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48화 (48/123)





소극장 입구는 벌써부터 몰려든 관객들로 시끌벅적했다. 평일 낮이라 관객이 없을 법도 한데 어디에서 단체관람이라도 온 듯 구석구석 몰려 있는 관객들 대부분이 비슷한 연령대로 각각 비슷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좁은 입구를 막고 서서 농을 던지며 껄껄껄 웃어대던 아저씨 두엇이 승도와 희완을 발견하곤 어이쿠 자리를 비켜주었다. 간만의 외출이 즐거운지 들뜬 듯한 기운이 좁은 계단을 따라 굽어 들어가는 복도까지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복도 벽에 붙은 긴 벤치에 앉아 먹을 걸 나눠 드시는 아주머니들 사이를 지나쳐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티켓 부스에 얼굴을 디미니 습관적으로 성함을 물으며 마우스를 움직이던 정안이 반색을 했다.


“아이고, 희완 씨 아닙니까. 여길 또 어쩐 일로!”


본래 인력을 쓸 자금이 부족한 영세한 극단은 무대 설치부터 이런 티켓팅까지, 연출을 비롯한 몇몇 단원이 하나서부터 열까지 모두 다 소화하곤 했었는데 「너울」이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 부연출을 겸하고 있던 정안이 희끗한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기며 주름진 눈가를 접었다. 극이 좋다고 몇 번이나 재관람을 한 덕에 얼굴을 익히고 말을 몇 번 섞다 보니 자연히 친분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무엇보다 학정이라는 이름이 정안에게 흥미를 일으킨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비좁은 대기실을 복작복작 메우고 있는 관객들을 가만 둘러본 희완이 저를 반기는 그에게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관람하러 왔습니다. 예매 없이 와서 저희 자리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어우 걱정 마요, 걱정 마. 희완 씨라면 내 없던 자리도 빼주겠지만, 하하하 다행히도 빈 좌석 많~습니다.”


너스레를 떨며 흘긋 희완의 뒤에 비스듬히 선 승도를 올려다보았다.


“이쪽은?”


“아, 네- 이쪽은,”


그제야 뒤늦게 승도를 소개하려던 희완이 잠시 말문이 막히는 얼굴을 했다.


“그게, 제,”


“팬입니다.”


뒤에서 불쑥 뱉어지는 말에 놀란 희완이 시선을 들었다.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한 발 다가와 정안에게 악수를 권하는 승도가 정중히 눈인사를 하였다.


“백승돕니다.”


“박정안입니다. 하하, 희완 씨 매력은 남녀노소 구분이 없는 모양입니다. 저번에는 어느 꼬맹이 하나가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모르더니.”


웃으며 하는 말이, 공연 중에 관람객 품에 안겨 있던 아이 하나가 단이 없는 무대를 쪼르르 가로질러 가 맞은편에 앉았던 희완의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한바탕 웃음이 터졌더랬다. 다행히 심각한 장면이 아니라 능숙한 애드립으로 넘어가긴 하였는데 우리 배우님, 인기 많은 누구 씨 덕에 진땀을 빼긴 하였을 거라며 웃음을 터트리는 정안이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관객을 발견하고 지불금의 반을 제하고 서둘러 희완에게 티켓 두 장을 끊어 주었다. 관례였던지라 희완도 사양 않고 티켓을 받았다.


“두 분 덩치가 웬만한 정도가 아니라서 뒷자리로 배정했습니다. 끝자리긴 해도 워낙 좁은 극장이라 잘 보일 겁니다.”


마지막 말은 승도에게 하는 정안이 곧 다음 관객에게 티켓을 끊어 주었다. 자리 배정이 없는 자유석이라 아직 공연 30분 전임에도 티켓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단체 관람객 외에도 보러 오는 관객들이 많은 것을 내심 흐뭇하게 보던 희완이 인구 밀도에 괜히 더해 줄 것 없다는 생각에 들어온 길을 다시 돌아 나가려 했다. 인사를 받던 정안이 마우스로 예약 내역을 확인하다 씩 웃으며 공연장 출입구롤 가리킨다.


