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Le memoire bleu
― 푸른 회상 ―
시간이 흐르면 잊혀 진다고 누가 말하던가요.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손만 뻗으면 그때의 일들을 어루만질 수 있을 것처럼 또렷합니다. 이젠 잊었다고
안심하고 있을 때면, 그의 망령은 어느새 미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와 저를 고통
스럽게 합니다. 그의 얼굴, 따뜻한 체온과 살 내음, 목소리, 그리고 함께 공유했던 감정들
은 이미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체내에 완벽하게 흡수되어버렸습니다. 그것들은 기존의 세
포가 죽더라도 새로 태어난 세포 안에 더욱더 생생하게 침투해 여태껏 제 몸에서 순환하
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한 그 순간 이외의 살아온 제 모든 인생은 거짓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 이전에
도, 이후에도 저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제 모습은 그의 눈동자에 비치는 잔상으로서만 온
전히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 보고 계신 제 모습도 사실은 좀비나 다름없
습니다. 단지 그것과의 결정적인 차이라면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혈액을 빨아들여 살을 썩
히지 않는다는 것 정도겠지요.
선생님, 저는 어쩌면 좋습니까? 그동안 죽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수백, 수천 번입니다. 하
지만 저는 이 악몽 같은 연옥 속에서 마음대로 목숨을 끊을 수조차 없습니다. 이젠 아무것
도 돌이킬 수 없는데, 모든 것이 투명하고 명료하게 끝나버렸는데도 저는 구차한 목숨을
방치해야만 합니다. 왜냐고요? 이미 전 제 목숨조차 그에게 맡겨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
기에 전 그의 허락 없이 죽을 권리마저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견디기가 어려워집니다. 고통은 제 살을 파먹으며
자라 점점 더 제 몸속에서 비대해져만 가고 있습니다. 그 이물감에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들이쉬는 호흡이 원망스럽습니다. 스스로에게 비웃음 당하는 짓은
이제 끝내고 싶습니다. 그 남자를 죽이고서라도 제 온전한 권리를 되찾아 편해지고 싶단
말입니다. 말씀해 주세요, 선생님. 자살이 절대적인 죄악입니까? 이미 영혼은 죽어버린
지 오래인데, 껍데기만 살아남아 이승을 떠돌아다니며 주변 사람을 혼돈케 하는 것도 죄
아닌가요?
마음의 출입문에 나는 써 붙였다. ‘출입금지’라고. 하지만 사랑이 웃으며 와서는 소리쳐
말했다. “제가 들어가지 못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답니다.”
-허버트 쉽맨 Herbert Ship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