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75화 (75/123)

“안 합니다.”

“오 감독 작품이야.”

대꾸 없이 받은 대본을 다시 데스크 위에 올려놓는 우진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병행할 여유도 없고, 그럴 체력도 못 됩니다.”

사실이었지만 오하영 감독은 우진이 평소 같이 작업을 하고 싶어 하던 감독이었고, 며칠 전 술자리에서 만난 감독이 직접 우진의 출연에 대해 넌지시 이야기를 건네 왔었다. 학정도 이미 작품 들어가 있는 놈 다리 하나 찢어다 투입시키는 것 자체를 탐탁잖게 여기는 편이었지만, 놓치기 아까운 자리었다.

“내일 오후 2시다.”

“희완이 보내세요.”

“정말 생각 없는 거면, 취소하고.”

말이 오디션이지 일대일 미팅 주선 자리였다. 게다가 오하영 감독은 독특한 세계관과 독보적인 미장센으로 국제영화제에 출품할 때마다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대중적으로도 흥행몰이에 성공한 영화계에서도 보기 드문 인재였다. 이번 작품은 평소 그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던 미국 측 영화제작사와 손을 잡고 헐리우드 입성을 목표로 제작된다 하여 시작도 전부터 영화계뿐만 아니라 연극판까지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여기저기서 줄 대려고 안달인 사람이 직접 우진을 청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오 감독이 제안한 역할 자체가 비중을 떠나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배역으로, 이제 재기를 준비하고 있는 우진에겐 큰 기회나 다름이 없었다.

그 사정을 옆에서 간단히 부연 설명해준 경성이 묵묵부답인 우진을 쳐다보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려, 그려, 평양감사도 저가 싫다면 별수 없는 거지 뭐. 그렇다고 감독이 직접 찜해 놓은 배우 대신 다른 놈 밀어 넣는 건 말이 안 될 일이니 할 수 없다. 그 아까운 걸 왜 안하느냐고 펄쩍 뛰지 않고 알아서 스스로 납득하는 경성이 쯧 혀를 찼다. 넝쿨째 굴러 들어온 호박 싫다는 우진이나, 그런다고 한마디 설득 없이 즉시 오 감독에게로 전화를 넣는 학정이나, 징한 놈들이란 생각이 새삼 들어서였다.

“희완이 넌 제발 저런 멍청한 짓 좀 하지 마라.”

“형도 별로 연연해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보이냐? 이래봬도 나 지금 이거 굉장히 연연해하고 있는 건데?”

하며 피식 웃는 경성이 굴러다니는 사탕 하나를 까서 제 입에 물었다. 작품이 아깝기야 하지만, 싫다는 놈 억지로 등 떠밀 정도로 아쉽지도 않다. 이제 겨우 정신 차려 가는 놈 괜히 그 바닥에 혼자 떨어뜨려 놓고 전전긍긍하다 숨이라도 넘어 가는 시늉을 하면 시작될 마누라 등쌀은 또 어떻고.

“연희완은 안 된다냐?”

그래도 아깝긴 아까운지 툭 던지는 말에 웃음이 터진 건 희완에게서였다.

첫 공을 3주 앞두고 영화에 동시 캐스팅되었다는 배우 때문에 잠시 시끄러웠었다. 뮤지컬을 포기해서라도 굳이 그 영화에 출연해야겠다는 배우와 소속사의 고집 때문에 제작사 관계자들이 한참 날카로워져 있었다. 당연하게도 배우들과의 사이도 나빠져 한창 연습 중이었던 상대 배우와 대판 싸우고 문을 박차고 나간 뒤로 그대로 계약을 파토 냈다. 비상이었다. 그 즉시 관계자 회의가 소집됐고 이래저래 배우 캐스팅부터 모든 일에 관여했던 인물들이 판판이 깨져 나가고 책임을 물리는 사이 내내 말이 없던 연출이 결단을 내렸다. 총 4페어 중에서 한 페어를 빼고 한 명 남은 배우를 로테이션 돌리기로 한 것이다. 그럼 따로 크로스 페어 일정을 잡을 이유도 없고, 골고루 번갈아 가며 새로운 페어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졸지에 힘들어진 건 계약 파토 내고 나간 배우의 파트너였던 성현이었다. 아역 출신 배우로 반짝 스타였다가 오래도록 무명 시절을 견디고 근래 들어서야 겨우 뮤지컬 배우로 네임 밸류를 형성하기 시작한 서른둘의 중견 배우는 갑작스러운 로테이션에 상당히 곤혹스러운 눈치였다. 한 명이 아닌 세 명과 호흡을 맞추는 것부터 스케줄 조정까지 모든 걸 부담스러워하는 성현에게 연출이 따로 붙어 실시간 과외가 시작되었다. 무단이탈한 배우는 그 전부터 연습에 소홀해 함께 맞춰볼 시간이 많지 않았고 덕분에 성현 역시 연습이 많이 부족한 상태였다.

