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64화 (64/123)

막 들어선 희완을 발견한 연출이 대본과 악보를 번갈아들고 우진과 머리를 맞댄 채로 그를 불러들였다.

“우진 씨가 좀 더 뒤에 가 있고, 이 장면에선 ‘나’ 보다는 ‘그’ 의 표정이 더 드러났으면 하는데, 우진 씨가 해석해 온 ‘그’ 는 가장 개새끼긴 한데, 그래서 더 몰아붙이는 재미가 있을 겁니다. 그에 반해 희완 씨는 너무 순둥이로 잡아 놔서, 묻힐까 걱정이긴 한데, 의외로 거기서 역할이 부딪치는 재미가 쏠쏠할 겁니다.”

길쭉하고 분위기가 남다른 두 배우 사이에 서서 흑심 어린 웃음을 언뜻 보이고 있는 연출이야말로 무척 재미 져 보였다. 피식 웃는 피아니스트가 야유하듯 장난스럽게 건반을 띵동거린다. 그러는 동안 몇 마디 더 배역을 보완하며 악보 없이 대사 톤으로만 다섯 씬을 마치고, 다시 피아노 반주가 들어가며 연달아 같은 씬을 마치고, 원 테이크로 한 번에 모든 씬을 마치고 나니 밤 아홉 시가 넘어 있었다.

오후 두 시부터 시작한 연습이었다. 연습실 정리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열 시부터 연습에 들어간다는 아이돌 출신 배우 둘이 출근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 문 앞까지 왁자하게 몰려든 그 팬들을 창문 너머로 흘긋 본 우진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밤도 늦었는데 열성이네.”

그 말에 같이 창문에 붙어 서서 밑을 내려다보던 희완이 입매를 올렸다.

“홍보가 많이 된다나 봐.”

“꽤나 하는 것 같더라.”

굳이 홍보가 필요 없을 만큼 관객층이 두터우면서도 얼굴 마담을 내세운 속사정을 들여다보니 별게 아니었다. 새 작품 런칭 전에 최대한 자금을 끌어모으려는 심산이었다. 새로운 관객층도 끌어들이면서 돈도 벌어들이고 기존 관객들에게도 새로운 재미를 선사하자는 윈윈 전략이었다. 뭐, 아직까지는 그런대로 성과가 있는 것 같았지만 미디어 쪽으로는 영 소식이 좋지 않았다.

기자와의 트러블이 있은 뒤에 우진과 희완 페어는 인터뷰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제작사 측에서는 노이즈 마케팅이라도 일단 화자가 되는 건 좋은 일이라며 반대표를 던졌지만 연출이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그런 거 없어도 제일 대박 날 페어라며, 선수 보호 차원에서도, 비밀병기 보호 차원에서도, 더 이상의 인터뷰는 찬성 못 한다는 연출의 입김은 꽤나 세서 결국은 그 뜻대로 결정이 내려졌다.

우진은 그 사람 이 갈리게 하는 질문을 안 받아서 좋았고, 희완 역시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 안 지게 돼서 좋았다. 보통 무명 배우나 소위 한물간 배우라면 인터뷰 하나라도 더 따서 이름 알리는 게 좋았지만 그런 것은 둘에게 썩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하여 연출이 그런 의사를 내비쳤을 때 둘 다 흔쾌히 동의했었다.

이름 알릴 기회 날려서 어쩌느냐는 우진에게 그러게 말입니다. 소탕하게 웃으며 답하던 희완은 조금도 아쉬운 기색이 아니었다. 물욕도 명예욕도 없는 그 일면이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아마 연기만 해도 먹고살 수 있다면 희완은 그러고도 남으리만치 연기에 대한 열정이 순수했다. 일부 연극인처럼 뮤지컬에 대한 편견도 우월감도 없는 건 학정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었다.

“같이 호텔 갈래?”

“아니, 오늘은 집에 들어가 보려고. 우편물 날아올 때 됐어.”

