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 새벽바다처럼 시린 눈동자의 색
피곤에 무겁게 가라앉았던 눈꺼풀은 주변의 분주한 기척에 깨어났다. 밖에선 비행기의 바
람을 뚫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에서 깨자 머리를 관통하는 그 소리가 유독 더 거슬렸다. 저
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보니 옆에 앉은 말쑥한 노신사는 고목 같은 손으
로 비행기에서 나누어준 담요와 베개를 정리하고 있었다.
“실례합니다만, 비행기가 착륙하려면 얼마나 남았는지 아십니까?”
“30분이오.”
그는 졸린 기운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기지개를 펴고 이리저리 뒤척여
보았다. 몸은 장시간동안 움직이지 못해 삐걱거렸다. 블라인드가 쳐진 창의 틈새로 금빛
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올리자 창밖에선 쏟아지는 햇빛과 함께 모래 빛 도시가 웅
장하게 나타났다. 유구한 역사로부터 성장해온 도시의 모습은 비슷한 높이의 건물들로 꼭
꼭 채워져 있었고, 그 사이로 도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모습이 마치 가뭄에 쩍쩍 갈라진 논
바닥 같았다. 그 도시의 이름은 빠리였다.
공항에서 입국절차를 마친 뒤, 나는 택시를 타고 예약해둔 호텔로 향했다. 중년의 택시 운
전기사는 피곤해보였다. 지저분하게 자란 콧수염과 창백한 피부 위에 움푹 꺼진 눈은 마
치 벌레가 파먹은 시체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런 외모와 그의 성격은 전혀 무관한 것 같았
다. 왠지 모르게 움츠리게 만드는 분위기의 운전사가 건네는 인사에 내가 프랑스어로 간결
하게 답하자, 그는 이야기 상대가 되겠다 싶었는지 제멋대로 수다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처음엔 국적이나 프랑스에 온 목적 같은 가벼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는 목에 힘줄을 세우며 프랑스 정부에 대한 온갖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남프랑
스의 어투가 강하게 섞인 말투 때문에 나중엔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는 그런 것에 신
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불평을 한참이나 늘어놓고 있는데 목적지에 도달하자 그는 아쉽
다는 듯 입맛을 쩍쩍 다시며 택시비를 받아 쥐었다. 못 다한 불평거리가 아직도 많이 남은
모양이었다.
호텔에 짐을 맡기고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와 지하철을 탔다. 시계를 보니 벌써 밤 9시였
다. 한국에선 이미 해가 저문 시간이었지만 낮이 긴 빠리의 하늘은 이제야 점점 어둠에 먹
혀가고 있었다. 시간과 맞지 않는 하늘에 한참이나 이상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도착한
목적지는 몽마르트르 언덕 위의 한 성당이었다. 그곳까지 올라가는 수백 개의 계단을 나
는 순례자가 된 것처럼 성의 있게 밟아 올라갔다. 그 둥글고 하얀 돔이 씌워진 성당에 다
다다랐을 때쯤엔 이미 완전한 밤이었다. 거의 끝나가는 막바지의 여름 바캉스였지만, 여전
히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나는 약간은 지쳐버린 다리를 이끌고 사람들이 드문
전망대쪽으로 걸어갔다. 도시는 밤바다에 반사된 달빛처럼 인공의 불빛으로 이글거렸다.
나는 멀리서 금빛으로 반짝이는 에펠탑을 보고서야 정말 와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빠리의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이곳에 온 이유도 도시를 내려다보며 이런 기분을 느끼기 위
해서였다. 내가 정말 수없이 꿈꿔왔던 곳에 와있다는 기분을 실감하기 위해서. 기대감과
함께 공존하는 불안감에 맞서,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 조금 더 용기를 가져보기 위해서 말
이다. 도시로부터 실려 오는 바람이 살갗에 닿았다. 닿자마자 그대로 녹아버리는 것 같은
바람을 느끼면서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이곳에 오기 위해 지난 몇 년간 얼마나 치열하
게 살았던가. 그간 힘들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래, 나는 정
말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내 스스로 옭아맨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눈을 뜨자
그 한 폭의 사진 같은 풍경이 다시금 눈앞에 펼쳐져 가슴 속 무언가를 뜨겁게 울렸다. 말
로 형용할 순 없지만 몽마르트르 정상에서 바라본 이 도시의 밤은,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
의 고요했던 마음을 어지럽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좋은 밤이지요?”
“……?”
망연한 시선으로 한참이나 빠리의 야경에 취해있는데 갑자기 다가온 목소리에 반사적으
로 고개를 돌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키가 훤칠한 아랍계의 청년이었다. 나는 어떻게 반
응해야 할지 몰라서 조금 뜸을 들였다. 일단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안경을 고쳐 끼며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민망해진 기분으
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내가 가볍게 반응해온 것에 그는 꼬투리를 잡듯이 바로 뒤이어 물
었다.
“여행을 오신 건가요?”
“…아뇨. 이곳에서 공부하려고 지금 막 도착한 겁니다.”
나는 좀 더 혼자 생각에 잠기고 싶었지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을 무시할 수가 없어 그의 질
문에 답했다. 프랑스엔 의외로 아랍계 사람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중 많은 사
람들이 저소득층인데다가 집단적으로 이런저런 일상적인 범죄도 자주 일으켜서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그들을 좋은 눈으로 보질 않는다. 물론 보통은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는
다.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 같은 편협한 사람으로 보여 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이
다. 하지만 난 그네들에게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알기 전에 아랍인
이라고 색안경을 끼며 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귀찮아도 되도록 상대방이 기
분 나쁘지 않도록 최소한의 응대를 했던 것이다. 그 아랍인 청년은 내 대답에 순간 눈을 반
짝였다.
“오, 그러시군요. 그럼 앞으로 잘 되게 해달라고 이 사크레 쾨르 사원Basilique du Sacre
Coeur으로 미사를 드리러 온 건가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야경을 보면서 마음을 정리해볼까 해서요.”
그렇게 대충 에둘러 대답하면서 난처한 웃음을 보였다. 그 아랍계 청년은 내 웃는 얼굴을
보며 마주 웃었다.
“손 좀 줘보실래요?”
“…네?”
갑자기 뜬금없는 남자의 요구에 나는 고개를 돌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제 애인이 집시라 저도 손금으로 미래를 보는 방법을 배웠거든요. 앞으로 어떤 일이 벌
어질지 점을 봐드릴게요.”
남자는 그렇게 자신의 말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허락도 없이 내 손목을 낚아챘다. 대체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어 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내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남자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해 보여서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고개
를 쳐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난감한 표정이었다.
“아…이거 어쩌죠?”
“…왜 그러시죠?”
“이런 말을 하기 좀 미안하지만 손금에 따르면 당신의 미래는 어두워요. 여기서 지내는
동안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수많은 난관이 찾아올 겁니다. 게다가 정신적으로 계속 안정
을 찾지 못하는군요.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면 결국 당신은 당신 일생에서 가장 끔찍한 일
을 겪게 될 거예요. 어쩌면 평생에 영향을 줄 수도 있겠군요.”