사람 보는 눈을 자부했던 연출은 잠시 상심하는 듯했지만 곧 새로이 스케줄을 짜 분위기를 수습하는 데 앞장섰다. 그럼에도 이미 배우 한 명의 이탈로 인해 엉망이 된 팀 분위기는 한동안 살얼음판이 따로 없었다. 그걸 가만두고 보지 못한 성격 호탕한 총괄 팀장이 급한 불이 꺼지는 대로 단합 한번 하자고 약속한 날이 오늘이었다. 평소 회식에도 밥만 먹고 빠지던 우진도 오늘은 별수 없이 참석한다 했고, 팀 분위기 상승을 위해 소속된 모두가 의무적으로 참석하게 되는 묘한 단합 대회가 되고 말았다. 작품 지휘하는 것만도 일일 텐데 그간 파토 난 배우 설득하고, 또 그 배우 캐스팅한 죄로 죽을 놈이 되어 찍소리도 못 하고 다니던 캐스팅 디렉터를 챙기고, 또 졸지에 낙동강 오리 알 신세 된 아역 출신 배우 다독이고, 다른 배우까지 챙기느라 여념이 없던 연출의 얼굴이 그새 살이 쑥 내려 있었다.

술을 안 마시는 우진이 구석에 앉아 연출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래서 그 새끼는 어떻게 됐답니까.”

“뭐, 결국에는 그 영화 조연 급으로 잘 캐스팅 마무리됐다고 합니다.”

“원래 이 바닥이 그렇습니다.”

모르고 있던 게 아니면서도 연출은 상심한 기색이 컸다.

무뚝뚝한 것 같아도 알게 모르게 배우진을 살뜰하게 챙기던 연출을 가장 살갑게 따르던 것도 바로 그 난리를 피우고 나간 그 배우였다.

“꽤 괜찮은 작품이 나올 뻔했는데 말입니다.”

“나하고 연희완으로는 부족하다 이 말씀입니까.”

차게 웃으며 쳐 오는 농에 이리저리 치어 음울해진 눈으로 잔에 담긴 술을 내려다보던 연출이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잔을 비운다.

“가장 성공한 페어가 될 겁니다.”

그만 미련 떨고 얼른 훌훌 털어 버리라는 뜻으로 가볍게 농을 친 건데 돌아오는 진지한 반응에 슬쩍 눈살을 찌푸린다.

“도우진 씨 그 신경질적인 면모 말입니다. 그게 딱 극 속 인물하고 같아요. 오만하고 이기적이지만 그 내면엔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결핍이 있죠. 나는 데뷔 적부터 도우진 씨에게서 그러한 결핍을 보아 왔단 말입니다. 왜 저렇게 가진 게 많고 훌륭한 사람이 저리 음울하고 세상 다 끝난 것 같은 눈빛을 하며 웃을까, 하고 많이 생각했었습니다.”

“풍문으로 들은 것도 없습니까.”

“풍문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바닥이 바로 이 바닥 아닙니까.”

허탈하게 웃는 연출이 스스로 제 잔을 채우며 술을 탁 털어 넣었다.

찬성하는 사람이 없었다. 캐스팅 디렉터도, 총괄 팀장도, 제작팀도, 광고팀도, 하나같이 도우진은 안 된다 했다.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총괄 팀장은 도우진보다 연희완이 더 껄끄럽다며 결과적으로는 둘 다 퇴짜를 놨었다.

