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102화 (102/123)

“오랜만이에요.”

높은 곳에서 그리 오래도록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괜히 저 골목 구석구석이 그리워졌다. 학정으로 돌아가는 길을 일부러 빙 돌아 햇빛이 비치지 않는 그늘에까지 발길을 옮기던 희완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그녀를 발견한 건 근처 노천카페에서였다.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그녀의 모습에는 여전히 그때의 풋풋하다 못해 당돌하기까지 했던 일면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도 했다.

화장기가 더욱 진해져 있는 그 얼굴을 대번에 알아보고서도 선뜻 반갑게 인사말을 건네지 못한 건 그리 유쾌했던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봤는데 그리 매정하게 굴 거냐며 툭 토라진 얼굴을 하는 소영의 귀염성 있는 볼로 보조개가 도드라졌다. 매력적이었으나 희완에겐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상대 쪽에서 먼저 알은 체를 해 온 마당에 대놓고 무시를 할 정도로 그녀의 만행이 그리 특출 난 것이라 하기도 어려웠다. 그때의 희완은 여기저기서 면박당하고 무시당하고 얻어맞고 다니던 동네북이었고, 그 당시 그녀가 희완에게 했던 행동은 다른 이들에 비하자면 그저 귀여운 수준에 그칠 뿐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를 무참히 외면하지 못하게 했던 건 이 추운 날씨에 찬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노천카페에 나와 있던 그녀의 꽁꽁 얼어붙은 귓불이었다. 우연을 가장한 듯했지만 오래도록 희완을 기다린 것이 분명하였고 그것은 곧 희완을 앉혀 놓고 입을 여는 그녀로 인해 확인이 되었다.

노천카페 난간에 팔을 기대놓고 어서 오지 않고 뭐 하느냐는 듯한 표정을 하는 그녀는 여전히 억지를 부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것을 태생적인 귀여움과 애교로 커버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희완에겐 크게 와 닿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간 정말 잘 지내셨더라구요.”

좀 전의 토라진 듯한 모습과는 달리 희완이 난간을 돌아 들어오자 환하게 웃는 그녀가 카페 실내로 자리를 옮기며 말을 건네었다.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앉자마자 서버를 불러 커피 두 잔을 주문하는 소영은 상대방 취향을 고려하지도 않고 제멋대로 생각하여 결정을 내리는 그 구석도 여전했다.

“저번 작품은 정말 잘 봤어요. 와, 정말 대단하시더라구요, 어쩜. 연기를 그렇게 잘하시는지! 오빠 사생활만 깨끗했더라면 진즉에 빛을 봤을 건데요, 그렇죠?”

사실 여부 관계없이 제가 들은 것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사실로 판단하고 그리 몰아가는 화법 또한 여전했는데 희완은 굳이 그것을 정정하여줄 필요성 또한 느끼지 못했다. 매몰차게 거절을 못 해서 여기 앉긴 했지만 조금이라도 더 나간다 싶으면 고민하지 않고 일어설 작정이었다. 그러나 역시 타고난 눈치를 그런 쪽으로만 예민하게 발달시킨 소영이 깜찍하게 눈썹을 접으며 샐샐 웃어 왔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아직도 이 버릇을 못 버리고. 안 그래도 입사하자마자 말 이쁘게 안한다고 된통 깨지고 다녔었는데. 죄송해요. 제가 옛날부터 이렇게 생각 없이 툭툭 말을 뱉는 버릇이 있었잖아요. 의도적인 건 아닌데, 제가 워낙 고명딸로 오냐오냐 키워져서 좀 버릇이 없어요. 이해해주세요. 이제는 많이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네?”

또 샐샐 눈가를 흔들며 애교를 보이는 소영은 객관적으로만 보자면 확실히 매력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와 그리 개인적인 친분도 없는 희완이 그녀의 노력에 관심을 보일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시계를 내려다보던 희완이 다시 그녀를 보았다. 백 마디 말이 필요 없이, 그래서 용건은? 하고 묻는 듯한 태도에 화사한 웃음이 걸려 있던 눈가가 아주 잠시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곧 그것을 능숙하게 감추며 또 밸도 없는 것처럼 샐샐 웃어댄다.

