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도 높았던 정적이 작은 기침 하나에 깨어졌다. 매몰차게 저를 뿌리쳤던 팔을 붙잡고 입을 맞추려 했던 희완이 눈을 깜빡였다.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고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기어이 극을 깨어 버린 성현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순간 싸늘하게 얼어붙은 공간에서 먼저 고개를 숙여오는 성현의 얼굴엔 낭패스러운 기색이 역력하였다. 키스를 하려던 순간 그 앞에서 거부 반응을 보인 것은 명백한 실례였다. 악의가 없었기 때문에 더 질이 나빴고, 보는 눈도 지나치게 많았다. 한창 극에 몰입해 있던 스태프들 중에선 인상을 찌푸리는 이도 있었다. 아무리 연극이라도 동성끼리의 스킨십에 대한 거부감은 이해될 범주의 것이었지만 이런 식의 반응은 무례한 것이었다. 정작 당사자들보다 더 싸늘한 반응을 보이는 구경꾼들에게도 고개를 숙이려던 성현을 제지한 것은 희완이었다.
“타이밍이 나빴습니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실상은 그보다 더 알맞을 수가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굴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뛰어난 연기자라도 생리적인 거부감까지 완벽히 제어할 순 없는 법이었다. 희완까지 연달아 여기저기 죄송하다 인사를 하니 분위기가 요상해져 버렸다. 이게 무슨 한 씬에 몇십 명씩 달라붙어 찍는 영화나 드라마도 아니고, 기껏해야 반주자나 연출한테나 고개 숙이고 끝내면 될 것을, 뭘 저렇게까지. 연습 도중에 삐끗하는 건 예사거늘, 대역죄인처럼 구는 둘을 만류하고 들어선 건 다름 아닌 연출이었다.
“됐습니다. 그러다가 목 디스크 옵니다. 그리고 여기 소속 아닌 사람들은 좀 빠집시다. 우리 배우님들이 아름답고 멋지신 분들이라 자꾸 보고 싶은 마음 내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섬세하기 짝이 없는 나를 배려해서라도, 좀 나가주시지들?”
웃으면서 압력을 넣는 연출 덕에 연습실 곳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구경하던 몇몇 스태프들과 제작사 직원들이 툴툴거리며 자리를 비워줬다. 연습 시에도 보는 눈들이 붙으면 현장감이 붙는 건 사실이라 참관에 제재를 두지 않았었는데, 그 생각을 조금 바꾸는 연출이었다. 우리 성현 씨가 보기보다 많이 섬세하시네.
“좀 쉬고 할까요? 아직 한 시간 정도 여유 남았는데, 음료수라도 한 잔씩 마시고 와요. 담배는 피우지 말구요.”
금세 교통정리를 마치고 잠시 연습을 끊어 가자 하는 연출이 시간을 확인하곤 손가락 열 개를 다 펴 보였다. 십 분만 쉬고 가자는 뜻이다.
“커피 드십니까? 이온음료?”
눈을 맞추며 묻는 희완을 빤히 보던 성현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온음료가 좋겠습니다.”
2층 휴게실 자판기에서 이온음료 두 캔을 꺼내 하나는 성현에게 건네주고 하나는 제 손에 쥔 희완이 탁자를 가운데 놓고 그 맞은편에 앉았다. 약 10여 평의 휴게실은 오가는 사람 없이 썰렁하기만 했다.
“아깐 미안했습니다.”
“아니, 정말 괜찮습니다. 너무 죄송스러워하니까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말씀도 편하게 놓으세요. 선배님이시잖아요.”
노는 판이 다르긴 했어도, 희완보다 연상에 아주 어려서부터 배우 활동을 해 왔으니 배우라는 직업군으로만 따지자면 희완의 선배가 맞긴 했다. 비록 중간에 꽤 오랫동안 휴식기를 갖긴 했어도 희완을 비롯해 아직 성현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희완 씨가 너무 잘생겨서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한 모양입니다.”
“선배님께 그런 말씀 들어도 별로 기쁘지 않습니다. 하이틴 스타로 날리셨잖습니까.”