“갈 데 없으면 들어가 있어요. 성동 선생님이 반가워할 겁니다.”


하며 희완의 대답도 듣지 않고 출입구 쪽으로 떠밀었다. 엉겁결에 밀리며 주춤 남자를 올려다보니 별말이 없다. 희완이야 이 화제의 일인 극을 이끌어 가는 주역인 배우 성동을 만나는 게 즐거운 일이긴 했지만 남자를 두고 그러는 건 실례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사양하고 돌아서려는데 무심히 다가온 그가 굳게 닫혀 있는 출입문을 열고 희완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떠밀리듯 안으로 들어선 희완이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로 문을 닫으며 좁은 공연장 내부를 말없이 훑어보는 남자의 장신이 눈에 들었다. 어둔 조명을 머리맡에 둔 채 유심히 안을 살피는 그 모습을 잠시 넋을 잃고 올려다보던 희완이 문득 귀 아래를 문지르며 시선을 떼 내었다. 짐짓 다른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목 밑을 쓸어내리는 희완에게로 남자의 시선이 닿았다. 슬쩍 붉어진 귓불이 눈에 띄었다. 내색하지 않고 다시 내부를 둘러본다.


아직 관객 입장 전인 공연장 내부는 아담하니 조용했다. 사실 공연장이라기도 뭣할 만큼 낙후된 시설은 뮤지컬이 아닌 연극이기에 가능한 시설이었고 하준우의 훼방으로 공연장 잡기도 어려웠던 너울의 복잡한 사정이 반영된 장소이기도 했다. 그나마도 학정을 통해 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희완도 얼마 전에 정안에게 들어 알게 되었다.


“좁습니다.”


“아, 네. 소극장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극장입니다. 보수공사를 해도 워낙 작게 지어진 곳이라,”


“주로 연극이 올라옵니까.”


“네, 음향 시설은,”


말을 멈춘 희완이 네 개의 사각에 덜렁 달려 있는 낡은 스피커를 가리키며 답했다.


“저게 전붑니다.”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이던 승도가 소박하나마 여러 소도구로 한껏 꾸며져 있는 무대를 훑으며 희완을 보았다.


“인사하러 안 갑니까.”


“어-.”


같이 갈 생각이었나 보다. 그제야 납득하는 희완이 눈을 들며 괜찮으시겠냐고 묻는다.


“내가 깽판 놓을 것 같습니까.”


“아, 닙니다.”


놀라 고개를 젓는 희완이 조금 얼굴을 뒤로 물렸다. 제 공간에 들어와 있는 남자를 그려 본 적이 없어서 낯설고 이상한 기분인 건 사실이었으나 자꾸 그에게 시선이 가는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준비도 없이 맨살을 계속 보여주는 것마냥 긴장되고 어색해서 연신 신경이 쓰였다.


“얌전히 있겠습니다.”


“…….”


“혼자 다녀와도 되고.”


“아, 아닙니다. 같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며 남자의 팔을 붙잡던 희완이 뒤를 돌아보았다. 대기실로 통하는 문이 요란한 마찰음을 내며 열리고 그 사이로 깡마른 사내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반가운 손님이 있을 거라더니.”


분장을 완벽하게 마친 성동이 히죽 웃으며 희완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걸 보자마자 붙잡고 있던 남자의 팔을 놓고 그리고 돌아서는 희완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뭐 하러 또 왔어? 아니, 관객 없어서 자리 채우라고 불렀나?”


하며 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주위를 두리번두리번거리던 성동이 뒤쪽에 선 남자를 발견하고는 축 처진 눈을 크게 떴다.


“못 보던 인산데?”


“아, 네. 이쪽은 제-,”


마침 이쪽으로 다가오는 승도를 성동에게 소개시켜 주려 하던 희완이 또 말을 멈추고 말았다. 기다리고 있던 성동이 그걸 이상스럽다는 눈초리로 보았고 남자 역시 가만 쳐다보았다. 그 짧은 순간 그 작은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이 바쁘게 오갔지만 결국, 눈가를 조금 이지러뜨리는 희완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뱉어 놓은 건 남자가 정해 준 포지션이었다.


