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58화 (58/123)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열리는 문을 보던 승도가 시선을 들었다.

기다리기라도 했던 모양인지 활짝 문을 열어주는 희완이 편안한 복으로 승도를 맞아주고 있었다. 시계를 내려다보니 희완이 귀가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이제 저녁 일곱 시. 승도 역시 잠시 옷을 갈아입을 겸 들른 것이었다.

철진의 우려대로 그 일대의 치안이 최근 들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날이면 날마다 찾아오는 투기꾼들에, 양복쟁이들에, 건설회사 임원의 탈을 뒤집어쓴 깡패새끼들까지, 그 등쌀에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이 더 삭막해져 가는 철진의 얼굴을 보고 업소 아가씨들은 어쩜 얼굴이 더 재수 없어진다고 대놓고 면박을 주기 일쑤였다. 지난 주말에는 한 달에 몇 백씩 상납한 보람도 없이 불시단속에 걸려 일주일 매상에 달하는 금액을 벌금으로 물기도 했다. 그쪽 일대 땅을 내놓지 않겠다하니 본격적으로 벌주기에 돌입한 셈이었다. 그럼에도 승도에게는 별다른 언급을 않는 철진이 급기야 성매매 알선 혐의로 검찰 출두 명령을 받았다. 온갖 VIP를 상대하는 클럽 업주를 상대로 내놓은 혐의는 사실상 거의 실효성이 없는 것으로 망신 주기와 기운 빼기가 목적인 것을 굳이 감추지도 않았다. 아직 발표도 전에 이리 안달인 것으로 보아 동네 재개발 수준의 문제는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출두 명령을 받고 12시간째 검찰조사를 받고 있는 철진을 대신해 클럽으로 출근하려던 참이었다. 문을 열어주고 저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뒷걸음질을 치는 희완의 허리를 안아 간단히 입을 맞춘 승도가 안으로 들어서며 재킷을 벗었다. 넥타이를 당겨 소파 등걸이에 걸어 놓고 욕실로 성큼성큼 걸어가니 따라오는 시선이 느껴진다. 하루 종일 먼지 쌓인 서류와 담배 연기 속에 파묻혀 있어 꼴이 형편없었다.

현재 소유 중인 그 일대의 등기부 등본을 쌓아 놓고 열람 중이었다. 사들일 당시에 헐값에서 좀 더 가격을 쳐서 사들인 땅은 지금도 그리 시세가 높다 할 수는 없는 지역이었다. 벌거벗은 몸을 세게 틀어 놓은 물에 맡기며 활짝 열린 문밖을 향해 돌아서는 승도가 물줄기와 함께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문간까지 따라왔던 희완이 눈을 마주치고는 그대로 돌아서 문 옆 벽으로 붙어 서는 게 욕실 벽에 붙은 거울에 비쳤다.

“아직 일곱 십니다.”

“네, 내일 촬영으로 연습이 취소됐습니다.”

“저녁은 했습니까.”

“이렇게 일찍 오실 줄 몰라서,”

먼저 끼니를 때웠다는 말이다. 물을 잠그고 거품을 내어 몸을 닦는 승도가 거울에 비친 희완의 옆모습을 흘긋 본다. 예의 헐렁한 추리닝에 얇은 면 티 하나를 걸쳐 입은 몸은 반듯한 골격이 두드러질 만큼 얇았다. 근육이 원체 안 붙는 몸인가 하여 연기하는 데 별 무리는 없느냐 물었더니 오히려 과한 근육은 복식호흡에 방해된다고 권장하지 않는다 했었다. 그러면서 제 등 근육을 짚어 오는 손이 제법 간지러웠었다.

“집에 먹을 게 없었을 텐데.”

“네, 근처 편의점에서 대충 해결했습니다.”

워낙 사람이 들고 나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 희완이 자주 드나드는 것도 아니라 같이 살 당시엔 매일같이 오던 도우미도 일주일에 한 번이 고작이었다. 끼니는 대개 밖에서 해결하니 냉장고에는 맥주와 생수만 가득했고 간혹 희완이 와도 외부에서 먹고 들어오기 때문에 생활감 없는 냉장고는 매 그 상태였다. 그나마 쌀독은 차 있었는데 계란도 없고, 김치도 없고, 그 흔한 인스턴트식품도 없어 희완은 옷을 다시 꿰어 입고 편의점까지 도로 내려갔다 왔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었는데 남자 혼자 사는 집이 괜히 더 삭막하게 다가오기도 했었다.