“제가 이번에 K잡지사에 입사했거든요. 비싼 돈 주고 학교 보내 놨더니 공부는 안 하고 놀러만 다닌다고 아빠한테 된통 혼나고 시골에 끌려갔다가 이번에 취업하면서 다시 상경했어요.”

기집애가 공부는 무슨 공부냐며, 그깟 학교 같은 건 집어치우고 집에서 조신하게 있다가 선 자리 들어오면 조용히 시집이나 가라던 부친이 들이 미던 남자들은 하나같이 하자투성이였다. 웬만하면 참겠는데, 다들 다리가 길면 머리가 없으시다거나, 머리가 있으시면 다리가 짧으시다거나, 내내 대학로를 호스트바 드나들듯 드나들며 흥청망청 돈을 써대던 소영의 눈에 그런 남자들이 눈에 찰 리가 없었다.

그래서 학교도 때려치우고 끌려간 시골에서 못 이기는 척 열 번 정도 선 자리에 나갔다가 마지막 맞선남에게 치한 누명을 씌워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소영은 현재 제 2의 이십대를 만끽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전히 대학로는 활기찼고, 보는 눈은 즐거웠고, 돈만 주면 호스트처럼 서슴없이 제 밑도 빨아주는 골 빈 놈들도 많았다.

어떻게 그런 치한에게 금쪽같은 딸을 보낼 생각을 했느냐며 울고불고 있는 패악 없는 패악을 다 부린 소영에게 쩔쩔매던 부친은 결국 다시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었다. 논현동에 시가 30억짜리 아파트를 마련해주고, 다달이 몇백씩 용돈을 보내주고, 공부도 안하고 일도 안 하고 놀자니 심심하다고, 이게 다 학교 중퇴시킨 아빠 때문이라며 또 생떼를 쓰는 그녀를 K잡지사에 낙하산으로 떨어뜨려 준 것도 바로 부친이었다. 처음엔 마땅히 눈에 차는 인물들도 없고, 매번 돈을 주는 저만 예쁘다고 물고 빨아주는 남자들의 휘어진 눈에 주렁주렁 매달린 추저분한 속물근성을 보는 것도 물려버려, 뭐 또 재밌는 일이 없을까 하다 마침 공연 매거진에 떡하니 박힌 채용 모집 광고를 보고 그리 부친을 볶아 먹은 것이었다.

헌데 그렇게 고생해서 들어간 잡지사는 소영을 낙하산이라고 왕따시키고, 일 못한다고 왕따시키고, 일도 못하는 게 곱상한 얼굴만 믿고 나댄다고 왕따시키고, 남자 직원에게만 샐샐대는 소영에게 여우 같은 년이라고 왕따시키고, 어디서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앞에선 웃으며 커피 사주던 남자들이 뒤에선 걸레 같은 년이라고 욕하며 왕따시키고, 정말 더러워서 몇 번 때려치우고 싶던 것을 오로지 오기 하나로 버텨 왔었다. 그러던 중 다들 도우진과 연희완을 못 잡아 안달이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쾌재를 불렀다. 우와,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며 그 바닥에서 그리 천대받고 손가락질 받던 인간 둘이 이렇게 떠받들어질 줄 알았나. 새삼 격세지감을 느끼던 소영의 입가로 오랜만에 여유 가득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런 아까운 기회를 그냥 놓칠 수야 없지. 그 누구도 만나주지 않는다는 연희완 인터뷰를 따 온다면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리라. 평소 저를 눈엣가시같이 여기던 윤 대리년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생각으로 소영은 희희낙락했었다.

미리 준비해 뒀던 명함을 문득 생각난 듯 꺼내어 건네주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희완은 그걸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정말 격동의 3개월을 보내면서 희완은 이러한 뻔한 수작질에 너무 많이 당해 왔던 것이다. 얼굴도 기억 못하는 사람들이 선후배라며 친근하게 다가와선 뒤통수치고 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도 희완은 잘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말할 리 없는 우진에 관한 가십을 주골자로 말이다.

