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52화 (52/123)

어깨를 걸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무슨 웃기는 소리라도 했는지 멀끔하게 눈을 뜨고 있던 희완이 나른한 눈매를 반달 모양으로 휘며 아하하 웃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아니, 들려오지 않았으나 그 몸짓만으로도 충분히 들은 것이나 진배없다. 대학로에서도 번화가와는 한참 동떨어져 있어 붐비는 시간대임에도 한적한 골목을 빠져나오던 희완이 어귀에 세워져 있는 차체를 발견하곤 옆을 돌아보았다. 인사라도 나누는지 어깨를 둘러 안은 여자의 팔에 끌려 가볍게 포옹을 하고 또 단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그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희완이 서둘러 걸음을 옮겨 오는 게 보였다. 창문을 두드리기에 내려주니 흰 얼굴이 가우뚱 안을 들여다본다. 매번 문을 열고 올라서기 전에 이렇게 먼저 인사를 해 오는 것은 희완의 습관이었다. 이러는 게 예의라고 누가 가르치기라도 했는지 아주 몸에 배어 있었다.

상체를 당겨 조수석 문을 밖으로 밀어 주니 그걸 잡고 여는 희완이 훌쩍 긴 다리를 접으며 안에 올라탔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물으며 시간을 확인하는 희완이 대꾸 없이 핸들을 돌리는 남자를 보았다.

유리 너머로 막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도연과 석주 무리가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는 게 보였다. 안이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 저런다. 누구냐 묻기에 쓸데없는 소문이 돌까 그냥 아는 형이라 했고 눈썰미 좋은 도연은 고급형 세단을 보곤 아는 형 참 요란스럽다며 우스갯소리를 해댔었다. 이따금씩 시간이 맞을 때 희완을 데리러 오는 일이 있긴 했었지만 이렇게 단원들과 딱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정식으로 인사시킬 일이 아니어서 대충 둘러대고 떨어져 나왔다. 사실대로 말할 수야 없는 일이었고, 그렇다고 승도 본인이 정안에게 그랬던 것처럼 팬이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 못 할 만큼 부끄러운 구석이 있었다.

말이 없는 남자를 슬그머니 살펴본 희완이 시간을 확인했다. 15분여가 지나 있었다. 혹시 그것 때문에 심기가 상했나 하여 남자의 표정을 살피던 희완이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큰길로 빠지기 전, 갓길에 차를 댄 그가 상체를 기울여 왔다. 짙게 선팅이 되어 있어 안의 모습을 밖에서는 볼 수 없을 테지만 그래도 조금 긴장을 한 희완이 눈을 굴리다 순순히 그 입술을 받았다.

“저녁은 먹었습니까.”

희완의 혼을 쏙 빼놓고서야 직성이 풀린 건지, 입술이 떨어진 자리에 흥건히 젖은 침을 스윽 닦아주며 다시 도로로 진입하는 승도의 질문에 멍하니 늘어져 있던 희완이 고개를 저었다.

“샌드위치 몇 조각으로 때웠습니다.”

대답을 하면서 공복감을 느낀 희완이 느리게 몸을 추스르며 차창 밖으로 막히는 도로를 보았다. 연습 전에 소줏집에 가서 국밥을 간단히 시켜 먹기로 했는데 때 아닌 대타 요청이 들어와서 그중 유일하게 극본을 외우고 있던 희완이 차출되어 갔다. 요즘 한창 잘나가고 있는 남극 작품을 하도 여러 번 보기도 했고 틈만 나면 찾아와서 애들 연습 상대 좀 해달라며 단원들 떨궈 놓고 가는 성희 덕에 배역마다 대사는 줄줄 외고 있었다. 꽤 비중이 큰 조연 역을 맡은 녀석이 갑자기 맹장이 터져 실려 가는 바람에 구멍이 난 걸 간신히 메우고 나오니 밤 열 시가 조금 못 넘어서였다. 한턱 쏠 테니 밥 먹고 가라는 성희에게 밥 대신 오리지널 내한 공연팀 티켓 두 장을 수고비로 받아내고 나오는 길에 뒤에서 저 들으라고 씹어대는 소리가 아주 화려했다. 아까워 죽으려는 성희에게 티켓을 흔들어 보이며 아하하, 웃으니 저를 향해 뻗어지는 주먹이 참 야무지기도 했었다.

아시아 투어를 하게 되면 좀처럼 일급 배우들이 들어오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이번 뮤지컬 내한 공연은 일급 배우들로만 구성되어 딱 네 번만 공연 일정이 잡혔다. 다들 표 구하느라 난리였고 성희도 천신만고 끝에 표를 구했건만 그날이 딱 남극 막 공 날이라고 땅을 치며 한탄을 했었다. 성희의 상심과는 별개로 어쨌거나 남는 표, 호시탐탐 눈독 들이는 놈들이 많았었는데 무대 한 번 서준 대가로 이 정도면 후한 값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무대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공연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몇몇 팬들에게 샌드위치를 받아 그나마 공복을 달랠 수 있었다. 희완의 팬은 아니었는데 당일 대타로 뛴 그에게도 인심이 후한 걸 보니 작품 자체의 팬인가 하며 학정으로 돌아가 늦게 연습에 합류하고 나온 길이었다.

“식사는,”

“아직입니다.”

“많이 바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럼에도 아직 식사 전이라는 남자를 뻔히 올려다보던 희완이 괜히 손바닥으로 턱을 감싸 누르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호에 걸려 차가 멈췄고 한참 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희완이 슬쩍 시선을 내렸다. 창문에 비치는 남자의 옆모습을 내내 보고 있었는데 거기로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모른 척해줘도 될 법하건만, 멋쩍어 눈가를 문지르니 다시 전방을 주시하며 차를 움직인다.

“한정식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답하는 희완의 목덜미로 손이 덮어졌다. 진득하니 머무르다 떨어지는 그 손에 내내 창에 시선을 못 박고 있던 희완의 귓불이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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