“대충 해결하는 게 어떤 겁니까.”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시원한 물소리를 듣고 있던 희완이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물기를 다 닦지도 않은 승도가 문간에 서서 희완을 내다보고 있었다.

“김밥하고, 컵라면으로,”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젖은 손으로 희완의 손목을 끌어다 시간을 확인한 승도가 마른 수건을 걷어 물기를 닦아낸다.

“시간 좀 비니까 저녁 먹고 옵시다.”

“먹은 지 얼마 안 됐습니다.”

“그런 걸로 끼니가 되나.”

“끼니 못 챙길 정도로 바쁘신 것 같은데.”

“그 정도 시간은 됩니다.”

허리에 수건도 두르지 않고 맨몸으로 걸어 나오는 승도가 그 결을 지나쳐 드레스 룸으로 향하였다. 탄탄하게 근육 잡힌 몸 곳곳에서 시원한 물 냄새가 맡아지는 듯했다. 세탁소에서 가져온 그대로 걸어 놓은 슈트 중 하나를 꺼내어 걸쳐 입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움틀거리는 등 근육에 의해 사납게 얽혀 있던 검은 용 두 마리가 매양 표정을 바꿔 가며 으르렁거렸다. 상당히 위협적이었으나 희완에게는 이제 별다르게 효과가 없었다. 다만 그 근육의 역동성에 번번이 시선을 놓을 뿐이었다.

그새 옷을 다 꿰어 입고 넥타이를 매던 승도가 뒤를 돌아보았다. 가까이 다가온 희완이 승도의 손에 걸려 있던 넥타이를 빼어 갔다. 슈트도 잘 안 입는 녀석치고 매고 감는 게 능숙하여 보니, 중고등학교 내내 넥타이를 매고 다녔단다. 그제야 교복 입고 돌아다녔을 십대의 희완을 불러일으켜 보아도 승도의 뇌리에 강하게 남은 건 스물의 연희완이었다. 무대 위에 올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용케도 객석을 휘어잡으며 스스로 빛을 내던. 그런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고, 희완은 이십대 중앙을 관통하여 나오는 동안 강제로 거세당한 채였다.

구속과 관심은 한 끗 차이라 누가 그러기도 했었는데.

이젠 기억도 흐린 누이의 풋풋한 기운을 떠올리던 승도가 고개를 숙였다.

열리는 입술이 달게 희완의 혀를 빨았다. 예쁘게 잘 맨 넥타이를 꽉 쥐고 승도의 키스에 응하던 희완의 목울대가 가볍게 울린다. 이지러지는 눈가를 보니 또 이대로 옷을 발가벗겨 성이 찰 때까지 녹진하게 물고 빨아 넘기고 싶었으나 극단 생활에 푹 빠져 있는 희완을 전처럼 제 성대로 굴릴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또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붙어 오는 몸을 만지면 그럭저럭 버틸 만도 했다.

꽤 볼만했던 뮤지컬을 관람하고 나오고서 다음 날 아침까지 승도는 품 안에 넣은 희완을 내내 떨어뜨려 놓질 않기도 했었다. 달리 살을 섞지 않고 제게 온몸을 맡겨 온 희완을 품에 넣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욕구는 해소가 되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런 갈증이야 얼마든지 다스릴 수 있다.

그저 울컥 치솟은 열이 가라앉을 때까지 희완의 귓불을 물고 그 열기가 뺨까지 번져 갈 때까지 진득하게 빨아 당기던 승도가 혀를 떨어뜨렸다. 얼얼하기라도 한지 파득 떠는 희완이 손바닥으로 한참 물려 있던 귀를 꾹 누르고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보고 무심코 지나쳤던 사실 하나를 뒤늦게 떠올린 승도였다.

“무슨 일 있습니까.”

