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머무는 계절 (Just Stay)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크게 벌어진 입에 정액을 듬뿍 쏟아 붓던 남자가 사납게 응수했다.
“누굽니까.”
의사라는 소리에 왈칵 쏟아진 것을 다 삼키지 못하고 줄줄 흘리는 희완의 턱을 붙잡아 억지로 아귀를 맞추는 승도가 출입을 허락한다. 문이 열리는 동안에 병실 바닥에 주저앉아 널브러져 있던 희완을 침대 위로 끌어올리곤 무기력하게 벌어진 몸뚱이 위로 얇은 시트를 덮어준다. 그러는 사이 안에 들어온 의사 가운을 입은 중년인이 크흠. 인기척을 내었다.
“이틀 꼬박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습니다.”
더러워진 손을 수건으로 닦아내고 아랫배까지 벌어져있는 셔츠 단추를 잠그는 승도의 뒤에 반듯이 선 의사가 미간을 좁힌다.
“먹지도, 싸지도 못하게 했으니 썩 좋은 꼴은 아닐 겁니다.”
차마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어느 정도 걸러서 듣는 의사가 기겁하는 건 나중 일이었고 노타이로 슈트 재킷을 걸쳐 입는 승도가 한마디 덧붙였다.
“빼줄 건 빼주고 기력만 회복시키는 정도면 됩니다.”
그 걸 끝으로 병실을 나선 승도의 모습이 문 너머로 사라지자 괜시리 긴장되어 있던 어깨를 가볍게 푸는 의사가 침대로 다가갔다. 특실 층이어서 원래도 방음이 좋았지만 이틀 내내 복도로 새어나오는 소리는 이미 간호사들 사이에 소문이 파다했다. 그 지경이라면 병원 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특실층 환자 이야기라 그저 이니셜로만 나도는 선에서 그쳤다. 강 박사 역시 돌고 도는 소문을 들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병원에 있다 보면 별의 별 꼴을 다 보기 마련이었다. 무엇보다 해외 연수 중인 윤 박사가 소개 시켜 주며 귀머거리 삼년 봉사 삼년을 외게 하던 기억을 떠올리면 웬만하지도 않겠다는 판단은 있었다. 그러나 축 늘어져 있는 환자의 몸을 덮고 있던 시트를 걷었을 때 강 박사는 잠시 평정심을 흩뜨려야만 했다.
“이런….”
신음이 절로 나오는 광경이었다.
귀 아래부터 발끝까지, 짓씹히지 않은 구석이 없었고, 억지로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기형적으로 늘어난 양쪽 유두는 거의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였고, 본래의 색을 찾아볼 수도 없는 피부는 짐승이 물어 놓기라도 한 것처럼 온통 잇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 무엇보다 강 박사로 하여금 남자가 남기고 간 말을 단숨에 이해시키도록 한 건, 음경과 음낭을 꽉 묶고 있는 천 조각이었다. 그 천 조각은 실제로는 남자의 목에 매여 있던 넥타이였지만 환자의 성기를 조이고 있는 동안에는 그저 몹쓸 것에 불과했다.
“으으읏.”
강 박사가 천 조각을 건드리자 죽은 듯이 늘어져 있던 희완에게서 기이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고통과 쾌락이 점철되어 있는 괴이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눈살을 찌푸리는 것 외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강 박사는 조심스런 손길로 음경과 음낭을 떨어져 나갈 정도로 조이고 있는 천 조각을 살살 떼어내었다. 정말 이틀 동안 단 한 번도 빼내지 못한 건지 아직도 잔뜩 발기해 있는 음경은 파리하게 질린 정도고 요도구는 부러진 면봉으로 꽉 막혀져 있었다. 우선 음낭까지 감겨 있는 천을 마저 풀고 쓰레기통에 던진 강 박사가 병실 수납장을 뒤졌다. 특실엔 웬만한 도구는 구비되어 있었다. 예상대로 곱게 놓여져 있는 카데터 봉지를 꺼내든 강 박사가 요도구를 막고 있는 부러진 면봉을 빼내려 했을 때였다.
“제가…,”
갈라져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선을 드니 파리한 얼굴의 환자가 강 박사를 응시하고 있었다.
“방법을… 제가, 하겠…,”
“안 됩니다.”
“…….”
“의사 라이센스도 없는 분에게 맡겼다간 자격 박탈당합니다. 뭣 보다 상태가 중합니다.”
심각할 정도로 중하지는 않았지만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었다. 반응을 보이는 것은 좋은 신호였으나 너무 오래 방출을 하지 못해 감각이 둔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조심스런 손길로 면봉을 빼내니 환자의 하체가 약하게 펄떡였다. 굉장한 자극이었을 것이나 고작 그 정도의 반응을 보이는 게 최선일 만큼 기력이 쇠해 있었다. 자력으로 무엇이든 뱉어낼 상태가 아닌 요도구에 카데터를 밀어 넣으니 바들바들 떠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래도 필요한 정도까지 완전히 밀어 넣고 잠시 기다리니 투둑툭, 카데터와 연결한 소변용 봉지로 탁액이 먼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시작된 배출에 환자가 거의 우는 듯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고, 굉장히 절망스러운 치욕감이 느껴져 강 박사는 이런 게 일인 의사임에도 조금 이상한 기분을 느껴야했다. 치료의 일환일 뿐이었지만 환자에겐 이조차 수치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강 박사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앞이 이 정도라면 뒤는 더할 정도였고, 대개 앞보다는 뒤를 내보일 때 더한 수치를 느끼는 것이 보통이었다. 역시나 카데터를 빼내고 뒤를 보자 했을 때 미세하게 일그러지는 환자의 너덜너덜한 입술을 보고 강 박사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보수가 괜히 많은 게 아니라는 윤 박사의 은근한 목소리가 새삼 실감 되었던 탓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승도가 셔츠를 걷어 팔에 꿰며 사무실을 가로질렀다. 기다리고 있던 철진이 고개를 숙인다. 의복을 다 갖추고 마지막으로 시계를 차는 승도가 앞장섰다. 오전의 클럽 외부는 물론 내부 역시 한산했다. 오히려 적막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1층에서 내려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지하로 통하는 통로를 걸어가는 승도에게서 짙은 담배연기가 풍겨진다.
