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는 빼야지, 너 그간 연습한 건 안됐지만, 승무는 너 대신 석주 넣고, 깁스 감추는 건 설정을 조금 수정하면 되니까, 그거면 되고, 문제는 너다. 올라갈 수 있겠냐.”
당연한 소릴 묻는 학정에게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희완이었다.
“네, 할 수 있습니다.”
“너는 할 수 있겠지만,”
버럭 또 무어라 하려 하던 우진이 결국 인상을 쓰며 말을 끊는다.
이미 다치고 온 애한테 뭐라고 해 봐야 어쩔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그냥 입을 닫는다. 면목이 없어 입을 꾹 닫은 채로 고개를 숙인 희완이 다시 죄송하다 한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됐다, 부러진 거니 무리만 안 하면 금방 나을 거 아니야. 누군 왕년에 안 다쳐 봤냐, 그럴 수 있어. 니 잘못도 아니고, 그래서 범인은 어떻게 됐다는 거냐?”
결국 희완을 달래주는 건 경성의 몫이었다. 굳이 안 달래줘도 될 거를 달래준다는 눈초리로 경성을 보던 우진이 날카롭게 선 눈으로 깁스를 한 희완의 팔을 한번 훑어보고는 또 짜증스러운 얼굴을 한다. 어제 늦게까지 같이 있던 게 본인이라 그렇게 다친 걸 보는 게 또 힘든 것이리라. 그걸 본 희완이 뭐라 하기 전에 학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됐다, 도우진. 그 새끼가 잘못한 거지, 너나, 희완이 무슨 잘못이야. 쓸데없는 생각 말고 가서 연습이나 더 해. 연희완 너도.”
“네, 단장님.”
겨우 사무실을 빠져나온 희완이 성큼성큼 연습실을 가로질러 나가는 우진의 뒤를 빠르게 쫓아갔다. 깨끗하게 부러진 거라 크게 아프거나 하진 않았는데 거추장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가는 중에 예전에 남자가 2주도 못 돼서 풀어버린 걸 생각한 희완이 난간에 선 우진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형.”
대꾸도 않는 우진이 한참 밖을 향해 서 있다 겨우 희완에게 옆자리를 내주었다.
미안하다는 말도, 괜찮다는 말도, 이 상황에서는 뭐 하나 어울리는 말이 없어 그냥 묵묵히 곁에 선 희완의 머리칼이 불어오는 바람결에 나부꼈다. 이 연극을 준비한다고 자르지 않고 길러 온 것이었다. 그런데 별, 또 울컥 짜증이 치솟는지 얼굴을 찌푸리던 우진이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까먹는다. 그리고 곧 희완에게도 하나 까서 주었다. 오독오독, 사탕 씹는 소리가 다 큰 사내 녀석 둘 사이에서 울렸다.
희완이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걸 본 남자는 딱히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희완이 입을 열었다.
“이럴 것까지는,”
“왜, 다음엔 뒤통수 깨진 채 병원 영안실에서 얼굴 보여줄 셈입니까."
“…….”
무시무시한 비유에 그만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만 희완이었다.
그게 그렇게까지 큰일이었나, 하다 그만 입술을 깨문다.
하긴, 그렇게 저항을 하지 않았었다면 그 몽둥이가.
“…….”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희완의 눈으로 남자의 찌푸려진 얼굴이 스쳤다.
“어.”
또 이상하다 생각을 하는 희완이 그만 부들부들 떨리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의식하지 못한 채 떨리는 거였다. 때문에 놀라 희완이 그 떨림을 멈춰보려 하는데 그건 다른 손으로 전염될 뿐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괜찮았는데, 갑자기 남자의 말에 지난밤의 일을 떠올리고 또 저를 향해 휘둘러진 각목을 떠올린 순간 머리가 뜨거워지면서 손이 이렇게 떨려 오는 것이다. 놀라서 크게 뜬 눈으로 점점 더 심해지는 제 손의 떨림을 보고 있던 희완이 뒷걸음질을 치기도 전에 먼저 다가온 남자가 손을 뻗었다. 잡힌 팔뚝이 진정되는가 싶더니 도로 번져간다.
남자에게서 낮게 욕설이 뱉어졌다.
그리곤 자신의 반응에 제가 더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희완을 당겨 안았다.
“놀라서 그런 겁니다.”
놀라서.
남자의 말이 더디게 희완의 뇌리 속에 내려앉는다.
그렇지만 어제는 괜찮았는데, 오늘 아침에도, 또 학정에서도.
더디게 기억을 더듬어 올리는 희완이 시선을 들려는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가라앉았다.
“말이 헛나왔어. 그깟 걸로 사람 안 죽어.”
“…….”
아, 그제야 영안실 운운했던 그의 말을 겨우 떠올리게 된 희완이었다.
그래도 남자가 저에게 사과하는 이유는 찾지 못한 희완이 아직도 떨리는 제 손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 괜찮습니다.”
“압니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래도 전보다는 조금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 음성가득 눌러져 있던 서늘함이나 사나움 같은 것들이 많이 누그러뜨려져 있었다.
“괜찮아도 사람은 놀라면 가끔 이럽니다. 어제는 놀랄 만했고, 넌 충격이 좀 더디게 온 거야.”
“…….”
남자의 차분한 설명에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이는 희완이 다시 그 품에 묻혔다. 바르르 떨려 가는 게 나아지는가 싶다가도 또 어떻게 보면 나아지는 게 없어 보이기도 해 희완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은데, 겨우 팔 하나 부러진 게 무슨 대수라고. 그냥, 별일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가, 답답하기만 했다.
넓은 침실은 검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침대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곤히 잠들어 있는 희완의 흰 뺨이 어둠 속에서도 파리하게 비추어졌다. 워낙 흰 피부이긴 하였지만 놀라거나, 긴장하거나, 했을 때는 유독 더 창백하다 못해 파리하게 질리는 희완은 가느스름한 숨을 내려놓으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이제 그의 숨소리, 높낮이 하나만으로도 곤히 잠들어 있는지 선잠이 들어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승도는 외려 잠에 들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자기가 놀란 줄도 모르던 애한테 쓸데없는 소릴 지껄인 주둥이를 찍어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먼 이야기가 아님에도, 업자들에게 육시를 당했던 일들을 떠올리게 할 작은 계기만 생겨도 공황장애를 일으키며 구석으로 숨어들어 가던 연희완을, 찌그러진 차체에서 저에게로만 달려드는 것 같은 야구배트나 벽돌들을 크게 찢어진 눈으로 바라보며 극한의 공포에 질려 얼어붙어 있던 연희완을, 그리 생생하게 기억하는 주제에. 이제 조금 살 만해진 것처럼 나돌아 다니는 연희완이 정말 나은 거라고 생각해서 제 성질만 챙겼던 게 짜증스럽게 후회되었다.
하필이면 각목을.
푸줏간 돼지처럼 매달려 육시를 당할 때 그리 그를 후들겨 팼던 각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