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자 나직이 울리는 노랫말이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강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대학로 전경이 펼쳐져 있는 아파트 난간에 상체를 기대고 서서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 올리는 우진의 옆모습이 약간량 일그러져 있었다. 두 번의 복구 수술로 인해 처음보다는 많이 흐려진 흉터는 그럼에도 선명하였다. 밝게 쏟아지는 햇빛 속으로 아지랑이처럼 녹아들어 가는 담배 연기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다시 시선을 내려 난간 저 밑을 응시하는 우진에게서 다시 그 음울하고도 잔잔한 음색이 흘러나왔다.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너도 한 대 주랴.”
어느새 그 뒤 벽에 기대어 서서 우진을 바라보고 있던 희완이 들려오는 음성에 고개를 저으며 성큼 그 옆에 다가섰다.
“뭐 좋은 게 보여?”
“뭐 구질구질한 바닥이지.”
시큰둥하게 답하며 담뱃불을 눌러 끄는 우진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수술 후 회복 기간이 길어 어느 정도 몸 상태가 좋아져 있었다. 슬슬 무어라도 할 법한데 우진에게선 아직 이렇다 할 말이 전혀 없었다. 재촉하는 이도 없었고, 권유하는 이도 없었고, 그 주변은 예전 같지 않게 무척 고요했다. 사고 후 심심찮게 맴돌던 찌라시 기자들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고 이젠 때 되면 씹기 바쁜 연예 프로 가십거리로도 소비되지 않았다. 그것들을 좌지우지하는 힘이 없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동안 우진은 자연스레 잊혀 가고 있는 중이었다.
“요즘도 강명 선생 쫓아다니냐.”
“아니. 또 산 들어가셨어. 이제 가르칠 거 없다고 가면 맨날 술만 먹이셔서 차라리 속이 다 시원해.”
“하하, 김학정 술꾼 내력이 어디서 왔나 했더니.”
“학정 형도 요즘 얼굴 뵙기 힘들던데.”
“여기라고 다르겠냐. 아마 이 낡은 집구석보다 극단에 얼굴 비추는 횟수가 더 많을걸? 요즘은 또 장미호 선생질 한다고 더 쪼갤 시간도 없이 바쁜 모양이더라.”
승원과 오석이 나눈 이야기가 말짱 풍문은 아닌 모양이었다. 장미호 전부터도 학정의 티칭 실력은 각 배우들 사이에서도 자자하여 그런 요청이 종종 들어오기는 했었다.
“장미호 그 성격에 학정같이 답답한 성격 못 배겨낼 건데.”
걱정이라며 코웃음을 치는 우진이 돌아서 등을 난간에 기대며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혔다. 흔들리는 머리칼 밑으로 선연한 칼집이 목 아래로 길게 이어졌다.
“주여욱이랑 연애할 때는 대단했지.”
“친분이 있어?”
“친분이랄 것까지야. 나 드라마 데뷔할 때 주여욱이 여주 오빠로 출연했었지. 그 꼴통도 노는 거 좋아해서 클럽에서 몇 번 얼굴 마주치기도 했었고. 반면에 장미호는 발랑 까지게 생겨 갖고 의외로 요조숙녀였거든. 주여욱이 그렇게 날 짓 하고 다니는 걸 끔찍하게 싫어해서 한번 뒤집어지면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어.”
그래도 꽤 끈질기게 사귄 거 보면 장미호 순정도 무시 못 한다고, 남자 잘못 만나 제 신세 망쳐 가는 대표적인 케이스였다가 근래 정신을 차린 것 같다 하는 우진이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어쩌면 그 당시의 제 모습을 떠올리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워, 아직도?”
묻는 희완에게 답을 않는 우진이 길게 감았던 눈을 느리게 떠 내었다.
“조명.”
미치게 날뛰다가도 조명 앞에만 서면 그렇게 안심이 될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날 밝히던 거라서, 많이 집착했었다.”
정제할 수 없는 열망을 깨닫고 방황하던 우진에게 학정이란 것은 떼어 낼 수 없는 굴레였다. 체념하였으나 부옇게 쌓인 먼지처럼 소리도 없이 쌓여 가던 그 뜨거운 것은 먼지와는 달리 쉬이 흩어지지도 않았다.
어찌 재어지지도 않는 그 깊이와 무게가 두렵고 무서워 감히 꺼내 보지도 못하던 것을 건드린 하준우에게 살의를 느꼈었다. 제 이 치부와도 같은 것을 학정이 알게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했다. 하준우에게 몸을 내어 주며 갈 곳 없이 안에서 쌓여만 가던 분노와 설움이 갈 길을 찾아 칼바람처럼 휘몰아쳐 갔다.
얌전히 안기면 원하는 건 무엇이든 주겠다던 하준우의 뒤통수에 비수를 꽂으며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충격을 받아 눈을 부릅뜨다 야차처럼 일그러져 가는 그 얼굴에 침을 뱉고 욕설을 뱉었다. 거의 발악하다시피 폭소하는 우진에게 달려들던 하준우의 붉어진 눈에서 뒤틀린 상처를 보았다.
정말 몰랐을 것 같으냐고, 그렇게 아끼던 네놈이 뒤통수치고 떠나가도 성질 한번 내지 않고, 니놈 손 한번 붙잡지 않고 보낸 이유가 뭐일 것 같으냐고, 써먹을 데라곤 씹질밖에 없는 더러운 호모 새끼, 제 발로 떠나간다니 모르긴 몰라도 속이 다 시원해 박수 치고 싶은 심정이었을 거라며 악에 받쳐 빈정거리는 하준우에게 다시 침을 뱉었다. 그 더러운 호모 새끼 궁둥이에 시도 때도 없이 발정하는 돼지 같은 놈이라며 욕을 뱉었다. 개처럼 목줄이 채워진 채 죽으라고 조여지며 하준우를 받는 순간 우진은, 다시는 학정으로 발길도 두지 않겠노라 했었다.
“요즘 매양 선 자리 들어오나 보더라. 교수직이라는 멀쩡한 명함도 있고, 또 쓰기에 따라 극단 단장이라는 명함이 나쁜 것도 아니고, 하니 시골에서도 이래저래 성화라서 전화벨 울릴 때마다 학정 그 인간 얼굴이 썩어 들어간다. 누구 신세 망칠 일 있나며.”
그 꼴이 퍽이나 우습다며 키득거리던 우진이 난간에서 몸을 떼어 내며 환기시킨 다고 활짝 열어 두었던 현관으로 걸어 들어갔다. 군살 없이 뼈대만 홀쭉한 몸은 그나마 살이 붙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