성의준은 본보기를 보일 명분이 필요했다. 그깟 노리개 하나 건드렸다고 처박아 내리는 건 이리떼들에게 희완을 통째로 던져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굴종하는 듯 했지만 호시탐탐 치고 오를 기회만 누르던 성의준은 병적인 구석이 있어 통제가 까다로웠다. 그걸 승도는 외려 통제하지 않는 것으로 통제했다. 건드리지 않는다면 성의준의 사고 방향은 1차원 적인 구석이 있어 가늠하기가 어렵지도 않았다. 성의준은 목적은 오로지 하나였고 그 목적에 이르는 방법 또한 다양하지 않았다. 백승도를 끌어내리든지, 발악이라도 해서 스스로 바위에 머리를 깨고 죽든지,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이 더러운 변소 바닥을 뒹굴던 공동변기 신세였던 성의준이 건져지는 대가였다. 누구든, 무엇을 얻고자 하면 그 대가를 치러야했다. 그것에 예외는 없었다.
어두컴컴한 지하복도 내부를 밝히는 불은 희미했다. 오로지 야만으로만 구조된 이곳은 많은 전기가 필요치 않았다. 피아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했고 대상을 무력화시키는 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열리는 철제문을 통해 고통에 신음하는 짐승의 소리가 새어나온다. 시간을 확인하는 승도가 물었다.
“깨어난 시각.”
“한 시간 십분 전입니다.”
직접 의사를 대동해 놓고 시작한 고문이었다. 말 그대로 대가성 외에는 목적 없는 고문이었고, 손수 작업에 임하는 승도에게선 곱게 죽이지 않겠다는 의도가 어렵지 않게 드러났다. 해외 연수 중이라던 윤 박사가 구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라도 요 며칠 간 목격한 광경은 제정신으로 있기도 힘들 정도였다. 억지로 약을 놓아 정신이 들게 한 짐승은 차라리 고깃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럼 닥쳐.”
윤 박사의 말을 끊은 건 승도가 아닌 철진이었다. 심기가 좋지 않은 승도에게 섣불리 입을 놀리는 윤 박사를 짜증스럽다는 눈초리로 응시하던 철진이 어서 꺼지라는 눈치를 준다. 벌써 한쪽에서는 소매를 걷으며 작업 준비에 들어가는 승도의 등에 바짝 붙은 셔츠가 위험스럽게 움틀였다. 처음 조우 시의 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아시안을 길거리 똥개 취급하며 거들먹거리던 양키들에게 한 방 먹이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개싸움이었다. 대대적인 소요의 발단이 되었던 그 사건으로 승도는 코쟁이 교도관들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한 후 약 한 달 간이나 독방에 갇히는 기록을 세웠다.
아메리카에서도 가장 낙후된 교도소는 섬에 위치한 곳으로 흉악범들의 집합소로 악명이 높았다. 성의준은 미성년자 강간 혐의로 기소, 80년 형을 받고 수감되었다. 청주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백승도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국외로 빼돌린 성낙우는 미성년자 강간범으로 수감 첫째 날 응급실로 실려 간 손주 성의준을 보호하기 위해 백승도를 경비견으로 아메리칸 교도소에 밀어 넣었다. 무죄 방면 되기까지 3년, 한 달은 교도소 내 병동을 전세 내어 피를 쏟으며 교도관 수감자 가릴 것 없이 밑을 열었고 후로 반년을 공동변기로 굴려지다 백승도의 수감 이후 화대를 받으며 정해진 인원수만 받는 남창으로 신분이 수직상승 되었다.
후에 백승도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철진은 그 차가운 머리에 감탄했다. 수감 후에도 백승도는 철저히 성의준을 무시했고 외려 양키들을 조종해 그를 지능적으로 괴롭혀 제 수중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교도소 내에서 백승도를 완벽히 의지하게 된 성의준은 그의 말이라면 똥이라도 주워 먹을 기세로 잘 길들여져 있었다. 추후 그에게 모든 권리를 양도한 후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성의준의 정신은 완전히 붕괴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성의준이 날뛰는 데도 관대했던 이유는 그런 것에 대한 죄책감이라는 것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성의준은 대외용으로 필수적인 요소였고 그 허수아비를 끌어내리는 데에도 적절한 절차와 방법이라는 게 있었다. 하여 하준우의 뒤를 팠을 때 드러난 의외의 인맥은 꽤 괜찮은 수단이 되어 주었다.