“…….”
남자는 불길한 미래를 예상하듯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예의상으로라도 좀 좋은 말이 나
올 거라 예상하고 있던 나는 겁을 주는 듯한 남자의 말에 반사적으로 흠칫 떨었다. 그는
내 표정의 불안을 감지하곤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뭔
가를 하나 꺼내어 내 왼쪽 손목에 단단히 묶어주었다. 빨간색과 파란색 구슬이 맞대어 엮
어져 있는 가죽팔찌였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은 이걸 항상 차고 다니세요. 이것이 당신의 이성과 감정 사이의 균
형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줄 겁니다.”
“아…,”
“끊어지거나 망가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그 순간 모든 일들이 틀어질지 모르니.”
그는 내 귀 가까이에 조용히 속삭이며 다시 한 번 주의를 시켰다. 나는 당최 어이가 없었
다. 제멋대로 점을 보곤 겁을 주질 않나, 부적이랍시고 난데없이 팔찌를 주질 않나. 한국에
서야 이런 사람이 있을 리가 만무했지만 여긴 프랑스였다. 이 남자가 도대체 무슨 의도로
낯선 동양인에게 말을 걸고, 점을 봐주고, 부적으로 팔찌까지 줘버리는 건지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조금 난감한 상황이고 정말 받아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남자의 태도
가 워낙 예의 바르고 진지해서 일단 고맙다고 말할 참이었다.
“저기……”
“9유로 되겠습니다.”
“……네?”
“그 팔찌요. 9유로짜리라고요.”
“…….”
단번에 벗겨진 이상한 아랍인의 실체는 말 그대로 관광객을 상대로 한 잡상인이었다. 그
야말로 멍청하게 있다가 그들의 상술에 ‘낚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매몰차게 화
를 낼 수가 없었다. 이미 팔찌를 차놓은 데다가, 그가 한 말까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다가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직 프랑스에 적
응이 안 된 상황이니만큼,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결국 고단수의 아랍인 놈의 뜻대로 그에게 9유로를 내어주어야만 했다. 마음 같아서
는 실실대는 입가에 돈을 처박아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까진 할 수 없었다. 이놈들이
일부러 나같이 거절 잘 못하는 동양인들을 집중해서 노린다는 것은 한참이나 지나서야 알
게 된 사실이었다. 나는 기분이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상태로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왔
다. 내려오는 도중에도 잡상인들은 내가 호구처럼 보이는지 여기저기서 집적댔다. 나는 기
분이 불쾌해져서 ‘건드리면 죽인다’는 살기등등한 표정을 유지한 채 빠르게 발걸음을 재촉
했다. 계단을 다 내려와서도 화가 아직 안 풀렸는지 나는 혼자서 씩씩대고 있었다. 분풀이
로 팔찌를 빼서 버릴까 했지만 무언가가 그 행위를 강하게 제지하고 있었다. 그 잡상인의
말도 안 되는 예언을 믿는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팔찌를 빼내기에는 뭔가 찝찝
한 구석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9유로나 주고 샀는데 그냥 차고 다니지 뭐. 그렇게 볼품
없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런 식으로 미신에 대한 불안감을 합리화시키며 작은 한숨을 내
쉬었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길에 있던 술집의 네온사인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보지 않
아서인지 주황색 불빛이 불규칙하게 깜빡거리는 술집의 이름은 「*비엥브뉘 아 빠리
Bienvenue a Paris」였다.
주) 비엥브뉘 아 빠리. ‘파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뜻.
*
‘…다녀오겠습니다. 몸 건강하세요.’
‘……정말 이렇게 가는구나. 이렇게 몇 년은 널 못 볼 거라고 생각하니……. 네가 원하는
게 아니었으면……‘
‘아뇨, 제가 원하는 겁니다. 제가 꿈꿔왔던 거예요. 그리고 저 스스로 일궈낸 겁니다.’
‘…….’
‘걱정 마세요. 저는 반드시……그 동안은……겁니다.’
눈을 떴다. 시차 적응이 안 된 걸까, 꿈자리가 사납구나. 눈을 뜨자마자 파고드는 강렬한
빛에 미간을 찌푸렸다. 햇빛의 느낌은 어딜 가든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한국의 것과
는 전혀 다르다. 더운 태양과 자줏빛 커튼 덕분에 내 몸과 침대시트는 핏빛으로 물들어 있
었다.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노란 태양광이 그 잔혹한 색으로 물든 몸의 정 중앙을 가
르고 들어왔다. 흰 침대시트에서 나는 나프탈렌 냄새 때문인지 거기에 물든 핏빛그림자 때
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쪽이든 살풍경한 병실을 연상시키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힘겹
게 팔을 딛고 상체를 일으켰다. 가슴께에 송골송골 맺혔던 땀이 미끄러져 찝찝하게 몸을
간질였다. 나는 세면실로 가서 몸을 씻었다. 아침에 일어난 모양새 때문인지, 마치 긴 수술
을 마치고 나온 듯한 기분이 자꾸 들어 몸을 씻어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호텔에서 제공한 크로와상과 커피로 간단히 배를 채우고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빠리에
오면 가장 찾아가고 싶었던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보이지 않는 어떤 인력에 이끌
리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지만 나는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숙명이라고 받아들였던 것 같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한가득 안고 찾은 곳은 어제 갔던 성당 바로 근처에 있는 광장이었다.
많은 예술인들이 그림을 그려주고, 전시하고, 팔고 있는 화가들의 광장 테르트르Place
du Tertre. 사실 예전에 가난한 화가들이 몽마르트르에 모여 살게 된 건, 당시엔 이곳이 풍
차가 돌아가는 빠리의 변두리라 집세가 쌌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고흐나 피카소, 로트렉
등 현재는 저명한 화가들도 무명시절엔 이곳을 거쳐 갔다는 것 때문에 화가들의 거리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가지게 된 환상일까. 예전부터 빠리에 오게 된다
면 해보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곳에서 마음에 드는 화풍을 가진 이름 없는 화가에게
내 초상화를 한 장 부탁하는 것이었다. 일본에 가면 초밥을 먹어 봐야 하고, 뉴욕에 가면
자유의 여신상을 꼭 보러 가야하는, 내겐 그 나름대로의 낭만이자 꿈이었다.
