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105화 (105/123)

약속 시간을 10분 남기고 노천카페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희완이 그 앞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오는 세단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켰다. 두드리기 전에 내려가는 창문 안쪽으로 남자의 옆모습이 일부 비쳤다. 오셨느냐며, 남자가 안쪽에서 열어주는 조수석 문을 잡고 올라탄 희완이 채 문을 닫기도 전에 운전석 쪽으로 끌어당겨졌다. 입술이 닿는 찰나 아직 열려 있을 조수석 쪽 창문을 의식하고 있는데 그 순간 창은 이미 끝까지 올라가는 중이었다. 담배 맛이 느껴져 혀끝을 굴리는 희완이 안전벨트를 매는 걸 확인한 남자가 핸들을 돌렸다.

비좁은 대학로 거리를 활보하기엔 타고 온 세단이 육중한 편이었으나 남자는 어디 한 군데 부딪치지도 않고 잘도 길을 빠져나갔다. 새삼스레 남자의 운전솜씨에 감탄을 하는 희완이 백미러로 밖을 내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그걸 본 남자가 왜 그러느냐 물어왔고 희완이 면허증 갱신 기간이 지난 것 같다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고지서를 자취집으로 해놓고 정작 그쪽으로는 발길도 안 한 지 반년 가까이 되는 바람에 미처 확인을 못 한 부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취 집 계약 기간도 종료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고지서를 챙기지 못한 것도 줄줄이 생각나 미간을 좁히던 희완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네?”

“그 집 내가 처분했습니다.”

금시초문이었다.

“고지서도 다 내 앞으로 해놨고, 운전면허는 지난 1월부로 갱신되었을 겁니다.”

놀란 눈으로 남자를 보던 희완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걸 왜 마음대로.”

“집은, 두 집 살림할 것도 아닌데 따로 둘 필요가 없고, 고지서는 해지할 거 해지하니 남는 건 기본적인 것뿐이라 신경 쓸 거 없고, 면허는 할 수 있어서 그렇게 했습니다.”

“면허는 본인이 가야.”

“해결 봤습니다.”

뭘 어떻게 해결 봤다는 건지 희완은 감도 잡히지 않아서 도로 입을 닫고 말았다. 동거를 한다지만 희완은 생활비를 낸 적이 없으니 거의 얹혀산다고 할 수 있겠는데 사소한 것까지 남자가 부담을 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니 그동안 제가 정신이 없었던 걸 새삼 깨닫고 말았다.

“제가 부담할 수 있는 건.”

“거의 반백수지 않습니까.”

“광고비하고 출연료 받은 돈 있습니다. 집 처분한 거면 그 전세금도,”

“전세 뺀 거 모르고 있었다니 큰돈 관리하는 통장은 아예 쳐다도 안 보는 것 같고, 생활비로 쓰는 통장에 얼마나 남았습니까.”

“그건,”

답을 하려던 희완이 다시 의아한 얼굴로 남자를 보았다.

신용 회복이 된 이후 남자에게서 받은 통장을 제외하면 희완은 딱 두 개의 통장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걸 출연료를 지급받는 통장과, 생활비로 지출되는 통장 두 개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었다는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혹시,”

“불쾌합니까.”

불쾌해야 하는 게 맞긴 한데 희완은 그보다는 조금 놀랐을 뿐이었다. 남자의 행동에 기인한 것이기보다는 이제껏 그걸 전혀 모르고 있었던 스스로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통장이나 금융기관 등, 돈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 채무변제 이후로 무의식적으로 그런 것들을 기피하게 된 희완은 지금까지 최소한의 것들만 납부하며 살아왔고 보험가입은 물론 그 흔한 신용카드 한 장 만들지 않았었다. 핸드폰 요금도 새것을 들고 다닌 이후론 지불해본 기억이 없었다. 가끔씩 간식을 나르거나 회비를 낼 때나 사용하지 남자와 같이 살게 된 이후론 생활비라고 나갈 게 없었으니 거기에 얼마가 들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게 당연했다.