걸쇠에 매달려 잘게 다져진 돼지 꼴이 된 하준우에게 신경을 깨이게 하는 약을 흡입시키는 승도의 팔뚝이 선연하게 굴곡진다. 하준우를 국외를 도피시켜 놓고 안심하고 있을 성의준은 다음 차례였다.
유리창에 비친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랑곳 않고 완전히 부피가 늘어날 때까지 기다린 남자가 이미 느슨하게 벌어져 있는 항문을 푹 박고 그대로 주욱 밀어 넣었다. 구구극, 입구가 한계까지 벌어지며 내벽이 늘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테이블에 엎드려 양 다리가 넓게 벌려진 채 뒤에서부터 남자를 받고 있는 희완의 얼굴이 일그러지길 반복하며 허물어지는 과정이 어두운 유리창으로 고스란히 비쳐들었다. 머리채를 잡아 고정시키는 남자가 감겨진 눈을 뜨게 했다. 유리창에 비친 남창의 모습을 똑바로 보라했고, 그게 바로 너라 했으며, 네가 뚝뚝 흘리는 것은 그저 고통을 넘어선 쾌락에 불과한 경멸스런 것이라며 희완을 철저히 헐렁한 음부 취급했다.
“다리 붙여.”
방만하게 벌어져 남자가 치고 들어올 때마다 들썩들썩하며 흔들리던 다리는 그럼에도 움직임이 없었다. 뿌리 끝까지 박았던 걸 쑥 빼어 넣고 반쯤 떨어지는 남자가 벌어져 있는 다리를 오므리게 하고 양쪽 허벅지를 두 손으로 붙잡아 고정시키게 했다.
“헐렁해서 못 봐줄 정돕니다.”
실제로도 남자의 것이 빠져나갔음에도 축 늘어져 있는 구멍은 탄력을 잃은 채 탁한 장액만 뚝뚝 떨궈 대고 있었다. 강 박사는 요양을 권했지만 그 따위 속편한 소리나 듣자고 병실에 판을 깐 게 아니다. 그 때 그 때 고쳐가며 쓸려고 이 불편을 감수하며 병실을 세놓은 것이다.
“질리도록 박게 해준다며. 갈기갈기 찢어 놓아도 기꺼이 벌려주겠다던 그 기세는 어딜 간 겁니까. 내가 질리기도 전에 나가떨어지면 무엇으로 보상하겠습니까. 고작 이 정도도 버티지 못하면서 개새끼들의 암캐가 되겠다 선언한 겁니까. 내가 지불한 화대 값을 치르려면 이 정도 근성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연희완.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변기 처리기도 못되는 좆통이 어떤 것인지 절절히 실감하게 해주겠습니다. 그러니 물으랄 때 제대로 물고 꽉꽉 쥐어짜라 할 때 제대로 짜. 이런 걸 원했잖아.”
연한 살갗이 벗겨져 속이 보이는 입술을 깨무는 희완이 느리게 몸을 움직였다. 허벅지에 붙이고만 있던 양손에 힘을 줘 구멍을 오므리게 하고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최대한 붙이며 신음을 흘린다. 겨우 다물려진 항문을 비집고 육중한 것이 힘껏 파고 들어온다. 목구멍까지 콱콱 처박아지는 기분이었다. 넘어 올 것 같은 걸 억지로 눌러 담으며 내벽을 조여보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남자가 축 늘어져 있는 희완의 성기에 손을 대고서야 억지로나마 뒤를 조일 수 있게 되었다. 다시 강 박사가 불려 들어와 막혀 있는 요도구를 푼 것은 그 밤 늦은 새벽이었다.
으리으리한 빌딩들이 멀리 펼쳐져 있는 유리 너머를 응시하던 승도의 손끝에서 담배연기가 검은 운무처럼 피어올랐다. 시간이 되었다는 철진의 전언을 받고도 느리게 담배를 태우던 승도가 꽁초를 눌러 끄며 뒤돌아섰다. 사무실을 통과해 회의실로 들어서니 미리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주주들이 일제히 그를 보았다. 그 중 상석에 앉아 푹신한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고 있던 성의준은 히죽 웃기만 할뿐이었다.
이미 말이 돌았다. 실질적인 주석 그룹의 주인인 백승도가 모든 권리를 성의준에게 양도한다는 소문이었다. 증권가 찌라시로도 돌지 않는 주석그룹의 치부였지만 약육강식의 궤이 깊숙이 침투한 브레인들은 성의준이 허수아비라는 사실은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권리를 모두 양도한다는 것은 들개 출신인 백승도가 범의 새끼인 성의준에게 패배했다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주가가 요동치지 않는 것은 제도권 전반적으로 미친 주석그룹의 영향력은 건재하다는 뜻이었고 말인 즉슨 성의준의 뒤를 백승도가 철저히 받쳐주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어찌됐든 굿판 구경에 떡이나 주워 먹으려는 심산으로 비밀총회에 참석한 주주들이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건 백승도가 착석하기도 전에 잠기는 회의실 출입구 때문이었다.
“제안을 하겠습니다.”
여유를 부리고 있던 성의준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무어라 외치려 하는데 어느새 다가온 철진이 그 입을 막고 강제로 착석을 시켰다. 그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는 승도가 가장 가까운 곳에 앉은 중년 사내를 보았다.
“강하복 대표님. 호주, 모스만 베이, 주이형 씨께서 안부 전하더군요. 덕분에 주선희 씨는 안녕하시다 합니다.”