“작품에 편승한 인기였죠. 군대 다녀오니 거품 쫙 빠져 있던데요.”
“아, 군대 다녀오시느라 활동을 안 하신 겁니까.”
안 하셨다니, 오랜만에 듣는 다정한 말이라 생각하는 성현이었다.
빽도 없고, 재능도 출중하지 않으니 절로 도태됐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그걸 못 견뎌서 군으로 도피한 것이었고, 시간이 흘러도 못 잊겠어서 돌아왔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어서 결국 언더나 다름없는 이 판으로 이목을 돌리게 된 것이었다. 그 역시도 큰 재미를 못 보는 중에 들려온 오디션 합격 소식은 가뭄 중 단비였다.
“희완 씨는 드라마나 영화 쪽으로는 진출 안 하십니까? 여직 그쪽에서 못 본 게 신기한데요?”
“아, 저는 본격적으로 연기하게 된 게 얼마 되지 않아서요. 무대에 선 것도 손에 꼽을 정돕니다.”
“광고는 잘 봤습니다. 화면발도 잘 받아서 섭외요청이 꽤 들어왔겠던데.”
“아하하, 음료 값으로는 너무 후한 과찬이십니다.”
머쓱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희완이 진심으로 쑥스러워하는 것 같아 의외라 생각하는 성현이 피식 웃었다. 귀엽네. 미인치고 성격도 좋고. 들려오는 소문으론 이쪽도 꽤 험난하게 굴렀던 것 같은데, 듣던 것과는 달리 꽤 수더분한 성격도 맘에 들었다. 반면 배역 몰입도가 높아 극에 돌입할 때면 딴 사람이 되곤하는 모습은 또 천상 배우였다. 촉박한 일정이었고, 어차피 번외편으로 러닝 후반부터 투입되는 크로스 페어 특성상 희완과 합을 맞추는 건 오늘까지 두 번째였다. 저번에는 간단히 음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모든 시간을 소비했고, 직접적인 동선까지 세세하게 짚어가며 연습에 임했던 건 오늘이 처음이라, 갑작스레 그의 입술이 다가왔을 땐 솔직한 말로 심장이 뚝 떨어지는 듯했었다.
“아까 일은 진짜 미안했습니다. 연습에서도 실제로 하는 건 처음이라 긴장했었습니다.”
“아, 그러셨습니까. 몰랐습니다. 저는 매번 해 와서.”
보통 연습 시에는 키스신 정도는 생략해 왔었는데 우진도 희완도 그런 쪽으로는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매번 정석대로 극을 소화하곤 했던 것이다. 그제야 다른 페어들의 연습은 저희와 사뭇 다른 분위기겠구나 새삼 실감하는 희완이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선 뒤늦게 아차 싶은 얼굴을 하였다.
“그럼 아깐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저는 당연히 하는 건 줄 알고.”
“정석대로 하자면야, 당연히 하는 게 맞죠. 그러니 사과하실 건 없습니다. 다만,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몇 번 정도는 거르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네. 연출 선생님만 허락하신다면 괜찮습니다.”
연기에 고지식한 면을 보이는 것치고 신선한 답변에 또 의외성을 발견한 성현이 남은 음료를 홀짝이며 다른 화제를 꺼내었다.
“도우진 씨하고 페어였죠. 소문이 대단하던데, 첫 공 티켓도 벌써 매진됐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그중에는 제 티켓도 한 장 있구요.”
“저도, 선배님 첫 공 회차 티켓 있습니다. 좋은 좌석 안 줘서 2층에 앉을 것 같은데, 거기도 전망 좋더라구요.”
“아아. 신축 건물 말입니까? 아직 개관 전일 텐데?”
“네, 이번 주에 개관한다죠.”
