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118화 (118/123)

“해가 비쳐야 하는 데 저기.”

그녀가 가리킨 하늘을 올려다보니 좀 전까지만 해도 쨍쨍했던 해를 흰 구름이 가득 뒤덮고 있었다. 신기한 장면이긴 했으나 당장 촬영에 해가 필요한데 이러니 속을 썩이는 애물단지로 전락한다.

“어, 시간이 좀 걸리겠는데요.”

“네, 그래서 다들 하늘만 보느라고, 정신이 없어요.”

이 씬을 찍어야 할 주민도 언제 해가 나올지 모르니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밥은 먹었어요?”

“다이어트 중이라, 정말 배고플 때 한 끼만 먹어요.”

“아,”

주머니에 든 초콜릿을 만지작거리던 희완이 잠시 갈등하다 결국 그걸 주민에게 내밀었다.

“들어요, 직접 만든 거라 아주 달지도 않고, 맛이 좋을 겁니다."

“우와, 고마워요, 희완 오빠.”

생긋 웃는 주민이 포장지를 얼른 까서 입에 쏘옥 넣는다. 다이어트 중이라기에 손도 안 댈 줄 알았더니, 예상보다 훨씬 더 귀엽고 솔직한 데가 있는 아가씨였다.

“아, 저 어제 매니저 언니한테 허락받고 오빠한테 갔었는데, 안 계시더라구요. 연기 연습 같이하자 했잖아요. 어디 갔었어요? 냇가에도 없던데?”

냇가에 까지 왔었다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낯빛을 희미하게 굳히던 희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시간에 냇가까지 혼자 갔었어요?”

“뭐 어때요, 다 촬영팀인데. 그보다, 어제 어디 계셨었냐구요.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기다리다 도로 왔는데.”

“아.”

순간적으로 말을 뱉지 못하는 희완은 어제 제가 소리를 높였던가, 안 높였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다, 어린 아가씨 앞에다 두고 엄한 생각 한다는 자각에 얼른 기억을 지웠다.

“미안해요, 어제 잠이 안 와서 혼자 산책 다녀왔어요.”

“나랑 같이 가지! 저 불면증 있어서 잠 잘 못자거든요.”

“아, 그랬어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대신 이따가 촬영 끝나고 같이 연습한 다음에 같이 산책 가요. 매니저 언니는 영 심심한지 이따가 읍내 놀러 간다더라구요.”

매니저라는 사람이 자기 배우 두고 그래도 되나 하는 의구심이 잠시 스쳤지만 희완은 어차피 자신과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라 그냥 그러려니 했다.

사색이 되어 달려온 경성과는 달리 주민의 매니저는 의사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시큰둥했다. 큰 흉터가 남지는 않을 거라는 말에만, 아- 다행이네요. 반색을 하고는 곧 걸려 오는 전화를 받으며 병실 밖으로 나갔다. 또각또각, 그 구둣발 소릴 듣던 경성이 질린다는 얼굴을 한다. 마침 경성도 근처에서 촬영이 있어 내려오는 길에 희완을 내려다 주었고, 올라가는 길에도 희완을 태워 가려던 차였다. 그래도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와 놓고서도, 매니저 반응이 저러니 주민이 눈치가 보여 희완에게 평소처럼 호들갑도 못 떠는 기색이었다.

“촬영 중이신데 미안해요, 형.”

“아니야, 안 그래도 비가 안 와서 대기 중이었어. 올 것 같지도 않고, 촌구석이라 살수차 대여도 힘들고, 이래저래 오늘 촬영 안 될 거였거든.”

옆 침대에 시무룩하게 앉은 주민이 신경 쓰이는지 일부러 길게 답을 하는 경성이 의자를 끌어다 털썩 앉으며 그나저나, 하고 운을 떼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아, 그게요.”