연락도 없이 불쑥 이렇게 찾아오는 건 희완의 방법이 아니었다. 승도가 데리고 오지 않고서야 혼자서는 여길 잘 오지도 않았지만 오게 된다 해도 문자라도 꼬박꼬박 남기지 이렇게 말도 없이 빈집을 차지하고 있진 않았다. 승도야 이러나저러나 오는 게 낫지만 희완은 이런 것도 예의라고 몸에 밴 모양이었다.

“아, 그게.”

딱히 이유가 있어 온 건 아니었는데, 막상 그 까닭을 물으니 답하기가 어려웠다.

연습도 취소되고 갑자기 빈 시간에 마땅히 할 일이라곤 단원들과 어울리는 것뿐인데 그 단원들도 죄다 제 스케줄 찾아갔으니 남은 건 집에 가서 혼자 책을 보거나 극본을 보거나, 뭐 그런 것이었다. 대학로 구석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요즘엔 알아보는 사람이 늘어 편하지 않은 구석도 있었다. 그리고 또 할 말이 아예 없지도 않았다. 그런데 막상 입 밖으로 꺼내려 하니 멋쩍은 것이었다.

“편하게 출입하라고 만든 아파트긴 합니다만.”

흰 얼굴로 드러나는 곤혹스러움을 그리 해석한 승도가 재킷을 걸쳐 입으며 드레스룸을 먼저 나섰다.

“대본, 새로 받았습니다.”

매일 받는 대본, 그게 뭐 새삼스러운 일이라고 이러나 돌아보던 승도가 곧 이해를 한다.

“작품 들어갑니까.”

“네, 우진이 형하고 같이 들어갑니다. 같이 캐스팅됐어요.”

우진의 건강 때문에 많이 걱정을 했는데 의외로 우진 쪽에서 흔쾌히 오케이를 했다며 흰 뺨에 기쁜 기색을 드러내는 희완이 현관으로 나서려는 승도의 손끝을 붙잡았다.

“괜찮으시면,”

식사 말고 이런 거 하자고, 말끝을 못 맺는 희완의 목덜미 아래로 매끈한 등골이 도드라진다. 입은 옷이 헐렁해 고개를 숙이니 드러나는 것이다. 수없이 살을 섞고도, 결코 아무것도 모른다 시치미 뗄 수 없는 주제에도, 이런 것들에 늘 어색해하고 유혹 측에도 못 드는 몸짓을 보이는 희완은, 그러나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잡힌 손끝으로 손바닥부터 손목까지 쓸어 올려 팔뚝을 잡아, 살짝 힘을 주니 순순히 당겨 오는 허리로 팔을 감는다. 입을 맞추며 소파 팔걸이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승도의 다리 사이로 희완이 완전히 들어찼다. 제 등허리를 쓸며 능숙하게 혀를 감아 오는 승도의 목덜미와 어깨를 붙잡고 열심히 응하는 희완에게서 간간이 잔숨이 떨어졌다.

“그 말 하고 싶어 여기까지 온 겁니까.”

“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보고 싶어 왔다는 말은 희완이 근래 들어 많이 하게 된 말이었다. 이 말을 하는 데에는 그리 부끄러움이 없는지 흔히 붉히던 귓불도 희게 제 색 그대로였다. 다만 키스의 열기로 나른하게 울리는 목울대를 손끝으로 가만 쓸어 입가를 문지르면 속눈썹을 길게 내리깔아 오며 습관적인 한숨을 뱉어 온다. 흔연히 갈라지는 입술 새로 살짝 밀려들어 간 손가락 끝을 희완의 혀가 가볍게 빨아 갔다.

“앞으로 연습 들어가게 되면 자주 못 보게 될 것 같아서요.”

“이보다 더 말입니까.”

지금도 썩 자주 보는 편은 아니라 만날 때마다 이리 입술을 부딪치고 몸을 부비는 것이었지만 쉬이 동거를 결정 내리지 못하는 희완을 재촉할 생각은 없었다. 몸을 섞는 것과 직접적으로 삽입하여 그 안을 점령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 외에도 여러 면에서 부담을 지는 건 희완이었고 같이 살게 된다는 건 그 부담을 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하기에 그 망설임은 이해될 범주의 것이었다.

