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83화 (83/123)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입니다.”

대관받는 입장에서 하는 말에 대한 소감인 줄 알고 생긋 웃으면서 그렇습니까. 하는 희완이 시선을 들었다. 하늘이 맞닿아 있는 넓은 천장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는 희완의 부드러운 눈매를 엿보던 남자가 무어라 달싹이려던 입술을 도로 닫았다.

흔하지 않게 웃음을 보여주니 번지듯 솟는 기분을 무어라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고작 이깟 건물 하나로. 아니, 희완에게는 고작이 아닐 것이다. 집 없이 떠도는 들고양이처럼 사정 따라서 여기저기 쫓겨 다니던 가난한 배우에게 이런 건물은 겨우, 고작이 아닐 것이었다. 때문에 승도는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설계자를 몇 번씩이나 갈아 치우고 음향 전문가와 무대 전문가들을 직접 섭외해 비싼 돈 쥐여 줘 가며 한 층 한 층 건물을 지어 올렸다. 충동적으로 시작한 일치곤 공을 많이 들였다. 가끔 희완을 파고들고 싶다는 욕망이 들이칠 때면 유령처럼 서 있는 폐쇄된 공사장에 찾아와 밤이 기울 때까지 회색 건물을 올려다보다 돌아섰다. 억지로 잡아채어 오고 싶은 희완에게 향하는 발길을 붙잡을 무게로 이 건물은 적당했다.

“맘에 들어서 더 다행이고.”

알 수 없는 말을 연달아서 하는 남자가 쑤욱 몸을 일으키는 걸 보던 희완도 다리를 펴며 그 곁에 다가갔다.

“아직 개관 전이라 궁금했었는데, 구경시켜줘서 고맙습니다.”

“아무도 안 막습니다.”

주인이 희완이니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보러 와도 막을 사람이 없겠지만, 그걸 모르는 희완이 그렇게 경비가 허술해도 되는 거냐며 의아스러운 눈길을 보낸다. 아직 신축 건물 특유의 냄새가 빠지지 않는 내부를 휘돌아 주차장 입구로 빠져나가는 내내 승도의 등 뒤에 서 있던 희완이 슬쩍 그의 팔을 잡았다. 돌아보니 그 붙잡은 팔을 끌고 시야가 차단되는 모퉁이 뒤로 숨어들어 간다.

“이래도, 하지 말라는 겁니까.”

먼저 입술을 부딪쳐 오는 희완에게 혀를 내어 주는 승도가 묻는다.

내일부터는 이런 식으로 졸라도 정말 금욕을 해야 하는 거냐고.

그걸 듣던 희완이 이 짧은 순간에도 저를 능숙하게 파고 들어오는 남자의 키스에 잠시 몽롱해진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저었다.

“눈에 띄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러면 다 괜찮다고, 제법 단호하게 잘랐던 아까와는 달리 한결 누그러진 투로 답하는 희완은 일부러 시간을 빼 저를 이곳에까지 데려온 남자에게 무척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걸 고스란히 읽어내는 승도가 목덜미를 감싸 안아 더 붙을 수도 없이 바짝 밀착시키며 귀밑 피부에 뜨거운 입술을 대었다.

“어떻게 하면 눈에 띄지 않을지, 생각을 좀 해 봐야겠습니다.”

역시 금욕은 안 되겠다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남자의 가슴에 붙은 희완이 화사한 색으로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벽을 담아내며 눈썹을 접었다.

***

이제 곧 개관식이 있을 신축 건물은 학정에서도 뜨거운 감자였다.

가격도 착한 것이 때깔도 죽인다며 신축 건물에 대한 찬사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늘어놓는 승원의 이빨에 피식거리면서도 동의를 하는 단원들은 곧 저들도 그곳에서 공연을 올릴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을 기꺼워했다. 일렬로 죽 늘어서서 목청껏 소리를 높여 발성 연습을 하다 문 옆으로 보인 희완을 발견하고 우르르 몰려든 단원들이 연습 안 하고 뭐 하느냐는 필영의 호통에 다시 우르르 몰려가 연습에 임하는 걸 본 희완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었다. 한창 연습 중에 끼어들기도, 구경만하기도 뭣해서 복도 난간에 나와 있던 희완이 옆을 돌아보았다. 얼굴 보기 힘들었던 학정이 옆에 서 있었다.

