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기사부터 낯 뜨거운 제목에 결국 클릭도 못 해 보고 익스플로러 창을 끄는 희완이 등 뒤에 다가온 남자의 키스에 입을 내주었다.
“어린애는 취미가 없다더니.”
“네, 맞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이쪽에 더 취미가 있거든요.”
하며 슬쩍 남자의 다리 사이에 손을 대고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는 희완의 귓불이 뜨거워져 있었다. 그걸 보던 승도가 힐긋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약속 시간이 촉박하기는 하였으나 한 번 빼는 것 정도는 괜찮은 시간이었다. 게다가 희완의 오럴솜씨는 그동안 일취월장해 요즘은 혀 놀리는 기술만으로도 능히 승도를 싸게 만들었다.
“어디 그 취미 생활 얼마나 만끽하는지 한번 봅시다.”
하는 승도가 희완의 팔뚝을 끌어다 소파에 앉히며 바지 지퍼를 내렸다.
“으음.”
남자의 입에서 사정을 한 희완이 바륵바륵 아랫배를 떨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붕대를 벗겨 놓은 상처에 땀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걸 본 승도가 구급상자를 가져와 상처를 치료해주며 한마디 했다. 액션 배우 하면 이름 날리겠습니다. 그다운 언사에 멋쩍은 얼굴로 이마만 긁적이던 희완이 남자의 턱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뭐, 잘 넘어가 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오빠 죄송해요.]
문자를 확인한 희완은 그제야 확신했다.
음, 확실히 얘가 푼 거 맞구나. 혹은, 일부러 그렇게 요란하게 저를 만나러 왔다거나. 스캔들이야 크게 문제 될 거 없는데, 주민이 팬들이라는 애들이 학정을 쫓아와 소동을 피우는 게 문제였다. 그래도 오는 족족 단원들이 막아서 큰 소란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도 없는 일이고.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소수의 안티팬은 더 극성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오죽하면 경성이 출퇴근길 조심하라 하겠나.
마지막 리허설이 코앞이었다.
그간 몇 번이나 합을 맞췄는데도 긴장이 되어서 학정에서의 마지막 연습 중에 버벅거리던 희완이 호되게 혼났다. 정신 딴 데 팔고 다닐 거냐고, 아주 선후배 앞에서 대차게 혼나는데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희완은 씩씩했다.
그걸 그래도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을 내고서야 해산을 시킨 학정이 사탕 하나 휙 하니 던져주고 극단을 빠져나갔다. 우진이 와서는 희완의 이마를 툭 민다.
“거기가 그렇게 버벅거리냐.”
“네, 잘 안 외워집니다. 발음도 어렵고, 여기가 갑자기 확 치고 나가는 부분이라 타이밍 잡기도 어렵습니다.”
“음, 나랑 한번 맞춰보고 들어가자. 시간 되지?”
“네, 그럼요.”
단원들이 죄 빠져나가고 우진과 단둘이 남은 희완이 곧 연습을 다시 시작했다.
극은 한시간 반짜리였고, 등장인물들이 번갈아 가면서 한 씬을 책임지는 형식이었다. 중간중간 교차 씬이 있는데 희완이 막히는 부분이 바로 그 씬이었다. 우진과 부딪치며 갈등하는 씬으로 내내 속에 가득 쌓인 걸 참기만 하던 희완이 최초로 속을 드러내는 장면인데, 그게 그렇게 잘되지 않는 것이었다. 몇 번에 걸쳐서 그 부분을 맞춰보고 잠깐 쉬었다가 또 맞춰보고, 그러니 새벽2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우진이야 가까운 곳에 거처를 마련했으니 느긋이 가면 되지만 희완은 집이 멀어서 이 시간에 퇴근하면 항상 택시를 이용해야 했다. 이제 와 돈이 궁한 것도 아니니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지만, 아무리 연습 때문이라도 이렇게 귀가가 늦어지면 저도 모르게 남자의 눈치를 보게 된다는 것이었다.
날이 많이 추워져 각자 옷을 따뜻하게 싸매 입고 학정을 나와 골목길을 빙 돌았다. 우진이 먼저 올라가는 걸 보고 희완도 택시 정류장 쪽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타다다닥 빨라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시커먼 것이 달려들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는 희완에게로 몽둥이가 휘둘러졌고 빠각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놀라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상대방의 배를 발로 차고 다시 몽둥이를 휘두르려는 상대방의 팔을 필사적으로 잡고 덤비는데 우둑, 맞은 팔에서 심각한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이를 악물면서 상대방하고 몸싸움을 하는데 저쪽 골목길 바깥에서부터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좁은 골목길에 꽉 닫혀 있던 창문들이 하나둘씩 열리며 거리가 밝혀졌다. 만신창이가 된 희완이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던 건 뒤늦게 연락을 받고 뛰어온 경찰에 의해서였다. 그것도 조사한다고 다친 희완을 병원에도 안 들르고 곧장 경찰서로 데려가는 바람에 나중에 치료받을 때 더 고생을 해야 했다.