“팬입니다.”


머리칼 밑의 귓불이 붉어지는 걸 흘깃 보던 승도가 악수를 건네며 성동에게 인사를 걸었다.


“백승돕니다.”


“성동입니다. 이야~ 키가 굉장하시네요.”


“종종 듣습니다.”


“이 녀석 팬이라구요? 하하, 떡잎부터 알아보는 재주가 있으십니다. 학정만 아니었으면 진즉에 빼 왔을 건데 말입니다.”


“동감입니다.”


의외의 답에 놀란 건 희완뿐만이 아니었다. 벙한 얼굴로 저보다 머리 두 개는 위에 있는 승도를 올려다보던 성동이 푸하하하 폭소를 터뜨렸다. 이거, 이거, 당장 팬클럽이라도 만들 기세시라고 희완의 등을 팡팡 두드려 가며 웃는 성동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스윽 손가락으로 그걸 닦아내며, 흰 얼굴이 민망해 죽을 것 같이 변해 가는 걸 보고는 또 남은 웃음을 푸흐흐 흘린다.


“아무튼 좋은 팬 두셨습니다, 우리 예쁜 아우님. 곧 막 올라가니까 재밌게들 보시고, 다음 기회에 술이라도 한잔합시다.”


하는 것으로 간단히 인사치레를 한 성동이 공연 잘 마치시라 응원을 하는 희완의 어깨를 툭툭 가볍게 치고는 곧 빡빡한 대기실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공연 십 분 전이라 몇 안 되는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들 있었다. 머쓱한 기분에 괜히 남자를 돌아보지 못하고, 음향 체크를 하고 소도구 확인을 하고 객석 체크를 하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손에 쥔 티켓만 긁어대던 희완이 불현듯 좌석표를 확인했다. 정안의 언질대로 중앙 맨 뒷줄 연석이었다. 손끝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든 희완이 오랜만에 남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화장실이나, 담배 피우실 거면 지금 다녀오시는 게,”


“갈 겁니까.”


“아니, 저는 괜찮습니다.”


그럼 되었다며 희완의 손을 통째로 쥐어 좌석표를 확인한 승도가 육안으로도 자리를 확인하고 먼저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공연장 중에서도 천장이 낮은 축에 속해서 계단을 오르는 남자의 정수리가 조명 끈에 닿을 것 같아 굉장히 아슬아슬한 느낌이 있었다. 더구나 사방이 막히고 좁은 곳에서 봐서 그런지 괜히 남자의 존재감이 더 부각되는 듯하다며 뒤늦게 걸음을 옮기는 희완도 곧 그 옆에 가 앉았다.


“자리가 좀 불편할 겁니다.”


“신경 안 씁니다.”


무뚝뚝한 어투에 가만 고개를 끄덕인 희완이 멋쩍게 좌석표를 내려다보고 바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의 움직임을 좇다 눈이 마주치면 꾸벅 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고 무심코 남자를 돌아보는데 시선이 마주 닿았다. 닿은 곳에 열기가 스며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여 저도 모르게 그 검고 선명한 굴곡을 빠진 듯이 응시하던 희완이 문득 키스를 한 지도 오래되었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손끝으로는 제 입술을 슬쩍 훑었다. 의도된 건 아니었으나 충분이 도발적인 몸짓에 그걸 본 눈에 담긴 열기가 좀 더 짙어져 갔다. 희완 역시 그것을 알아차렸다.


“관람시간이 어떻게 됩니까.”


“100분…입니다.”


“키스하고 싶은데.”


“…….”


여전히 무심한 어조에 빤히 그를 쳐다보던 희완이 소매를 걷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몇 분 남았습니까.”


“10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어선 남자가 올라왔던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좌석표를 챙긴 희완도 곧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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