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번에 내가 작업을 하는데, 나는 딱 연희완 씨가 같이 작업,
그린의 말이 끊기고 잠시 뒤 강영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실례했어요, 희완 씨. 이래서 영업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아, 네. 영업 실력이 아니더라도, 누드는 무리겠는데요.”
-전신 누드 아니고 세미 누드에요. 사실상 뒷모습만 나간다고 생각하시면 되고요. 영상 아닌 광고 화보로만 나갈거고요. 원한다면 스태프 없이 그린만 넣어줄 수 있어요. 아, 이런- 그린만 넣는 게 더 위험할까요?
이런 작업은 신중히 접근을 해야 하는 데 다짜고짜 본론부터 들이밀고 들어간 그린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다는 뉘앙스를 팍팍 풍기는 강영희가 간략하게 팩트와 조건제시를 먼저 했다.
-저 웬수 때문에 오늘 영업 힘들겠네요. 얼굴 보고 얘기하는 건 어때요? 김그린 어린이가 선물 줄 것도 있다는데
“직접 얼굴 보고 설득하셔도 누드는 어렵습니다.”
-네,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어요. 그런 데다 저 어린이가 코까지 빠뜨리니 의욕까지 상실 중이라 오셔도 영업엔 그리 열성적이지 않을 것 같은데, 픽업 갈까요?
거절의 말은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고 건네는 화법은 여전해서 어쩐지 기시감까지 느끼게 된 희완이 작게 웃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두 시였다.
“연습 마치면 오후 일곱 십니다.”
-역시 성실하시네요. 모시러 갈 테니까 거기서 딱 꼼짝 말고 계세요.
“아닙니다. 위치 아니까 찾아가겠습니다. 혹시 시간이 너무 늦습니까?
-사실 그 시간에는 대중교통이 제일 빠르긴 하죠.
“네 그런 여기서 일곱 시 반쯤 출발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요. 우린 오늘도 밤샘 작업일 것 같으니까요.
불쌍히 여겨주십사 부러 앓는 소리를 내는 강영희의 넉살을 마지막으로 통화를 마쳤다. 난간 위에서 담배 냄새가 나기에 올려다보니 오랜만에 극단으로 출근한 필영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담배를 태우고 나온 승도가 욕조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소파에 걸터앉았다. 테이블에 무어가 가득 널어져 있기에 보았더니 예의 극본이나 대본, 책, 노트, 그리고 연필 등이다. 그중에서 못 보던 것이 있기에 건져 들어 보는 승도였다. 꽤 빳빳한 재질로 커버가 되어 있는 것은 사진 앨범으로 개인적으로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은 듯한 인상이었다. 클립을 빼어 커버를 열어 보니 왼쪽 공간에 필름이 끼워져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필름 현상은 드물기 때문에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필름을 꺼내어서 불빛에 비춰 본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피사체였다.
최근은 아닌 것 같고.
언젯적 사진을 받아 온 건가 하여, 다음 장을 넘기는 승도의 시선으로 흥미가 이는 듯하였다. 그러나 곧 그의 눈빛은 한 장 한 장 앨범을 넘길 때마다 진중해지기 시작했다.
2년 전의 희완이 그 안에 있었다. 아니, 약 3년 전의 연희완이.
마지막 한 장까지 모조리 앨범에 담긴 희완의 사진을 본 승도가 다시 첫 장으로 되돌아갔다. 흥미로운 사진이었다. 아니, 흥미로운 피사체였다. 다시 첫 장을 본다.
사진 속의 희완은 폐쇄된 공사 현장을 배경으로 까만 슈트를 답답하도록 딱 맞게 끼워 입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두드러지는 새하얀 피부와 이마 위로 몇 가닥 흩트려 놓은 머리칼은 제법 유혹적이었지만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구석이 있다.