현행범으로 잡혔던 범인은 주민의 극성팬으로 밝혀졌으나 전과가 없고 또 누가 죽은 것도 아니라 훈방 조치로 처리됐다. 피해자임에도 한참 경찰서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희완은 보호자를 부르라는 소리에 잠시 갈등을 하다 겨우 남자의 이름을 꺼내었다. 어차피 알게 될 거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어휴. 긴 한숨을 내쉬는 희완의 어깨가 푹 꺼졌다.
“피해자가 합의를 안 해줬는데 누구 마음대로 훈방 조치라는 겁니까. 담당 검사가 누굽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까무룩 잠이 들어 있었던 희완이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경찰과 이야기 중에 있었다. 무어라 무어라 대화 내용이 들리고 경찰이 같은 말을 반복하자 더 말을 않고 입을 꾹 다무는 남자가 어디론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평상복을 입은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관할 담당 검사라는데 핼쑥하게 질린 얼굴이 저보다 더 환자 같다 생각하는 희완이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가 희완의 팔뚝을 잡았는데 몽둥이로 맞은 곳이라 통증이 상당했던 것이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이 험악해지는 걸 본 희완이 그만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사람이 다친 걸 알고도 병원에 보내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자는 불같이 화를 냈다. 희완에게 낸 것이 아니라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때 병실 밖에서 누군가와 통화하는 내용을 들은 것이다. 처치실에 앉아 부러진 팔을 치료받는 내내 하얗게 질린 얼굴을 손바닥으로 훑고 있던 희완의 앞으로 남자가 다가왔다.
화가 나 있다는 건 그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처치가 끝날 때까지 그 앞에 서서 내내 희완을 쏘아보고 있던 남자가 습관처럼 팔뚝을 잡아 오려다가 관두고 먼저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그걸 보던 희완도 목덜미를 문지르며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남자가 샤워를 하고 나오는 동안 소파에 앉아 내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희완이 일단 학정과 우진 그리고 경성에게 연락을 하려다가 시간이 너무 늦었지 싶어 망설이는 와중에 욕실 문이 열렸다. 검게 굳어 있는 남자의 얼굴이 시선에 들었다. 멀거니 앉았던 희완이 귓불을 문지르다 겨우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해도 붙잡아 오는 시선이나 목소리가 없다. 화가 나긴 했는데 저한테 아무 말도 안 하니 외려 더 불안해진 희완이 욕실 안에서 힐긋 문밖을 훔쳐보다 옷을 벗었다.
먼저 하의를 벗고 상의를 벗으려던 희완이 깁스를 맨 붕대를 풀어서 웃옷을 끌어 올렸다. 왼팔을 빼고 그다음 머리를 빼도 마지막으로 깁스를 한 오른팔 까지 빼니 어느덧 남자가 문간에 와 있었다. 머쓱해진 얼굴로 제 아래를 가리고 시선을 내리는데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가 희완을 끌어다 욕조에 앉혔다. 그리고 쏴아- 물소리가 울린다. 깁스한 팔을 내내 올리고 있는 동안 샤워볼을 당겨 온 남자가 희완을 죄다 씻겨 주었다. 올린 팔이 아파서 슬쩍 내리는 동안 아래를 씻겨 주었는데 왜인지 민망하고 미안해져 괜찮다고 거절하려다가도 그냥 꾹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만다. 도무지 어떻게 말을 풀어야 할지도 모르겠었다.
아침 일찍 극단에 나가니 벌써 소식을 들은 단원들이 우르르 희완에게 몰려왔다. 무슨 일이시냐고, 아침부터 경찰에 검찰에 난리도 아니었다고, 큰일이셨냐고, 물어오는 후배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간단히 설명을 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사무실에 들어갔는데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학정과 경성은 의외로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다만 우진이 벌컥 화를 냈는데 주민인지 우민인지 아주 가만 안 두겠다고 이를 바득바득 가는 걸 희완은 감히 말리지도 못했다. 순간적으로 이게 주민의 잘못만은 또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면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 붓는 격일 것 같아 아무 말도 못 했다.
우진이 한바탕 퍼붓고 난 후 학정이 입을 열었다.
“언제 푼다냐?”
“네. 이게 부러진 거라 3, 4주면 된다고 합니다.”
“당장 다음 주가 공연인데 부러진 팔로 뭘 어쩌겠다고.”
“괜찮아, 깁스정도는, 그런데, 너 승무는 출수 있겠냐.”
“저 팔을 해가지고 승무를 어떻게 춥니까!”
희완을 가운데 두고 설전을 벌이던 셋이 어느 한 순간 입을 꽉 닫았다. 눈앞의 희완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하얗게 질려 있는 게 눈에 들었기 때문이다.
“죄, 죄송합니다.”
손끝으로 턱 밑을 누르다가 일어서서 꾸벅 사과를 하는 희완을 보던 우진이 팍 인상을 쓴다. 그리고 경성은 한숨을 쉬었고 학정은 별말이 없었다. 그리곤 한참 무슨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곧 다시 말을 꺼낸다.
“이미 부러진 팔 다시 붙일 거 아니면 별수 없다.”
“뭘 어쩌려고 그럽니까, 부러진 팔 가지고 무대 오르면 몸 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