연습 시작 후 거의 매일 학정의 아파트에서 합숙하다시피 하며 우진과 합을 맞추었다. 둘 다 잠이 안 오면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기 일쑤였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상대방을 깨워 문득 생각난 것을 줄줄줄 이야기해 납득이 가면 또 그 옆에서 엎어져 잠들기도 했다. 덕분에 요즘 들어 엄청나게 바빠져 새벽같이 나갔다가 또 새벽에 귀가하는 학정은 거실 소파에서 한뎃잠 자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갑작스러운 노부모의 방문으로 하루 정도 시간을 뺐었던 학정은, 벌써 일주일째 아파트에 머무는 노부모를 이제는 거의 방치하다시피 하는 수준이었다. 덕분에 얹혀살던 우진은 내내 호텔에 머물러 있었는데, 희완도 덩달아 호텔에 투숙하는 날이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별다른 불평이 없는 우진은 시간이 맞으면 아파트로 가 심심할 어르신들 서울구경도 시켜드리고, 맛난 것도 사드리며 같이 시간을 보내는 눈치였다. 일이 끝나면 들어오기가 무섭게 소파에 엎어져 거의 사경을 헤매기 바쁜 학정은 아마도 그 사정을 모를 터였다.

첫 영화로 유명세를 얻고 승승장구하는 동안 시골에서 홀로 병사하신 홀아버지 이야기를 우진은 거의 하지 않았는데, 그가 연세 많으신 분들에게 약한 부분이 있다는 건 어지간한 극단원들은 대부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학정의 노부모를 상대하는 것도 마지못해 하는 게 아니었고, 사실 싫은 일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는 우진이 맘에도 없는 일을 얌전히 할 리도 없었다.

그럼 내일 보자며 먼저 골목을 돌아 들어가는 우진을 보내고 버스 정류장에 남은 희완이 두 손을 재킷 주머니에 푹 찔러 넣었다. 운동화 앞 축으로 바닥을 툭툭 차는 뒤꼭지가 축 가라앉아 있었다. 오후 내, 핸드폰을 잃어버렸다. 분명 연습실 창틀에 두고 잠시 자리를 비웠었는데 남자에게 전화를 하려고 보니 찾을 수가 없었다. 비밀스러운 내용이 담긴 것도 아니고 잃어버린 거야 다시 사거나 하면 그만이었지만 학정이 준 것이었고, 또 핸드폰에는 남자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학정과 우진, 경성, 심지어는 석주경의 번호도 외우고 있었는데 남자의 번호를 외우지 않고 있었다. 우진의 것을 빌려서 남자에게 전화를 하려다 도로 핸드폰을 닫은 이유였다. 차가 들어오기 전까지 우두커니 벤치에 앉아 제 발치만 내려다보고 있던 희완이 곧 앞에 서는 버스에 올랐다.

골목 어귀에 차를 세워 놓고 담배를 태우던 승도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희완이 혼자 세 들어 사는 불 꺼진 2층 자취 집은 잠겨 있었고, 저 아래까지 내려가 확인한 지도 한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하루에 두세 번씩은 꼬박 전화를 하거나 문자라도 보내던 희완에게 연락이 없어 일과를 마친 뒤 전화를 거니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투기꾼들 등쌀에 여기저기 불러 다니기 바쁜 철진을 대신해 클럽 사무실을 지키다 잠깐 시간을 내어 나온 시각이 밤 열한 시였다. 그때 역시 전화를 받지 않아 곧장 이곳으로 직행을 한 것이다. 담배꽁초를 구둣발로 비벼 끄는 승도의 미간이 좁아진다. 다시 만난 이후로는 일부러 희완의 곁에 사람을 붙여 두지 않았다. 때문에 승도가 그에 대해 전해 듣는 통로는 희완 본인이 유일했다. 핸드폰이라는 매개체가 사라지니 그 역시 불통이 되어 버린다.

마지막으로 시간을 확인하는 승도가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아침 출근 전 짧은 통화를 하면서 오늘은 아홉 시면 끝난다는 이야기를 스치듯 들었다. 자정이 다 되어 가도록 귀가하지 않는 걸 보니 중간에 어디로 샌 건가 싶다.

