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 선생에게서 받아 온 오리구이가 인기였다. 마침 점심시간쯤이라 연습을 중단하고 배달책자를 뒤적거리던 단원들이 양손을 무겁게 하고 온 희완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반겼다. 물론 곧 오리구이와 족발에 우선순위가 밀려 찬밥 신세가 되긴 했지만 신문을 깔며 간만에 배 속에 기름칠하겠구나 휘파람 불고 희희낙락하는 단원들을 보는 걸 즐거운 일이었다.
“단장님 인기가 정말 대단하답니다. 얼마 전에는 그 유명한 장미호가 단장님을 연기 선생으로 몰래 초청하기도 했대요.”
“니 입에서 나오는 얘기에 어째서 몰래라는 단서가 붙냐? 어이구. 지나가던 똥강아지도 다 알겠고만, 이제?”
“뭘, 이미 인터넷에 쫙 깔린 얘긴데. 망신이라는 건 아는지 극구 부인했다는데, 솔직히 장미호가 얼굴 빼면 볼 게 없긴 해.”
“야, 그만한 스타가 일개 극단 단장 쫓아다니며 연기 배우는 건 어디 쉬운 일인 줄 아냐. 나는 그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찬사는 개뿔, 너 장미호 팬카페 회원인 거 내가 다 알거든?”
“야, 너는 얼마 전에 연기 배우겠다면서 남팬들 줄줄이 끌고 와 경찰까지 출동하게 한 아이돌한테 사인 받는 거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거든?”
서로 한마디도 안 지며 투닥투닥하는 승원과 오석에게 시끄럽다고 한 소리 뱉는 도연이 남은 컵에 물을 따라 희완에게 건네주며 우진의 안부를 물었다. 사고를 당해 크게 다쳤다는 사실은 경성을 통해 듣기는 하였지만 단체로 병문안 갔을 때 직접적으로 우진을 마주하고는 그리 넉살 좋던 녀석들도 선뜻 말을 뱉지 못했었다.
수완 좋은 경성과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는 우진에 의해 분위기는 금방 풀렸고, 간 놈들도 죄다 한바탕 떠들썩하게 병문안의 의의를 다하였지만 돌아오는 길은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몇 없는 윗기수를 제외하고는 우진 대한 미움보다는 동정의 감정이 더 컸던 아래 녀석들은 마치 제 얼굴이 그리되기라도 한 것처럼 상심이 컸었다. 그래도 잘생기셨다는 석주의 말에 동의하는 웃음이 비식 터져 나오고서도 한동안은 그랬었다.
“수술 경과가 아직 안 나와서 쉬고 계셔.”
“두 번째라고 했지?”
“어, 워낙 상처가 깊어 그 정도로는 회복이 어렵다는데 그래도 많이 좋아지셨다.”
“그래도 뭐 멋지시던데.”
귀 옆에서 턱 밑까지 길게 이어진 칼집을 달고서도 그런 소릴 들을 사람은 우진 선배밖에 없을 거라며 낄낄 웃는 도연이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바꿨다.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져서 요즘 수입이 짭짤하다는 남극의 암표 판매에 관한 일화라든지, 한참 연극판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형 아이돌의 뮤지컬도 아닌 연극판 진출이라든지, 풍문으로 들려오는, 또는 알음알음으로 들어 아는 소식들을 풀어놓던 도연이 주머니를 뒤지다 인상을 구긴다.
“왜, 담배가 없어?”
“소줏집에 두고 왔나 보다. 아, 거기 두면 사장님이 홀라당 먹을 텐데.”
한 푼이 아쉬운 가난한 연극인이다 보니 담배 한 갑에도 일희일비하는 도연에게 심심한 위로를 표하던 희완이 훌쩍 몸을 일으켰다.
“설마, 담배 가지러 가게?”
“마침 나도 담배가 떨어져서. 빨간 거 태우지?”
“오오~ 돈 좀 번다 이거지?”
