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76화 (76/123)

제 안에서 축축 늘어지는 희완을 안아다 침대에 눕힌 승도는 하고 있던 깁스를 깨끗이 푼 후였다. 문득 문득 시선이 스칠 때마다 애달아하는 눈길에 별것도 아닌 걸 오래 끌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나마 희완이 있어 이 정도로 끝낸 것이다. 한번 개싸움에 달려들면 승도는 상대방뿐 아니라 스스로도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극한으로 치닫곤 하였다. 부서지는 차 안에서 사색이 되어 있던 희완이 아니었다면 아마 뼈를 통째로 내어 주며 그들을 더 잔인하게 도륙 냈을 것이었다.

“덥습니다.”

드물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리 말하는 희완이 역시 뜨거운 손바닥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총괄 팀장이 옆에서 자꾸 권하는 술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언변이 좋은 그는 희완으로 하여금 기분 좋게 술을 넘기게 하는 재주도 가지고 있어 결국 주량을 넘기고 말았다. 결코 가벼운 주량이 아님에도 말이다.

붉게 풀린 눈으로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던 희완이 눈가를 문지르던 손바닥으로 제 입을 덮고 훅 숨을 불어 보았다. 술 냄새가 지독하다. 이 상태로 키스하면 남자도 취하는 게 아닌가, 하는 두서없는 생각들을 하던 희완의 상체가 일으켜졌다.

술기운이 올라 평소보다 더 짙게 붉어진 입술이 컵에 닿았다. 목이 탔어서 꿀떡꿀떡 마시는데 이상하게 목구멍으로 안 넘어가고 다 턱 밑으로 줄줄 샜다. 왜 이러나 싶어 물끄러미 제 턱 밑만 내려다보고 있던 희완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일순 흐려진 시야로 시커먼 것이 가까이 다가왔다. 시커먼 것이었는데 희완은 그게 무엇인지 너무 잘 알아서 조금도 경계하지 않고 다가오는 입술을 가만 받았다.

입술이 갈라지며 미지근해진 물이 천천히 목구멍으로 흘러들어 왔다. 시원하진 않았어도 타는 듯한 목구멍으로 흘러드는 그 물은 단비였다. 거의 반쯤 감긴 눈가를 찡그리며 꿀떡꿀떡 흘려 넣어 주는 물을 잘도 받아 마시던 희완이 다시 입술을 벌렸다. 목이 마르니 더 달라는 뜻이다. 그걸 보고 또 제 입에 물을 담아 입을 맞추는 승도가 천천히 물을 흘려 넣어 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얼음을 가져와 녹여 넣어 줄 걸 그랬지, 하는 승도가 입술을 떼며 희완의 목 밑으로 흐른 물을 가볍게 훑어내어 준다.

“으음.”

알코올이 들어가 민감해진 몸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걸 무심히 넘긴 승도가 물기가 남은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툭 건드렸다.

“요새 주정이 늡니다.”

하는 소리에 멍하니 승도를 올려다보던 희완이 잘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인다.

“취한 것 같습니까.”

미친놈이 나 미쳤다고 하진 않지만.

희완이 이러는 건 의외라 빈 컵을 내려놓고 그 앞에 앉는 승도가 가만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웬만큼 취해도 얼굴로는 잘 티가 나지 않는 희완의 뺨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주량을 넘겼다는 소리다. 클럽 모니터 앞에 앉아 내내 룸 비디오 속 희완을 들여다보았다. 싫다는 소리도 없이 주는 족족 받아먹던 희완은 대충 보기에도 무리를 하는 게 보였다. 그런데 그게 또 기분 좋게 마시는 술이라 딱히 나쁠 건 없어 보여 내버려 뒀는데, 주정이라니. 언젠가 밖에서 술 먹고 들어와 제 발치에 주저앉아 좋다느니, 어쩐다느니, 술김에 고백을 해 오던 희완을 떠올린 승도가 시선을 든다.

“내가 누굽니까.”

왜 그런 이상한 걸 묻느냐는 얼굴이다. 그리곤 눈살을 찌푸리다 그 벌겋게 달아 오른 입술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백, 승도.”

유난히 희완이 남자의 이름을 발음할 때는 성과 이름을 끊어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별거 아닌 습관이었지만 희완이 다른 이를 이렇게 부르는 걸 들은 기억이 없다.

“내가 연희완에게 누굽니까.”

이번에야말로 정말 이상하다는 눈초리다. 그러나 이번엔 좀 전처럼 쉬이 입술을 열지 못하는 희완이 고개를 갸웃한다.

