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어디 가려고?”
대꾸할 말이 궁한지 말을 돌리던 희완이 7층에서 열리는 문을 보고 우진의 곁으로 좀 더 붙었다. 스키마스크로 얼굴을 꽁꽁 둘러맨 중국집 배달원이 철가방을 들고 올라탔다. 철가방에 박힌 중국집 상호는 희완도 많이 시켜 먹어 눈에 익었는데 배달원이 자주 바뀌는 집이라 올 때마다 다른 얼굴이라는 것도 기억했다.
“바람 쐬러.”
“오늘 엄청 춥던데. 밥은 먹었어?”
“생각 없어.”
“난 배고파. 같이 먹으려고 안 먹고 나왔거든.”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수에 물끄러미 희완을 쳐다보던 우진이 곧 열리는 문을 통해 내리는 배달원의 뒤를 따라 내렸다. 문이 없는 아파트 현관을 통해 차가운 바람이 쌩하니 몰아쳤다. 비교적 날이 맑다고 했었는데 바람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형.”
“국밥 먹을래?”
“순댓국.”
“거기 어디가 맛있다고 하던데.”
“K대, 학정 형이 출강 가셨던. 수육도 맛있었어.”
“거기까지 다녀올 시간이 되나.”
“오후 다섯 시 공연이니까.”
“일찍도 왔네.”
겨우 정오를 넘기고 있는 시간을 확인한 우진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응수했다. 버스를 타고 갈 생각인지 택시 정류장을 지나쳐 횡단보도 앞에 서서 뒤따라오는 희완을 기다린다. 그 곁에 붙어 선 희완이 빨간색 정지 신호를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 자고 가라셨어.”
“누가.”
“학정 형이.”
“그럴 거 없어.”
“그러겠다고 했어.”
“왜, 내가 또 약이라도 하고 추태 부릴까 봐.”
“요즘도 그래?”
“뭐가.”
“요즘도 그러냐고.”
“죽을 때까지 안 그럴까.”
매시간 배 속 깊이 석회 가루 같은 앙금이 깔려 있는 기분이었다. 조금만 출렁여도 부옇게 올라와 배 속을 간질이며 목구멍을 타고 넘어올 것 같은. 혈관을 타고 올라와 뇌수까지 침범하여 머릿속을 간질이는 것 같은. 기괴하고도 참을 수 없는 감각이었다. 긁어도, 아무리 파내려고 쑤셔보아도 결코 해갈될 수 없는. 그 감각을 떨쳐내기 위해 다치지 않고 우진이 할 수 있는 건 냉수욕이 전부였다.
살이 떨어져 나가도록 몸을 긁어 학정에 의해 양손을 묶인 적도 있었고, 깨진 유리 조각을 들고 피부 밑을 기어 다니는 것 같은 그 앙금을 털어내기 위해 살을 갈라내 응급실에 실려 간 적도 있었다. 그런 것은, 의지나 이성 같은 것으로 제어가 되는 범주의 것이 아니었다. 중독이라는 것은 매일 매 순간 극심한 금단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 미세한 감각은 늘 몸속에 남아 언제든 발작을 일으킬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가, 계기, 아주 사소한 계기 하나만 접해도 쉽게 우진을 집어삼키는 것이다. 육체를 숙주 삼아 번식하는 기생충보다도 지독했다.
“순대 국밥 두 그릇하고, 수육 중 자 하나 주세요. 그리고, 사이다?”
주문을 하며 묻는 희완에게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는 우진이 밥때치고 한가한 식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낡았지만 청결하게 유지되어 있는 식당 안엔 우진과 희완이 앉은 자리를 제외하고 서너 테이블이 더 차 있을 뿐이었다.
“일요일이라 한가한가 봐.”
“뭐. 학교 근처니까.”
“고맙습니다.”
기본적인 찬과 사이다를 먼저 내주는 아주머니에게서 오프너를 받은 희완이 사이다 뚜껑을 따 우진의 잔을 먼저 채웠다.
“뭐 보러 간다고 했었지?”
“시라노 드 베르쥬락.”
“아아. 한민 선배가 하신다던.”
“캐스팅 바뀌었다는 것 같은데.”
“무슨 일로?”
“제작사 쪽 문제라는데. 자세한 건 나도 잘.”
“한민 선배가 시라노 역 아니었나?”
“그 역이 바뀌었다나 봐.”
“낙하산 들어오나.”
배역이 확정돼도 종종 제작사 입김으로 주연이 바뀌는 건 예삿일이었다.
그래도 한민 선배 정도면 낙하산으로 밀어내기도 쉽잖을 건데. 하는 우진이 컵을 집어 들었다. 달달한 탄산음료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데 그 속에 낀 오물들이 한꺼번에 꺼져 들어가는 듯했다. 연이어 차례대로 나오는 순댓국과 수육을 비우면서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예의 연극판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고, 간간이 신변잡기도 섞여 들었다. 계산을 하고 나오는 길에 식당 앞에 서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우진의 모습이 보였다. 작은 대학가 주변이라 일요일 오후에는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그곳에 홀로 서 있는 우진의 모습은 그래서 더 눈에 띄기도 했다.
“걸어서도 20분 거린데. 좀 걸을까?”
버스에서 내리기 전만 해도 매섭게 불어왔던 바람이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동안 언제 그랬느냐는 듯 뚝 그쳐 있었다. 꽁초를 비벼 끄며 희완이 내민 박하사탕을 입에 무는 우진이 대답 대신 대학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도 이 근처라면 길이 밝았다. 학정이 햇병아리 시절 첫 출강을 나왔던 학교는 작은 규모임에도 배출해낸 배우가 많아 연기 명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극단을 떠나기 전 우진도 몇 번 학정을 따라오곤 했던 장소였다. 돈도 안 되는 일을 자처하던 학정을 우진은 그때도 이해하지 못했었다. 건물 월세를 내지 못해 극단원 대부분이 막노동을 뛰던 시기였고 재정이 바닥을 쳐 극단 문을 닫느니 마느니 하던 때이기도 했다. 그런 중에 우진에게 섭외 요청이 있었다. 그 당시 연극판에서는 몇 번의 작품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던 우진을 드라마 제작사에서 직접 섭외를 해왔고 우진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단지 돈 많은 사모님들 술자리에 불려가 술이나 한잔 따르며 웃음이나 지으면 20회짜리 드라마 주연 자리가 굴러 들어오는 건데, 학정의 반대로 파토가 나버렸다. 제작사 주선으로 마련된 술자리에서 제 밑을 은근히 더듬어 오는 손길들을 방치하며 술을 따르고 있던 우진을 끌고 나오면서 학정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왜 그랬느냐고 다그치지도 않고, 더러운 놈이라고 욕하지도 않고, 부끄럽지도 않느냐 윽박지르지도 않고, 그 밤 두 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그 낡은 아파트로 끌고 들어갔다.
부는 바람을 기억했다. 그 뜨거운 손에 꽉 붙들려 인파로 넘치는 복잡한 거리를 가로질러, 오래된 골목을 돌아, 달이 비치는 뚝방을 지나쳐, 아파트로 돌아 들어오는 동안 우진은 제게로 부는 바람을 기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