고개를 주억거리며 시계를 내려다본 희완이 남은 음료를 한 번에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십 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 뒤를 따라 일어선 성현도 빈 캔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휴게실을 나섰다. 아이돌 페어도 아이돌 페어지만 몇 장의 스틸 컷 공개 후 가장 큰 반응을 얻은 것은 바로 도우진과 연희완이었다. 확실히 배우 중에서도 발군인 그들의 외모와 재능은 단 한 장의 사진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나, 모든 추문을 제외하고도 보는 이의 시선을 빼앗는 마력이 있었다. 놀라운 건 도우진의 옆에서도 그 존재감을 잃지 않았던 배우 연희완이었다.
얄팍한 웃음이나 표정 없이도 그는 아름다웠고 매혹적이었다. 그 단 한 장의 사진으로 패배감을 느껴야 했던 성현은 얼마 안 되는 시간, 같이 연습을 맞추면서 그 패배감이 희석되는 것을 느껴야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진 속에서 보는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압도적으로 시선을 빼앗아 갔던 그는 일상에선 그 존재감이 희박했다. 어딜 가든 눈에 띄는 외모와 분위기는 여전했지만 사진 속의 그 느낌과는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었는데.
잠시 생각을 멈췄던 성현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제 곁에 선 희완을 보았다.
그것이 작품 속의 희완과 작품 밖의 희완의 차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재개발 지역만 골라 전국 방방곡곡을 쫓아다니는 소위 꾼을 만나고 오는 길에 철진의 연락을 받은 승도가 클럽에 들렀다. 이전 날 지시했던 일에 관한 것이었다.
보안 카메라에 잡힌 것은 VIP 전용 구역이었다. 보안이 높고 접근이 어려우니 클럽 내에서도 가장 질펀하고 은밀한 일들이 매일같이 일어나는 장소였다. 거기서 익숙한 얼굴을 찾았다. 얼마 전 희완이 잔뜩 취해 들어온 날 그 옆에 계속 끼고 앉아 연신 술잔을 비우게 했던 총괄 팀장이 거의 헐벗다시피 한 여자 여럿을 끼고 돈을 뿌리고 있었다. 가만 보니 실제 취한 건 아니고 취한 척하면서 은근슬쩍 사람 비위 맞추고 까내리기도 하며 일을 성사시키는 전형적인 영업맨의 아류였다.
따라주는 술을 족족 바닥에 부어가며 흥청망청 돈을 뿌리는 총괄 팀장은 유명사학재단 후계자로 돈 쓰며 놀기 좋아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것 만이라면 상관이 없겠는데, 독립하겠다고 뛰어든 공연업계에서도 영업을 더럽게 한다는 소문이 은근슬쩍 돌고 있었다. 승도가 알아본 바로 꽤 큰 건도 여러 건 있었는데 돈이나 협박으로 무마시켜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 성매매 브로커 짓이나 하던 하준우와 하등 다를 게 없는 놈이었다.
룸에 들어앉았을 때부터 묘하게 신경을 긁던 놈의 정체를 알고 나니 승도는 이제 화도 나지 않았다. 운이 없는 건지, 원체 그런 끼가 남다른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쪽 바닥이 워낙 진창이라 그런지, 뭘 좀 하겠다고 한 발자국만 내딛어도 귀신같이 알아채고 달려드는 날벌레 중에서도 제일 더러운 놈들만 꼬여드는 희완이 이젠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고 그 옆에 앉아 웃기도 잘 웃으면서 드물게 즐거워하던 모습을 떠올리던 승도는 딱히 유쾌한 기색도 불쾌한 기색도 아니었다. 걸려들기 전에 알았으니 됐다는 생각이다. 더 흉한 꼴 보기 전에 잘라내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안 그래도 요즘 공연 전이라고 얼굴 한번 마주칠 틈도 없이 바쁘게 나돌아 다니는 희완이 정신 팔려 있는 동안 정리해 놓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한다. 그러다 별거 하는 것도 없는데 가는 길마다 악질들만 더럽게 꼬여드는 희완을 떠올린다. 나른한 정적이 내려앉은 로비에 앉아 기분 좋은 열기를 띤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던 모습이 선했다. 그 곁을 뻔뻔스럽게 차지하고 앉은 승도야말로 그 곁에 달라붙은 악질 중 악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