“백, 승도.”

하다 미간을 좁힌다. 제가 해놓고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곤 한참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 잠들은 건가 싶을 즈음 그 큰 눈을 나른하게 떠 온다. 객관적으로 봐도 예쁘고 단정한 얼굴이었다. 남자로 보기에도 잘생겼고, 그냥 여성에 빗대어도 예쁘게 생겼다.

“키스, 하고 싶습니다.”

“연희완 씨는 키스를 아무하고나 막 합니까.”

“백승도 씨는 아무나가 아닌데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승도의 말투를 따라 하다 무얼 떠올리는지 또 미간을 좁히는 희완이 고개를 젓는다. 그리곤 또 무얼 말하려는지 머쓱한 얼굴로 붉은 귓불을 문지르다 이내 곤란하다는 듯이 콧잔등을 이지러뜨린다. 로테이션 소식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틈만 나면 제 입술을 공략해 오던 남자가 떠올랐고, 그러다 언젠가 한번 부르트고 만 입술을 보고 코웃음을 치던 우진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음, 작작 좀 하라 했었는데. 또 뭐라 했었지. 기억을 더듬던 희완이 다시금 연한 살이 툭 도드라져 있는 입술을 열었다.

“이건 우진이 형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었습니다.”

갑작스레 도우진 이름이 나와 승도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요즘도 한창 연습이라니, 그 주둥이 수없이 붙였을 생각 하니 절로 기분이 더러워진다. 게다가 배우 하나가 빠진 통에 그 주둥이 붙이는 놈이 하나 더 늘기까지 했다. 속사정이야 식사를 하는 내내 희완에게 전해 들어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뭘 말입니까.”

“어디 가서 바보 소리 듣는다고 절대 입 밖에 꺼내지도 말라고 했던 건데요.”

주저하던 희완이 기어코 입을 열었다.

“나는 첫 키스도 사랑하는 사람하고 하고 싶었고, 동정도 고이 모셔 뒀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금세 차분해지는 얼굴로 제 맞은편에 앉은 승도의 탄탄한 허벅지를 응시하던 희완이 슬쩍 시선을 기울였다.

“첫 키스는 처음 사귄 애한테 줬는데, 잘 기억이 안 나고, 첫 섹스는 백승도 씨한테 줬는데, 저는 그때 정말 그대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거침없이 제 몸을 덮쳐 오던 그때의 백승도를 떠올리기라도 하는지 주춤 어깨를 움츠리는 희완의 귓불이 빨갛다.

“그런데 우진이 형이 나보고 제대로 한 게 하나도 없다더라구요.”

풋사랑 첫 연애에 잠시 스친 입술은 살갗이지 키스는 아니고, 또 백승도랑 하는 게 섹스는 맞는데 네가 쑤신 건 아니니 동정 뗀 건 무효라며 비식 웃던 우진은 조금도 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우진은 살짝 취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몽롱하고도 흔연한 눈동자 때문이리라. 복작복작한 술판에서 제 잔을 술 대신 시원한 냉수로 채워주던 우진은 혼자만 멀쩡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가 던져주는 시선은 몽연했었다. 아마 제가 취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희완이 혀를 내어 마른 입술을 핥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어쩌다 그런 얘기를 했더라. 아아, 작품 얘기를 하면서였다.

“사랑 한번 제대로 못 해 본 놈이라고 했습니다.”

억울했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랑이 무어냐고 묻고 싶기도 했는데, 이상해서 안 물어봤다. 가슴에 깊이 틀어막힌 것, 이 가슴이 깊이 틀어막혀 빠지지도 않고 녹아 흘러 없어지지도 않는 것. 그것 같기도 해서.

“그래서,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당신에게 돌아온 것.

당신에게 돌아온 것을, 우진은 후회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했다.

“키스하고 싶습니다.”

“왜.”

우진과 했던 대화를 떠올리며 눈동자를 흔들던 희완이 눈앞에서 툭 떨어지는 음성에 가까스로 초점을 맞춰 왔다. 냉담한 남자의 얼굴이 고스란히 들이쳤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익숙하게 녹아드는 목소리기기도 했다. 이런 것들이 다 익숙했다. 그전엔 주변에 이렇게 무섭게 냉담한 사람이 없었는데.

“또 키스만 좋다고 지껄이기라도 할 작정입니까.”

“아닌 거 아시잖습니까.”

항변하는 희완이 저를 빤히 쳐다보는 남자의 눈을 마주 본다.

“우리, 잤었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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