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54화 (54/123)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희완이 내민 표 두 장을 보던 승도가 손째로 그걸 쥐며 시간과 날짜를 확인했다. 돌아오는 일요일 오후 저녁 공연이었다. 머릿속으로 일정을 더듬어 확인한 남자가 곧 고개를 끄덕이며 희완의 손을 놓아준다.

“그날도 학정으로 출근합니까.”

남자의 체온이 묻어 나온 듯 뜨끈한 손등을 무의식적으로 쓸어내리며 표를 뒷주머니에 도로 넣는 희완이 고개를 저었다.

“금요일부터 촬영지원 나갑니다.”

희완에게까지 떨어지는 할당량은 거의 없었는데 필영이 나가는 드라마 전쟁 씬이 금요일부터 있을 예정이라 했다. 인원이 모자라 예정 스케줄이 없는 단원 모두가 차출이 되었고, 낮 씬과 밤 씬 둘 모두 있다니 일요일 오전에나 촬영을 마칠 가능성이 농후했다. 유동적인 촬영 시스템을 잘 알고 있는 남자가 시간 맞출 수 있겠느냐며 차 문을 열어주었다. 저를 태워 놓고 또 담배를 빼어 물려는 걸 알아챈 희완이 그 문을 도로 닫아 놓고 거기에 등을 대었다. 품에서 담배를 꺼내던 승도의 시선이 희완에게로 닿았다.

“안 늦겠습니다.”

담배를 쥔 승도의 손을 가만 누른 채로 상체를 붙여 오는 희완의 입술이 지척에 있었다. 그걸 잠자코 내려다보던 승도가 입술이 거의 붙으려던 찰나에 입을 열었다.

“담배를 태우는 게 싫어 이럽니까.”

정곡을 찔린 것치고 희완의 반응은 대단치 않은 것이었다. 가까이 붙였던 몸을 슬쩍 떼어 내며 부정도 긍정도 않던 그의 손 역시 가볍게 떨어져 나갔다. 부는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대충 훔치며 시선을 내리는 희완의 속눈썹 위로 주차장에 켜 놓은 노란 불빛이 내려앉았다.

“피우라고 준 거 아닙니까.”

노천카페에서 줬다 도로 뺏어 갔던 담배는 결국 승도의 손에 들어왔다. 그랬던 속내까지 가늠할 정도로 세심하지 못한 남자는 손을 내미는 것만으로도 희완이 자의로 주려 했던 최초의 물건을 다시 받아 갔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참견할 생각 없습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시라는 희완을 빤히 쳐다보며 담뱃불을 당기는 승도의 입술 새로 곧 짙은 담배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 익숙한 향에 속눈썹을 들어 올리는 희완이, 그렇습니까. 하는 그의 목소리에 반응을 했다. 담배를 끼운 그의 왼 손목을 잡아 밑으로 끌어 내리며 제 쪽으로 끌어오는 희완의 이마 가까이로 남자의 턱이 와 닿았다. 턱을 조금 뒤로 젖히니 움틀리는 남자의 목젖이 희완의 시선 안으로 고스란히 들이쳤다. 담배에 뒤섞인 희미한 스킨 향은 이제 희완에게서도 풍겨지는 것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칼 너머로 길게 연기를 뱉어낸 승도가 한 발자국 다가서니 잠시 떨어졌던 희완이 등이 툭, 차체에 부딪치며 꼼짝없이 가운데에 끼이게 된 꼴이 되었다. 아랑곳 않는 남자가 왼 손목에 희완의 손을 매단 채로 팔을 들어 올려 다시 입에 담배를 물었다. 잡힌 손목을 차창에 눌러 외려 희완의 손등을 꼼짝 못 하게 하고 다른 손으로 담배를 빼어 바닥에 떨어뜨리는 그가 구둣발로 꽁초를 비벼 껐다. 귓가로 연기가 흩어지는 소리가 선명히 울렸다.

“참견 같은 건, 모르는 성격 아닙니까.”