급변하는 강하복의 얼굴색을 그 자리에 모인 스물다섯의 주요 인사의 얼굴이 모두 흙빛으로 변하였다. 그제야 백승도의 수를 읽은 것이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정확한 지명과 이름, 장소, 일시 등을 읊어주며 장내를 장악해가던 백승도의 시선이 마지막에 가 닿았다. 그의 자리와 가장 동 떨어진 곳, 그리고 백승도 다음으로 유효 주식을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는 백발노인에게로 향하였다. 장성 출신 3선 의원으로 퇴임 후 낙하산으로 내려와 둥지를 틀고 앉았다 불과 몇 해 전 퇴직한 강성이었다. 성의준의 조부인 성낙우와는 막역한 사이이기도 했다.
“노경인 전무님. 하준우. 현재 생명이 위독하답니다. 목 떨어지기 일보직전이라더군요. 그가 남긴 것들이 꽤 됩니다.”
하준우는 노경인의 사생아로 그 친모 역시 의문사하였고 고아원을 전전하던 것을 노경인의 옛 수행비서가 거둬 키웠다. 그 수행비서와 노경인과 하준우의 친모의 관계는 흥미로웠으나 골자는 친모의 사인이었다. 하준우가 필사적으로 윗줄에 들려했던 까닭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진실을 육시가 된 하준우에게서 백승도는 빠짐없이 빼어 들었다. 강성인 노경인 전무조차 평정심을 잃는 걸 보던 성의준이 대경하여 고함을 지르려던 찰나였다.
“오분 드리겠습니다.”
좌중의 치 떨리는 시선이 철진에게 억류되어 있는 성의준과 상석에 느른히 앉은 백승도를 향했다.
“내 제안이 유효한 시간입니다.”
곧 카운트에 들어가는 백승도가 시선을 내리깐다. 병실에 널브러진 것을 그대로 두고 온 희완을 생각한다. 걷지도 못하는 것을 바닥에 널어둔 채 그 비틀린 열기와 신음으로 그득 찬 공간을 빠져나왔다. 물어뜯고 싶다. 목을 물어 축 늘어질 때까지 쥐고 그 숨통을 끊어버릴까 하다가도 힘겹게 버티는 그 모양이 측은하고 애틋하여 쓸어주고만 싶었다. 다스릴 수 없다. 이성을 잃고 온갖 악의를 퍼부어대던 희완의 목을 부러뜨려 그 입을 닥치게 하고 싶은 욕구와 그러면서도 부들부들 떨던 그 안쓰러운 입을 물고 어루만져 주고 싶은 욕망이 공존하여 승도의 심상을 더욱 싸늘하게 한다.
스스로의 심과 싸워 버티려는 그 의지를 존중했다. 다 집어치우고 그 몸뚱이 하나만 건져내어 온전히 차지하고픈 욕망을 억제하며 기다렸다. 거짓이었다 외치던 그 악에 받친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뒤따르던 초점의 방황을 떠올려내며 검은 심상을 가라앉힌다. 믿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희완은 백승도라는 짐승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앞으로 믿을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어떤 식으로 방황하며 스스로를 밀어 떨어뜨리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망가지겠다면 이 손으로,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는 않을 것이다.
백승도가 눈짓을 하자 전면의 스크린이 켜졌다. 재생화면이 시작되었고 동시에 성의준에게서 괴성이 쏟아져 나왔다. 곧 철진에 의해 입이 틀어 막힌 채 몸부림을 치는 성의준이 눈을 뒤집는다. 곧 조용해지는 실내로 번지는 건 좀 전의 그 괴성과 흡사한 기이한 소리들이었다.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올리는데 단 한 발자국도 회의실에서 나설 수는 없어 쓰레기통에 얼굴을 박고 속을 게워내기도 했다.
스크린 속의 괴물은 성의준이었다. 제 손으로 제 혈육들을 도륙하고 난자하는 필름이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었다. 달아나던 형수가 무릎을 꿇고 애원을 하다 목에서 피를 뿜으며 넘어가는 순간 노경인에게 침음성이 터졌다. 그녀는 노경인의 차녀이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성낙우의 죽음. 장내는 침 넘어가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처절하고도 초라해 쓸쓸하기까지 한 최후였다. 제 손주의 손에 죽어가며 눈도 감지 못한 성낙우의 난자된 가슴을 마지막으로 필름은 끝을 맺었다.
살기 어린 눈을 번뜩이는 성의준은 이미 철진 없이도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성의준을 그 지옥에 밀어 넣은 인간들의 최후이다. 최소한 암묵적 동의를 했던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의 최후였다. 영상 속의 괴물은 백승도가 모든 권리 양도의 대가로 성의준에게 제공한 값이었고, 사고사로 처리 됐던 주석그룹 일가의 실제 사인이 밝혀지는 유일물이기도 했다.
갑자기 폭소가 터져 나왔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성의준에게로 향한다.
“그래, 내가 한 짓이야! 그 뿐인 줄 알아? 당신들! 당신들! 날 그 시궁창으로 한 치 거리낌도 없이 밀어 넣는데 동조했던 당신들!! 갈가리 찢어 죽여도 시원찮아!!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받아먹으며 배부른 돼지들처럼 희희낙락했겠지. 내가 조각조각 찢겨나가는 동안에도 던져주는 고깃덩어리 처먹으며 떵떵거렸을 거야! 이게 끝인 줄 알아! 이걸로 내가 만족할 줄 알아! 살아서는 다리 한 번 못 펴고 전전긍긍하며 살게 해주지! 그 인면수심 살가죽을 뜯어 만천하게 떠벌려 주고도 모자라 저 잘게 다져진 고깃덩이들처럼 편육을 만들어 내 목구멍에 쑤셔 넣을 거야!!”