다음 장의 연희완은 슈트 재킷 단추를 열어 놓고 물끄러미 렌즈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른해 보이는 눈매와 짙은 색의 선홍빛 입술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은 듯도 했다. 무척 익숙한 그런 분위기였다. 또한 이질적이기도 한, 그 이질적임은 온통 검은 공간에 점점이 흩뿌려진 빨간 핏자국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고급스러움보다는 천박함, 고급 살롱이 아닌 길거리 창녀에게서나 볼법한 퇴폐미가 검은 슈트를 반듯하게 꿰어 입고 있는 청년에게서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섹시가 아닌 색기 그 자체였다. 포토그래퍼가 누구든 이러한 분위기를 원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저 나른한 눈매와 입술 끝에 매달린 기묘한 미소 하나만으로 그런 천박한 분위기를 풍겨내는 연희완은 그 뒤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연희완과 같은 인물이라고 볼 수 없었다.
첫 번째의 연희완을 지나 두 번째의 연희완을 본다.
낡은 앰프에 걸터앉아 역시 낡은 통기타를 끌어안은 채로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 모습. 사진의 앵글은 멀리 뒤에서부터 비스듬히 찍힌 것이었다. B컷 분위기가 물씬 풍겨졌지만 첫 번째의 피사체보다는 훨씬 보기 편하고 인간미가 넘치며 빛살을 받아 부드럽게 떨어지는 곡선에선 부드러운 관능미까지 드러나 보였다. 그것을 빤히 쏘아보던 승도가 곧 펼쳤던 것을 챙겨 정돈하며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그는 첫 번째의 연희완과 두 번째의 연희완을 모두 알고 있었다.
첫 번째의 연희완을 만들어 낸 것은 업자들의 손에서 연희완을 건져 온 그때의 백승도였다. 건져 온 것을 철저하게 창부 취급하여, 창부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을 가르친. 그러나 두 번째의 연희완을 만들어 낸 것은 연희완 본인이었다.
승도의 손에서, 천대받는 그 꿈의 거리에서, 방황하고 차이고 깨지며 그가 만들어 낸 진짜 연희완의 모습이었다. 포토그래퍼가 사랑한 연희완의 모습은 아마 두 번째의 연희완이었으리라. 그러나 승도에게는 첫 번째의 연희완도, 두 번째의 연희완도,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사랑스러운 것.
어찌 그렇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제가 주는 모든 것들을 괴로워하면서도 거절해 내지 않은 희완은 끝끝내 그 길을 돌아서 다시 백승도에게 돌아왔다. 그 길은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이고, 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끝내 그의 곁에 돌아온 연희완에게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나눔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어차피 한 것. 천박한 연희완도, 풋풋한 연희완도, 어차피 한 것이다. 승도에게 역시 그 나눔은 무의미한 것이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희완이 소파에 앉은 남자를 발견하고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았고 마른 수건으로 문지르고 있는 머리카락에서 증발되지 못한 물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소파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쿠션을 옮겨다 테이블 위에 올려주니 거기에 앉는 희완이 남자와 마주 보게 되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닦으며 시선을 내리다 여태 남자가 보고 있던 것을 발견하곤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스튜디오에 갔었는데, 주시더라구요.”
“첫 광고였던 것 같은데.”
“네, 맞습니다.”
살짝 맞닿은 무릎을 이용해 희완의 다리를 바깥쪽으로 넓게 벌린 승도가 샤워후의 열기로 발갛게 물들어 있는 말랑한 성기를 보았다.
“거긴 왜 갔습니까.”
“광고 섭외 때문에요. 선물 주신다고도 하셔서.”
“이게 선물입니까.”
“네, 가서 받고 알았습니다.”
“무슨 광고입니까.”
“향수 광곤데요.”
성기를 빤히 들여다보던 시선이 늘씬한 배꼽을 지나 가슴의 작은 살점에 닿았다. 승도에 의해 민감해져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발기하듯 부어오르고, 쳐다보기만 해도 딱딱해지는 그것은 색이 많이 연해져 있었다. 본래도 남자치곤 색이 예쁜 편이었지만 요즘 들어 더 두드러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향수 광곤데.”
“콘센트가, 누드라고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