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가 만들어졌다는 소리가 어디서 새어 나간 듯했다.
이럴 것 같아서 일부러 당일 개인 직통 전화로 약속을 잡고 장소도 요릿집으로 한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이쪽 보좌관 측에서 새어 난 것 같다며 죄송하다 하는 상대에게 알겠다며, 그럼 조만간 또 연락을 드리겠다 하고 먼저 통화를 끝낸 승도가 활짝 열린 창밖으로 담배 연기를 훅 뱉어내었다. 자리가 취소되었으니 식사는 내올 것 없다는 승도의 전언이 있은 후 장지문이 열리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등나무에 앉아 곧잘 담배를 태우곤 하는 승도에게 재떨이를 밀어 주는 것으로 잔소리를 대신하는 그녀는 희완이 불 때마다 예쁘다 감탄하던 여인이기도 했다.
“식사는 안 하세요?”
“안 합니다.”
“오늘 그 잘생긴 청년은 안 오구요?”
대꾸를 않는 승도가 담뱃재를 그냥 떨어뜨리려는 걸 본 여자가 재빨리 그 밑에 재떨이를 밀어 주며 살풋 눈가를 접는다.
“약과 얹어 놨어요. 가실 때 좀 들고 가세요. 그 청년 주전부리는 좋아하나요?”
저번에 약과랑 식혜 내준 거 다 비운 걸보긴 했는데.
하며 말끝을 흘리는 여자는 이미 벌써 희완의 몫을 챙겨 놨을 것이었다.
담백하게 생긴 것과 달리 단것들을 좋아하는 희완은 주전부리도 심심찮게 비워내곤 했다. 양이 많다기보다는 조금씩 자주자주 먹는 편이었다. 손을 안 탈 것 같이 생겼는데 의외로 손을 잘 타기도 해서 여기저기서 입에 물려 주는 걸 잘 받아먹고 다니는 것 같았다. 하긴, 그리 노숙 생활이 길었으니 그런 버릇이라도 들여야 안 굶고 다니기라도 했을 것이다.
남은 꽁초를 비벼 끈 승도가 재킷을 걷어 일어서며 여자를 돌아보았다.
“식혜하고 뭐 딴 거 있으면 종류별로 싸 주십시오.”
“네, 안 그래도 사이좋게 나눠 드시라고 변변찮은 찬이랑 몇 가지 같이 싸 놨답니다.”
변변찮다고 낮춘 것치곤 꽤 맛이 좋을 것이었지만, 예상했던 답이라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승도가 옷을 걸쳐 입으며 장지문을 나섰다.
첫 공연이 일주일도 안 남은 시점이라 하루가 바쁜 희완은 귀가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자정이 넘겨서 들어오는 건 예사였고 종종 3시나 4시를 넘겨 들어오기도 했다. 헌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일찌감치 들어와 소파에 엎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들고 있던 걸 대충 챙겨 냉장고에 넣어 놓고 거실을 가로질러 나오는 승도가 재킷을 벗으며 소파 앞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악보를 보다 잠든 건지 소파에 엎드려 곤히 잠든 희완의 비죽이 나온 오른손에 악보 여러 장이 가까스로 걸쳐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맺혀 있는 그것들을 걷어 손에 쥐고는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음악 쪽으로는 영 소질이 없으니 대충 훑어봐도 알 것 없이 진한 글씨로 여러 번 지웠다 고친 흔적이 남은 희완의 메모만 눈에 든다.
작품에 대한 몰입도와 진지한 태도가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변치 않았다는 생각이다. 이처럼 비일상의 연장선인 무대 위에 올라서 제 빛을 발하는 보석은 흔치 않았다. 그건 노력만으로는 불가한 것이었고, 연희완은 그 재능에 노력까지 갖춘 배우이기도 했다. 무대 위에서 흔히들 일어나는 일에 발끈하는 스스로가 우습기도 하면서, 그러나 이것을 온전히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게 승도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때때로 그의 집착이라는 것에 불을 당기기도 했다.
물욕조차 없이 오로지 파괴만을 일삼아 왔던 승도에게 그 집착이라는 것은 살이 튀고 피가 튀는 일 외에는 전혀 접점이 없던 것들이었다. 이런 것에 집착하게 될 줄, 이런 것에 마음 쓰이게 될 줄, 누구인들 예상이나 했겠나.
불편하게 엎드려 잠든 희완의 하얀 뺨이 그사이 더 기른 머리칼 사이로 비죽 솟아 나왔다. 그걸 테이블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응시하던 승도가 한참 만에 몸을 일으킨다. 안방에서 이불과 베개를 끌어와 희완의 턱 밑에 고여 주고, 목 끝까지 덮어준다. 그리고 그 앞에 바닥을 깔고 앉아 새벽이 밝아 올 때까지 그 곤히 잠든 모습을 보았다.
눈을 떠 보니 아파트에 아무도 없었다. 씻고 나와 우유를 마시려던 희완이 냉장고에 들어차 있는 주전부리들을 발견하곤 그걸 조금씩 종류별로 꺼내 놓았다. 이른 아침이라 입맛도 없었고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었다. 옷을 갈아입기 전에 식탁 앞에 앉아 대본과 악보를 번갈아 보며 우물우물 약과나 곶감 등으로 공복을 채우던 희완이 10분 뒤면 도착한다는 총괄 팀장의 전화를 받고 뒤늦게 옷을 갈아입었다.
