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셨습니까.”
의식하지 않은 웃음은 평소 그의 삶의 궤적과 맞물려 늘 그 흰 얼굴 한 켠에 드리워져 있던 진청색 그늘을 깨끗하게 거둬 간 채였다. 밝은 햇살 아래서 일상을 돌아 나와 저에게 다가오고서도 해사하게 웃는 희완을 담아내던 남자의 눈길이 짙어진다. 아름답다 생각했던, 아주 오래전의 그 해묵은 감상이 그 묵직한 불덩이를 헤치며 나른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장가든 뒤로 한동안은 새신랑의 면모를 보이며 생글생글 막 피어난 해초 같던 소줏집 주인의 안색이 영 못 쓰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오가는 사람마다 걱정하여 무슨 일이 있느냐 한마디씩 거들면 아주 죽을상을 짓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 악마란 세 살에서 네 살로 넘어가는 내 조카들이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녀석들이 그냥 커피라면 내 사랑스러운 아들놈은 티.오.피.였더라. 그건 내 자식이지만, 악마야. 소악마야, 소악마. 아주 절망스러운 얼굴로 육아 스트레스를 피력하던 주인은 아닌 게 아니라 신수 훤했던 신혼 때의 모습이 아닌 구질구질했던 노총각 시절의 쉰내 나는 아저씨로 돌아가 있었다.
그걸 본 경성이 와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웰컴 투 헬, 환영의 인사를 전했다. 지금은 소악마 같지요? 나중에는 양의 탈을 쓴 사탄으로 보이게 될 겁니다. 오랜만에 무드 잡고 나란히 누워 입술 붙이고 있는데 쓰윽 나타나서 엄마, 아빠, 모 해애? 하고 고개 갸우뚱하잖아요? 오~ 그 판타스틱한 감정. 그걸 느꼈다면 주인님은 오 멋진 신세계를 영접하신 거랍니다.
학정에서 유일하게 유부남이었고 애 아빠이기도 한 경성이 토닥토닥 동병상련의 정을 쌓아가며 소줏집 주인을 위로하는 동안 나머지 단원들은 그 집을 거덜 내기라도 할 작정으로 폭풍 흡입을 시작하였다. 한구석에서 제 금일봉을 슬쩍 꺼내 보는 필영의 얼굴이 시시각각 흙빛으로 꺼멓게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 다이내믹한 광경을 보는 게 또 단원들의 즐거움이었다. 즉, 흔치 않은 구두쇠 벗겨 먹기 궐기대회 앞에선 취향 상관없이 만장일치 대동단결인 것이다.
시끌벅적한 공간에서 기분 좋게 흥청망청하는 동안 술자리는 깊어만 갔다. 맑았던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며 길게 치우친 전선줄 너머로 해가 뚝 떨어짐과 동시에 쏴아아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소줏집 안에서 왁자하게 떠들며 간만의 망중한을 만끽하던 단원들이 누군가의 어? 비가 옵니다! 하는 소리에 일제히 문간을 돌아보았다. 낡은 소줏집 유리문 너머로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절경이었다.
어느 시대가 바뀌어 가는, 또는 계절이 바뀌어 가는, 그 길목에 흩뿌려지는 물씨처럼 부옇게 올라오는 물안개를 향수 어린 눈길로 바라보던 그들에게서 낮은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작된 노래는 끊임없이 이어져 복작복작한 소줏집을 빙 돌았다. 그 가운데 앉아 계절과 날씨가 주는 우수를 마치 처음인 것처럼, 아무 걱정 없이 음미하던 희완에게서도 익숙한 음률이 나직이 흘러나왔다. 오늘따라 다른 손님도 없고 시원하게 내리던 비도 구슬픈 노랫가락처럼 내리니, 길어져만 가는 술자리에 파장 분위기가 요원하였는데 전화를 받은 희완이 슬그머니 그 공간을 빠져나왔다.