하며 치근대는 도연에게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던 희완이 사무실에서 재킷을 걷어 나왔다. 도연의 우스갯소리가 마냥 농으로 치부할 건 아닌 게, 극단 학정으로 한동안 꾸준히 연락이 왔었다. 그린과 함께 작업했던 화보가 소위 대박을 치며 그 브랜드 자체 구매력이 높아진 뒤로 희완에 대한 광고업계의 컨택이 끊임이 없어 한동안은 사무실 전화선을 뽑아 놓고 지내다가 정작 중요한 작품 섭외를 받지 못해 한바탕 난리가 나기도 했었다. 희완 쪽에서 주욱 거절이 나가니 초반이 지난 후로는 또 섭외 연락이 뜸하긴 하였는데 그 후로도 이따금씩 모델 에이전시나 광고주 쪽에서 직접 섭외를 밀어 넣기도 했었다.
워낙 학정이 그런 쪽으로는 데면데면하기도 하였고 그 반년간은 희완도 제 몸 추스르는 것도 힘들어해서 섭외를 사양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즈음 낡은 극단 건물 밖으로 으리으리한 스포츠카가 떡하니 머리를 박고 섰었다. 그 차의 주인은 브랜드 대박으로 고속 승진하여 허철수의 마수에서 벗어나 현재는 제 팀을 꾸리고 있다는 강영희였다.
섭외 과정은 간단했다.
신세 졌잖아요.
네, 신세 졌습니다.
그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요?
그거 다 돈 받고 하시는 일이었잖습니까.
어머머머, 그땐 말 한마디 않고 그 섹시한 입술만 꾹 다물고 있더니 대박 신인이라고 지금 강짜 부리는 거예요?
아닙니다. 그간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 사정 구구절절 들을 오지랖은 없구요. 사진 한 번 더 찍죠. 근사하게 찍어 줄게요.
그린 씨가 그러셨습니까.
희완의 응수에 빤히 흰 얼굴을 응시하던 강영희가 목젖을 보이며 크게 웃었다.
그래요, 미운 정만 듬뿍 들어 도저히 아쉬운 소리 못 하겠다고 날 보낸 어린이가 그린이에요. 그래서, 할 맘이 뚝 사라졌어요?
아닙니다. 단지, 시기가….
스케줄은 이쪽에서 전폭적으로 맞춰줄게요. 다른 제반 사항도 전부요. 한 번 그랬는데 두 번이라고 못 그러겠어요? 물론 이번엔 받는 뒷돈이 없어 쪼끔 아쉽긴 하지만, 광고계의 다크호스를 섭외하는데 그 정도 투자 못 하겠어요?
비행기 띄우라고 월급 주는 회사에 투신 중이라는 강영희의 아부는 뻔하였으나 유쾌한 구석이 있었다.
그렇게 일정을 맞춰주는 조건으로 작업한 광고가 소위 또 대박을 치며 희완의 몸값이 훌쩍 올랐다. 이번엔 15초짜리 인터넷 동영상 광고까지 포함되어 그 반향이 이전에 비할 수 없게 대단하였지만 강명 선생을 쫓아다니느라 또 반년을 훌쩍 보낸 희완은 얼마 전까지도 그 사정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계약 당시 개설하고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통장에 들어와 있던 러닝 개런티를 한 달 전 자취 집 재계약을 위해 돈을 알아볼 때 알아차릴 정도였으니 알 만한 수준이었다. 덕분에 그 돈으로 껑충 오른 전세금을 충당하고도 얼마가 남아 현재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랬더니 씀씀이가 늘어 극단으로 자주 먹을 걸 들고 날랐고 간간이 담배 심부름이라든가 술심부름을 일부러 도맡아 하기도 했다. 새삼 배우게 된 것이, 아끼는 사람을 위해 쓸 돈이 있다는 게 나쁘지 않다는 기분이었다.