“어머, 사람이 명함을 주는데 받지도 않아요? 세상에, 오빠 잘되더니 많이 변했네요?”

부러 핀잔을 주며 눈을 흘기는 소영은 사회생활에 필요한 가장 기본 조건조차 갖추고 있지 않았다. 예의라는 거는 원래 상대적인 거라며, 상대가 널 깔보면 너도 깔보면 되고, 상대가 너한테 건방지게 굴면 너는 그보다 더 싸가지 없게 굴면 된다고, 3개월 내내 희완의 곁에 붙어서 귀에 딱지가 않도록 누누이 이야기를 하던 우진은 과연 매우 훌륭한 선생이었다.

“할 말 없으면 그만 가보겠습니다.”

“어머, 나 지금 말하고 있잖아요!”

아쉬운 소릴 하러 온 게 바로 저라는 걸 망각하기라도 한 듯, 무안을 당한 것에 성을 내는 소영의 눈초리가 홱 하니 올라간다. 안하무인 그 성질머리 꽤나 오래 누르고 있긴 했다.

“자꾸 이러시면 정말 재미없어요?”

희완이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를 들은 듯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어서 다시 앉으라고 희완이 앉았던 의자를 발치로 툭 차는 소영이 쀼루퉁한 얼굴을 한다. 계속 있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결국 다시 돌아서 가려는 희완의 등 뒤로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던져졌다.

“오빠 소문난 걸레였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거에요!”

잠시 멈칫하는 희완의 등 뒤로 연달아 그녀의 목소리가 내던져졌다. 주변에 사람들이 있든지 말든지, 이 소리를 듣든지 말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는 그 막무가내는 여전했다.

“그뿐인 줄 알아요? 같은 남자한테 다리 벌리고 다녔다고! 돈 없어서 화대 받으면서 몸 판 거 내가 모르고 있었을 줄 알아요? 하준우 선배가 다 말해줬다구요! 거기 안서? 도우진 몸 판 것도 내가 다 말하고 다닐 거야! 완전 상 걸레도 그런 상 걸레가 없었다고! 야! 연희완! 내가 기사 쓰면 너 그 알량한 커리어? 인기? 다 날아간다구! 야!! 야!! 거기 서란 말이야!!”

별소리를 다 지껄여도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희완에게 약이 올라 악에 악을 쓰며 종반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소영에게로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신경질적인 눈초리가 와 닿았다. 호기심보다는 웬 미친년을 보는 듯한 눈초리였다.

“그래서 점심은 먹었습니까.”

-아니요. 지금 소줏집 갑니다. 연습이 일찍 끝나서요.

“오늘도 술 마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병원 예약 내일로 미뤘습니다.”

그러니 술 마시지 말라는 소리에 건너편에서 네, 알겠습니다. 하고 순순히 답을 해 왔다. 창틀에 기대앉아 창문 밖 풍경을 내려다보던 승도가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 좀 늦을 겁니다.”

-기다려도 됩니까?

“많이 늦습니다.”

-아, 네.

그러시냐고, 답을 하고서는 기다린다 아니다 말을 않는 희완의 목소리는 어쩐지 가라앉아 있었다.

“밑은 괜찮습니까.”

잠시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소란스러웠던 희완의 주변이 조용해졌다.

-새는 느낌은 없습니다.

그 답을 하기 위해 자리를 옮긴 모양인지 좀 전보다 목소리도 더 키워져 있었다.

“묻어 나오는 건.”

-괜찮습니다. 최근엔 삽입 안 하셨잖아요.

희완의 입에서 나오는 삽입이라는 단어가 꽤나 쓸모없게 야하다는 생각을 하던 승도의 시선이 들렸다. 휴게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철진이 곧 출발해야 한다는 손짓을 하였다. 기대고 있던 몸을 세우는 승도가 품에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요양원도 병원이라고 건물 전체가 흡연 구역으로 지정되어 방문한 동안 담배를 태우지 못했다. 철진을 먼저 내려 보내고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는 승도의 귓가로 누군가 희완을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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