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둘이 있게 되니 어색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석주가 기어이 먼저 항복 선언을 해 왔다.
“저번엔 죄송했습니다.”
뜬금없는 말이다. 잘못한 게 있기나 했나.
“극본 흘리고 가서 중간에 되돌아왔는데, 샤워실 불 켜져 있는 거 보고,”
말끝을 흐리는 석주의 얼굴에 열기가 돌았다. 요 근래 희완과 얼굴을 마주 할 때마다 이래서 이제 희완은 별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사실 그런 꼴을 보게 한 희완이 미안한 건데.
“어, 안 다쳤어? 그때 소품 죄다 엎어 놓고 갔던데.”
“아.”
경황이 없어 그거 다 치우지도 못하고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
아, 그걸 희완 형이 다 치우고 갔겠구나, 거기도 그 지경이었는데.
하는 속내가 고스란히 얼굴에 비친다. 그만 어이없어 웃어버리고 만 희완이었다.
“환자를 그런 식으로 부려먹는 것도 재주는 재주야.”
“죄송합니다.”
또 순진하게 사과를 해 오는 석주의 양 볼이 빨갛다.
그냥 치질 정도로 이해하는 건 어렵겠지. 중얼거리는 희완이 먼저 사무실을 나섰다. 카메라 테스트 정도는 해 봐야 한다니 홍영에게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손님이 없으면 문 걸어 잠그고 나돌아 다니는 게 피사체 사냥을 다니는 그의 유일한 취미이기도 했다.
다행히 스튜디오 문은 수월히 열렸다. 대학로 중심으로 들어서는 여러 개의 입구 중 가장 한적한 곳에 위치한 스튜디오는 그곳을 드나드는 이들의 면면을 보면 놀라운 구석이 있을 정도였다. 유명 모델에, 배우에, 감독에. 웬만한 패션지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사람들이 단골로 드나드는 곳이었다. 이런 데서 인맥을 쌓아서 이용해도 좋을 텐데 학정은 그 좋은 인맥을 카메라 테스트용으로만 사용하고 있던 것이었다. 피팅 모델도 엄밀히 말하자면 선을 보이는 건데 건강 나빠진다고 욕을 바가지로 퍼다 붓는 경성도 어찌 보면 학정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러니까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극단을 운영해 온 것이겠지만.
열리는 스튜디오 문으로 들어서니 홍영은 한창 손님을 맞고 있었다. 꾸벅 허리를 숙이는 석주가 우렁차게 인사를 했고 그 소리에 놀라 돌아보던 손님을 발견한 희완이 약간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그린이 거기에 있었다.
현장에서처럼 가벼운 캐주얼 복장의 그는 이번에야 말로 정말 그 이름에 걸맞게 밝은 녹색으로 머리칼을 물들인 채였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희완이 놀랄 정도로 성큼 다가와 두 팔로 와락 끌어안고 반가움을 표했던 그린은 홍영과는 미국 스쿨 시절에 웬수처럼 지낸 사이라고 했다. 홍영이 사진을 접게 된 계기가 바로 그린이었다고 하는데 그린은 웃기는 소리라고 가볍게 일축했다. 가난한 사진작가 지망생과 부유한 사진작가 지망생의 우정 스토리는 나름 듣는 재미가 있었지만 마냥 시간을 놀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카메라 테스트 때문에 왔다는 석주를 세워놓은 홍영이 간만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요즘 이런 피사체 찾기 쉽지가 않단 말이야. 희완 씨랑 분위기가 정반대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니까.”
“의외로 야한 거?”
“야해? 희완 씨가? 아, 뭐 그렇긴 하지. 저 갈매기 입술도 그렇고 나른한 눈매도 그렇고, 나는 희완 씨 멍 때릴 때가 제일 예쁘더라. 뭐랄까. 불어오는 바람에 치마가 날려도 그것이 남성에게 보이고 있는 상황의 의미를 아직 모르는 소녀 같은 이미지라고 해야 하나? 그걸 보는 멀쩡한 사람도 변태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묘한 마력이 있지.”
“비유 한번 적절하다. 희완 씨 다 나쁜데 제일 나쁜 게 그거야. 본인이 다른 사람들한테 어떤 감상을 불러일으키는지 모른다는 거. 그래서 수위 조절이 안 돼. 수위 조절이.”
광고 촬영 때 희완 때문에 고생깨나 했던 그린은 도무지 칭찬인지 험담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으며 거기에 무척 동조하는 홍영과 죽이 잘 맞았다. 거기에 얼마 전에 나름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죄로 병원 신세까지 진 석주까지 은근히 편승하니 졸지에 희완만 멀쩡한 사람들 변태 만드는 나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건 뭐 강간해 놓고 니가 옷을 너무 야하게 입어서 그래. 억지 부리는 범죄자들과 비슷한 습성을 엿보는 것 같긴 하나 그 경계 참 미묘했다. 이래서 외설과 예술은 한 끗 차인가 싶은 희완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카메라 앞에 섰다. 말하자면 피사체 광인 홍영에게 카메라 테스트 비용을 지불하는 셈이었다.
“희완 씨 이번 주말에 별일 없으면 영희네 회사로 와요.”
석주와 번갈아 가며 한참 홍영의 욕구를 채워주고 중간에 편승한 그린의 욕구까지 채워주고서야 간신히 풀려나게 된 희완이 단추를 잠그다 그린을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탈의실 문틈에 서서 희완을 훔쳐보고 있던 그린이 손가락 끝으로 희완의 허벅지 뒤쪽을 가리켰다.