그걸 두 달 가까이 설득에 설득을 거듭하며 총괄 팀장을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

들리는 풍문은 너무 많았다.

연희완에 관한 풍문, 도우진에 관한 풍문, 그들이 속해 있는 학정에 관한 풍문.

결국 풍문이 풍문을 낳고 또 풍문을 낳는 바닥에서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하는 논리가 총괄 팀장에게 먹혀 들어가 설득한 후로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니 일은 일사천리였다. 꿈의 무대였다. 국외에서 인정을 받고 돌아왔지만 누구 하나 반겨주는 곳 없는 이 한국 땅에서 처음으로 내놓는 작품을 결코 대충 걸어 놓고 싶지 않아 최선을 다했으나 때때로 예기치 못한 산이 앞을 가로막아 빙 돌아가게 했다.

술 석 잔에 벌써 주정을 늘어놓는 연출의 푸념 아닌 푸념을 듣고 있던 우진이 서비스로 나온 음료수를 홀짝이며 룸을 돌아보았다. 이런 곳에 기쁨조로나 불려 다녔지 이렇게 편하게 온 적이 있었던가. 와도 씹질로 번 돈 흥청망청 쓰며 또 같은 쓰레기끼리 붙어 다니며, 더러운 오물이나 양산하고 다녔지. 냉소를 띄는 우진의 눈길이 희완을 찾았다. 좋은 시절, 그리 진창을 뒹굴고서도 여전히 해사한 배우는 사람들 틈에 끼어 수더분하게 웃고 있었다.

요즘 그렇게 연희완을 싸고돌며 틈만 나면 그 옆에 찰싹 붙여 놓으려는 총괄 팀장 옆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희완을 보던 우진이 다시 음료 캔을 입에 댄다. 흑심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 자체가 그런 성정으로, 예쁘게 본 이가 있으면 남녀 가리지 않고 저리 치근덕대는 총괄 팀장은 수완이 좋은 데가 있어 이 바닥에서 알아주는 마당발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웬만한 캐스팅은 다 저 총괄 팀장 손에서 이뤄진다고 하겠는가. 이 바닥에서 학정을 제외하고는 딱히 비빌 곳 없는 희완이 잘 보이면 또 좋은 일이라 내버려 두는 우진이 땅콩 하나를 주워 먹는다.

후원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미묘한 위치에서 희완을 들었다 놨다 하는 그 남자의 얼굴이 스친다. 처음부터 돈으로 얽힌 관계였으니 이런 어중간한 상황도 어쩔 수는 없을 테다. 희완이 마냥 저렇게 순하게 웃어도 쉬운 녀석도 아니고, 오죽하면 그 지독한 하준우가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겠나. 밑지는 중에서도 학정 욕을 하면 따박따박 대들다 얻어터지기도 많이 얻어터졌다는데, 어디서 뭐 하는지 풍문으로도 들을 수 없는 하준우의 그 비열한 눈매를 떠올리던 우진이 다시 얼굴을 굳힌다. 뭐, 그 행적엔 그 남자가 얽혀 있을 거라 짐작 하지만, 짐작에 불과할 뿐이다. 어디까지나.

술에 취한 희완의 몸이 현관문을 열어주는 남자의 품으로 와락 쏟아졌다.

미리 연락을 받아 오늘 회식자리가 있다는 걸 알고 있던 승도는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다. 일반 술집이 아니라 룸으로 들어간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수소문하여 그 제작사가 회식을 한다는 장소를 알아냈다. 철진의 관리구역으로 요즘 물갈이가 한창 되어 주로 연예인들이 VIP로 드나드는 회원제 클럽이었다.

누구 빽으로 그런 회원제 클럽을 갔나 했더니 거기 총괄 팀장이 빽이 좋았다.

빽만 좋은 게 아니라 인맥이 넓고 수완도 좋아 회원제 클럽의 멤버 반이 아는 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정도였다. 그런 인간이 고작 공연 제작사 총괄 팀장으로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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