하지만 테르트르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것이 쓸모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확
신이 들었다. 마지막 여름휴가를 빠리에서 보내기로 작정한 수많은 관광객들이 만들어낸
분주하고 정신없는 분위기가 주된 것이었고, 나까지 세계 도처에서 몰려든 인종시장의 물
결에 떠밀려 다니는 것 같아 걷는 내내 정신이 아찔했다. 이곳에서 느끼고 싶었던 느직하
고 낭만적인 분위기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오늘날 남아있는 이곳의 화가들은? 그
들은 대부분 그저 판에 박힌 모사화나 엉터리 초상화 따위를 휘갈기며 관광객을 불러들이
고 있을 뿐이었다. 대충 책에서 보며 ‘그래도 화가의 거리인데’하며 설마 했는데 실제로
그 소잡한 분위기에 파묻히게 되자 한숨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래도 이왕 온 거 즐겨보자 하는 생각에 나는 용기를 가지고 인파에 몸을 실었다. 꾸준
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조악한 그림들 사이를 거닐었는데 제법 자신 있던 내 인내심은 10분
도 되지 않아 바닥이 나버렸다. 그래, 어제 그 강매사건 까지만 해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
만 내가 꿈꿔왔던 환상에게 당한 배신감은 도무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게다가 더운 햇
빛과 사람들 사이의 밀도 높은 공기 때문인지 피로감이 급작스럽게 덮쳐오기 시작했다. 어
제오늘 계속 짜증나는 일들의 연속이다. 결국 나는 다른 곳을 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대
로 호텔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제대로 된 초상화나 그림은 고사하고 엉터리 초상화를 관광객들에게 내밀며 팔아넘기려
는 그네들의 모습을 경멸스럽게 바라보며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하던 차였다. 그렇게 질
려버린 걸음은 후미진 구석에 외따로이 자리 잡고 있는 화가의 그림에 그대로 묶여버렸
다. 태양의 붉은 빛을 뿜어대는 노을처럼 핏빛 바탕에 작게 웅크리고 있는 태아의 그림. 아
이의 탯줄은 그림 밖으로 연결되어 있다. 마치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
는 것처럼. 그래서인지 평생 생길 리도 없는데도 마치 내 뱃속의 아이처럼 그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 보듬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그림을 보고 있을수록 어쩐지 그 그림
속 태아는 결국 ‘내 안의 나’라는 느낌으로 전이되었다. 내 안에 언제나 아기처럼 잠재되
어 있는 꿈틀거리는 본능. 오직 그 본능 속에 감춰진 채 변하지 않는 나의 자아.
얼마 되지도 않는 좁은 캔버스 속의 태아의 그림이 이런 환상을 불러일으키다니, 나는 철
판으로 머리를 꽝하고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상업주의로 물든 그림의 물결
속에서 발견한 그 그림은 단연 돋보이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걸 그렸나 하는
궁금증은 이젤들 옆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로 자연히 시선을 옮기게 했다.
작은 접이식 의자에 앉아있는 그 남자는 팔다리가 길어서 어딘가 모르게 움츠리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은 남루해 보이는 올리브색 체크무늬 셔츠를 입었고, 캡이 붙어있는 카키
색 빵모자 아래에 감춰진 얼굴은 무척 희었다. 모자 밑으로는 백발에 가까운 금발이 드리
워져 있었다. 깊게 눌러쓴 모자에 검은 뿔테안경을 착용하고 있어서 그의 얼굴은 잘 보이
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더욱 쓸데없는 호기심을 자극할 뿐이었다.
나는 얼굴을 보기 위해 약간은 짓궂은 자세로 몸을 숙였다. 제법 멀찌감치 떨어져 그 모
자 안을 올려다보자 남자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그 사람의 얼굴 보려고 몸을
숙인 내 의도를 눈치 챈 듯한 동작이었다.
남자는 아직도 이쪽을 등 뒤로 하고 볼일이 있다는 듯 그쪽에 베이지색 가죽 가방을 뒤적
였다. 대체 뭘까, 저 반응은. 이 프랑스 땅에서 나를 알아볼 외국인이 있을 리가 만무했지
만 그는 분명 일부러 내 관심을 피하고 있었다. 나는 굽혔던 몸을 폈다. 그리고 그 이상한
화가에게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S’il vous plait, monsieur.”
주) 실 부 쁠레, 므슈. ‘실례합니다, 선생님.’
남자는 망설이고 있었는지 한참이나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응답을 기다리며 계속 앞에
서 알짱거리고 있는 나를 완전히 무시하긴 어려웠는지, 포기한 듯한 동작으로 가방을 내려
놓았다. 하나하나 덧붙여지는 이상한 반응들에 의구심은 깊어져만 갔다.
“Oui.”
“저기, 전 므슈에게 제 초상화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
“저…, 실례가 되지 않는 다면 그전에 먼저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기념으로 당신의 모습
을 찍고 싶어……엇??”
화가는 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재빨리 액자랑 화구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그 모습을 황망하게 쳐다보았다. 대체 뭐가 어떻
게 돌아가고 있는 걸까.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내가 한 말을 되짚어보았다. 하지만 역
시 특별한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다시 용기를 내어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저, 저기요……?”
내가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자, 짐을 챙기고 있던 그의 동작이 순간 멈칫 했다.
그러더니 나를 홱 하고 돌아보았다. 그의 눈과 처음 마주친 순간이었다. 그 눈은 영하의 심
해처럼 깊고 새파랬다. 어째선지 그 맑은 빛이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남자
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곤 몇 걸음 다가와 그 얼굴을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나
는 그의 압도된 분위기에 괜히 뒷걸음질을 치려다 이내 튀어나온 그의 말에 그대로 석고처
럼 굳어 버렸다.
“그래, 여기까지 잘도 찾아왔군 그래. 내가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처음 알았어. 너
같이 어린 동양애송이한테까지 이런 뻔뻔한 연기를 시킬 정도라니 말이야.”
그의 알 수 없는 말에 내 눈은 더욱 동그랗게 떠졌다. 이 남자,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
는 거야? 여전히 돌아가는 상황에 나는 화까지 나려고 했다. 그러나 표면적인 모습에선
그 분노가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그가 내뿜는 위압적인 공기에 나도 모르게 위축되어 꼬
리를 집어넣은 강아지마냥 부들부들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내 손목에 감긴 디지털 카메라를 뺏어 들었다. 나는 내가 가지
고 있는 소시민적인 성격 때문에 그것을 말리지도 못했다. 그저 어릴 때 동네에서 제일 덩
치 크던 골목대장에게 사탕을 빼앗겼던 심정으로 강탈된 디카를 무력하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전원을 켜고 내가 찍었던 사진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빠르게 사진들을 넘
겨보더니 그는 한쪽 입 꼬리를 올린 채 비아냥거렸다.
“관광객의 디카 메모리까지 훔친 건가? 아주 위장도 철저하군.”
“…….”
아니, 그건 훔친 것도 위장한 것도 아닌데. 나는 그의 비꼬는 말투에 곧바로 토를 달았다.
…물론 마음속에서만 말이다. 남자는 사진을 대충 훑어본 뒤 내 카메라를 가슴팍에 푹 밀
어 넣었다.
“…이미 알고 온 것 같은데, 허튼 수작을 부릴 생각 따윈 버려. 행여 챙기고 있는 동안 사
진 같은 거라도 찍고 있으면…… 네 녀석의 그 부러질 것 같은 손목을 평생 못쓰게 만들어
버릴 줄 알아.”
