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아파트에 도착한 승도가 전화를 거니 한참 만에야 신호가 끊기며 왈칵 시끄러운 소리가 밀려들어 왔다. 눈살을 찌푸리며 수화기를 귀에서 잠시 떼어 내고 담배를 물며 베란다로 가로질러 간다. 집에 먹을 게 없어서 밖에 나왔다는 희완의 목소리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들이 끊임없이 떠밀려 왔다. 그 어수선한 공기가 생생하게 잡힐 듯하였으나 잘 들리지 않는 희완의 목소리에 그의 미간이 좁혀진다.
“어딥니까.”
대답을 듣고 핸드폰을 끈다.
분명 아침까지도 절룩거리며 걷던 녀석이,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다는 소리였다.
깁스를 멘 어깨를 보는 눈이 조심스러웠다.
아프기 보다는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에 대충 뼈가 붙으면 바로 풀 생각이었던 승도의 시선이 제 곁에서 짐짓 딴 곳으로 눈길을 돌리는 희완에게 향하였다. 길쭉하니 희어서 이리 복잡한 곳에서 눈에 확 띄는 희완은 긴 옷으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걸친 재킷도 목까지 지퍼가 꽉 끌어 올려져 있어 목덜미에 남은 흔적은 구경할 수도 없었다. 한번 폭주하게 되면 승도의 본능이란 것이 그 안에 샅샅이 남겨버리고 마는 흔적들이었다.
“안 덥습니까.”
답을 않는 희완의 눈이 승도에게로 향한다.
왜 그런 걸 묻는지 이상하다,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 몰라 그러느냐, 묻는 것 같기도 하는 시선이다. 마트 안이라 기본적으로 온도 조절이 되어 있긴 하지만 일요일 저녁이라고 죄다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인해 실내는 습하고 더웠다. 체질적으로 더위를 잘 안타는 희완의 반듯한 이마에도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걸 본 승도가 희완의 손에서 카트를 끌어다 제 앞에 밀어 놓는다.
“얼른 하고 갑시다.”
고개를 끄덕이는 희완이 적어 왔던 것을 다시 확인한다.
저도 솜씨가 없어 그냥 기본적으로 하는 것들뿐이라 카트에 담긴 건 인스턴트나 간단한 레토르트 식품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에 계란이 있었고, 구운 김이 있었고, 야채 몇 가지와 과일 몇 가지가 있었다. 일단 먹을 게 궁해서 나오긴 했는데 정확히 뭘 사야 할지도 모르겠고, 또 뭐가 필요한지도 모르겠어서 우선적으로 생각나는 것들만 적어오긴 했지만 역시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만하면 된 것 같아 시선을 들던 희완의 눈길이 다시 승도의 팔뚝에 닿았다. 무의식적인 것이었으나, 한 번만 더 닿으면 내일 당장 윤박사 손에 직접 연장을 쥐어 줄 생각을 하던 승도가 카트를 끌어다 계산대 앞에 놓았다. 줄이 길어 기다리는 동안 제 곁에서 반 뼘쯤 떨어져있는 희완의 머리칼 밑으로 채 가려지지 못한 자국이 희미하게 비쳤다. 작품에 들어가면서부터 기르기 시작한 머리카락은 이제 목덜미를 간신히 덮고 있었다. 집에 있을 때는 종종 대충 핀을 찔러 앞머리를 넘기고 있었는데, 어디에서 난 것이냐 물었더니, 극단원 중 한명인 도연이 찔러 준 것이라 했었다. 머릿속으로 주욱 꿰고 있는 얼굴들 중에서 어렵잖게 그 얼굴을 골라낸 승도가 덕분에 희게 드러난 이마에 가볍게 입을 붙이기도 했었다.
잠자코 서 있던 희완이 턱을 당겨 고개를 숙이며 재킷 지퍼를 입술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보였다. 빤히 저만 들여다보는 승도의 시선이 의식되었던 건지 머리카락 사이로 슬쩍 드러나는 귓불도 연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도 계속되는 시선에 낮게 헛기침을 하고 줄어드는 앞줄을 보던 희완이 꼼짝도 않는 카트를 보곤 결국 눈을 들어 승도를 보았다. 동시에 뻗어 온 손이 희완의 이마에 맺혀 있는 땀을 닦아주곤 카트를 앞으로 밀었다. 다음부터 목덜미는 자제하겠다는 남자의 음성을 들은 희완이 괜히 멋쩍어져 입술을 꾹 당겨 물었다. 곧 차례가 되어 카트에 든 물건을 꺼내는 희완을 거든 승도가 지갑을 꺼내 희완에게 건네주었다. 무얼로 계산할까 묻는 희완에게 지갑 안쪽을 차지하고 있는 카드 중 하나를 지목해 계산을 하게 하고는 좁은 통로를 빠져 나오던 승도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앞도 안보고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던 꼬마 하나가 승도의 다리에 철퍼덕 부딪쳐 왔던 것이다.