마침 가는 길이라 들렀다는 총괄 팀장은 이런 중요한 날 배우 혼자 출근하는 거 아니라며 희완을 재촉했고, 무대 전 최종 리허설이 중요하긴 해도 이렇게 유난을 떨 정도는 아니라 생각하던 희완은 내심 난감해했었다. 그러나 총괄 팀장의 권유를 한사코 거절할 이유도 찾지 못해 예정보다 빨리 준비를 마치고 내려간 희완의 앞으로 고급 컨버터블이 맵시 있게 멈춰 섰다. 꾸벅 인사를 하고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는 중에 만유에게서 휘파람이 불어 나왔다.
“휘유~ 완전 좋은 데 사시는데? 누구 집?”
“아, 아는 형네 얹혀삽니다.”
“그 아는 형 능력 좋으시네. 여기 시가가 몇십 억은 훌쩍 넘을 텐데?”
아, 그렇습니까. 하는 희완의 얼굴을 룸미러로 흘긋 살펴보던 만유가 피식 웃는다. 안전벨트를 매면서도 떼어 놓지 않던 악보를 들여다보고 있는 얼굴을 보아하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머릿속에서 소화를 못 시킨 것이리라. 이렇게 집중력이 좋기도 힘들 텐데 말이다. 확실히 얼굴만 반반한 여느 놈들하고는 다른 구석이 있었다. 스폰서랑 같이 산다는 소문도 거짓은 아닌 것 같고. 지난밤 집도 절도 없이 노숙 생활하던 가난한 무명 배우가 불러주는 주소를 듣고 만유는 그리 판단을 내렸었다. 아니면 그 고지식한 성격에 스폰서를 형이라고 뻥치는 게 맘에 걸려 이리 데면데면하시나, 하는 만유가 댄스가요가 흘러나오는 라디오 볼륨을 줄이며 가볍게 말을 걸었다.
“그럼 그 형한테 혼나지는 않고?”
“네? 무슨 말씀이신지.”
“저번에, 완전 필름 끊겨서 들어갔잖아. 그때 내가 희완 씨 모셔다 주느라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아, 팀장님이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저는,”
“혼자서도 알아서 잘 찾아온 줄 알았다고? 하긴 개들도 있는 귀소본능인데 사람이라고 없겠어? 그런데 희완 씨 본인 주사가 뭔지 모르지? 내 우진 씨한테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는데, 응?”
왜 본인 술주정을 우진한테 물어보려 했다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여태 취해 본 적이 몇 번 없으니 잘 모르는 게 사실이긴 했다. 사실 몇 번 취한 걸 본 극단 선배들도, 우진도, 남자도, 어땠는지 말을 안 해주니 크게 나쁜 버릇은 없나 보다 하는 것이었다. 그걸 드러난 표정만으로도 다 캐치해 낸 만유가 재밌다는 듯이 푸흐흐흐 웃는다.
“거봐, 모르고 있었다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뭐, 추태라도 부리나.
“제가 무슨 실수라도 한 게 있습니까.”
“실수는 무슨, 그런 주사라면 완전 고맙지. 어휴, 술 마시면 개 되는 게 한둘이야, 한둘? 난 내 주변 놈들이 희완 씨 같은 주사만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 오래전에 가산 탕진하고 파락호로 싸돌아다녔을 거야. 그 꼴 보겠다고 있는 호주머니 없는 호주머니 다 동원해서 술 싸 들고 다니면서 먹였을 테니까.”
하며 제 풀에 제가 꺾여 흐흐흐흐 웃어대는 만유의 표정이 밝았다.
어쩐지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반응에 제 주정이 뭔지 이제야 궁금증이 돋은 희완이 빤히 그를 보다 자연히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서 그날 아침 그런 건가.
평소라면 샤워볼로 희완의 가랑이를 씻어주고 갔을 남자가 손에 쥐여만 주고 나가기에 이기지 못할 술 마셨다고 그러는가 하고 넘겼었는데.
궁금해하는 희완을 흘긋 돌아보는 만유가 싱긋 웃으며 산뜻하게 답한다.
“애교가 늘어.”
무대 리허설 전에 있는 총 연습에 참석한 희완이 크로스 페어를 제외한 다른 페어들이 펼치는 극을 집중해 감상하였다. 연출의 말대로 정말 각 페어마다의 느낌이 너무 달랐다. 애절하고, 풋풋하고, 섹시하고, 농염하고. 치정극이라는 남자의 평가는 어쩜 맞는 말인가 싶기도 했던 게, 베테랑 배우들이 채우는 극을 보면서였다.
심리 스릴러극이라기보다는, 엇갈린 두 남자의 사랑이 범죄라는 갈등이 배치되며 심화되는 정말 치정극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이런 해석은 타이틀을 정면으로 배반하는 행위라는 악평이 쏟아질 수도 있겠지만 연출은 터부를 다룬다고 해서 사랑이란 감정을 굳이 배제시킬 이유가 없다 했다. 농도 짙은 감정을 희석시키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극의 퀄리티가 달라질 테지만, 연출이 뽑은 배우들의 힘은 대단했다. 무엇보다 그런 배우들만 골라 뽑은 연출의 안목이 매우 탁월했다.
두 번째 페어까지 리허설이 끝나고 다음이 희완과 우진의 차례였다.
보는 사람들을 배려한다고 평소 귀밑에서 턱 밑까지 길게 이어지는 칼자국을 긴 머리칼이나 옷깃 등으로 가리고 다니던 우진은 리허설에 앞서 머리를 짧게 쳤고, 흉터 또한 가리지 않았다. ‘그’ 역할에 맞게 댄디하면서도 어딘지 서늘하고 오만한 구석이 엿보이는, 그는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게 건조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