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51화 (51/123)

“아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보고의 마지막 후 한마디 덧붙이는 철진이 눈앞의 남자를 살폈다. 딱히 어떠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 남자는 말없이 넘겨준 파일을 넘겨보기만 할 뿐이었다.

노경인에게 총수 자리를 맡긴 후에도 백승도는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비록 낙하산으로 전무 자리를 꿰차긴 했어도 노경인은 회장으로도 쓸 만한 인물이었다. 어차피 회사는 전문 경영인들에 의해 잘 굴러가고 있었고 승도가 노경인에게 바라는 것은 폐쇄적인 한국 사회에서 잡음 없이 회사의 간판이 되어 줄 얼굴마담 역할이었다. 과묵하고 눈치가 빨라 제 주제 파악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노경인은 그 역할에 적합하였다. 성의준을 허수아비로 쓸 때만 하더라도 주석그룹을 소유하는 것이 아닌 갈가리 찢어 분해시키는 것을 목표로 두었던 백승도는 근래 들어 심경의 변화를 느낀 건지 태도의 변화를 보였다. 존속보다는 상잔과 파괴에 의의를 두고 거침없이 행동해 오던 그가 주석그룹의 안녕에 열의를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좀 더 파볼까요.”

책상에 걸터앉아 두꺼운 서류를 단숨에 훑어본 승도가 고개를 젓는다.

주석그룹의 모든 소유권과 그 계열사에 대한 지분을 대부분 확보하고 있는 승도가 출퇴근하는 곳은 철진이 관리하는 클럽에서 멀지 않은 작은 사무소였다. 클럽을 기준으로 승도의 사무실이 위치한 남쪽은 미개발 지구로 재래시장과 오래된 건물들이 다닥다닥 어깨를 맞대고 있는 낙후된 지역이었다. 몇 년 전 한참 뉴타운 바람이 불었을 때, 재개발 지구로 낙점됐다가 시장이 바뀌면서 철회된 후로 거의 유령타운으로 바뀐 지역이기도 했다. 그런 땅에 하나둘 전문 투기꾼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보고였다. 재개발 철회 이후 크게 땅값이 떨어져 거의 헐값 수준이었던 이쪽 지구는 거의가 승도의 소유였다. 클럽 소유권을 이전받는 조건으로 골칫덩이였던 이쪽 지구의 대부분의 땅을 사들여야만 했던 것이다.

심심찮게 용역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말에 별다른 대응을 않던 승도가 흘깃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겨우 이깟 일로 여기까지 불러들였느냐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걸 빠르게 눈치챈 철진이 크게 송구스러워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돈 냄새에 가장 민감하다는 땅 투기꾼들이 이 일대에 몰려들기 시작한다는 것은 곧 피바람이 몰아친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정부나 시 차원에서 개발 계획이 발표되기 전에 귀신같이 냄새를 맡고 죄 몰려온 투기꾼들에 의해 이 일대는 쑥대밭이 될 것이 자명했다. 대외적으로는 철진의 관리 구역으로 알려져 있어 모든 컨택이 그쪽 창구로 들어올 예정이었으나 실질적 소유자는 백승도였다.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억만금을 퍼부어도 이 일대는 낙후된 지역으로 남아 있을 것이었다.

벌써부터 슬슬 분위기를 조성하러 오는 용역들은 철진이 알아서 청소하고 있었으나 공식적으로 발표가 되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터였다. 하여 처리 방향을 묻는 것인데 승도에게선 별다른 소리가 없다. 즉, 땅 투기 따위엔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피부로 먼저 감지하고 클럽으로 찾아오는 세입자들에게 둘러댈 말이 생겨 한결 입장이 가벼워진 철진이 다시 고개를 숙인다. 담배를 빼어 무는 승도가 낡은 의자에 걸어 뒀던 재킷을 꿰어 입으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약속 시간이 넘치게 남았으니 이 일대를 한 바퀴 돌아볼 심산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