학정의 아파트, 우진이 머문다는 호텔, 갑작스러운 호출로 인한 촬영장, 또는 이번에도 말없이 제 아파트로 향한 건가 싶기도 하고. 찾고자 하면 찾아내는 게 어렵잖겠지만 다시 담배를 피워 무는 승도가 차 시동을 걸었다. 별일이야 없을 테니 클럽 마감 후에 아침 일찍 희완을 찾아오기로 한다.

남자의 차가 골목 큰길 어귀를 돌아 내려오는 동안 컴컴한 지름길을 통해 귀가한 희완이 좁고 경사가 높은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섰다. 핸드폰이 없으니 허전하고 왜인지 불안한 기분이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며 불 꺼진 단칸방을 둘러본 희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불안은 남자와의 연락이 되지 않음으로써 비롯된 것임을 인정한다. 그저 그의 번호를 외우지 못한 스스로가 한심할 뿐이었다.

한참 집 안 정리를 마치고 남자의 아파트로 향하려던 희완이 멈칫했다. 연출에게 받은 악보를 우진의 케이스에 넣어 놓고 챙기지 못했다. 대체 무슨 정신인 건지. 오늘 확실히 익혀서 내일 연습에서 소화해 내어야 했으니 그 악보가 필요했다.

아침의 짧은 통화 이후 남자와 연락을 하지 못해 초조한 건 희완이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오늘 밤은 남자의 아파트를 찾아가기로 했던 건데, 내일 연습을 망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내일은 오전 타임이었다. 한숨을 쉬며 입던 옷을 마저 끼워 입은 희완이 문밖을 나섰다. 챙겨 나온 택시비를 확인하며 어둔 골목길을 내려가는 걸음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한참을 쭈욱 걸어 내려가 여러 대의 택시가 대기하고 있는 정류장에서 한 대를 잡아타고 주소를 불렀다. 우진이 머무는 호텔이었다.

대학로 근처 호텔에 도착했을 때 우진은 차가운 욕조 속에 잠겨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어 있었고 얇은 입술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룸으로 들어섰을 때 싸늘하게 인기척이 없는 내부를 이상스럽게 생각하며 실내를 가로질러 간 희완이 안쪽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물소리에 욕실 문을 벌컥 열었다.

물이 출렁이는 욕조 속에서 그대로 얼어붙은 것 같은 우진을 발견하자마자 뛰어 들어가 찬물을 들이붓고 있는 수돗물을 잠갔다. 욕조 마개를 열어 얼음장 같은 물을 빼내니 한껏 고여 있던 한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희완의 몸을 덮어 왔다. 한여름이 다가오는 계절이었지만 찬물 샤워는 우진에게 한참 일렀다. 회복되었어도 그는 이미 정상적인 몸이 아니었다. 마른 타월을 닥치는 대로 끌어다 우진을 감싸 안고 미지근한 물을 틀어 차갑게 식은 몸을 데웠다. 품에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몸이 싸늘했다. 그 몸을 욕심껏 당겨 안으며 형, 하고 부르는 소리에 뒤늦게 반응을 하는 우진의 눈 끝에 서리 같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젠 괜찮은 줄 알았는데.

중독이란 건 단칼에 끊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끊는 게 아니라 매일을, 매분 매초를 참고 견뎌 가는 것이라던 우진은 끝내 일그러진 울음을 뱉어냈었다. 견딜 수 없을 땐 온몸의 감각을 마비시켜야 그나마 견디기 수월한데 제 몸을 해치지 않고 그럴 수 있는 방법은 냉수욕밖에 없다던 우진은 간신히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른 수건을 바꿔 덮어주고 미지근한 물로 가까스로 데운 몸에 연신 뜨거운 물을 부어주는 희완의 손이 빨갛게 익어갔다. 형, 부르는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찬물이 다 빠져나가고 남은 자리로 부연 운무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뜨거운 탕에 오래도록 몸을 담가 식은 몸을 데우는 동안 그 곁에 앉아 이런저런 말을 걸며 대화를 하던 희완도 새벽 네 시가 되어서야 욕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때쯤 우진은 거의 눅진하게 늘어진 후였다. 물이 다 빠져나간 욕조에서 푹 젖은 몸에 감긴 옷을 벗기고 마른 수건으로 우진의 몸을 덮은 희완이 그를 침대로 옮겨 갔다. 가벼워서, 희완은 조금도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목 끝까지 시트를 끌어 올려주고 드라이를 끌어다 젖은 머리칼을 말려주는 희완이 다시 우진을 불렀다. 답이 없는 우진의 얼굴이 창백했다. 그로 인해 더욱 도드라지는 귀밑의 흉터에 희완의 시선이 한참 머물렀다.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우진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한 웅큼도 덜어낼 수 없이 우진에게만 머물러 있는 무게. 아마 앞으로도, 평생, 우진이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었다.