힐긋 수민을 보던 희완이 별거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연예가 단신 뉴스로 짤막하게 소식이 다뤄진 걸 들을 수 있었다. 극성팬이 단막극 촬영장에 있던 여아이돌을 급습했다가 근처에 있던 스태프에 의해 현행범으로 잡혔다는 소식이었다. 주민의 이야기였다. 가끔씩 대화 중에 나오던 극성팬이 정말 극성팬이 아니라 스토커에 가깝다는 걸 주민을 통해 알게 되니 조금 섬뜩해졌다. 그런데 더 씁쓸했던 건 걸그룹 중에서도 인지도가 낮은 멤버라 사람들이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하물며는 그 매니저조차도 그러게 왜 혼자 다녔어! 하고 성질만 내고 걱정 따위 하나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만일 그 자리에 희완이 없었다면 정말 주민은 얼굴에 큰 흉이 생겨 가수 생활을 접어야 했을 지도 모르는데, 매니저는 성가시다는 태도로 주민을 대하며 소속사에 보고하기 바빴었다. 희완 덕분에 살짝 스치기는 했어도 턱에 작은 흉이 남은 주민을 보니 괜히 우진이 형 생각이 나기도 해서 병실에 있는 동안 몇 마디 말을 붙여줬더니 또 금세 생글생글 웃으며 답을 해 온다. 고맙다는데, 그 눈에 맺힌 눈물이 괜히 서러워 보여서 희완은 일부러 모른 척해주었다.

물론 희완은 올라오는 길에 경성에게 등짝을 맞아가며 호되게 혼나야 했지만 그래도 여자애 얼굴에 흉 남는 것보다는 제 팔뚝에 흉 생기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는 대꾸엔 경성도 별말이 없었다. 사실 희완도 별다른 정의감이 있어 그런게 아니라 우연히 그 자리에 있다가 말려든 것에 불과했으니 잘못했다고도 할 수 없었다.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는데 그 소란에 크게 다친 줄 알고 놀란 스태프가 비상연락망으로 적어 놓은 경성의 핸드폰에 전화를 하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된 거였다. 상처가 깊지는 않았으나 아주 얕은 것도 아니어서, 흘깃 제 오른팔을 내려다본 희완이 자연스레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화낼 게 분명했는데, 얼마다 화를 낼지는 잘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의외로 남자는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인상을 찌푸린 채 희완의 팔뚝을 잡아 상처를 살폈을 뿐이었다. 대신 복병은 학정이었다. 고새 경성이 동네방네 소문을 낸 덕에 우진에게도 혼나고, 학정에게도 혼나고, 필영에게도 혼나고, 후배 동기들에게는 면박 아닌 면박을 다 들어 먹어야 했다. 나 홀로 영웅 짓 하다가 골로 가는 거 모르느냐고,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너 아이돌 팬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 등등 잔소리를 하도 들어서 녹초가 된 희완은 그 밤에 또 남자에게 몸으로 혼났다. 두 번 정도 사정을 하고, 남자도 두 번 정도 사정을 하고 파김치가 된 몸으로 축 늘어져 있었는데 잠결에 제 팔뚝에 감긴 붕대를 갈아 주는 손길을 느끼고 죄송하다고 했다. 돌아온 답은 입맞춤이었다.

고맙다고 인사 온 주민의 뒤로 우르르 화사한 여아이돌이 모이니 희완은 순식간에 애물단지에서 영웅으로 신세가 뒤바뀌어 버렸다. 혼자 떨어져 나와 시무룩해 보이던 것과는 달리 그룹 멤버들과는 사이가 좋은지 그 쓸쓸해 보이던 모습이 함께 있으니 간데없었다.

바쁘다는 멤버들을 먼저 보내고 맛있는 걸 사주겠다는 주민과 근처 레스토랑에 가서 같이 밥을 먹는데 보는 눈들이 대단해서 희완은 얼마 먹지도 못하고 주민이 살갑게 늘어놓는 이야기에 맞장구만 치다가 레스토랑을 나왔다. 그러고 배가 고파서 석주경과 소줏집 가서 국밥에 파김치전을 뚝딱하고 오후 연습에 참여했다.

희완과 주민이 마주 보면서 웃고 있는 사진이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든 건 다음 날이었다.

기사 타이틀 참.

[정의의 사도 요정을 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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