고함을 지르며 좌중을 향해 달려들려던 성의준의 몸이 철진에 의해 가로 막혔다.
“날 이렇게 만들었어! 날 이렇게 만들었어!! 니 놈들이 날 괴물로 만들었어!!!”
발악하는 성의준이 철진에 의해 끌려나갔다. 문이 닫히고도 한참 들려오는 그 비명에 가까운 절규가 들려왔다. 얼어붙은 장내에서 유일하게 제 페이스를 고수하고 있던 승도가 시간을 확인하고 시선을 들었다.
“표결하겠습니다.”
유효시간의 막바지였다.
후들후들 다리를 떨던 희완이 겨우 끌어온 바지를 꿰어 입었다. 한바탕 정사를 거친 후 남자는 또 자리를 비운 후였다.
손끝하나 까닥이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러니 희완은 꾸역꾸역 바지를 꿰어 입고 상의를 꿰어 입으며 흐느껴 나오는 신음을 악물어 삼켰다. 좀 전에 치료를 위해 들어온 강 박사를 통해 이 병실에 눕혀 지낸 지 2주가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무에게도 연락을 하지 못했다. 핸드폰은 변기통에 처박힌 지 오래였고 이곳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남자와 강 박사가 유일했다. 찢어지진 않았으나 좀처럼 다물어지지도 않는 밑에서 주룩 그가 쏟아 놓은 탁액이 흐르는 게 고스란했다. 발목까지 흐르는 걸 내버려둔 채로 겨우 발을 딛고 일어선 희완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훑었다.
같은 층이었다. 우진의 병실과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긴 복도를 굽어 걸어야 했지만 가능한 거리였다. 절뚝거리며 욕실 밖에서 안쪽의 거울을 들여다보는 희완의 얼굴은 파리했다. 턱 밑으로 진하게 남아 있는 울긋불긋한 자국들을 가릴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그럴 기력도 없었고, 우선은 당장 서 있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도로 기다시피 돌아들어가 서랍을 뒤져 상비약 틈 속에서 부착형 파스를 찾아내었다. 그것들을 떼어 목덜미에 덕지덕지 붙이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딱지가 붙을 새도 없이 물어뜯어지는 입술을 깨무는 희완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한 층에 병실 두 개로만 구조되어 있는 특실 층 복도는 오가는 사람이 드물었다. 벽을 짚어가며 모퉁이를 돌아서던 희완이 잠시 숨을 골랐다. 맨발이 흘러내린 점액질 등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제가 걸어온 길에 점점이 이어져 있는 자국을 돌아볼 힘도 없이 기대었던 몸을 세우는 희완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스치는 성기 주변이 알알했고 벌어진 밑에서는 진한 통증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조금만 덜컥거려도 그 벌어진 구멍을 통해 안의 내장이 쑥 꺼질 듯한 감각은 희완을 겁에 질리게 함과 동시에 불안에 떨게 했다.
복도 마지막의 병실을 찾은 희완이 잠시 그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틈으로 작게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진과 학정의 목소리였다. 별 거 없는 한담이었고 간간히 가벼운 웃음소리도 들려오는데 보통 학정의 걸걸하거나 우진의 퉁명한 색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었다. 평온이 전해졌다. 문득 제 꼴을 쓸어보는 희완이 느리게 숨을 뱉어내었다. 희완이 아니어도 우진은 회복될 수 있었고, 학정 역시 그래왔듯이 꿋꿋이 뿌리 내린 자리에서 버텨낼 것이었다. 결국 그 문을 열어젖히지 못하고 온 길을 되짚어 나가는 희완의 절뚝거리는 발밑으로 탁한 액체가 남겨졌다, 곧 흔적 없이 말라갔다.
“8일 날짜로 입원수속 했습니다. 그룹 산하 병원으로 보안은 철저합니다.”
제주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조치 된 성의준의 자리는 노경인이 대신 하기로 했다. 칠십 넘은 늙은이였지만 정정하였고 어차피 대외용 허수아비였다. 10일 회장 취임식이 있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승도가 닫히는 문 밖에서 꾸벅 허리를 숙이는 철진을 흘긋 쳐다보았다.
하준우의 신병은 입 닫고 허수아비 노릇을 해주는 대가로 노경인에게 넘겼다. 물론 하준우가 파고든 음성적인 파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하준우만은 결코 멀쩡하달 수 없었다. 사내구실은 물론 평생 혼자서는 걷지도 서지도 밥을 먹지도 못한 채 산송장으로 살아야 할 터였다. 제 영리를 위해 핏줄을 낳은 여자를 사고사로 위장해 살해한 노경인의 성품을 보자면 짐짝에 불과한 하준우를 어찌 처리할 지는 불을 보듯 훤한 일이었다.
조명을 낮춰 적막함이 더욱 두드러지는 복도를 저벅저벅 걷는 승도의 눈가로 스산한 빛이 머문다.