호되게 부딪쳐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가떨어진 꼬마의 손에 쥐어져 있던 아이스크림이 뭉개져 있었는데 그 아이스크림 덩어리는 승도의 슈트 바지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제가 부딪쳐 놓고 제가 놀란 데다가 잘 쥐고 있던 아이스크림까지 그렇게 되니 울먹울먹하던 꼬마에게서 우렁찬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사람 많은데서 꼬마가 저렇게 울어대니 웅성웅성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한데 모이는데 아이 엄마는 어디서 뭐 하는지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있었다. 나동그라진 아이를 본 척도 않는 승도 대신 무릎을 굽힌 희완이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누군가 달래주니 더 빽빽 울어대기 시작하는 아이를 난감하게 쳐다본다. 피붙이 하나 없는 희완도 이런 쪽으로는 영 소질이 없어 능숙하게 달래질 못하고 물끄러미 우는 아이만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아이 엄마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장을 보던 중에 아이를 잠깐 놓쳤는지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아이를 발견하자마자 달려와 그 자그마한 어깨를 붙잡고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리면서 나무라던 여자가 영 못쓰게 버린 승도의 바지를 발견하곤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아이가 잘못한 상황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애꿎은 아이만 혼내던 여자를 난감한 눈으로 쳐다보던 희완이 슬쩍 승도를 올려다보았다. 반응은 남자가 보여야 할 것 같은데, 내내 말이 없이 묵묵한 남자는 아이 엄마가 죄송하다 고개를 숙이는 데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달래줄 줄 알았던 엄마가 오히려 저를 혼내니 더 서러워져서 이젠 숫제 끅끅대며 우는 아이와 그 아이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희완의 시선을 번갈아 보던 승도가 계산을 마친 카트를 끌고 아이를 무심히 지나쳐 갔다. 세탁비라도 물어드리겠다며 고개를 조아리던 여자가 놀란 눈으로 그 뒷모습을 보았고 희완도 뒤늦게 그를 따라갔다.
졸지에 아이와 단 둘이 남게 된 여자가 그제야 진 한숨을 푹 뱉어 놓다 또 아이를 나무라는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그러다 어휴 이 웬수, 하며 서럽게 우는 아이를 안았다. 멀리서 아이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 저 덩치 큰 남자를 발견한 순간 여자는 정말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고 식겁하여 달려왔다. 헌데 우는 아이를 팬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 없는 남자는 세탁비도 뭐도 요구하지 않고 군말 없이 돌아서 나갔고, 그 옆에서 그림같이 서 있기만 하던 잘생긴 청년이 그 뒤를 따라 나가는 걸 보고서야 겨우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여기가 보는 눈이 많은 마트라 다행이기 망정이라며 남자의 행동을 제멋대로 해석한 여자가 달래주니 더 서럽게 우는 아이를 데리고 다시 아이스크림 코너로 향하였다. 그러니까 엄마 옆에 꼭 붙어 있으라고 했잖아. 연이어 타이르는 목소리엔 아이의 행동을 꾸짖는 내용은 하나도 섞여 있지 않았다.
버린 바지를 화장실에서 대충 닦고 나오던 승도가 단숨에 희완을 찾아내었다.
이리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서도 그 얼굴을 찾아낼 수 있는 건 눈에 띄는 외모가 이유의 전부는 아닐 터였다. 툭 손끝으로 옷깃에 묻은 물기를 가볍게 털어내며 저벅저벅 걸어간 승도가 그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희완이 시선을 들어왔다.
“역시 안 지워지네요.”
물로 닦아내긴 했어도 워낙 호되게 부딪친 자리라 아이스크림 자국은 크게 번져 있었다. 세탁해야겠다며 혼자 중얼거리는 희완이 그가 없는 동안 비닐봉지에 옮겨 담은 짐을 손에 들었다. 그걸 가져가 제 손에 쥔 승도가 흘긋 희완의 눈가를 본다. 제 엄마에게 매달려 우는 아이를 보는 눈에서 어둡게 스쳐 가는 그늘을 보았다.
