어있는 롤리타라는 여성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염색한 밝은
주황색 머리카락은 인형 머리칼처럼 풍성하고 구불구불했고, 하늘색 비슷한 연두색 눈동
자 또한 크고 맑아서 마론 인형을 연상시켰다. 흰 피부위에 도드라진 주근깨는 오히려 말
괄량이 같이 귀여운 느낌이었다. 얼굴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육감적인 몸의 굴곡은, 어찌
보면 오히려 그녀의 매력을 더해주는 듯 했다. 나는 각각을 번갈아보며 프랑스엔 참 다양
한 분위기의 여자들이 있구나 생각했다.
우리는 합석을 하기로 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까트린느가
물었다.
“실례지만 어느 나라에서 오셨죠?”
“한국입니다.”
“아, 그렇군요. 남한이요, 북한이요?”
“당연히 남한이죠. 제가 북한 사람이었다면 아마 북한 통치자의 직계가족쯤은 됐을 겁니
다. 북한 사람은 지배층 외엔 쉽게 국외로 나올 수 없으니까요. 그리곤 그런 것을 질문한
당신을 순식간에 빠방-!하고 뒤처리 할지도 모르죠.”
“후훗,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지노는.”
까트린느와 롤리타는 각자 독특한 매력이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까트린느는 외모에
어울리는 지성미가 돋보였다. 그녀의 직업은 사생활이라 묻지 못했지만 취미로 동양사를
공부하고 있다면서 나에게 이것저것 관심 있게 질문했다. 북한이나 남한에 대한 서로간의
이해관계라던가 이념 같은, 남한 젊은이들조차 보통 관심 갖지 않는 것에 대해 질문을 해
서 답하는 것이라 조금 당혹스럽긴 했지만 말이다. 그럴 때면 한국의 현실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한없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참 마음
에 들었다. 말도 잘 통하는 편이었고 이야기 하는 도중에 비쳐지는 배려심이나 부드러운
말씨는 무척이나 예뻐 보였다.
즐거운 대화 때문에 우리는 한참이나 시간을 잊은 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것을
의식했을 땐 이미 제법 시간이 흘러버린 상태였다. 나는 그녀들과 연락처를 주고받고 나중
에 다시 연락하기로 약속하며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미쉘과 개선문으로 향해 걸어
가던 도중 그가 넌지시 말했다.
“……까트린느라면, 단념하는 게 좋을 겁니다.”
“무슨 소리죠?
“그녀에겐 오랜 연인이 있으니까요.”
“…….”
“오늘 같이 대화했던 사람 중에 있었어요.”
“……정말입니까?”
미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연인을 소개했다. 미쉘은 놀랍게도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던 것이다. 아니, 놀랄 일은 아니었는지
도 모른다. 자신의 연인을 호감 있는 눈으로 보는 남자정도는 금방 알아봤을 터였다. 그녀
에게 가진 것이 그렇게 절절한 것도 커다란 감정도 아니었지만 미쉘이 그녀와 사귀고 있다
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약간 씁쓸해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역시…….”
“그래요. 안타깝게도 당신에게 돌아갈 기회는 없는 것 같네요.”
내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미쉘은 그렇게 말했다. 나는 혼잣말로 힘없이 “어쩐지
당신과 함께 있는 모습이 참 잘 어울려 보였어요.”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미쉘이 “……
네? 지금 까트린느가 누구와 사귀는 줄 알고 말씀하시는 겁니까?”라며 의혹의 목소리를
내었다. 나는 그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누구긴요, 당연히 당신이죠.”
“말도 안 되는 소리!”
“네……? 무슨…….”
“제 말은, 저와 까트린느가 아니라, 롤리타와 까트린느가 연인사이라고요!”
“에에-!”
그랬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녀들은 레즈비언 커플이었던 것이었다. 미쉘이 한 ‘당신에게
돌아갈 기회는 없다’는 것은 동성애자인 까트린느를 두고 한 말이었다. 나는 한동안 황망
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금 심하다고 무심코 생각하고 넘겼던 둘의 스킨십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혼란스럽게 맴돌 뿐이었다.
*
아까 미쉘이 어딜 가고 싶은지 물었을 때 내가 개선문이라고 했던 건 바로 고등학교 2학
년 때 우연히 읽은 E.M.레마르크의 ‘개선문’이란 책 때문이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나는
잿빛의 창백한 파랑 물감이 묻어져 나올 것만 같은 우울한 분위기에 흠뻑 반했었다. 그래
서 프랑스에 오게 되면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곳이었다. 아까 발걸음을 돌렸던 지하통
로를 통과해서 그 실물 앞에 서자 전율을 느끼게 할 만큼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아름다움
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특히 꼭대기로 올라가는 원형 계단을 올라갈 땐 정신이 아득해
질 정도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 파스타모양으로 구부러진 계단을 하나하나씩 올라가는
것이, 마치 인생을 살아가는 행위와 닮아있다는 인상을 받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개선문 주변을 돌아본 뒤 나는 약간 고양된 상태로 서점을 찾았다. 소설 「개선문」을 사
들고 나는 주인공 라비크가 지나갔던 거리의 이름들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걸은 자리를 한 남자가 뒤따라 걷는다. 그렇게 두 사람은 대로에서 골목길로, 골목길에서
대로로 천천히 걸었다.
새로 들어선 길고 긴 골목의 끝엔 태양이 눈부시게 걸려있었다. 석양은 마침 골목 사이를
비집고 있었고 나는 그 강렬한 빛에 몸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그 빛은 눈꺼풀
을 뚫고 들어와 시야를 온통 주홍빛으로 채웠다. 나는 어째선지 그 주홍빛에서 안온함을
느낀다.
