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109화 (109/123)

“씻고 싶습니다.”

“그 꼴로는 무리니까 그냥 잡시다.”

그러자는 말에 고집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희완의 옷이 상의부터 벗겨졌다. 팬티 한 장을 제외하고 양말까지 다 벗겨준 남자가 침대까지 데려가 희완을 눕혀놓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확실히 전에 비해 주량이 줄긴 했다. 단순히 각박했던 마음이 풀어져 그런 건지, 건강이 나빠져 그런 건지, 진단을 받아 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이러는 걸 보는 게 귀찮은 건 아니라 딱히 싫은 얼굴도 않는 승도였다.

어디 룸 들어가서 여자 끼고 노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대학로 근처 술집에서 소주잔이나 기울이는 게 전부인 녀석, 매일같이 마시는 것도 아닌 바에야 더 제제할 생각은 없었다. 술기운이 올라 발갛게 물이 든 뺨을 내려다보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겨 주던 승도가 가만 상체를 숙였다. 입술에 닿는 이마 역시 미열이 오른 것 마냥 뜨거웠다.

희완이 체불금 소식을 들은 건 그로부터 2주가 지난 후였다. 받기는 진즉에 받았다는데 그간 또 다른 작품에 투입되었던 도연과 태주와 얼굴 볼 일이 없어 소실을 늦게 들었다. 제작사에서 떼인 돈은 경험상 받기 어렵다는 걸 알고 거의 체념하고 있었던 그들에게 희소식이 날아든 것이 희완이 간 뒤 남은 셋이서 술 먹고 뻗은 이튿날이라 했다. 한 달이 넘도록 못 받은 돈이 우리 그런 지 단 이틀 만에 해결이 된 건 기적이라고, 우리 넷이 뭉친 게 아마 신의 한 수일지도 모른다며 되지도 않는 말을 흥분해서 내뱉던 도연은 금연주간이 아니라 그런지 살이 조금 올라 있었다. 쪼들리는 살림에 밀린 돈 받으니 살 것 같은지 아무튼 굿 럭, 이라며 마주치는 사람마다 행운을 빌어주고 다닌다는 도연은 케이블 드라마 조연급으로 출연중이었다. 보통 드라마 쪽은 인맥 없이 오디션만으로 뚫기엔 어려움이 있었는데 운이 좋으려는지 오디션 보자마자 바로 합격 통보를 받았다는 말을 듣자면 정말 그녀 말대로 행운이 따르는 듯도 싶었다. 요즘같이 기쁜 날 또 술이 빠지는 건 말이 안 되는 거라며 술자리 한 번 더 마련하자는 도연에게 핀잔을 준 건 마침 곁에 있던 성희였다.

“야, 이년아. 드라마 촬영한다고 제일 바쁜 척하는 건 너거든?”

그러는 성희야말로 잘 안 풀리던 작품이 이젠 제법 자리를 잡아 무대에 올리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바쁘기로만 치자면 그날 모였던 넷 중에 성희만한 인물이 없을 것이었다.

“태주도 뮤지컬 주연으로 캐스팅됐다며?”

“어, 내달부터 시작이라더라. 첫 공 티켓 받았어?”

“다행히 안 겹치더라구. 가서 첫 공의 저주나 한 다스 풀어 놓고 와야겠구만?”

배우 중 징크스 없는 배우가 없겠느냐만 유독 그것에 집착하는 태주를 괴롭힐 생각에 벌써부터 흥이 난 성희가 남은 샌드위치를 마저 털어 넣으며 다 비운 제 것 대신 희완의 잔에 남은 음료를 쪼옥 빨아 먹었다. 그걸 아예 내어 주는 희완이 제 몫의 샌드위치도 그 앞에 밀어 주었다.

“다이어트하냐?”

“아니, 집에 가서 밥 먹어야지.”

“아, 그 아는 형이랑 같이 산다고 했었나? 맞지? 저번에 그 완전 때깔 나는 외제차.”

“어어, 가끔 시간 나시면 태우러 오시거든.”

“몇 살 찬데 그런 극존칭을 쓰냐? 둘이 별로 안 친해?”

별일이라며 샌드위치를 크게 한입 베어 물며 묻는 성희가 그러고도 출출한지 희완이 밀어주는 음료까지 깨끗하게 빨아 마셨다.

“엄청 잘생겼다고 하던데, 너 그 사람 조폭이라고 소문난 거 알아?”

“뭐?”

제가 말해놓고도 어이없는지 깔깔거리는 성희에게서 오도록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작년 이맘때 강정의 밤 보러 갔었다며, 그 사람이랑 같이. 성동 선생님이 그러시던데? 엄청 크고 아름답게 생긴 남정네가 너 팬이라고 쫓아다닌다고.”

