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했습니까.”
“네.”
“왜.”
남자의 시선이 유두에서 입술로 옮겨졌다. 이것이 남자가 원하면 스스럼없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때때로 스스로 원하여 겹쳐지는 것이기도 했고, 뜨겁게 숨을 뱉으며 애원하여 매달리는 것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기 싫습니다.”
“뭘 말입니까.”
“이 몸이요.”
“왜?”
“너무 민감한 몸이라서요.”
“그게 부끄럽습니까.”
“곤란합니다.”
“뭐가 곤란합니까.”
입술에서 콧등을 타고 올라가는 시선이 담아 낸 것은 검은 눈동자였다. 긴 속눈썹으로 드리워져 있어 고즈넉하면서도 나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눈이었다. 때때로 열기를 품으며 습하게 젖어 들어가기도 하는 그 눈이 남자를 가만 응시하고 있었다.
“쉽게 뜨거워집니다.”
“아무 때나 그럽니까.”
“늘 떠오르니까요.”
눅눅해진 수건이 희완의 손에서 남자의 손으로 건너갔다. 그걸 바닥에 던지는 승도가 양손을 테이블에 받치며 가운데에 든 희완을 내려다보았다. 승도에 의해 민감해진 몸은, 승도를 떠올릴 때만 뜨거워지곤 했는데, 거의 매 순간 승도를 떠올리게 된다는 희완의 고백은 지나치게 솔직한 것이었다.
“가끔 사람 미치게 하는 거 압니까.”
흰 얼굴로 스며드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저는 매번 제정신이 아닌데요.”
짐짓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해오는 희완의 입술로 남자의 혀가 닿았다.
곧 남자의 허벅지로 올라타는 희완의 하얀 몸뚱이가 그 몸에 빈틈없이 감겨지며 소파 위로 푹 꺼져들었다. 이윽고 짙게 피어오르는 건 축축한 열기였다.
연습실 창틀에 기대어 앉아 바깥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우진을 발견한 건 빛이 깃드는 오월이었다. 부는 바람에 흩어지던 꽃잎이 내려앉은 머리칼을 털며 안으로 들어서던 희완의 걸음이 멈추었다. 삭풍의 겨울을 지나쳐 온몸으로 봄을 맞고 있는 우진에게서 치열한 평온이 느껴졌다. 다녀오겠다던 그는 그곳에 있었다.
학정의 이야기는 새에 관한 이야기였다.
가장 낮은 새, 가장 높은 새, 그리고 가장 더러운 새.
이야기의 흐름은 평면적이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의 대사는 굉장히 입체적이고 사실적이어서 보는 이의 심상을 깊이 파고 들어가 묵직한 흔적을 남겼다.
새에는 학정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극단 학정이 있었다, 친구 경성이 있었고, 아픈 손가락 우진이 있었으며 또 아픈 손가락 희완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때때로 낮은 새가 되기도 하고 높은 새가 되기도 하고 또 가장 더러운 새가 되기도 했다. 오욕과 실패와 희망이 공존하는 새의 날개짓이 무대 위를 날 것이었다.
낮은 새와 높은 새와 더러운 새 중 더러운 새를 보았던 우진은 그 안에 투영된 자신의 과거와 실패한 욕망에 계류되어 스스로의 오물 덩어리를 뱉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드리워진 한과 오욕은 우진의 것이었다. 학정이 그러했고 희완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 역시 새를 통해 자신을 투영한 것이다.
털어내야 할 것들이었다.
새는 날아오를 때 모든 시름을 한껏 털고 날아오른다.
그 연약한 날개짓에는 그런 힘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소리가 점점 커짐에 따라 그것은 이제 그의 육신을 가득 채우고 솔바람 소리를 따라 눈 아래 들판까지 멀리멀리로 번져 나갔다. 그 소리에 감응을 하듯 들판이 서서히 가동을 시작했다. 빈 들판에 꿈속처럼 아슴아슴 사람의 모습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여기저기 낭자한 상사 뒤에 가락이 번져 오르고 있었다.
그는 이제 그 자신이 소리가 되어 만 리 산하를 훨훨 날았다.]
***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빗물로 인해 한적했던 노천카페가 복작복작 사람들로 붐벼대었다. 그 대열에 합류하지 않고 커피나 음료 따위를 시키는 사람들로 혼잡한 실내에서 떨어져 나와 빗물이 들이치는 노천에 서 있던 희완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데리러 올 시간이었는데 아직이다.
흐음.
입술을 꾹 누르며 팔짱을 끼는 희완의 고개가 숙여졌다. 발치로 들이치는 빗물이 까만 운동화를 물들여 갔다. 여름이 가까워져 오면서 비가 잦아지고 있었다. 빗소리 좋아하는 배우들이야 운치 있다 좋아하며 빗물 소리 듣고 있다지만 이렇게 오며가며 들이치는 비가 또 마냥 좋지만은 않기도 하다. 안 그래도 복잡한 곳 차까지 끌고 올 그가 걱정되기도 했다.
시선을 드니 막 노천카페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검은 세단이 눈에 띈다.
어서 타라는 듯 안에서부터 열리는 조수석 문을 얼른 잡아 올라타는 동안 후두둑 떨어지는 빗물이 희완의 머리칼을 죄다 적셨다.
“많이 기다렸습니까.”
“아닙니다. 빗소리 들어서 좋았습니다.”
오늘 길에 사고현장을 지나치는 바람에 늦어졌다 하는 이가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춰 선 동안 상체를 기울여 희완과 입을 맞춰 왔다. 자연스레 응하는 희완의 머리칼에 떨어진 빗방울이 투둑 어깨 위로 떨어졌다. 그걸 보고 닦아내어 주는 승도가 다시 브레이크를 놓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결과는 매우 양호합니다. 영양 상태도 좋고, 건강 상태도 좋고, 모든 내장 기관 기능, 즉 오장육부 건강하고, 전에 빈혈 진단 나온 게 있었는데 수치도 좋습니다. 악성 아니니까 걱정 마시고, 항문 기능이나 성 기능도 괜찮습니다. 즐거운 성생활을 영유하시는 건 환영할 만하지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좋지 않은 법이니까요. 또, 위생을 위해 삽입섹스를 할 때는 관장하는 게 좋긴 하지만, 이 역시 관장이 몸에 좋은 것도 아니고, 애널섹스가 몸에 좋은 것도 아니니 적당히 걸러 가면서 하시는 게 환자 분 건강에 도움이 될 겁니다. 에, 또-”
윤 박사 대신 진료실을 차지하고 앉은 의사는 마치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저 긴 내용을 희완이 미처 앉기도 전에 줄줄 읊어대었다. 듣고 있던 희완의 얼굴이 뜨끈해졌고, 그 옆에 앉아 등을 기대고 있던 승도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래서, 해도 된다는 겁니까,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