제주의 정신병동에서는 매일 밤 개 짖는 소리와 좋아 자지러지는 소리가 들릴 것이었다. 적어도 성의준의 면상이 헐어 문드러질 때까지는 그럴 작정이었다. 굳게 닫혀 있는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 승도가 안으로 들어선다. 등 뒤로 문이 닫히자 불도 켜지 않은 병실 내부는 컴컴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익숙하게 걸어가 끝까지 내려져 있는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는 승도의 시선이 검어졌다. 있어야 할 곳에 희완이 보이지 않았다. 눈을 사납게 치뜨는 승도가 타다닥 불을 환히 켜고 성큼성큼 걸어가 욕실과 휴게실 문을 차례로 벌컥벌컥 열어젖혔다. 어디에도 희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승도의 얼굴의 험악하게 일그러진다. 거의 악귀에 가까워져 가던 빛이 대번에 사그라든 것은 저 밑에서 작은 숨소리를 들은 순간이었다.
드나들었던 문을 통해 병실을 나서려던 승도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한참 희미한 달빛이 비치는 빈 침대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침대 앞에 서는 승도가 허리를 굽혀 침대 가장자리를 짚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여 침대 밑 안쪽을 들여다보니 저 구석에 웅크린 형체가 보인다. 희완이었다. 억눌린 신음이 간헐적인 숨이 되어 짧게 짧게 끊어졌다. 벌벌벌 떠는 것이 어둠에 숨어서도 확연히 보였다.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던 승도가 손을 내민다. 불안에 떨며 작게 이상한 소리를 내던 희완이 제 지척으로 뻗어오는 그 손을 보고 불현듯 시선을 들었다. 선뜩하게 질린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어 있다 서서히 묽게 번져가기 시작했다. 울 것처럼 일그러지는 얼굴 만면으로 설움이 스며들었다.
잡아 오지 않는 손이 그러고도 한참 후에 거두어졌다. 아이처럼 벌벌 떨며 혼란스러워할 뿐 승도의 손을 잡지 않는 희완은 다시 학정을 찾을 것이었다. 이처럼 정신이 궁지에 몰려 구원이 필요한 순간에도 희완은 결코 승도를 찾지 않을 것이었다. 결국 거둔 손을 쥐며 몸을 일으키려던 승도가 멈칫했다.
“…….”
밑에서부터 작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다시 안쪽을 들여다보는 승도에게로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이 뻗어 온다. 당겨 잡으니 선연한 울음이 닿은 살갗을 통해 절절이 번져 나왔다. 끌어서 꺼내어 품에 안으니 와락 쏟아지는 몸이 뜨거웠다. 그 품에 안겨 서럽게 우는 희완의 등허리와 목덜미도 커다란 손이 덮어진다. 말없이 그것을 안으며 닿은 곳곳을 쓸어주는 승도의 시선으로 창밖의 어둠이 쏟아졌다.
“정말, 안 되겠습니까.”
희완의 울음은 거세어지기만 했다.
“정말… 안 되겠어.”
탄식처럼 독백 아닌 애원을 뱉은 승도가 그 젖은 관자놀이에 입술을 묻으며 서럽게 울리는 몸을 가득 끌어안았다.
머리 위에서 가득 기울어가는 달 옆으로 희게 머무는 별이 떨어지고 있었다.
맺힌 응어리는 풀려야 한다.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풀리기보다 자꾸 맺히기 쉬운 게 우리네 삶이고, 그래서 삶이란 적이 한스럽다.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드는 희완의 머리 위로 산뜻한 바람이 불었다.
극단 옆 노천카페에 앉아 극본을 보고 있던 희완이 저를 마구 부르며 신나게 이쪽으로 달려오는 석주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헉, 헉.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와서 제 앞에서 일부러 더 죽는다고 헥헥거리는 석주를 빤히 보던 희완이 기가 차다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제 몫으로 아직 남아 있던 얼음커피를 마시라고 건네주었다.
“뭘 그리 뛰어와.”
“헉헉, 당연히 형 보려고 이렇게 뛰어왔죠! 제가 우리 주경이, 아! 아니, 그 주경이 보러 갈 때도 이렇게 안 뛰는데!”
여전히 저희는 커플이 아니라며 주구장창 우기느라 애를 쓰는 석주의 거짓말 솜씨는 다를 것 없이 형편없었다.
“학정 단장님이 찾으세요! 우진 선배 퇴원 기념으로 저녁에 소줏집으로 모인대요.”
겨우 한숨을 돌리고 전해주는 소식이 이미 희완이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부러 면박을 줄만도 하건만 좋다고 히죽거리는 석주가 귀여워 작게 웃고 마는 희완이 읽고 있던 극본을 덮으며 긴 다리를 펴고 일어섰다. 그리고 노천카페 난간을 넘어 앞서 가는데 뒤를 졸졸 따라오는 석주가 미주알고주알 뭐 그리도 알고 싶고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쉴 새 없이 조잘댔다. 이거 이 노무 주둥이 군대 가야 좀 조용해지려나 한탄하는 필영의 곁에서도 꿋꿋이 제 지분을 확보하는 석주의 웃음소리에 희완의 웃음소리도 간간히 섞여 들었다.