“앞으로는,”

“내가 돈 더 많이 법니다.”

“압니다. 그래도,”

“연희완씨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돈 많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그래도.”

“취미도 없고 피붙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어 돈 쓸 데라고는 연희완이 전붑니다.”

“어….”

“그래도 부담스러우면, 연희완 씨가 나보다 돈을 더 많이 벌게 된 후에, 그럼 그때부턴 그쪽에서 책임지는 걸로 합시다.”

매달 늘어가는 재산에 본인도 정확한 보유금액을 측정하지 못하는 남자의 제안은 언뜻 공평해보였으나 때문에 비합리한 것이기도 했다. 어리숙해도 그것까지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은 희완이 난감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평생, 돈 쓸 일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껴뒀다 그 좋아하는 연극에 쓰면 되잖겠습니까.”

남자가 알게 모르게 연극판에 투자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건 아니고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인 희완은 그마저도 참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달리 반박할 말을 하지 못했다.

“이상합니다.”

“뭐가 말입니까.”

“그래도, 예전처럼 화대받는 기분은 아니라서요.”

“뻔뻔스러워진 것 같아 보람이 있습니다.”

뻔뻔스럽다는 말에도 자격지심을 느끼지 않고 스스로 본인의 반응을 신기해하던 희완이 문득 가슴 한 켠이 무지근해지는 기분에 손바닥으로 그께를 꾹 문질렀다. 그걸 본 남자가 거기가 아프냐 물었고 희완은 고개를 저었다. 그저 조금 뻐근했을 뿐이었다. 돈 쓸 데라고는 연희완이 전부라는 남자의 말 이면을 살피기도 전에 오직 그 말에만 반응하여 뜨거워지는 가슴 안쪽이 죄스러우면서도 뭉클했다. 오로지 희완뿐이라는 남자의 말은 담담해서 더 묵직한 구석이 있었다.

“키스하고 싶습니다.”

“다음 신호에서 걸리면.”

안전벨트를 풂과 동시에 남자의 뺨에 쪽 입을 맞추고 떨어져 나간 희완이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서히 붉어지는 귓불을 룸미러로 본 남자가 일부러 늦춰 신호 대기에 걸렸다. 곧 남자의 손에 의해 딸려 간 희완의 입술로 따뜻한 것이 겹쳐졌다.

병원에서 간단히 진료를 받고 건강검진 예약을 잡은 후 요릿집으로 향하였다.

계절이 바뀌어 가니 대나무 정원의 정경도 바뀌어 있었다. 작은 별채를 빙 둘러싸고 있는 대나무 숲과 측백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르니 바뀔 게 없었지만 그 안에 정성 들여 가꿔 놓은 정원과 후원은 다른 말이었다. 버드나무 가지가 길게 드리워져 있는 연못을 지나 곧장 안으로 들지 않고 목조건물을 빙 돌아 후원으로 돌아나가니 때 이른 철쭉이 꽃잎을 내밀며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그 주변으로 추운 겨울을 이겨낸 파릇한 꽃나무들이 여린 잎을 내밀고 있었는데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이 수려한 모습이었다. 긴 눈매를 한껏 들어 올리며 정성껏 가꿔 놓은 후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희완의 머리칼이 불어오는 바람결에 나부꼈다. 등나무 의자에 앉아 그런 희완의 모습을 바라보던 승도는 그 역시 한 폭의 그림 속 인물 같다는 생각을 한다.

“볕이 좋습니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다.

꽃을 틔우면 그 향이 만 리를 간다 해서 만리향이라고도 불린다는 금목서 옆으로 활짝 핀 철쭉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희완이 바람결에 흩어진 머리칼을 더듬으며 승도에게로 걸어왔다. 바람에 붙어 얇은 셔츠 아래로 선연히 드러나는 몸의 굴곡이 색스러웠다. 어둠에 있을 때보다도, 밝은 곳에 있을 때 더 도드라지는 희완의 음성적인 매력을 승도는 제 입맛에 맞춰 잘도 골라내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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