아니, 그도 그렇지는 않군. 주변인들을 끔찍이도 아끼는 희완을 떠올려내고 이내 제가 뱉은 말을 정정하는 남자의 바짝 붙여진 가슴으로 단단한 근육질의 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체까지 빈틈없이 밀착되어 어쩐지 불편해진 희완이 고개라도 조금 물리려는 순간 목뒤로 커다란 손이 덮어졌다. 목덜미를 뒤덮은 손이 하얗게 드러나 있던 살갗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희완의 고개를 뒤로 젖히게 했다. 들리는 눈으로 남자의 날렵한 코끝이 잡힌다. 심미안에 까다로운 유명 향수 모델로도 손색이 없는 남자의 외모는 여자와 함께 있을 때 더 두드러졌는데, 가끔 이렇게 혼자서도 한 꺼풀 그 외양을 드러내 보일 때가 있었다.

직선으로 뻗어 있던 시선을 내려 희완을 응시하는 남자가 차창에 누르고 있던 손등을 풀어주니 겨우 손목을 붙들고 있던 악력이 떨어져 나갔다. 그것을 다시 제 손으로 꽉 덮어 쥐는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다가오는 입술이 자연히 맞붙었고 희완은 달리 거부를 하지 않았다. 외려 입술을 열어 그의 키스에 동조했다. 희완에게도 익숙한 쌉싸래한 향이 혀끝으로 가만히 굴려졌다.

“누가, 봅니다.”

깊어지려는 것을 입술을 떨어뜨려 만류한 희완이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의 전용으로 쓰이는 주차장에 누가 있을 리 만무하건만 선선히 물러서는 승도가 희완을 당겨 옆으로 세우고 다시 문을 열어주었다.

“사진이라도 찍힐까 염려하는 겁니까.”

하는 소리에 희완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잘은 몰라도 요릿집 내부가 보안이 철저하다는 것은 희완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흔한 감시 카메라 하나 없었고, 출입 시 단 한 번도 다른 이와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사실 좀 전에 제가 댄 핑계도 그저 남자를 밀어 내는 역할이 전부였고.

“아.”

그제야 제 핑계에 대한 남자의 가벼운 응수였다는 걸 깨달은 희완이 커다란 손에 떠밀려 조수석에 앉혀졌다. 문이 닫히고, 보닛 앞을 빙 돌아 운전석에 올라타는 승도에게로 희완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시동을 켜고 벨트를 매는 그가 사이드미러로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벨트 매고.”

“아, 네.”

뒤늦게 제 몫의 안전벨트도 착용을 하는 희완이 매끄럽게 공간을 빠져나가는 차체의 울림을 느꼈을 땐 이미 요릿집 후원을 빠져나온 후였다. 도심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도로는 어둑한 그늘이 내려 무척 한적했다. 양옆으로 길게 불을 밝히고 선 가로등과 울창한 가로수를 휙휙 지나치는 동안 조용히 차체의 울림만 느끼고 있던 희완이 가방에서 극본을 꺼내었다. 운전 시에도 평소와 같이 말이 없는 남자는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이대로 아파트까지 직행한다면 약 한 시간 정도가 소요될 것이었다. 운전하는 사람 옆에서 자는 건 싫고, 라디오도 켜지 않은 밀실에서 과묵한 남자와 침묵을 나누는 건 불편하지 않았으나, 자칫 신경이 느슨해질 우려가 있었다. 그러다 졸 것 같아서 꺼낸 극본을 펼쳐든 희완이 시선을 내렸다.

“무슨 내용입니까.”

“사랑 얘깁니다.”

“그것만으로는 장사가 안 될 텐데.”

“네, 그렇더라구요.”

올린 지 한 달 만에 막을 내린 극이었다. 덕분에 극작을 한 필영은 한동안 그 충격에서 헤어나질 못했었다. 소도둑같이 생긴 놈이 의외로 순정적인 면이 있어 그거 하나만은 봐 줄 만했다는 경성의 평에는 희완도 부분적으로 동의했다. 소나기 짝퉁 같다는 성희의 평이 결정적으로 필영의 슬럼프에 일조를 했지만, 그런 거 같았으면 아예 올리지도 않았다는 학정의 한마디로 일축이 되었다. 단지 흥행하기에 너무 정적이라서 흥행요소가 떨어졌을 뿐이다. 그럼에도 학정이 손을 들어 준 이유는 극본 안에 있었다. 감초처럼 들어가는 갈등구조 하나 없이, 말 그대로 서정적이고 순정적인 사랑 이야기였다. 때문에 실패한 이야기이기도 하였으나, 반면 그래서 더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어쩌면 연극이 아니라 단편 드라마 대본 정도로 나갔다면 더 나았을 거라는 학정의 말에 수긍이 가기도 했었다.