라비크의 행적을 추적할 때부터 귀에 끼웠던 이어폰에서 음악이 바뀌었다. 다시 눈을 떴
다. 벤자민 음반의 4번 트랙, 「베베Bebe(아기)」라는 곡이었다. 첼로에서 뿜어져 나오
는 저음은 내 마음을 점점 편안하게 이완시킨다. 벽을 향해 다시 팔을 뻗었다. 손끝에 와
닿는 까칠한 벽의 촉감은 나의 깊은 곳까지 전해져, 줄곧 잠들어 있던 무의식을 일깨웠다.
그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기억을 더듬어보려는 듯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언제부턴가 내 입에선 베베의 멜로디가 나직하게 음악에 따라 흘러나왔다. 그렇게 온 시
야가 주홍빛으로 물든 상태로 느낀 시멘트벽의 촉감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
올 때 온몸을 죄어오던 느낌을 회상시켰다. 어머니의 따뜻한 자궁 안에 머물러 있다가 세
상의 빛을 향해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 태아. 다만 모두들 망각했을 뿐, 그것은 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숭고한 의지이다. 생명을 가진 것들만이 가질 수 있는 신의 축복.
태어나 처음 와보는 이국땅에서 나는 어째서 이런 묘한 느낌을 받는 걸까. 온몸 구석구석
에 평온이 퍼져나가 생의 의지로 하나하나 살아나는 감각. 그것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태초의 나를 만난 것 같았다. 처음 만난 날 보았던 미
쉘의 그 그림을 마주했을 때처럼 말이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뒤따라오고 있었다. 내 모습이 신기해 보이는지 연신 웃고 있
었다. 그의 얼굴 또한 그리고 그 푸른 눈동자 또한 지금만큼은 나와 같은 자궁 안에 있는
것 마냥 붉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를 기다렸다. 내게 점점 가까워지는 미쉘의 발걸
음 소리 하나하나가 내 심장에 새겨졌다. 그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어쩐지 훨씬 이
전부터 알고지낸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어렸을 때 마음 설레며 읽었던 이야기의 주인공
을 잊고 있다가 다시 만난 느낌이랄까. 그래, 처음 만날 때부터 어렴풋이 그와 겹치던 이미
지는 아마 어린왕자였을 것이다. 사막에 고립된 비행사 앞에 갑자기 신기루처럼 나타나 양
을 그려달라고 한 어린왕자.
어렸을 때, 나는 그 책을 읽고 난 뒤 매일 밤 마치 소녀와 같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어린
왕자를 기다린 적이 있었다. 그가 만났던 한 마리의 여우가 된 것처럼. 어린왕자와 만나 관
계를 맺고, 서로에게 길들여져, 죽을 때까지 그의 외로운 심장을 감싸주고 싶었다. 나도
그 어린왕자를 떠올리며 금빛 밀밭을 떠올리고 싶었다. 그러나 한동안 계속 밤잠을 설치
게 했던 맹목적인 기다림은 실망감과 함께 점차 잊혀져갔다. 그리고 그 순수한 마음은 어
느덧 세월에 퇴색되어 겨우 떠올려야만 그 기억의 몇 조각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아득해
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낡은 기억 속에서 기다려왔던 그를 끄집어내었고 결국은 이렇게 다시
만났다. 그는 작은 소행성에 혼자 지내는 것이 외로워 지구로 돌아와 머물면서 점차 어른
이 되어버린 어린왕자. 하지만 껍데기만 자라버린 어린왕자는 이제 양 대신 자신의 모습
을 그려달라고 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자마저 사랑할 줄 알던 그는 이제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 했다. 나는 문득 책 속에 나온 어린왕자의 마지막 순간을 떠
올리며 어째서 그 장면이 슬프면서도 애틋하게 느껴졌는지 깨달았다. 그에겐 지구를 떠나
자신의 별로 돌아갈 이유, ‘장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어린왕자가 안타깝게
보이는 건 아마도 ‘그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겠지.
어느덧 내 앞까지 다가온 미쉘은 그대로 멈춰 섰다. 나는 말없이 이어폰 중 하나를 빼내
어 그의 귀에 가져갔다. 그는 벤자민의 음악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잠시 멈칫 했다. 미묘
한 표정이었지만 이어폰을 뽑아버리거나 하진 않았다. 미쉘은 내가 꼽아준 대로 그대로 두
고는 조용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그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그
의 두 개의 손가락만 아슬아슬하게 쥔 채 다시 골목을 걸었다. 이 골목을 걸으면서 이 느낌
을 자궁 안이라고 느껴서인지, 그의 손가락을 쥐고 있는 것이 꼭 탯줄을 쥐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로 단 한마디도 하고 있지 않았지만 나는 어쩐지 그 역시 나와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어른이 되어버린 나의 어린왕자와의 만
남은 그렇게 시작한 것이다.
벤자민의 뱃속에서 듣던 어머니의 심장박동 같은 음악과, 비좁은 골목길 사이로 자궁처
럼 내 몸을 감싸던 붉은 석양과, 한 손 끝엔 까칠한 벽의 촉감과, 다른 한 손엔 아슬아슬하
게 잡혀 느껴지는 손가락의 온기의 주인과 함께. 그와 함께한 그 순간은, 앞으로 절대 잊
지 못할 정도로 내 뇌리와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나는 그것이 참 좋았다.
그냥 네가 너무나 필요해서, 나를 필요로 할 것 같아서 여기 왔어.
-영화 아메리칸 퀸트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