남극은 공모전 당선 후 투자를 받아 성공적으로 공연을 이끌고 있었고, 명성은 장오 작의 [술 취한 다락]이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국제 연극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또 학정은 교수직을 제안 받아 올해 3월부터 강단에 서게 되었다. 긴 입원과 퇴원의 반복 끝에 거의 건강을 회복한 우진은 오늘 정말 마지막 퇴원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희완은, 그 병실과 남자의 아파트에서 나와 단칸방 하나를 구해 자취 중이었다. 간혹 학정이 자고 가기도 했고, 필영이 술에 취해 외롭다며 한탄을 하다 돌아가기도 했고, 석주와 철민이 하룻밤 재워 달라 오기도 하고, 고주망태가 된 성희가 엎어져 자는 내내 왈칵 게워 놓은 토사물을 치우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일 년 쯤 보낸 것 같다. 남자 없이, 남자를 곁에 두지 않고, 더는 섞는 살도 없이 그렇게 일 년을 보낸 것 같다. 늦은 밤, 혹은 이른 새벽 찾아오는 그 푸른 외로움과 이유모를 적막함은 남자를 떠올리게 할 지언정 그립게는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리움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희완은 이대로도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학정이 있었고 우진이 있었고 연극이 있었고 희완 스스로가 있었다. 다시 무너져도 일어서야 할 이유와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들이 곁에 있었다.
왁자한 소줏집을 나와 건물 외벽 앞에 쪼그려 앉은 희완의 담배를 꺼내 물었다. 촘촘한 처마 너머로 오랜 만에 별이 보였다. 한동안 비가 그치질 않아서 밝은 햇살이 비친 건 오늘 오후가 최근이었다. 연습을 마치고 비는 시간을 찾아 벤치에 앉아 극본을 보았다. 학정이 쓴 글이었다. 그의 자서전이기도 했고, 우진과 희완을 아우르는 수필기이기도 했다. 처음 극본을 받았을 때 희완은 오래도록 멍하니 앉아 까만 글씨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보았을 때 울었고, 세 번째는 가슴이 턱 막혀 바닥을 긁으며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다. 무대에 설 수가 없었다. 이렇게 돌아오고도 희완은 무대에 설 수가 없었다.
복귀 후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을 때 아주 작은 역임에도 희완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느낌에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관객들의 시선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느껴졌고 쏟아지는 조명은 뜨거운 불구덩이 같았으며 상대역의 고함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과 욕설과 야유 같았다. 한 발자국만 움직이면 저의 머리채를 잡고 내동댕이치던 남자들이 어디선가 우르르 몰려 나올 것 같았고 한 마디만 뱉으면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그 무수한 폭력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대로 꼼짝할 수가 없었다. 대사를 치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는 희완을 향해 배우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리고 곧 그 동요는 관객석으로 어김없이 번져갔다. 웅성웅성, 술렁대는 그곳에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아무것도 들을 수 없어 점점 고립되어가던 희완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뒷걸음질이라도 치고 싶었으나 붙박인 듯 굳어 있기만 하던 희완의 전신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관객석에서 야유가 번져 나왔다. 무대 밖에서는 어서 나오라고 채근을 하는 연출팀이 있었다. 혼란으로 복잡하게 엉겨가는 희완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공황상태에 완전히 빠져들기 직전이었다.
객석에서 누군가 성큼성큼 걸어 올라왔다. 희완의 첫 공연을 보기 위해 들른 학정이었다. 그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추리닝에 잠바 차림이었고 분장은커녕 산발한 머리도 그대로였다. 그가 희완을 끌어다 바닥에 앉혔다. 그리고 희완이 뱉었어야 할 대사를 대신 읊었다. 상황극이었다. 멍한 얼굴의 희완이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 번 제 대사를 읊는 학정을 보았다. 그가 다시 웃으며 히죽 같은 대사를 읊는다. 술 취한 다락이었다. 누군들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흥청흥청 나사 빠진 인사가 되어 나오는 요지경 속이었다. 벌벌 떨던 희완이 더듬더듬 학정이 읊어주는 대사를 따라 읊었다.
[아야! 이놈아, 너는 눈 달아 뒀다 뭐해?]
[아 이놈아 너는 눈 달아 뒀다 뭐해?]
[야 이놈아 너는 눈이 삐었냐?]
[눈은 안 삐고 산 넘다가 다리 삐끗했다 이놈아.]
차츰 외웠던 대사를 되돌려가는 희완이 제 궤도를 찾는 동안 희완의 상대역이 슬그마니 무대에서 빠졌다. 곧 그 자리를 차지한 학정이 계속해서 대사를 읊었다. 벌떡 일어나, 우스꽝스런 몸짓을 하며 희완의 주변을 더듬는다.
[가만가만, 이 소리 강 건너 강봉사?]
[가만가만, 이 냄시 들 질러 봉봉사?]
[아이고. 이거 반갑구만, 반갑네, 반가워.]
그제야 객석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왁자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참 움츠러들었던 몸을 펴는 희완이 짧은 순간 무대 위에서 날았다. 그를 검게 덮었던 먹구름이 물러가며 본연의 모습이 배역을 통해 익살스레 터져 나온다. 최초의 날갯짓이었다.
그리고 그 밤 희완은 연극에서 떨어져 나와 외로움과 그리움에 몸부림치며 그 어둡고 작은 방구석에서 서럽게 울었다.
차라리 한스러운 통곡이었다. 더는 학정의 극본을 보며 가슴이 막혀 울지 않게 된 것도 그 후였다.
“별이 좋냐.”
“네. 좋습니다.”
어느새 드륵 문을 열고 나와 그 옆에 주저앉는 학정이 낡은 라이터를 꺼내 담뱃불을 붙인다.