연극판 이야길 하니 금세 또 얼굴 위로 떠오르는 잔잔한 표정에 막 도심으로 진입을 하던 승도가 라디오를 켰다. 마침 시끄럽게 터져 나오는 댄스가요에 주의가 분산된 희완이 옆을 돌아보고 창밖으로 비치는 풍경에 도심으로 진입한 걸 알아차렸다. 무심결에 시계를 찾아 보곤 다시 남자를 돌아본다.

“안 피곤하십니까.”

“괜찮습니다.”

채널을 바꾸는 대신 소리를 줄이는 승도가 사이드미러를 훑어보며 옆 차선으로 진입을 했다. 자정이 넘은 시간임에도 도시 중심부는 빠져나온 차량으로 가득 붐비고 있었다. 서로 먼저 가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차량들 틈에서도 능숙하게 핸들을 돌리는 남자가 신호에 걸려 정차를 시키며 라디오 대신 음악을 틀었다. 희완의 귀에도 익숙한 피아노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집중해도 됩니다.”

“아, 아닙니다.”

“그럼 눈이라도 붙이든가.”

“안 졸립니다.”

“졸 거 같아서 그거 꺼내 놓은 거 아닙니까.”

“어-,”

맞긴 한데, 그걸 어떻게 안 건가 하는 희완의 눈이 둥그레진다. 그걸 본 척도 않는 승도가 차를 출발시키며 손을 뻗었다. 단단한 손끝이 부드럽게 희완의 뺨을 스치고 다시 기어 위에 올려졌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의 체온은 평소 묵묵한 그의 성정과도 맞아떨어지는 면이 있었다. 그의 손끝이 닿은 곳에 제 손을 대며 보던 극본을 내려놓는 희완이 차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느린 호수처럼 이동하는 차량들의 불빛에 뜬 남자의 흐릿한 옆모습이 저를 돌아보는 게 비춰졌다.

“이쪽으로 보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하는 소리에 슬쩍 미간을 찌푸리던 희완이 결국 방향을 바꾸어 통하는 것 없이 제 눈으로 남자를 직시하였다. 운전에만 집중하는가 하였던 남자는 나름 희완에게도 신경을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매번 무심한 듯 저를 챙겨 오는 남자의 손길을 습관처럼 받고 있는 희완도 그걸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다.

콘솔 박스를 열어 안에서 종잇갑 하나를 꺼내 희완에게로 내미는 승도가 흘긋 옆을 보았다. 생각보다 도로가 막혀서 길에서 버리는 시간이 실시간으로 늘어 가는 중이었다. 요릿집에서 자고 올까도 했지만 어쩐지 내켜하지 않는 희완을 일으켜 그대로 별채를 나왔다. 화대를 받고 몸을 내어 주던 기억이 여직 남아 그러는가, 추측만 한다. 받은 케이스에서 초콜릿 하나를 꺼내어 제게 밀어 주는 희완의 손을 통째로 잡아당겨 입으로 받아 무는 승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클럽 전용으로 사용하는 초콜릿은 미약이 섞여 있었는데, 개중 약이 안 들어간 것을 챙기던 여자들이 때마침 방문한 승도에게 하나를 내밀었던 것이다. 약이 빠져 있어 더 단맛을 내는 것은 승도에겐 지나치게 달았으나 희완의 입맛에는 맞을 것이었다.

“답니다.”

“별롭니까.”

“아니, 좋습니다.”

연달아 초콜릿 하나를 더 입에 넣는 희완이 제 손끝을 괜히 한번 문대어보았다. 좀 전에 남자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였다.