날이 좋아 재킷을 걸치지 않고 손에 쥔 채 모퉁이 편의점으로 향하던 희완이 도로 뒷걸음질을 쳤다. 길 건너 모퉁이 노천카페에 유독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누군가가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제가 잘못 본 건가 하였지만, 아니었다. 그 익숙한 등은 분명 남자의 것이었다. 멀거니 서서 의아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던 희완이 우선 모퉁이 편의점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도연이 피우는 걸로 담배 두 갑을 치르다 곧 남자가 피우는 담배를 한 갑 더 골라 추가로 계산을 하곤 편의점을 나선다. 평소에도 얼굴 반반한 배우들이 일상처럼 오가는 거리라 크게 남의 시선을 끄는 일이 없었는데 남자는 다른 의미로 타인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건장한 체구가 그러했고, 대학로에서도 드물게 인적이 드문 거리를 늘어난 추리닝에 슬리퍼를 직직 끌거나 가벼운 캐주얼 복장으로 오가는 게 일상인 사람들 틈에서 엄격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모습은 이질적이기 충분했다.
노천카페 마루로 통하는 나무 계단을 오르기도 전에 뒤를 돌아보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요란스레 온 것 같지도 않았는데 남자는 이미 희완의 기척을 감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부채꼴 모양의 철제 의자에 기대어 앉아 신문을 펼쳐 보고 있던 그가 종잇장을 접으며 맞은편에 앉는 희완을 보았다. 점심 무렵에도 늘 한산했던 카페 내부는 달리 끼니를 챙기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워낙 구석에 있던 주인도 취미로 하는 가게라 손님이라곤 돈 없이 반값에 토스트로 끼니 때우는 단원들이나 멋모르고 들어온 초행길 손님이 전부였으니 별스러운 일이긴 했다. 귀찮아 죽겠다며 그 의욕 없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성의 없이 툭툭 토스트를 구워대고 있을 주인의 모습이 선하여 빙그레 웃던 희완이 문득 손에 쥐고 있던 담배 세 갑 중 한 갑을 테이블에 올렸다. 남자의 시선이 닿음과 동시에 희완이 입을 열었다.
“이것만 태우시는 것 같아서.”
대꾸 없이 테이블에 올려놓은 담뱃갑을 흘긋 쳐다보기만 하는 남자를 응시하던 희완이 손끝으로 귓가를 문질렀다. 반응이 없으니 괜히 무안해진 탓이었다. 고작 담배 한 갑을 선심이라고 내놓은 게 된 것 같아 꼴이 우습기도 해서 건넸던 걸 빼어 오려는데 남자가 먼저 선수를 쳤다.
“잘 태우겠습니다.”
“…….”
가져간 담뱃갑을 안주머니에 넣으며 그리 답하는 남자를 빤히 보던 희완이 조금 이상한 얼굴을 했다. 그리곤 주춤 손을 뻗어 막 남자의 손이 빠져나온 재킷 안쪽을 눌렀다. 양해를 구하기라도 하듯 그 주변을 더듬다 곧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어 제가 준 담뱃갑을 도로 빼내었다. 덕분에 철제 테이블이 덜컹거렸고 노천에 나와 있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힐금 쏟아졌다. 아랑곳 않는 희완이 빼낸 걸 도로 제 손에 쥐며 털썩 제자리에 앉았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남자를 말없이 응시하다 결국 귓불을 문지르며 입을 연다.
“다른 걸.”
“그것만 태웁니다.”
“담배가 아니라,”
8년 가까이 알아 오면서 남자에게 무언갈 줘 본 적 없는 희완이었다. 방금 건넨 담배 한 갑이 그에게 건넨 최초의 것이라는 것을 좀 전에 깨닫고 놀라 저도 모르게 몸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그 속을 곧이곧대로 말하기엔 민망스럽고 어딘가 또 미안스러운 구석이 있어 머뭇거리던 희완이 문득 발치를 구르는 연극 팸플릿을 발견하곤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연극, 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