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정신이 없었잖습니까.”
“아아, 그래. 일은 잘 해결됐다지.”
그제야 경성에게 한 마디 건너 듣게 된 총괄 탈세 사건을 떠올린 학정이 인상을 쓴다. 뭐 빼먹을게 있다고. 제대로 된 분배가 안 되니 위에서 돈 부리는 놈들한테는 눈먼 돈으로밖에 안 보인다는 걸 안면서도 그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불쾌한 건 사실이었다. 허탈해하면 지는 거라고 우린 불쾌해만 하자고 넉살을 부리던 경성도 곧 대기실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 뒤로 학정 단원들이 그릇에 쏟아지는 줄줄이 비엔나처럼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우진의 복귀이기도 하고 희완의 복귀이기도 했다.
한참 떠들썩했던 대기실은 바닷속에 잠긴 것처럼 고요했다. 공연 시작 10분 전에 미리 집중하라고 대기실을 싹 비워줘 그 안엔 우진과 희완 단둘뿐이었다.
그렇게 염원하던 무대이기도 했다. 희완은 의자에 앉아 악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우진은 의자에 털썩 기대어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이용만 당하고 제대로 된 대가 하나 받지 못하는 여기가 지긋지긋해져서 그렇게 떠났다. 어차피 이용당하고 버려질 거면 그만한 대가 하나는 받아내야 직성이 풀리겠다고, 남들이 찢어내기 전에 스스로 벌리며 그 구덩이 속으로 기어들어 간 우진이 그동안 질리게 외워 왔던 대사들을 되짚었다. 살을 에일 듯한 긴장감은 아직이었다. 그 곁에서 뱃속에 뭉근하게 들어앉은 뜨거운 열기를 들여다보고 있던 희완이 시선을 들었다. 대기실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축하 화환엔 출처가 적혀 있지 않았으나 보낸 이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남자였다. 아마도 맞을 것이다.
눈을 감는다. 오랫동안 저를 품에 안고 그 말캉하고 따뜻한 혀로 온몸 구석구석을 핥아주던 남자는 약속대로 보이지 않는 곳에만 제 흔적을 잔뜩 남겨 놨었다. 그의 것을 한 번 받아 삼키고, 그의 손에 의해 밑을 들쑤셔지면서 사정을 하고, 또 다리를 넓게 벌리고 앉아 그의 시선을 받으며 자위를 하고, 질척한 점액질로 흥건하였던 제 손을 끌어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빨아주는 그에 의해 또 발기하여 사정을 하고, 기진맥진하여 깊은 잠에 든 걸 홀딱 벗겨 놓고 밤새 구석구석 빨아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저도 모르게 긴장한 사실을 남자가 먼저 알아챈 모양이다.
그런다고 그 긴장이, 아직은 죄 풀리지 않은 무대에 대한 희미한 공포증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진 않을진대, 우습게도 희완은 지금 편안했다. 무대 위에서 저를 풀어주어 날갯짓을 가르쳐 준 게 학정이었다면, 그 무대 위에 끌어 올려 날개를 달아준 것은 남자였다. 그 날개를 활짝 펴서 날아오르는 건 온전히 희완의 몫이었다.
“엄청 달다.”
무대에 오르기 3분 전 학정이 던져주고 간 초콜릿을 먼저 한입 베어 문 우진이 남은 것을 희완의 입에 물려주었다. 그걸 얌전히 베어 삼키고 녹여 먹던 희완이 길게 호흡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무대 위에 바로 우진이 있고, 밑에는 학정이 있고, 이 몸속 깊은 곳에는 남자가 있는데 긴장할 게 무어 있겠느냐 싶은 거다.
[대중은 꺾여진 것에 환호하고 부러진 것에 열광하는 못된 습성이 있다. 그러나 그 못된 습성은 변덕스럽기도 한 것이어서, 때때로 꺾여지고 부러진 것에 대해 잔인할 정도로 냉담하고 공격적일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를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중략- 우리는 여기서 이 젊은 배우를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누구도 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 배우가 한때 유수 영화제를 휩쓸며 국내외를 종횡무진했던 실력파 배우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의 합을 만들어 낼 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중략- 고작 1시간 30분이다. 당신이 그들을 만나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다.]
***
극단 앞이 몰려든 인파로 바글바글했다.
심부름 갔다가 졸지에 그 인파에 휩쓸렸다 겨우 빠져나온 석주의 꼴은 그야말로 봉변당했다는 말 외에는 그 어느 것으로도 표현이 안 되었다. 2개월간의 짧은 공연 내내 매진 행렬을 기록하며 매회 화제를 일으켰던 작품을 끝내는 우진과 희완은 그 소리 없는 돌풍의 주역이 되어 있었다.