머리를 다 말려준 희완이 주변을 정리하고 그도 젖은 옷을 벗으며 지친 몸을 잠시 쏟아지는 물 아래 맡겨두었다. 멍하니 서 있는 동안 욕조에 시체처럼 늘어져 있던 우진의 모습이 떠올라 손바닥으로 흠뻑 젖은 얼굴을 훑어 내린다.

아파트 난간에 기대어 서서 저 밑을 내려다보며 낮게 노랫말을 읊조리던 우진의 옆모습이 다시 기억에 비추어졌다. 그대로 뛰어내리면 조용히 떨어질 것도 같아 저도 모르게 우진을 향해 내밀었던 손을 불현듯 거둬냈었던 희완이었다.

우진이 보고 있던 것은 허공이며, 공허였고, 또 바닥이었다.

오늘의 ‘그’ 는 평소보다 더 날카로웠다.

오만과 결핍을 동시에 지닌 ‘그’ 를 연기하던 우진이 나가떨어진 건 연습을 시작한 지 2시간도 채 못 되었을 때였다. 연출이 먼저 그 기미를 알아차렸고 연습을 중단시키려는 순간 휘청이는 걸 희완이 받아 들었다. 애초 우진의 건강 상태를 고려하고 캐스팅을 진행시킨 연출은 별다른 말 없이 스케줄을 조정했다. 오늘은 그만 들어가 쉬고 내일 오후에 연습을 재개하자던 연출이 나간 탈의실 의자에 늘어져 있던 우진에게서 한숨 같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스스로를 한심해하는 그 앞에 의자를 끌어다 마주 앉은 희완이 들고 있던 대본을 내려놓고 우진의 이마를 짚었다. 역시 뜨끈해져 있었고, 미열을 넘어서고 있었다.

“형, 링거 맞고 들어가.”

답이 없이 의자에 기대 눈을 감고 있던 우진의 이마를 한참 식혀주고 있던 희완이 먼저 나갈 준비를 했다. 우진의 것까지 챙겨 들고 팔을 잡으니 힘없이 늘어져 있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노부부는 내일쯤 시골로 내려가신다 했으니 오늘 하루만 더 호텔 신세를 지면 될 터였다. 자는 시간도 쪼개야 할 지경으로 바쁘다는 학정은 극단에도 얼굴 비춘 지 오래라 아파트를 드나들지 않으니 희완도 얼굴을 못 본지 꽤 되었다. 어쩌면 늙으신 부모님 닦달을 피하려 일부러 그리 바쁘게 일정을 잡았다는 추측이 들 만도 했지만 학정은 그런 꼼수와는 거리가 먼 성정이었다. 밖으로 나도는 대신 계신 동안 충분히 아들 노릇을 해 노부모를 만족시키는 것으로 서울에 머무르는 시간을 단축시켰을 것이었다. 그런 여유가 있었다면.

열만 오르는 건지, 몸살 기운이 오르는 건지 알 수 없어 붙잡은 우진의 팔에서 체온을 감지하던 희완이 마침 지나가던 연출을 잡았다. 눈치 빠르게 병원으로 갈거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니 곧 건물 밖으로 새끈한 은색 세단이 빠져나왔다. 인상을 쓰면서도 선선히 차에 오르는 우진에게서 뜨거운 숨이 뱉어졌다. 오늘도 희완은 호텔에 머무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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