우산도 없이 소줏집 처마 밑으로 세차게 들이치는 빗줄기를 하염없이 올려다보던 희완이 후드를 뒤집어썼다. 좁은 골목을 가득 메운 빗속으로 뛰어드는 희완의 기다란 실루엣이 희미한 가로등 빛에 비쳐 너울너울 흐려져 갔다.
창을 두드리기도 전에 열린 문을 통해 조수석에 올라타는 희완이 흠뻑 젖은 후드잠바를 벗었다. 골목 입구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이미 올려둔 히터를 조절하는 게 보인다. 뛰어와 춥지는 않았는데 잠바를 벗으니 으슬으슬한 기운이 남아 작게 진저리를 치는 희완의 머리카락을 타고 굵은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뻗어 온 손이 젖은 뺨을 스치고 눅눅해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희완의 목뒤를 덮어왔다. 벌써 일을 마친 거냐며, 술자리가 길어져서 저는 계속 여기 있었다 하던 희완의 입술로 남자의 입술이 겹쳐졌다. 자연스레 이끌려가던 희완이 익숙하게 남자의 입술을 받으며 그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혀가 섞이고 뜨거운 숨이 섞였다. 목덜미를 덮은 손이 등줄기를 타고 미끄러져 허리를 당기는 바람에 희완의 몸이 남자의 허벅지 위로 올려졌다. 차체가 넓은 세단이었어도 남자 둘이 좌석에 겹쳐져 있으니 공간이 부족했다. 레버를 당겨 운전석을 넓힌 승도가 제 위에 올라탄 희완의 귓불을 물었다. 입술이 벌어지며 나직한 숨소리가 뱉어진다. 물기가 남아 더욱 매끄러워 보이는 뺨으로 남자의 입술이 닿았고 곧 턱 밑으로 주룩 미끄러졌다. 고개를 뒤로 젖힌 희완의 목울대를 건드린 혀가 연한 살갗을 부드럽게 빨아 올렸다.
“거, 거긴 안…, 으음.”
행여 자국이라도 남길까, 흠칫하며 남자를 밀어 내려던 희완이 외려 나직한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읏. 목울대를 핥던 남자의 혀가 다시 위로 올라와 살짝 벌어져 있는 입술 새를 파고든다. 마른침이 넘어가며 희완의 입속이 두터운 혀로 가득 들어찼다. 남자의 목을 끌어앉고 능란하게 제 속을 헤집어 놓는 키스에 적극적으로 응하던 희완의 허벅지가 더욱 벌어지며 하체가 바짝 밀착되었다.
“내일 수영 간다 하지 않았습니까.”
“나, 남기신 것들이 다 없어졌습니까?”
수영장을 일찌감치 끊어놓긴 하였으나 다니겠다 한 날부터 몸 곳곳에 흔적을 남기기 시작한 남자 덕에 벌써 2주째 강습 한번 받아보지 못한 희완이었다. 이러다 피트니스 클럽에 강제기부하게 생겼다는 위기감으로 남자에게 자제를 요청하였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일단 몸을 붙이면 희완부터가 반쯤 이성이 나가 제어를 하지 못했다.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면 희완의 몸은 금세 열기를 품곤 했는데, 그 몸을 백지상태에서부터 꾸준히 길들여온 남자는 너무 능숙하게 희완을 다뤘다.
몽롱하게 뜬 눈으로, 혹은 안달하여 붉게 물든 얼굴로, 정확한 부위를 언급해가며 빨아달라고도, 물어달라고도, 핥아달라고도 하면, 남자는 굳이 그걸 마다하지도 않았다. 기꺼이 원하는 곳에 자국을 새겨 주며 뜨겁게 녹아드는 희완의 몸속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면 안에서부터 움찔움찔 떨며 남자를 세게 빨아들이는데 그 시점부터는 이미 제정신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매번 그러니 승도의 자제만으로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하여 이렇게 짙은 색향을 내비치는 희완에게 확인차 그 의견을 구하는 승도가 제 것이 묻어 있는 붉은 입술을 가볍게 훑어주었다.
“사타구니 뒤쪽은 여전합니다.”