기존 지지층이 두텁다 하더라도, 작은 소규모의 뮤지컬 작품 주인공들이 이렇게 대중적인 관심을 끌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엔 도우진을 향한 가시 박힌 시선들이 대중의 호의를 압도했다. 골수팬들은 대중의 날 선 관심을 끌어온 도우진을 눈에 박힌 가시처럼 대했고, 변변한 경력 하나 없이 주인공을 꿰찬 희완을 외무지상주의 세태의 수혜자, 비공식적인 낙하산, 등등으로 빈정거리기를 서슴지 않으며 매회 매 순간 그들을 평가했다. 2개월 내내 쏟아진 관심으로 인해 극은 숫한 화제를 뿌리며 커다란 성공을 거뒀지만 그 화제의 중심 선상에 있었던 두 배우 우진과 희완은 극이 크게 성공할수록 그 운신의 폭이 좁아져 가는 구석이 있었다.
그들의 ‘소속사’로 알려져 있는 학정은 연일 찾아오는 팬들로 북적거렸고, 일부 극성팬과 개념 없는 기자들로 인해 문단속에 그리 성실하지 않았던 학정 단원들 대부분이 문단속에 열정적이게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연습을 훼방하고, 선물이랍시고 물건을 던져 창문을 깨뜨리고 그런 난리도 없었다.
결국 연 기획 측에서 학정을 찾아가는 것을 자제해 달라는 호소문을 홈페이지에 올리게 되었고 일부 언론사에서는 예정 없는 방문을 삼가 달라 공문을 발송하기도 했다. 그렇게 두 배우에게나, 학정 단원들에게나, 연 기획에게나, 전쟁 같던 2개월이 지나고 극이 막이 내린 후에도 일부 극성팬들은 학정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우진은 3차 수술을 위해 요양 중이었고, 희완은 극이 내린 후 약 한 달간을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한 달만 쉬고 싶다고, 학정에게 허락을 받고 그날로 극단에 발길을 끊었다. 번 돈으로 여행 갔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강명 선생 따라 산 타고 다닌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둘 다 정확한 소식은 아니었다.
“어휴, 우리 이사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부단장님?”
“야, 야, 우린 이미 악명이 높아져서 이 바닥에서 받아줄 데도 없어. 그냥 적응해.”
“그렇지만 맨날 저한테만.”
여기가 아이돌 기획사도 아니고 밤낮없이 저기서 저러는 건 진짜, 좀 많이, 심하지 않느냐는 석주는 거의 죽을상이었다. 처음엔 밖에서 저러고 있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우리 형들 좋아해 줘서 고맙기도 해서, 샐샐 웃으면서 친절하게 대해 줬다가 콱 찍히고 만 석주에게 옳다구나! 그 등쌀을 다 떠넘긴 단원들이 이제 와 후회막심에 징징대는 걸 못 본 체하며 하나둘 그 곁을 떠나갔다. 그걸 웬일로 안 떨궈내고 끝가지 남아 다독거리던 경성이 창문 밖을 내다보며 코끝을 찡그렸다.
저 잡것들을 어찌 처치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나려나.
경찰이 와서 쫓아내도 그때뿐인 자칭 팬들을 웃는 얼굴로 내다보며 이를 가는 경성이었다. 쟤들 중 한 명이 밤중에 몰래 숨어 들어와 경성이 애지중지하던 낚싯대를 반 동강 낸 범인일 터였다.
낡은 소파에 앉아 김밥 하나를 우겨 넣으며 신문을 훑어보던 승도가 시선을 들었다. 막 사무소 안으로 들어서던 철진이 기막힌 표정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가 곧 고개를 숙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곧 공식 발표될 ‘신도시개발계획’ 에 관련된 서류들이 수북이 쌓인 책상에 김밥 한 줄 올려놓고 끼니를 때우고 있는 승도의 모습은 철진에겐 퍽 충격적인 장면이기도 했다. 이건 마치 마누라 등쌀에 못 이겨 집에서 쫓겨 나온 일중독자 남편 같은 게 딱 현재 액면가 그대로라 쳐다보기 민망한 것도 있었다. 그래도 대놓고 티는 못 내고 흘긋 서류더미에 파묻혀 있는 승도를 훔쳐보던 철진이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꺼내었다.
“식사 챙겨 올릴까요.”