“입맛에 맞으면 더 가져다주고.”

“괜찮습니다.”

되었다며 하나 더 입에 털어 넣고 케이스를 닫는 희완이 그것도 극본과 함께 가방에 넣었다. 그걸 본 승도가 컵 홀더에 끼워 두었던 생수를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썩은 이는 없습니까.”

“아- 네. 신경 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단걸 좋아하는데 이가 남아나느냐는 소리는 도연에게도 매일 듣는 말이었다. 여느 연예인들처럼 매주 스케일링을 받거나 대대적으로 이를 갈아엎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희완도 나름 관리를 하고 있었다. 본래 고르기도 하고 양치습관이 좋아서 치과하고는 거리가 멀기도 했는데, 한참 업자들에게 매여 있을 때 잘못 맞아 부러진 어금니를 해 넣은 적은 있었다. 그 건은 누구에게 따로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해본 적이 없어 현재 희완 외에 아는 이가 거의 없었으나 희완에 대한 모든 기록을 수집하여 열람한 승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희완은 모르는 일이었다.

“치아도 예쁘긴 합니다.”

“…아.”

무어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희완이 눈가를 문지르며 괜히 스피커 볼륨을 올렸다. 때때로 감당 못 할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어 놓는 남자였다, 키스를 할 때면 습관처럼 치열을 핥아 오던 남자가 떠올라 손바닥으로 입술을 누르며 차창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다시 차가 멈춰 섰다. 신호에 막혀 선 옆 차선의 차량이 짙게 선팅이 된 유리창으로 선명히 비쳐 들었다. 목덜미를 덮어 오는 손의 열기에 가만 제 입술을 누르고 있던 희완이 다른 손으로 안전벨트를 풀며 그에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손바닥 대신 남자의 뜨거운 감촉이 입술을 내리눌렀다.

“달아.”

한참 희완의 입속을 둥굴리다 입술을 떼며 하는 말에 희완이 그러시냐는 눈길을 주었다. 생수로 씻어내도 아직 입 안에 남아 있는가 하여 제 혀로 안을 훑어내던 희완이 내리깔았던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줄지은 행렬에 보조를 맞추며 속도를 내는 남자가 입술을 가볍게 건드리고 그 손으로 희완의 다른 곳을 만져 왔다. 진한 열감과 색감이 배제된 그냥 부드럽고 간지럽기까지 한 손길이었다.

“내일도 자러 옵니까.”

“그래도,”

“됩니다.”

제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오는 답변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희완이 제 목울대를 스쳐 빗장뼈 부근을 건드리던 남자의 손을 잡고 허벅지 위로 끌어 내렸다. 보통 일주일에 사나흘은 그의 아파트에서 자고 가긴 하였으나 바쁠 땐 하루도 힘들었다. 금요일인 모레부터는 촬영장에서 꼼짝을 못 할 게 뻔하여서 희완도 오늘내일은 남자의 아파트에 머무르려 했었다. 언제든 상관없다는 남자의 말은 희완에게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의 폭을 넓게 해주었다.

“내일도 그 시간에 끝날 것 같습니다.”

자정이 넘어 굳이 따지자면 오늘이었지만 승도는 정정하지 않고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도 데리러 가면 되겠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희완은 무심결에 잡은 그의 손을 이동하는 내내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대화를 이어 가며 무의식적으로 살갗을 문질러 오는 그 손길에 승도 역시 모르는 척 내내 희완에게 손을 맡겨 두었다. 키스하느라 풀어 두었던 벨트를 다시 매라 해놓고는 아파트 주차장에 파킹을 함과 동시에 제 손으로 그 벨트를 풀어낸 승도가 주차를 하는 동안 잠시 떨어져 있던 희완의 손을 잡아끌었다. 운전석으로 거의 넘어가다시피 상체를 기울이는 희완의 두 팔이 승도의 목뒤로 감겨지며 상체가 바짝 맞붙었다. 겹쳐지는 입술 새로 뜨거운 숨이 흩어지며 희완이 작게 무어라 속삭였다.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 승도가 다시 입술을 겹친다.

희완의 우려와는 달리 섞이는 입속에서 단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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