진한 니코틴 향이 바람에 날려 허공으로 너울너울 띄워진다. 그 모양을 한참 말없이 올리며 훅 뱉어내던 학정의 거뭇했던 얼굴은 훨씬 좋아 있었다.
“우진 형이 들어 살겠다 했다면서요.”
“나나 그 녀석이나, 메어 걸어 놓을 곳이 없잖냐. 피차 회복될 때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워낙 잘난 놈이라 그 정도 흉은 다이아몬드에 금 간 것 정도 밖에 안 된다.”
다이아몬드에 금이 가면 어디 그게 다이아몬드겠는가, 그리 금이 났어도 금이 가지 않는 다이아몬드라는 소리는 우진을 향한 학정의 소회였다.
“세 들어 산지 얼마나 됐냐.”
“일 년 쯤 되었습니다.”
“옮겨야지.”
“……잘, 모르겠습니다.”
“너라면 어쩔 것 같냐.”
“…네?”
마지막 담배를 불어 날리는 학정이 담배꽁초를 바닥게 눌러 끄며 희완을 돌아본다.
“네가 돈이 많아, 수렁에 빠진 나와 우진이 놈을 구해줄 수 있다면 너라면 어쩔 것 같냐.”
생각해 보지 못한 말들이었다. 그랬을 터였다. 희완이라면, 가진 재산을 전부 털어서라도 학정과 우진을 끌어안았을 것이었다.
“그런 거다.”
그것과 다르지 않다 말하는 학정이 툭 자리를 털고 일어서면 소줏집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자리에 혼자 남겨진 희완이 메마른 눈으로 하늘을 올려보았다. 기운 달 너머로 흐린 별이 스러지고 있었다. 다시 바닥을 떨구어 본다. 온갖 쓰레기들이 뒹구는 바닥은 검고, 검고, 또 검었다. 검은 마음이라 소리쳤던 남자의 그 정을 희완은 단 한 번도 바로 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는 희완이 손바닥으로 눈가를 훑었다. 서성이며 주머니를 뒤져본다. 가진 돈 오천원이 전부였다. 택시비로는 모자랄 것 같아 소줏집으로 뛰어 들어가 학정에게 손을 벌렸다. 군말 없이 내어주는 그 주머니에서 오천 원이 딸려나왔다. 눈살을 찌푸리는 학정 옆에서 낄낄 거리며 웃어대던 경성이 동기와 후배들을 툭툭 쳐가며 앵벌이 해온 총 오만 원을 희완의 손에 쥐어준다. 이자는 단 돈 이십 원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하는 경성의 옆구리로 팔꿈치를 날리던 우진도 주머니를 뒤져 만 원짜리 한 장을 던져준다. 올 때 과자 하나 사오라며 오징어 다리를 찢었다. 감사하다고 꾸벅 인사를 하는 희완의 눈이 붉어졌다. 꽁지가 빠져라 급하게 뛰어나가는 희완의 등 뒤로 누가 농담이라도 던진 건지 와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희완은 5월의 서는 바람을 받으며 구불구불한 골목을 뛰쳐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단 한 번도 떠올려보지 않았으나 결코 잊지는 못했던 그 주소가 단번에 튀어 나왔다. 좋은 동네에서 사시네요, 하며 친근하게 말을 건네는 택시기사의 주절거림이 과거의 어느 한 철을 오버랩 시켰다. 아아, 결코 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불 꺼진 아파트는 검은 바다에 잠긴 모래사막 같았다. 바뀌지 않은 비밀번호로 잠금을 해제하고 안으로 들어선 희완은 사람냄새를 맡을 수 없는 아파트 내부를 모래에 휩쓸리듯이, 파도에 휩쓸리듯이 떠돌았다. 바뀌지 않은 건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 공간은 시간이 정지되어 있었다. 희완이 아파트를 나간 그날, 그곳에서, 정지되어 있었다. 급하게 장을 열어 꺼내 놓았던 가방도 바닥에 나동그라진 그대로였고, 온실 한쪽에 세워뒀던 낡은 통기타도 그대로였으며, 거실 테이블에 올려놓은 극본과 낡은 노트, 그리고 연필까지 그대로였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던 희완이 걸어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불 꺼진 곳에서 한참을 우두커니 앉았다 손을 내밀어 차가운 테이블을 쓸어 더듬는다. 그리고 낡은 극본 사이에서 노트 하나를 꺼내들었다. 넓은 창으로 비추는 빛에 의존해 아무렇게나 흘려 쓴 글자를 읽어 내렸다. 희완이 적은 글들이었다. 변하지 않은 많은 것들 중 유일하게 누군가 건드린 흔적이 남은 것이었다. 희완은 제가 써내간 것들을, 낙서들을, 감정의 소회들을, 눈동자를 떨며 읽어 내려갔다. 마지막 한 장까지. 점 하나까지. 틀린 글씨 한 자까지. 남자가 몇 번이고 들여다보고 훑었을 것들이었다.
노트를 내려놓는 희완이 시선을 들었다. 열린 문을 통해 들어서는 검은 형체가 우뚝 현관에 멈춰 선다. 몸을 일으키는 희완의 손에서 주룩 노트가 미끄러졌다. 곧 환하게 밝혀지는 센서 등 아래로 뛰어드는 형상 하나가 검은 것과 한데 합쳐지며 현관 밖으로 떠밀려 나갔다. 그곳은 다시 암전이었다. 조용한 환희가 광란을 하는.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