“안 오면 거기에 잇자국 새기고 다니는 야한 몸이라고 동네방네 소문냅니다.”
정말 한다면 그러고도 남을 성격이었지만 농이었다.
그런 성격을 촬영하는 내내 파악하고 있던 희완이 당황하지 않고 단추를 마저 다 잠그고 재킷까지 걸쳐 입었다. 한 뼘 정도 열려 있던 탈의실 문을 활짝 열고 나가니, 그 틈에 기대서 있던 그린이 훌쩍 몸을 빼며 싱긋 웃는다. 주머니를 뒤져 내미는 걸 쳐다보니 명함이었다. 포토그래퍼 그린. 영문으로만 쓰여져 있는 이름 뒤에는 전에 없던 소속이 박혀 있었다.
“그쪽 일 접고 아예 이쪽으로 들어왔습니다. 언제 또 변덕 부릴지 모르겠지만, 강영희가 제법 능력 있는 여자라, 즐거운 작업 종종 물고 옵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받을 만한 건 아니고, 들러요. 거기에 내 전용 세트장도 근사하게 지어줬거든. 오랜만에 같이 놀자구. 오늘 걸론 영 감질만 나서.”
“진심입니까.”
“내가 언제 빈말하는 거 봤어요?”
하하 웃으며 시간 나면 꼭 전화해달라는 그린이 아직 제 손에 있는 명함을 희완의 재킷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며 빙그레 웃었다.
지름길을 돌아서 학정으로 향하는데 남극 근처에서 성희에게 붙잡혔다. 무언가 굉장히 당황한 듯하였던 그녀는 마침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희완을 발견하자마자 급 화색이 도는 얼굴로 그를 반겼다.
“이야, 이 자식! 진짜 반갑다! 역시 넌 내 구세주인 게 틀림없어!”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과 대사에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만 희완이 촬영 지원팀으로 소집된 석주를 먼저 보내고 남극에 합류했다. 작년 새 작품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이번에 또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던 작품이 거의 엎어지기 직전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예의 연 기획에서 투자금 지원이 결정되고 대관까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됐는데, 배우들이 작품에 대해서 감을 못 잡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오늘 연습 중에 작품 연출을 맡고 있는 성희와 트러블이 생겼고, 주연 배우 하나가 튕겨져 나가는 바람에 내일 프로모션을 앞두고 연습이 중단됐다는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희완이 도와줄 일이라 봐야 연습 중 대타 뛰어주는 것밖에 없었는데 성희가 바란 것이 바로 그거였다. 남극도 영세 극단이라 작년 대박을 친 뒤로 얼굴 알려진 배우들이 연예기획사로 대거 이탈을 하는 바람에 쓸 만한 배우가 정말 모자랄 지경이라 하였다. 이번에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도 올 초 새로 뽑은 새파란 신입들로 다들 무대 경험이 많지 않아 연습도 평탄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주연 배우 잡아 올 동안 너는 우리 애들 연습 좀 봐달라며 희완을 남극으로 떠민 성희가 곧 자취를 감추었다. 도와주겠다고는 했는데 이런 거일 줄은 몰라서 조금 난감하게 된 희완이 갑작스러운 저의 등장에 두 눈을 둥그렇게 뜨는 어린 배우들을 보고 관자놀이들을 문질렀다. 곧 허리를 폴더로 접으며 우렁차게 외치던 인사에는 민망해서 귓불이 붉어지기도 했다. 성희가 안겨주고 간 대본을 펼쳐 보며 시간을 확인한 희완이 두 번째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와 점심을 같이하기로 한 시간이 머지않았던 것이었다.
남자와의 약속을 미룬 뒤 거의 오후를 꼬박 할애해 남극 단원들의 연습을 봐주고 나온 시간이 네 시쯤이었다. 경성에는 사정을 이야기해 남극에서 연습을 마치고 그냥 귀가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되었지만 잠깐이라도 학정에 들렀다 갈 생각이었다. 지금쯤이면 학정에서도 한창 연습에 매진 중일 시간이라 중간에 들어갔다가는 괜히 흐름을 깨는 게 되어서 희완은 남은 시간을 밖에서 때우기로 결정했다.
평일 낮 시간대에도 유동 인구가 제법 되는 대학로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가 그가 들른 곳은 복귀 후 첫 작품을 올린 곳이기도 했고, 언젠가 남자가 아무도 정식으로 드나들지 않은 곳에 희완을 가장 먼저 데려간 곳이기도 했다. 극장 외에도 커피숍과 레스토랑이 입점해 있는 신축 건물은 개관한 지 약 반년이 지난 지금은 관람 공연이 없는 사람들도 약속 장소로 많이 애용하는 곳이 되어 있었다.
이곳에 첫발을 디뎠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활기차고 소란스러운 기운으로 가득 차 있는 건물에 들어선 희완이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멈춰 선 곳은 계단 벽 반면을 차지하고 있는 넓은 창 앞이었다. 대학로 전경이 한눈에 비추어지는, 그 커다란 창 앞에 서서 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내려다보는 희완의 머리 위로 밝은 햇살이 내려졌다. 계절의 막바지였다. 소복한 솜털 같던 눈으로 시작된 겨울의 매서운 한파가 물러가며 구름 사이로 맑은 하늘이 서서히 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