“오늘은 연습 없냐.”

“첫 공 얼마 안 남았으니 머리 좀 식히고 오라셔서요.”

뭐, 그런 것도 나쁘지 않지. 하는 학정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불을 붙이지 않고 입술을 꾹 다무는 학정의 턱 밑으로 수염이 거뭇하게 올라와 있었다. 그래도 저번처럼 삼수도인 소리 들을 정도는 아니라 경성의 잔소리는 피해갈 수준이었다.

“요즘 그리 바쁘십니까?”

종종 아파트에 들러도 예전처럼 얼굴 보기 힘들었던 학정에게 물으니 그렇다 대답하는 그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추운 계절을 보내 오는 동안 학정 역시 심경의 변화를 많이 느낀 모양으로 여지껏 지켜 왔던 방식이 바뀌어져 가고 있었다. 그것을 경성은 부러지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게 휘어지는 것이라 하였다. 부러지는 것보다는 백배 낫고, 휘어져도 나름의 정도가 있으니 또 좋은 것이라고도 했다. 주변에 사람이 많고, 또 기꺼이 이용당해줄 이가 있어도, 마냥 놀리기만 했던 학정이 이리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 것도 그것에 기인한 까닭이었다.

“들어간 작품 마치면 바로 연습 들어갈 거다.”

그래도 오디션은 거칠 거라는 학정이 라이터로 불을 붙이며 먼저 난간을 나섰다. 1층 계단으로 내려가는 걸 보니 또 일이 있는가 하는 희완이 잘 다녀오시라며 인사를 하곤 다시 난간 너머로 시선을 돌린다. 금세 1층 출입구로 모습을 보이는 학정이 돌아보며 휘 손을 젓고는 저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평일 대낮이라 한적한 길가로 밝은 빛이 내리고 있었다.

“으악! 안 돼요!!”

절규하는 석주가 네트 너머에서 무너졌다. 그걸 본 승원이 쾌재를 부르며 희완에게 달려든다.

“아하하하! 짜샤! 내가 넌 안 된다고 했지?”

승리의 도취감에 빠진 승원이 악당처럼 웃으며 패배감에 젖은 석주를 비웃는다. 저녁 내기 족구 한판의 결과였다. 건물 뒷마당에 네트를 걸어 놓고 편을 갈라 시작한 게임의 승자는 경성이 주장으로 있던 희완네 팀이었다. 의외로 발재간이 좋은 희완과 의외로 발재간이 형편없는 광민 덕에 승기는 일찌감치 희완네로 기울어져 있었다.

“형! 이건 진짜 사기에요!”

게임 시작도 전에 저는 희완과 꼭 한 팀 할 거라던 석주 엿 먹이는 심정으로 가위바위보 첫 판에 이기자마자 석주를 차출해 간 필영이 진짜 억울하다고 성을 내는 석주를 보고  배꼽을 잡으며 웃었다.

키가 작아도 우락부락하게 다부진 몸으로 사방팔방을 종횡무진하던 필영은 한때 족구계의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던 경성의 공격을 현란하게 막아내었지만 손수 뽑아 간 팀원들이 함정이었다. 게다가 적절하게 치고 들어가 이거다 싶은 공격은 족족 타이밍 좋은 희완의 발에 막히니 경기 한번 안 풀릴 만하다. 그런 답답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편인 희완이 점수를 올릴 때마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환호성을 올리던 석주 저놈은 적인지 아군인지, 정체성의 확립이 필요하다며 석주가 헛발질을 할 때마다 정체성! 정체성! 확립! 확립! 을 외쳐대던 필영도 결국 경성의 비웃음을 백그라운드 삼아 장렬한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땀에 흠뻑 젖어 시멘트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필영의 얼굴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느새 말끔하게 땀을 닦아 낸 희완이 시원하게 얼린 생수병을 내밀고 있었다. 석주 그놈은 밸도 없는지 역시 우리 희완이 형은 못하는 게 없으시다며 벌써부터 딸랑딸랑 알랑방귀 작렬이시다.