서울시 인장이 찍혀 있는 서류 중 하나를 넘기며 마지막 남은 김밥을 털어 넣던 승도가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제야 철진이 제 눈앞에 있다는 걸 제대로 인식하고 시계를 내려다본다. 오전 열 시, 집에서 나온 지 약 3시간 정도가 지나있었다. 대꾸가 없는 승도의 눈치를 보던 철진이 다시 넌지시 말을 꺼내 왔다.
“식사 챙겨 올리겠습니다.”
“간단한 걸로 합시다.”
거절 않고 그러자 하는 승도가 다시 서류더미에 파묻히는 대신 책상을 돌아 나와 담뱃불을 붙이며 창가에 섰다. 열리는 창으로 11월의 날 선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찌는 듯한 더위가 가시니 그나마 살겠다며 노타이에서 다시 넥타이로 갈아탔던 철진은 이제 가벼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한창 장사 마무리 중인 클럽 주방장에게 전화를 걸어 식사를 주문한 철진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왜 집에서 드시잖고.”
결국 하고 싶은 말을 꺼내어 물은 철진이 선선이 흘러나오는 승도의 대답을 듣고는 그냥 조용히 입을 닥쳤다.
“애 깨우기 싫어서.”
실오라기 한 장 걸치지 않은 채로 침대에 엎드려 있던 희완의 등허리를 타고 얇은 시트가 흘러내렸다. 잘 뜨여지지 않는 눈을 꿈벅이며 상체를 들어 올리던 희완이 제 허리에 고인 것을 치워내며 침대 밖으로 두 다리를 꺼내었다.
막상 바닥에 내려놓기는 했으나 딛고 일어설 엄두는 나지 않아 잘 뜨이지 않는 눈을 도로 감고 가만히 앉아 있던 희완이 결국 몸을 일으켰다. 화장실이 급했던 거다. 아직도 풀려 있는 것 같은 다리에 힘을 주고 겨우 일어서니 허리에 걸려 있던 얇은 시트가 스르륵 흘러내리며 희완의 나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귀밑부터 발목까지 본래 희완의 피부색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고, 또는 새로 생긴 울혈자국들이 그 몸을 수북이 덮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발바닥에도 승도가 씹어 놓은 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희완에겐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남자가 곁에 있었으면 볼일 해결하는 건 수월했을 것을. 후들거리는 다리를 세우는 것도 일이었는데 아직도 벌어져 있는 뒤에서 뚝뚝 떨어지는 탁액까지 더해지니 몸 자체가 거추장스러워졌다. 이젠 거울에 비치는 제 끔찍한 몰골에도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변기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희완이 소변이 나올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정사가 심해지면 그다음 날엔 여러 가지로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희완은 작품을 끝내고 꼬박 일주일을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질 못했고, 이나마 움직일 수 있게 된 것도 겨우 사흘째에 불과했다. 셈을 해 보면 열흘간을 남자와 침대 사이에 끼어 있었던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간헐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물줄기 소리가 겨우 연이어졌다. 이거 이러다 정말 고장 나는 거 아닌가 싶어 내심 걱정을 했던 희완이 진 한숨을 토해내다 도로 이맛살을 찌푸리고 만다. 숨을 토해냄과 동시에 배 속에 뭉근히 뭉쳐 있던 덩어리가 툭 떨어진 까닭이었다. 매번 뒤처리를 해주던 남자가 오늘은 미룰 수 없는 일정이 있다며 아침에 간단히 샤워만 마치고 외출을 했었다. 살짝 정신은 깨어 있었는데 그도 확실치 않아 정말 그랬다고는 할 수 없었다.
온몸이 나른하다 못해 며칠 몽둥이찜질을 당한 것처럼 아팠고,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욱신거렸다. 하도 남자가 많이 빨기도 했고 또 남자의 것을 많이 빨기도 해서 까끌까끌한 입속은 돋아난 혓바늘로 난리도 아니었다.
볼일을 다 보고서도 한참 허리를 세울 수 없어 자리에 앉아 있던 희완이 겨우 세면대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거의 기다시피 걸어가 욕조 난간에 걸터앉으려다 미끄러져 욕조에 처박히고는 그냥 그대로 몸에 힘을 빼고 누웠다. 높은 천장을 밝히고 있는 형광등이 눈부셨다. 그러고 보니 눈알이 빠질 만큼 거기도 빨려져서 이렇게 시야가 안 좋은가 한다. 한참 그렇게 누워 있다 보니 몸이 으슬으슬해진 희완이 간신히 손을 뻗어 물을 틀 수 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샤워볼에서 갑자기 찬물이 쏟아져서 움찔하다가 이윽고 온수를 틀어 거기에 몸을 내맡긴다. 쏴아- 머리 위에서 빗물처럼 쏟아지는 샤워 물을 맞으며 희완은 다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