남겨도 꼭 희완이 확인하기 어려운 곳에 남겨둬 종종 놓치기도 하는 구석이 있어 요즘은 좀체 밖에서는 옷을 갈아입지 않게 된 희완이었다. 자연히 사우나도 등한시하게 돼 필영의 원성을 사기도 했었다. 간만에 시간적 여유가 생겨 틈날 때마다 단원들을 이끌고 사우나로 행차한다는 필영은 개중에서도 특히 열기욕에 강한 희완을 탐내곤 했었는데 매번 거절당하니 뿔이 났던 것이다. 대신 좋아하는 족구 열심히 뛰어주는 것으로 벌충을 해 원성을 가라앉히긴 했으나 요즘에도 볼 때마다 사우나 타령인 것은 변치 않았다.
“어, 그럼 내일도 못 가겠군요.”
“그럼 오늘은 본격적으로 안아도 되겠습니까.”
언제는 그러지 않았던 것처럼 정중하게 물어오는 남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희완이 눈 끝을 찡그리며 정말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러다 정말 수영장에 발 한번 못 담가보고 강제로 기부하게 생겼습니다.”
“연기할 때 필요한 겁니까.”
“아직은 아닙니다만, 언제 또 필요하게 될지 모르고 또 체력도 길러야 할 것 같아서.”
“여기서 더 기를 체력이 있습니까. 이만하면 된 것 같습니다만.”
웬만한 여자들도 승도와 잠자리를 하고 나면 초주검이 되기 일쑤였다. 남자라서 여자들보다야 조건이 낫긴 하겠지만 본래 받는 용도가 아닌 곳을 쓰는 것은 체력적인 것과는 다른 면에서 부담이 클 터였다. 또한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승도의 욕망을 받아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는데 힘들어하면서도 희완은 그럭저럭 잘 견디는 편이었다. 하다 보면 정신을 놓는 건 이제 예사가 된 일이었지만 전처럼 완전히 늘어지는 게 아니라 이젠 중간에 눈을 뜨고 익숙하게 허리를 흔들기도 했다. 확실히 노숙 생활하던 때보다는 체력이 나아져 있었다.
그러나 희완은 생각이 달랐다.
“쉬는 동안 근육이 많이 빠졌습니다.”
본디도 빈약했던 근육이 몇 주간 침대에 묶여 있는 동안 아예 흔적도 없어져 버린 것이다. 섭취에서부터 배설까지, 정말 기본적인 욕구만 채우는 생활을 하며 문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는 내내 체력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근육 만들라는 특명이라도 내려졌습니까. 근육만이라면 수영보다는 헬스가 나을 건데.”
“발성에 안 좋다고 권유는 하지 않습니다. 헌데 근육 만들어도 괜찮습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습니까. 원한다면 상관없는 일 아닙니까.”
“어- 그런가요.”
“왜, 내가 근육질인 연희완은 건들지도 않을 것 같습니까.”
“그게 아니라.”
어, 결국엔 그런 뜻이 되는건가.
한 템포 늦게 제 말뜻을 자각한 희완이 조금 난감한 얼굴을 하였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먼저 숙이고 들어오는 희완을 제 위에 올려놓은 내내 그 몸 구석구석을 매만지던 승도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었다.
“여자 같은 몸을 원했다면 애초 연희완 씨를 건드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주변에 널린 게 깔려줄 연놈들인데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물건을 끼고 돌 이유가 없다. 몸만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희완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리 말하는 남자의 손이 바지 속을 파고들어 가 말랑한 엉덩이를 가볍게 주물렀다. 작고 탄탄한 엉덩이는 한쪽이 남자의 손 안에 다 들어올 정도로도 작고 옹골차 매번 좁은 비부를 꽉 감추고 있었다. 그걸 양쪽으로 벌려야만 간신히 모습을 드러내는 촘촘한 주름은 이제 조금만 공을 들여도 쉽게 입구를 열어 남자를 받아들였다.
“연희완 씨는 내가 아니라도 상관없습니까.”
봉긋한 둔부 사이를 가로질러 꽉 닫힌 그곳을 꾹 누르는 남자가 시선을 맞춰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