“어이구 저런 밸도 없는 놈.”

하는 타박에 선배님들 땀 냄새 쩐다면서 코를 쥐어뜯고 있던 주경에게서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하는 짓이 똑같다.

“술 한잔하러 가야지?”

“네, 필영 선배님이 사주시는 술 오랜만에 먹게 됩니다.”

돈도 제일 잘 버는 놈이 하는 소리 한번 야박하다. 제 빈털터리 주머니를 떠올리며 불쌍하게 코를 훌쩍이던 필영의 뒤에서 와락 달려드는 경성이 소주를 짝으로 시켜다 먹어야겠다며 쾌재를 부른다.

자정을 훌쩍 지나서야 마무리된 술자리 끝에서 필영이 사우나 가서 땀 한번 쭉 빼고 오자는 제안을 했다. 대부분 꽐라가 돼서는 뭐라는지도 파악 못 하고 무턱대고 옳소! 옳소! 찬성이오! 찬성이오! 를 외치는데 그 사이에서 난감한 듯이 웃던 희완이 슬쩍 발을 뺏다. 술 마시고 땀 안 빼면 꼭 뒷간 갔다 안 닦고 나오는 기분이라며 입단 초부터 술자리 끝에는 단골 목욕탕에 단원들 우르르 끌고 가 사나이들의 우정 운운하다 여자 선배들에게 혼쭐이 나고서도 그 버릇을 못 고친 필영이 아쉬운 얼굴로 희완을 붙잡았다.

“이 자식, 너와 내가 만나서, 사나이 알몸으로 쌓아 온 우정이 몇 년인데, 날 버리고 가겠다고?”

이몽룡이 잡는 성춘향이도 이리 애절하지는 못하겠다고 옆에서 키득거리던 경성이 미련을 못 버리는 필영을 질질 끌고 가며 어서 가 보라고 희완에게 손을 흔들었다. 덕분에 수월하게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게 된 희완이, 알딸딸하게 취한 상태에서도 차례차례 저에게 폴더 인사를 해 가며 선배들 뒤꽁무니를 오리 새끼들마냥 졸졸졸 뒤따르는 후배 단원들에게도 하나하나 손을 흔들어주었다. 모퉁이를 돌아 나가며 사라지는 그 행렬의 끝을 한참 응시하다 귓불을 문지른다.

어영부영 남자와 같이 살게 되면서 방치해 둔 자취 집을 오늘은 꼭 정리하려 했는데 그게 또 잘 안 됐다. 계속 남자 곁에 눌러살 것이냐 물어왔던 우진에겐 일단이라는 단서를 붙였지만 희완은 웬만큼 큰일이 있지 않은 이상은 계속 그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는 중이었다. 단지 그거와는 별개로 그 곁을 떠나와 있는 동안 저 혼자 서고 자고 엎어지며 이 몸 하나 기대 왔던 자취 집을 처분하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자꾸 가는 길이 더뎌지고 처리하는 속도도 느려지는가 한다. 오늘도 결국은 자취 집으로 향하지 않고 곧장 남자의 아파트로 향하는 희완이 옷에 닿아 쓰라린 젖꼭지 부근을 슬쩍 문질렀다. 역시 이 상태로 같이 사우나를 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짜릿한 감각이 그 작은 살점을 타고 온몸으로 번져 가는 걸 가만 누르고 있던 희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전신에 남은 흔적이 아니더라도, 남자는 희완을 너무 민감한 몸으로 만들어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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