그는 그렇게 내 귓가에 잔털이 다 일어날 것 같은 섬뜩한 협박을 남겼다. 그리곤 다시 돌
아서서 빠르게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의 머릿속 한편에선 지금이 기회라며, 미친놈한
테 재수 없게 걸렸다고 생각하고 얼른 달아나버리라고 외쳤다. 하지만 몸은 그 자리에 망
부석처럼 굳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달아나기엔 너무도 석연치가 않았다. 그가
짐을 다 정리하고 가방을 챙겨 맬 때까지도, 난 여전히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전부터 상황파악이나 이해속도가 느린 데다 눈치까지 없다고 주변의 핀잔을 자주 받으
며 살아왔다. 그래서 나는 한참 뒤에야 겨우 뒤늦게 상황파악을 한 뒤, 실수한 것이 있을
땐 나중에라도 사과하곤 했다.
그러나 오늘 같은 경우는 조금 달랐다. 머리에 쥐가 나도록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왜 이 사람을 화나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 솔직히 내 입장에선 지금까지 만난 프랑
스인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사람들뿐이다. 하지만 어제의 잡상인의 과장된 표정과는 달리,
이남자의 표정에선 진심으로 화났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일단 이 남자에
게 무언가 실수를 저지른 게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비록 그게 무엇인지 나는 모르겠지만,
날 대하는 태도를 봐서는 아주 큰 실수임에 틀림없었다.
내가 그 생각이 머리에 미쳐 있을 때엔, 그는 이미 그 자리를 떠나 빠른 걸음으로 광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그 뒤를 좇았다.
“잠깐만요, 멈춰주세요!”
그는 내 목소리에 멈칫하더니 이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파란 눈이 가소롭다는
듯 나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 눈빛에 잠시 움찔했지만, 나는 애써 기어나가려고 꿈틀거
리는 용기를 끄집어냈다. 나는 남자 앞에 상체를 푹 숙였다.
“저기, 정말 죄송합니다! 솔직히 제가 뭘 잘못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짐을 챙
겨 자리를 뜨게 할 만큼 큰 실례를 범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외쳤다. 이때 튀어나온 나의 불어 발음은 정말이지 끔찍했
다. 내심 상당히 긴장하고 있던 모양이다. 나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고 그의 눈
을 직시했다. 어디에나 적용되는 건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프랑스인에게 진심을 내보이기
위해선 눈을 마주치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라본 그의 파란 눈동자의 눈엔 미미하게
나마 당황한 기색이 스친 것 같았다. 나는 말을 이었다.
“사실 어젯밤에 프랑스에 처음 왔습니다. 이 곳 예절도 잘 모르고 무엇보다도 사진을 찍
는 게 그렇게 무례한 행동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진을 찍지 않을 테
니, 돌아가서 하시던 일 계속 하세요. 저는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두서없는 변명을 마치자 둘 사이엔 일순 묘한 정적이 흘렀다. 나는 그 자가 욕지거
리라도 뭐라고 지껄여주길 기대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저 신기한 눈으로 나를 응
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눈을 마주한 채 대답을 기다리기란 한국인인 나에겐 참으로
고역이었다. 나는 그 민망함을 피하기 위해 나도 모르게 눈을 굴려 시선을 피했다.
“…그, 그럼 전 이만!”
나는 가능한 한 빨리 이 어색한 상황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의 묵언은 사과
를 이미 받았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는 자기합리화와 함께. 나는 몸을 뒤로 돌렸다.
“잠깐만요.”
아까완 전혀 다른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나의 어깨를 붙잡는 커다란 손이 내 몸을 붙잡았
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그는 그것에 오히려 당황한 듯 “아…, 죄송합니다.”하
며 내게서 손을 얼른 뗐다. 나의 시선은 자동적으로 그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커다란 손으
로 반쯤 가려진 얼굴은 어쩐지 상기 되어있는 것 같았다.
“오히려 제가 오해한 것 같군요.”
“…네?”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무례를 범한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
“사과하는 의미로 사진 찍는 것은…… 안 되지만 당신의 초상화를 그려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돈을 받지 않고요. 괜찮을까요?”
“…….”
“저기요?”
“…아, 네?”
그의 조심스런 제안에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그는 응답을 요구하듯 되물었다.
“제 말 다 이해하셨습니까?”
“…아, 그럼요. 그렇게 해주신다면야 저야 감사하죠.”
물론 나는 그의 말을 다 알아 들었다. 여전히 이해 속도가 느린 탓에 상황을 정리하느라
대답을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뿐이다. 그래, 정리하자면 이 프랑스
인은 내게 무례하게 군것에 대해 사과하는 의미로 공짜로 그림을 그려준단 말이지? 이유
도 없이 사과한 것에 바보가 된 기분도 들었지만 어제의 불쾌감과는 차원이 달랐다. 현재
상황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납득되자, 나는 그의 제안에 싱긋 웃어 보였다. 그는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 대신……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그게 뭐죠?”
“당신 초상화 두 장 그려도 될까요? 한 장은 당신에게 드릴 테니, 다른 한 장은 제가 갖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어째서 제 초상화를?”
“음, 그건 당신 얼굴이……”
그는 말끝을 흐린 채 한참동안 자신의 날렵한 턱 선을 매만졌다.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 것
이 적절한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꽤나 난제에 빠진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남자
를 배려해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궁금했기 때문이다. 내가 동양
인이라서 그런 건가? 하고 생각해 봤지만 역시 아닌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엄청난 수의
화교들과 쇼퍼홀릭의 일본녀들, 그리고 베트남 전쟁으로 이주해온 베트남인 등으로 북적
대는 곳이 빠리이다. 동양인들이 드문 것도 아니니 그가 내 초상화를 요구하는 건 동양인
으로서의 희귀성 때문도 아닐 터이다. 오랜 동안의 골똘한 고민 끝에 그는 입을 열었다.
“당신 얼굴이 좋아서요.”
“……그게 무슨…….”
“그냥, 모델로서 괜찮은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렇게 거리에서 사람들 얼굴을 그
려주다가, 계속 그려보고 싶은 얼굴이 있으면 상대방에게 부탁해서 한 장 더 그려두거든
요.”
“그런 거라면 사진으로 찍는 게 더 정확하지 않나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첫인상의 느낌을 그대로 담아서 그린 그림이 가장 그 사람 본연
의 모습을 살려주거든요. 적어도 제 경우엔 말입니다.”
흐음, 그렇구나. 나는 나름대로 수긍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것을 긍정의 의
미로 받아들였는지 작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우리의 거래는 성사되었고, 화가는 곧 다시 자리에 짐을 풀고 그림 그릴 준비를 했
다.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이곳이 좋겠다며 양손으로 내 팔을 잡아끌었고, 나는 그 말에 순
순히 따르며 앉았다. 그렇게 앉아있는데 남자가 잠시 빤히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문제가
있냐는 듯 그를 마주 올려다보자, 기다란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 올을 타고 내려와 귓바퀴
까지 흘러 내려왔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민감하게 몸을 뒤로 물리자 그는 또 “아, 죄송.”이
란 짧은 말을 내뱉고는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머리가 굉장히 까맣고 반짝거려서 한번 만져보고 싶었어요.”