그 나름대로 순서를 밟아 오는 것이라 이해한다. 처음이 뒤틀렸던 만큼 이번만큼은 제대로 시작하여 겪어 나가고 싶은 것이리라. 그만큼 승도와의 관계를 중요시한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되었다.

“무슨 내용이기에 도우진 씨와 동시에 캐스팅된 겁니까.”

이어지는 질문에 극 내용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듯 잠시 속눈썹을 깔던 희완이 답을 했다.

“스릴러입니다.”

더블캐스팅된 건 아니고, 2인 극에 각자의 배역으로 동시에 캐스팅된 거라고 설명하던 희완이 티 속에 손을 밀어 넣고 제 뱃가죽을 문지르는 승도의 손목에 제 손을 겹쳤다. 뱃속이 간질간질해진 탓이었다. 그러다 소매 밑에 자리한 손목시계가 만져져 소매 끝을 슬쩍 끌어 올린다. 몸으로 장난치고 놀 시간이 있는지를 묻는 몸짓이었다.

“느긋하게 즐기고 싶습니다만.”

답을 않는 희완이 눈가를 살짝 찌푸리다 고개를 끄덕인다.

몸이 달아 있었는데 발기를 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몸 부딪치며 놀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다만 그러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다. 그럴 바엔,

“끝나는 대로 오겠습니다.”

“네.”

오면 본격적으로 놀아주겠다는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고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희완이 두어 걸음 물러서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내심 겸연쩍어진 탓이다. 어차피 남자가 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 남자가 오면 하는 일은 거의 정해져 있었고, 비교적 대화가 늘기는 하였으나 몸을 부비는 게 대부분이었다. 둘이 함께 있으면 옷을 걸친 시간보다 벗고 있는 시간이 더 많았는데 그걸 알고서도 찾아온 것이다. 사실 이렇게 일찍 귀가할 거라 생각을 못 해 이미 시간을 보낼 것들도 바리바리 싸 들고 온 후였다. 처음부터 그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잡힌 손을 내어 제 손목을 가만 간질이는 남자의 단단한 턱 끝을 응시하던 희완이 테이블에 대충 개켜져 있는 대본에 시선을 주었다. 나오는 길에 경성이 던져준 대본은 연극이 아닌 뮤지컬로 남성 2인이 이끌어 가는 심리 스릴러극이었다. 국외에서 라이센스로 들여온 작품은 올해 세 번째로 막을 올리는 터라 이미 국내에서도 그 상품성이 검증된 상태였다. 탄탄한 구성력과 뛰어난 작품성으로 국내외 마니아층의 충성도가 높아 연출부터 배우까지 매해 캐스팅을 할 때마다 화제가 되었고, 실험적인 캐스팅으로 신인들의 등용문이 되기도 하고, 알려지지 않은 배우의 재발견의 기회가 되기도 해, 배우 사이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작품이었다.

그런 작품에 오디션도 없이 지목되었다는 사실은 꽤 고무적인 일이었다.

희완은 작품으로는 무엇 하나 검증되지 않은 중고신인에 불과했고 도우진은 말 할 것 없이 트러블메이커였다. 흔쾌히 승낙을 하긴 했어도 대외적인 이미지와 건강상의 문제로 우려를 표했던 우진에게 직접 전화를 해 설득과 타협을 한 것도 이번에 새로 발탁된 연출이었다. 그는 열성적이었다. 극의 성공은 배우와 관객뿐 아니라 그 극을 지휘하는 연출의 열성에서도 크게 판가름이 나는 것이었다.

소파에 앉아 극의 흐름을 몇 번고 되짚어가던 희완이 문득 시선을 들었던 건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을 때였다.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에 일어나 빠르게 현관문으로 다가섰다. 기다리던 사람이라 반가웠고, 생각보다 일찍 귀가하게 돼서 보게 된 얼굴이 좋았다. 그래서 더 이렇게 떨어지는 게 아쉬운가 하였다. 좋은 소식이라 그에게도 들려주고 싶었고, 더 이야기가 하고 싶었는데. 짧게 입을 맞추고 이번엔 정말 나갈 준비를 하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진한 아쉬움을 느낀 희완이 괜히 턱께를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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