“아아.”

애매하게 긍정을 하는 희완을 빤히 쳐다보던 성희가 한마디 덧붙였다.

“니가 여자였으면 스폰서하고 같이 산다고 소문났을걸.”

대학로를 걷다 보면 발길에 차이는 게 연희완의 추문이었던 3년 전의 잔재는 굳이 억지로 꺼내고자 하면 어려울 것도 아니었다. 3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거리를 터전 삼아 생활하는 사람들은 큰 차이가 없었고, 현재는 희완이 아닌 다른 이의 소문이 거리를 휩쓸고 있을 뿐, 빌미만 생긴다면 희완이 다시 그 희생양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러니 처신 잘하고 다니라는 충고를 돌려 말하는 성희의 노파심은 기우가 아니었다. 제 속을 쏘아보는 듯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성희와 두 눈을 마주하던 희완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나보다 열 살 더 많아, 같이 살 만큼 친하고, 개인 사무소 운영하시고, 스무살 때 내 데뷔작 여러 번 보러 오시기도 했었고.”

언젠가 걸려 온 전화를 받으러 간 남자 대신 계산을 하면서 보게 된 지갑 속 신분증으로 생년월일을 알게 됐고, 남자의 허벅지 안쪽에 기다란 칼자국이 남아 있다는 걸 알 만큼 친하고, 클럽 사무실이 남자의 사무실인 줄 알고 찾아갔다가 시장통 한구석에 자리한 법인 사무소 간판을 보았고, 스무 살 때 무대 아래서 저를 보던 남자를 기억했다.

“그러니까, 친한 형이고, 자수성가한 사업가고, 스무 살 때부터 너 쫓아다니던 팬이란 말이지? 그래서 친해지게 된 거고, 애인은 있대?”

비슷한 말이었지만 실상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부풀려 기꺼이 입소문 내어 주겠다는 성희가 마지막으로 미심쩍은 부분 하나를 콕 집어 물었다. 그래서 희완은 사실대로 답을 했다.

“응, 있어.”

“오우, 거기다 임자까지 있는 몸이시다?”

하여간 이 바닥 입 싼 놈들은 누가 창작 콤플렉스 덩어리 아니랄까 봐, 틈만 나면 애먼 사람 잡고 싸구려 삼류소설 갈기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다, 빈정거리던 성희가 추가로 주문한 샌드위치 계산을 희완에게 떠넘겼다.

“잘 먹을게?”

“단장님씩이나 되셔서, 일개 단원한테 샌드위치나 얻어먹고 다니시고, 절약정신 참 투철하십니다.”

“원래 단장이 알뜰해야, 극단이 풍족해지는 거야.”

말해놓고 저도 뻔뻔스럽다 생각한 건지 가볍게 소리 내어 웃는 성희가 희완의 입에도 얼음 하나를 밀어 넣어주었다.

잊고 있던 그린에게서 연락이 왔다. 홍영에게서 번호를 알아내어 연락을 했다는 그린은 시간 되면 지금 당장 놀러 와도 된다고 하였다. 옆에 있던 강영희가 아쉬운 소리 하는 주제에 놀러 와도 된다는 말은 어느 나라 화법이냐며 한국어 초급부터 다시 배우라고 면박을 주는 소리가 핸드폰 너머에서 선명히 들려왔다.

“오랜만입니다, 강 팀장님.”

-오랜만이에요, 연희완 배우님. 작년 활약상은 잘 들었어요. 뮤지컬 어워드 신인상 후보에도 올랐었다면서요? 수상에는 실패했어도 심심한 위로 따윈 하지 않겠어요. 내 주변에만 해도 연희완씨 팬이 얼마나 많은데요.

자칭 다년간 갈고닦은 화장술과 눈칫밥, 말발 삼종세트로 초고속 승진에 숟가락을 얹었다던 강영희가 붙임성 있게 말을 건네며 너스레를 떠는 동안 그 옆에 붙어 있었을 그린이 빨리 오라고 하라며 재촉을 하는 게 희완에게도 다 들렸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아, 내가 이래서 김그린 어린이하고는 일하기가 참 행복해요. 이렇게 참을성도 많고, 이 잠깐 인사 나눌 시간도 못 기다려 주고요. 그렇죠? 희완 씨?

뼈 있는 한마디 한마디에 화를 내기보다는 뜸을 들이는 강영희를 참다못한 그린이 수화기를 빼앗아 들었다.

-너 누드 안 찍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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