“한마디 하시지 그랬습니까.”
하여 희완의 이 말에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돌아본다.
아이스크림이었으니 망정이지 다른 거였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하는 희완이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며 그 옆에 바짝 붙었다. 사람이 많아 자리가 비좁은 탓이었다. 이미 죽어 없는 조카를 떠올리는가 하였더니 다른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래도 누나는 조카가 잘못하면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을 내곤 했는데요.”
승도의 예상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조용히 읊조리던 희완이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서며 승도의 손에서 짐을 나눠 받았다. 남자 둘이 대충 고른 것이라 썩 내용이 알차거나 하지 않고 많지도 않아서 비닐봉지는 가벼운 편이었다. 차 문을 열고 트렁크에 짐을 부린 승도가 트렁크 문을 내리기 전에 희완의 팔뚝을 잡아 옆에 바짝 끌었다. 부딪치듯 입술이 관자놀이에 닿으며 떨어져 나간다. 놀라 굳은 희완이 잠시 그 부분을 만지다가 쿵 트렁크 문이 닫히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깁스를 한 상태로 운전을 하는 것이 걱정되었으나 남자는 별 어려움 없이 핸들을 돌리며 만차로 복잡한 주차장을 능숙하게 빠져나갔다.
집에 도착하니 마침 물건 배달이 왔다는 전화가 왔다. 오늘은 올 사람이 없으니 편히 있으라던 남자의 말과는 달리 생긴 방문에 의아함을 표하던 것도 잠시 열어 준 문으로 비쩍 마른 체구의 두 사람이 커다란 매트리스를 끌고 안으로 들어섰다.
욕실에서 상의를 벗은 채 면도를 하던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턱을 대충 닦고 나와 배달 업체 직원을 상대했다. 내일 도착 예정이었던 것이 하루 일찍 도착한 것이다. 허튼 데서 꼼꼼한 건 여전하다. 주문인 란에 적혀있는 철진의 이름을 확인한 승도가 수령인 란에 사인을 하며 안방으로 들이라 한다.
그날 축축하게 젖은 침대 매트리스를 우울한 눈빛으로 보던 제게 알아서 하겠다 했던 남자의 말을 그렇게 실감한 희완은 그날 바로 침대의 성능도 몸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만큼은 곁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희완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건지 남자는 어디 가지 않고 오후 내도록 같이 있어 주었다.
다음 달이면 개관할 신축 극장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뮤지컬이 아닌 연극 전용 극장이었지만 두 개의 층은 뮤지컬 극장으로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시설이 대단하다 했다. 개관도 전에 이미 일 년 치 대관이 나가 있는 스케줄 일정에 드디어 학정도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학정이 내내 붙들고 있던 작품이 드디어 탈고를 마친 것이었다. 소식을 듣고 극단으로 찾아가니 오랜만에 그 낡은 사무실 의자를 차지하고 앉은 학정을 만날 수 있었다. 소파 팔걸이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경성과 무언과 이야기를 나누던 학정이 막 안으로 들어서던 희완과 우진을 발견하곤 답지 않게 반색을 했다.
“어찌 살이 더 내렸냐.”
“단장님이야 말로 그러다 산수도인 되시겠습니다.”
며칠 깎지 못해 덥수룩해진 수염과 퀭해진 얼굴을 빗대어 답하는 희완의 곁으로 와 앉은 우진이 테이블에 있는 통을 끌어다 굴러다니는 사탕 하나를 주워 들었다.
“걱정 마라. 그래도 요즘 재미 좀 보시는 모양이더라. 제작사 측에서 컨택 들어왔다면서요.”
“어, 그래. 소식 들었냐.”
“그 새벽에 왔다갔다하면서 통화하면 안 듣고 싶어도 다 들립니다.”
늦은 귀가 후 습관처럼 안방 문을 열고 잠든 우진을 확인하는 중에 걸려 온 전화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랬느냐며 수염을 긁적이는 학정이 데스크를 돌아 나오며 그 앞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다음 달에 작업 들어가는 거 참여해 달라더라.”
“이번에도 장미호랑 같이하는 거냐?”
“아니, 그 여자는 드라마 들어간다던데.”
“벌써, 올 초에 드라마 하나 하지 않았었냐? 뭔 작업을 그렇게 많이 해?”
그걸 왜 저한테 묻느냐는 눈초리로 경성을 보던 학정이 데스크에 아무렇게 굴러다니던 대본 하나를 우진에게 툭 던져 주었다.
“모레 오디션 하나 있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