그는 멋쩍다는 듯 내 머리를 슥슥 흐트러뜨리고는 스케치북 앞으로 걸어갔다. 남자의 말
에 나는 어쩐지 민망해져버렸다. 머리 매무새를 다듬어 준다고 생각해서 내버려 뒀던 것이
었는데. 나는 괜히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한답시고 몇 번이나 같은 곳을 쓸어 넘겼다.
“……이젠 숨도 작게 쉬어요. 이쪽만 바라보고.”
그는 검은 뿔테 안경을 벗고 연필을 집어 들었다. 어쩐지 진지하고 성스럽게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태도에 침이 꿀꺽 삼켜졌다. 남자는 절제된 동작으로 스케치북 위에 스윽 하고
선을 하나 크게 그었다. 그 종이와 연필 사이의 마찰음은 왠지 모르게 긴장감이 스치게 했
다. 나도 모르게 몸이 약간 떨렸다. 소란스런 공기가 감돌고 있는 거리 속에서, 저 연필 선
긋는 소리 하나가 내 머리에 그려지듯 또렷하게 들려왔다. 몇 번의 큰 틀을 구성하는 선의
소리가 머릿속을 지나가더니, 이내 그 소리는 짧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쩐지 프랑스의 무음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나와 그 말고는 모든 사람들이 그
저 무성 흑백영화 필름처럼 부질없이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무척 생소하면서도 좋은 기분
이었다. 살짝 시선을 돌려 광장을 돌아보았다. 처음엔 수많은 인파 때문에 짜증이 밀려왔
던 그곳은 이제 어쩐지 친근하게 느껴지려 했다. 나처럼 빠리란 도시의 존재감에 이끌려
온 사람들에게 동족의식이 들었다. 역시 잘 왔구나, 나.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이 화가는 어째서 끼
고 있던 안경을 벗었을까? 아무리 안경 테두리가 거슬린다고 쳐도 안경을 벗으면 일단 잘
안 보일 텐데. 남자는 이러한 궁금증에 혼자 빠져있는 나와 무관하게 거침없이 손을 놀렸
다. 그렇게 20분 정도가 흘렀고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는지 그의 손은 이곳저곳을 다듬
으며 수정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나 완성.”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그 쪽으로 달려갔다.
“와아-”
나는 그대로 멍청한 감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렇게 생겼었지. 그 그림속의 나
와 대면하는 순간 그런 생각과 함께 그림을 수긍해 버렸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다른 사람
이 그려준 초상화를 보면 나 자신이 아닌 것 같다. 자신이 생각했던 이미지와 그 모습을 비
교하며 초상화 속 자신을 ‘구경’하게 된다. 하지만 이 사람의 그림은 달랐다. ‘이건 내 얼굴’
이란 생각이 너무 확연하게 받아들여져서 오히려 부끄러울 정도였다.
“정말 잘 그리시네요.”
남자의 등 뒤에서 입까지 벌리며 감탄하고 있는 나를 그가 올려다보았다. 그 뚫어질 것 같
은 시선에 나도 마주 보다가 그만 그대로 뒷걸음질 칠 뻔했다. 정말 입이 벌어질 만큼 미남
이었다. 안경도 벗고 고개를 들고 있어서 모자의 응달도 침범하지 못한 그의 얼굴은. 서양
인치고 드물게 깨끗한 피부였다. 그 얼굴빛은 햇빛을 받지 못해 허옇게 뜬 시체같이 우울
한 그것이 아니었다. 멀리서 봤을 땐 그저 희게만 보였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희면서도 혈
색이 도는 건강하고 결이 고운 피부였다. 얼굴의 전체적인 윤곽은 단단해 보이는 체격과
는 달리 앳된 티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훤칠한 키라던가, 단정하게 자리 잡
은 턱 선에서는 남성의 강인함이 느껴져 신비로운 미소년 보다는 미청년에 가까운 느낌이
었다. 그 파란 두 눈과 이렇게 두 번째로 마주하고 나서야 나는 어째서 처음에 그의 눈을
보고 영하의 심해를 연상시켰는지 알 수 있었다. 그 푸른 빛깔은 바로 나의 청소년기의 우
울한 과거의 색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쪽 모퉁이에 구겨놓았던 기억을 가까스
로 끄집어냈다.
고등학생 시절, 비교적 얌전했던 내가 딱 한 번 가출을 한 적이 있다. 아버지의 폭언 때문
이었다. 학교체제는 나에게 맞지 않는다며, 고등학교를 그만 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
고 싶다고 말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말하셨다. ‘너는 예술을 할 천부적인 재능도 배경도
없어’, ‘너는 안 돼’, 하나하나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그대로 말랑말랑한 심장을 뚫고 들어
왔다. 심장은 납처럼 무거운 가시에 박혀 그대로 가라앉았다. 그날 밤 도망치 듯 찾아간 곳
이 동해의 바다였다. 맑고 검푸른, 빨려 들어갈 것 같던 그 바다. 그래. 이 남자의 눈동자
는 그때 보았던 새벽 바다와 닮아있었다.
애꿎은 기억을 지워버리기 위해 옮긴 나의 시선은 곧은 이마를 살짝 가린 백금발로 향해
있었다. 그 금발 역시 기존의 다른 사람들 것과는 달랐다. 자칫하면 쥐털색의 물 빠진 잿빛
처럼 보이거나 너무 가늘어서 가닥가닥 뭉쳐버리는 것들과는 달리, 꿀 빛깔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달빛에 가까웠고 뒤쪽 머리칼은 잘 정돈되어 어깨에 살짝 닿아있었다. 분홍빛 입
술까지 살짝 벌리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얼굴은 남자인 나도 두근거리게 할 정도로 매력
적이었다.
남루한 옷차림새나 그림 그릴 때 벗어뒀던 바보 같은 뿔테 안경은, 마치 몸 전체에서 뿜어
져 나오는 광채를 일부러 가리기 위한 것처럼 어색해 보였다. 이렇게 타고난 외모를 뭐하
려 감추려는 거지? 제대로만 드러내고 다녀도 여자 관광객들이 줄을 서며 그림을 사려고
할 테고 그럼 힘들게 굳이 이런 일을 할 필요도 없을 텐데 말이야.
딱히 외모에 크게 콤플렉스가 있는 것도 아닌데도 왠지 모를 질투심이 들었다. 나는 잘나
지도 않은 얼굴 가지고도 한 점 부끄럼 없이 하늘을 우러러 보는데, 이 남자는 대체 뭐 때
문에 자신의 빛을 가리려고 애쓰는 걸까. 그 반듯한 얼굴을 마주한 채 나도 모르게 그대로
찡그려 보였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남자도 따라서 찡그린다. 순간 내 얼굴엔 어라? 하
고 놀라움이 떠올랐다.
“푸, 이상한 표정.”
그는 재미있다는 듯 장난어린 웃음소리를 냈다. 내가 남자의 그런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
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그는 무시하듯 고개를 돌려버리더니 한마디를 툭 던진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그렇게 가까이서, 사람 무안하게.”
“…그 쪽이 먼저 저를 쳐다보지 않았습니까?”
“뭐, 별로- 저는 그 쪽을 쳐다보지 않았는데요.”
나는 기가 차서 그의 말을 받아쳤다.
“그럼 올려다 본건 뭐였죠?”
“하늘.”
그의 말투는 예전에 키웠던 고양이를 연상시켰다. 깨끗이 발라진 물고기 뼈를 옆에 두고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우아하게 손을 핥고 있던 그 녀석 말이다. 나는 뻔뻔함의 극
치를 달리고 있는 그 태도에 어이가 없어 잠시 안경알 너머로 째려봐준 뒤 다시 상체를 다
시 들었다. 그런 나를 흘끗 보던 남자는 다시 무심한 듯 팔을 뻗어 그림 위에 정착액 스프
레이를 겹쳐 뿌린다.
“그건 그렇고, 정말 까맣군요.”
“…머리요?”
“…머리도 그렇지만 눈동자도요.”
“동양인들은 대부분 이렇게 진한 흑갈색이에요.”
“너무 까매서 동공이랑 홍채를 구분 못할 정도예요.”
“흑인들도 눈동자는 동양인 이상으로 까맣지 않나요?”
“음…, 뭐라고 말할 순 없지만 그것과는 다른 느낌이에요. 전혀. 뭐랄까…… 신비로움이
서려 있다고나 할까.”
흐음- 그게 신기해서 보고 있었던 건가. 나는 성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양인인 내가
서양인이 말하는 그 동양의 신비로움에 대해서 전혀 이해할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데 이 사람, 바보가 아닐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잘난 말투로 하늘을 보고 있다고 해놓
고 바로 눈 얘기를 하다니 말이다.
“…방금 하늘 보고 있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네. 하늘을 봤어요.”
“그럼 언제 제 눈을 그렇게 관찰한 건데요?”
“전 분명히 봤어요, 당신 눈에 새겨진 사막의 새카만 밤하늘. 정말 아름다워요.”
“…….”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속이 미식거리며 오늘 아침 먹은 바게트에 발랐던 버터냄새가 식
도를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여자도 아닌 남자의 눈을 보고 아무렇지 않게 토 쏠리는
말을 할 수 있다니, 저건 분명 단시간에 개인적으로 익힌 기술 때문이 아니다. 로마시대부
터 전쟁터에서 치즈를 먹던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농도 짙은 핏줄 때문일 것이 분명하
다. 오죽하면 이 나라에선 ‘치즈가 없는 식탁은 눈 하나 없는 미인과 같다’라고 표현할 정
도이겠는가. 나는 그 범상치 않은 느끼함에 역사의 뿌리까지 추적하면서, 이 더운 날씨에
도 굴하지 않고 온몸에 닭살을 세웠다. 그러나 날 이 요상하고도 찝찝한 기분에 휩싸이게
만든 당사자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느직하게 스케치북을 넘겼다.
“그럼 얼른 한 장 더 그리도록 하죠. 다 그리면 제가 빠리에서 맛있게 점심을 먹을 수 있
는 카페를 소개해 드리고 싶네요. 그곳 굴요리가 와인과 먹으면 아주 일품이거든요.”
그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신선한 굴로 만들어진 요리와 깔끔한 화이트와인을 떠올리며 입
맛을 다셨다. 그 인어의 비늘처럼 반짝이는 껍질 위에 얹어진 싱싱한 굴을 떠올리자 기분
이 금세 이완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 독특한 빠리
지앵에게 활에 유용한 여러 가지 정보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
자 나는 군말 없이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다시 간이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불쾌해하더니, 나도 참 단순하구나. 나는 피식하고 자조적인 웃음을 내보냈
다.
그가 연필을 들자 공기의 진동이 다시 바뀌었다. 그는 다시 진중한 태도로 두 번째 그림
을 그리려는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남자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어디선가 많
이 들어본 멜로디였는데. 하지만 그 곡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약
간 급해 보이는 손놀림으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 액정을 보는 순간 그의
표정은 눈앞에 칼날이 번쩍이는 듯 차디차게 돌변했다.
“…잠깐 자리 좀 지켜주세요. 전화 좀 받고 오겠습니다.”
“네….”
그는 그렇게 저음으로 읊조리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골목 안으로 걸어가 이내 그 어둠속
에 삼켜졌다.
*
처음 내게 대했던 태도를 볼 때에도 그는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말을 걸기 전부터 줄곧
불편하게 곁눈질로 나를 살폈고, 아무리 사진을 찍는 것이 싫었다 해도 그런 식으로 협박
을 한다거나 자리를 뜨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방금 휴대폰을 받던 그 태도 역
시 이상하다. 뭔가 뒤로 켕기는 짓을 했다거나 누구로부턴가 쫓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태도였다. 내가 사진 찍는 것을 부탁했을 때, 등골 서늘한 협박을 하며 인상을
구기던 그의 첫인상은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릴 때 보여준 진지한 표정이
라든지 내게 장난을 치며 보인 얄궂은 모습 역시 거짓은 아니었다고 생각되었다. 둘 다 그
의 전부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어느 쪽이 진짜에 더 가까운지 파악하긴 어려웠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그림들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얼떨결에 발견한 사실에 나는 당
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그림들 어디에도 그자의 사인, 즉 서명을 찾을 수 없었던 것
이다. 완성한 날짜조차 없었다. 서명은 그림에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이며, 그것 자체로
도 가치를 가진다. 또한 그것이 온전한 자신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정
도 그림을 그리는 남자가 그런 걸 모를 리 없다. 그걸 고의적으로 쓰지 않는 다는 것은, 극
단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그는 무엇으로부터 그렇게 쫓기고 있는 걸까? 그는 어째서 그림에 자신의 흔적을 아무것
도 남기지 않는 것일까? 나는 점점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한편으론 지나
친 호기심이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런 지나친 관심은 확실히 위험한 것
이었다. 그것도 나이나 직업, 심지어는 결혼여부를 묻는 것조차 굉장한 실례라고 생각할
정도로 사생활엔 철저하게 선을 긋는 프랑스인에게 말이다. 나는 애써 호기심을 털어버리
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잠시 후 남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말없이 제자리에 앉아 연필을 집은 채 잠시 생
각에 잠겨있더니, 곧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사정이 있어서 지금 이곳을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별 일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림은 한 장 그렸으니, 그걸 드리겠습니다.”
“…….”
그는 완성된 그림을 떼어주고는 화구들과 이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준 그림
을 받아든 채로 멀뚱히 내 얼굴과 그를 번갈아 보았다. 이대로 헤어지기엔 뭔가 석연치 않
았다. 이상하게 밀려오는 아쉬움 비슷한 감정은 소심하기 그지없던 나를 도발적으로 만들
었다.
“저, 서명을 빼먹으셨는데요.”
“…….”
“그러고 보니 다른 그림에도 서명이나 날짜가 적혀있지 않네요.”
“……그건,”
“적어도, 이름정돈 알려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아님, 이름이 없는 겁니까?”
“…….”
내 마지막 말에 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충격을 받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마치 정말 이
름이 없는 것을 들킨 사람처럼. 그림까지 그려준 화가에게 이름을 묻는 건 사생활 축에 끼
지도 않는 일인데도, 질문한 내가 오히려 미안할 정도로 그의 표정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
했다. 시선은 불안하게 허공을 더듬었고, 입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굳이 말씀하시기 싫으시다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신… 아까 말씀하신 그 카
페에서 맛있는 굴 요리와 와인으로 점심식사에 초대해주신다면.”
“……아.”
그 남자의 표정이 움찔했다. 사실은 그 말을 내뱉은 나조차도 놀라고 있었다. 수습하려고
충동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 식사를 대접하라고 말하다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실례였다. 나 역시 안 되겠다 싶어 재빨리 수습하려고 입을
연 순간 그가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짐을 모두 챙기고 나는 그와 함께 몽마르트르를 빠져나왔다. 나는 그의 무거운 짐들을 나
누어 들고 넓은 보폭을 좇기에 바빴다. 그는 그렇게 한참이나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가더
니, 동글동글한 디자인의 검은색 엔틱카 앞에 섰다. 그리고 문을 열어 짐을 옮겨 싣기 시작
했다. 나는 멍하니 짐을 넘겨주곤 말했다.
“당신 차인가요?”
“아, 네. 부품 구하기도 어렵고 운전하기도 불편하지만, 엔틱카를 좋아해서요.”
“차가 멋지네요. 정말.”
“고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는 내 칭찬에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엔틱카는 로맨틱
한 외형과 오래된 것들을 사랑하는 프랑스인들의 취향 덕분에 아무나 쉽게 살 수 있는 차
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차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차의 디자인은 꽤 오래되어
보였고 그에 비해 상태는 상당히 좋았다. 내부도 손을 본 듯 시트도 깨끗한 가죽으로 덧대
어져있었다. 엔틱카는 오래될수록 비싸진다. 엔틱카와 미니카는 프랑스인들이 부를 귀족
스럽게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 이정도 차를 가졌다면 이 사람은 거리에서 그림을 팔
아 살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저 낡은 옷과 모자는 모두 위장인 것이라는 것을 다
시 한 번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모자를 깊게 뒤집어쓰고 이상한 뿔테안경을 끼면서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고 애쓰는 남
자. 그러나 가려지지 않는 범상치 않은 외모와 분위기는 그에게 더욱 시선이 가게 만든다.
선인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악인의 기운은 없다. 게다가 선과 악을 넘어서 느껴지는
그 미묘한 무언가는 내 가슴속 깊은 곳을 진동시켰다. 내가 조수석에 앉아 줄곧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남자는 무슨 할 말이 있냐는 듯 눈동자를 마주쳐왔다.
나는 그 순수한 푸른 눈동자에 괜히 당황해서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
그가 소개한 카페 「*쎄 라 비C’est la vie(인생이란 그런 것.)」는 일반 카페보단 고급스
러운 분위기였다. 남자는 익숙하게 노천카페 쪽 테이블로 자리를 이끌었다. 채광이 잘 들
어오는 곳에 위치해 카페주변은 빛으로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였다. 곧 나이가 꽤 들어 보
이는 머리가 벗겨진 웨이터가 그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메뉴를 나누어주었다. 아마 단골인
듯 했다.
“본식은 늘 먹던 방식으로 굴 요리 한 접시와, 오늘의 요리 하나, 와인은 소비뇽 블랑으
로 한 잔. 디저트는 나중에 시키도록 하죠.”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기에 알아서 시키라고 주문했더니 그는 익숙하게 주문했다. 이곳
음식은 질에 비해 양도 많고 값도 싸다며 주요리만으로도 배를 채울 수 있을 거라고 말했
다. 식사를 기다리며 우리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 간결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건 마
치 서로를 탐색하는 것 같았다.
“예전부터 느낀 건데 빠리의 노천카페는 파라솔이 없네요. 오늘처럼 햇빛이 지는 날은 눈
이 부셔서 하얀 식탁을 보는 것조차 힘이 든데.”
“이곳은 햇빛이 귀한 곳이기 때문에 굳이 가릴 필요가 없는 거죠. 아마 오늘은 주말인데
다가 이렇게 날씨도 좋으니 각 공원들은 햇볕을 쬐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을 겁니다.”
요리는 상상했던 것보다 뛰어난 맛이었다. 보통은 전식으로 나오는 굴요리가 접시 한가
득 잘 구워 특별한 레시피로 만든 것 같은 크림치즈를 얹자 훌륭한 메인디쉬가 되었다. 달
콤한 화이트와인으로 목을 축이면서 굴 요리에 대해 칭찬을 하자 그는 몇 마디 덧붙이곤
웃어 보였다. 프랑스인은 못 말릴 정도로 수다스럽다던데 그에 비하면 이 사람은 말이 참
없는 편이구나 생각했다.
우리가 음식을 다 비울 때 즈음 웨이터는 후식을 먹을 거냐고 물었다. 우리는 둘 다 카페
Cafe를 주문했다. 프랑스인들 뿐 아니라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아메리카노 같은 커피를 ‘양
말 빤 물’이라고 할 정도로 우습게 여기며 카페를 즐겨 마신다. 요즘 젊은이들은 묽은 커피
도 잘 마시긴 하지만. 내가 그와 같이 카페를 주문하자,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희석된 커피라고 생각하고 주문하신 건 아니죠?”
“아, 저도 압니다. 카페가 프랑스에선 통상 말하는 에스프레소라는 걸요. 프랑스에 온 이
상 에스프레소를 피해 다닌다는 건, 인도에서 소를 안 보고 다니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행
동이 아닐까 생각되어서요. 사실 나는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마셨던 사약 같은 에스
프레소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긴 하지만 이제부터 도전을 해보려고 합니다.”
그는 내 말에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이곳 카페는 제법 괜찮아요. 그 안 좋은 추억은 아마 싹 날아가 버릴 겁니다.”
작은 커피 잔에 담긴 카페는 그의 말을 현실로 만들었다. 아직 적응할만한 정도는 아니었
지만, 혀끝에 남는 진한 향과 입안에서 가득 퍼지는 구수한 맛이 인상적이었다. 어째서 유
럽인들이 에스프레소를 사랑하는지 이해시키기에 충분한 맛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쓸데
없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유학하는 한국인 학생이 인터넷 카페에 남긴 글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유학생은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땐 카페가 너무 써서 처음엔 못 마
시다가, 나중엔 카페인에 중독이 되어 버려서 시험공부하다 하루에 서너 잔을 마셔서 위염
에 걸리고, 결국 시험도 망쳤다는 이야기를 올려두었다. 처음 마시는 건데 벌써부터 좋아
지려고 하면 어떡하지. 생뚱맞은 불안감에 카페를 향해 고개를 처박은 채 표정을 샐쭉거리
자 남자는 그런 나를 보며 말했다.
“정말이지 아무리 봐도 지겹지 않은 얼굴이네요.”
“…….”
한국인 친구였다면 비꼰다고 생각하며 대놓고 버럭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는 프랑스 인이었다. 나는 그가 놀리는 건지 칭찬인지 가늠할 수 없어 어느 한 쪽으로도 대
응하지 못한 채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행 중이시죠? 언제 빠리를 떠나십니까?”
“아, 사실 여행을 온 게 아니라 공부하러 왔습니다.”
“그렇군요.”
“운 좋게도 바로 *엉사드ENSAD에 편입하게 됐습니다. 2학년으로요. 일주일쯤 뒤에 개강
하는데, 열심히 하지 않으면 졸업할 수 없을 테니 최선을 다해야겠죠.”
“예? 엉사드요? 게다가 편입…?”
특별할 것 없는 내 학교에 대한 소개에, 그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요?”
“아니, 그럼… 저, 실례지만… 지금 나이가……?”
“스물두 살입니다.”
한국나이로는 스물넷이었지만, 생일이 지나지 않았으므로 만으론 아직 스물 둘이었다.
“네에……?”
그의 표정은 놀라움에 더욱더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왜 그러시죠?”
“아뇨…. 나이에 비해서 너무 어려 보여서 놀랐습니다.”
“그렇게 보일지도요. 아무래도 동양인들은 비교적 동안이니까.”
“…그래도 그렇지, 전 중학생정도인줄 알았습니다. 그냥, 키도 아직 덜 자란 것 같고……
일단은 저보다 어려 보여서요.”
나는 방금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에 뒤로 쓰러질 뻔 했다. 꼴레쥬College(중학생)라
니……. 그러고 보니 대학 졸업식 때 가족들과 외식하러 갔을 적에도 식당 아주머니가 어
느 고등학교에서 졸업식 한 거냐고 묻는 걸 듣고 무척이나 당황한 적이 있었지. 이런 외모
때문인지 몰라도, 대학 다닐 때에도 매해마다 들어오는 신입생들이 날 같은 학번으로 착각
했었다. 가뜩이나 한국남성의 평균 신장에 못 미치는 키에 체격까지 왜소한 편이라 더 그
런 것 같다. 그래선지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동안인 것이 내게는 오히려 콤플렉스에 가까웠
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 남자가 동안인 것은 결코 사회생활에 유리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어려 보인다는 둥, 키가 덜 자란 것 같다는 둥의 이야기
를 하면서 내 아픈 곳을 대놓고 쿡쿡 쑤시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의 분위기라는 게
있지 않은가. 아직 뭣도 모르는 애송이 중학생으로 취급하는 것이 괘씸하기까지 했다.
“당신 보다요?”
앞에서도 말했듯, 프랑스에선 나이를 직접 물으면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방금 저 사람은
엄청 실례를 무릅쓰고 나에게 물은 것이다-나는 간접적으로 그 사람이 자신의 나이를 말
하도록 유도했다. 그래, 너는 얼마나 나이가 많아서 날더러 중학생이라고 하는 거냐싶은
심정으로 말이다. 그는 내 질문에 느릿하게 말했다.
“전……열아홉이거든요.”
“…….”
“…….”
“……아, 그렇군요.”
나는 문득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하고 한 템포 늦게 대답했다. 그의 대답을 듣
는 순간 나는 그야말로 할 말을 잃었기 때문이다. 열아홉이라니, 그럼 겨우 우리나라 대학
교 1, 2학년 정도였다. 아까 그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하였을 때 앳된 모습이 남았다고 생각
은 했지만 이정도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확실히 놀라운 발견이었다. 하지만 우리
가 앉아 대화하는 여기 이곳의 이름처럼 말 그대로「C’est la vie」, 인생이란 본래 예상
치 못한 일들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다만 나는 문득 이 대화가 우리의 사생활을 내놓는
첫 물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인은 쉽게 친구를 사귀지 않는다고 한다. 사교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프랑스에서의
우정은 헌신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언제든 무리한 부탁을 하면 들어줄 수 있는 그런 헌
신적인 태도 말이다.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는 무척이나 인색한 데 반해 친구라
여기는 사람에겐 얼마든지 믿고 자신의 비밀스런 부분도 말할 수 있게 된다. 사귈 때에도
천천히 접근하는 편이다. 마치 프랑스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여
우가 어린왕자에게 ‘길들이는 방법’을 설명하는 것처럼, 프랑스에서 친구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보석세공처럼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섬세한 과정인 것이다.
나는 이 남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단지 몇 시간 전에 만났을 뿐이다. 하지만 만난
그 순간부터 나는 이 사람에게 끌렸다. 기묘한 첫 만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의 이
상한 행동이 조금 미심쩍어 보였지만 어쩐지 이 남자는 나를 묘하게 끌어당기는 매력을 가
지고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누군지 알고 싶었
다. 그의 이름이 궁금했다. 그건 평소 친구하자고 먼저 손 내밀지 않는 내가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서로 나이까지 알게 되다니, 재미있군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내심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듯 했다. 그것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내
가 먼저 남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를.
“그럼 이제 인사를 새로 해야 할까요? 저는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기 위해 어제 막 한국에
서 온, 진호 장입니다. 지노라고 불러주세요.”
그는 내가 내민 손을 한참이나 빤히 쳐다봤다.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여전
히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저는 빠리 국립음악대학에 재학 중입니다. ……미쉘 미라쥬Michel Mirage라고 합
니다.”
느리고 어색한 말투였지만 나는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사람을 알게 되고 서로를 받아들이
기 시작하는 게 이렇게 설레는 일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미쉘 미라쥬. 신기루라니 독특
한 성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참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방금 전에 그가 한
말을 되새겨보다가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다.
“제가 잘못들은 건가요? 미대가 아니라 음대요? 그럼 그 그림들은 대체 뭐죠? 초상화
는?”
“단순한 취미입니다.”
단순한 취미라니. 맙소사, 전공하는 사람이 부러워할 정도로 뛰어난 감각을 이 사람은 단
순한 심심풀이로 썩히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가 일순 괴물처럼 보여 입을 떡 벌린 채 쳐다
보았다. 내 표정이 우스웠는지 그는 새어나오는 웃음 입을 가렸다. 그 모습이 무척 매력적
이라고 느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환생은 아닌 거죠? 혹시 물리 실험 도구에도 친숙하진 않습니까?”
“하하, 설마요.”
내 웃기지도 않은 농담에 그는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그 기분 좋은 웃음에 나도 같이 웃
어버렸다.
“어쨌든 알게 되어 반갑습니다. 미쉘.”
“반가워요, 지노.”
주) ENSAD : 국립 장식 미술학교. 프랑스 미술
대학 중 그랑제꼴에 속한다. 그랑제꼴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그랑제꼴은 프랑스 대학
사이에도 최고로 높은 수준의 대학들로, 모두 국립이며 학비도 무료이거나 놀랄 만큼 저렴
하다. 덧붙여 보통 미술전공을 한 학생이 프랑스 유학을 올 경우, 학교 측에선 입학보단 편
입을 권하는 편이라고 한다.
사랑을 처음 알아채는 것보다,
그 사랑의 비단 날개가 처음으로 퍼덕이는 것을 느끼는 것보다,
우리 인생에서 더 거룩한 순간은 없다.
-헨리 워즈워드 롱펠로우 Henry Wadsworth Longfell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