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머무는 계절 (Just Stay)
무릎을 떨며 사정을 하는 희완의 상체가 와락 쏟아졌다. 욕조 난간에 흰 엉덩이를 앉혀 놓고 오럴을 해주던 승도가 울컥울컥 넘어오는 것을 깨끗이 삼키며 쏟아지는 몸을 가볍게 받쳐 들었다. 눈가를 살짝 찡그린 채 승도의 귓가에 연신 짧은 숨을 토해내는 희완은 길게 이어지는 사정의 여운을 이기지 못하고 늦게까지 부들거렸다.
첨벙- 물이 튀고 승도에게 매달려 있던 희완의 몸이 기울어지며 차게 식은 등이 따뜻한 물에 잠기고 매끄러운 욕조 벽에 닿았다. 뻗어온 손이 젖은 뺨과 목덜미를 한데 감싸 문지르며 붉은 자국을 남긴다. 다가오는 턱 끝을 망연히 올려보던 희완이 입술을 열었다. 겹쳐지는 살 틈으로 뜨거운 것이 가득 밀려왔다. 두터우면서도 날렵한 혀는 느슨하게 벌어진 입 속을 능숙히 유영하며 저 깊숙한 곳까지 헤집었다.
“헉.”
“목구멍이, 제법 넓어졌습니다.”
채 닫히지 못한 입술을 열고 쑥 밀어 넣은 손가락으로 요동치는 혓바닥을 누르며 편도부근을 문지르니 크게 반응하는 희완이 턱- 손목을 붙잡아 온다.
“큭, 쿨럭, 쿨럭.”
얼굴을 찡그리며 주욱 뽑혀져 나오는 길고 굵은 손가락을 견제하듯 붙잡고 상체를 들썩이며 기침을 하는 희완의 속눈썹으로 맑은 물이 맺혔다. 붙잡은 악력을 가볍게 털어내고 축축하게 젖은 손가락으로 일그러진 관자놀이를 문질러주는 승도가 맺힌 것을 따 듯이 훑어 삼킨다.
찰랑이던 물이 넘치며 단단한 근육이 움틀리는 허벅지가 욕조 난간에 걸쳐진다. 다리를 넓게 벌리고 앉은 승도의 손에 딸려 그 사이에 자리하게 된 희완이 뻐근하게 굳은 목덜미를 쓸며 검붉은 살덩이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을 삼키는 게 비참하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 난감할 뿐이었다. 썩 잘하는 축에는 못 들어도 어느 정도는 능숙한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남자의 것을 입에 담는 게 수월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반쯤 일어서 있는 것을 갈증이 나는 것처럼 내려다보다 젖은 손을 내어 그것을 가만 감싸 쥐어본다. 묵직하게 들어차는 그것의 표피를 문지르니 얽혀 있는 혈관이 매만져지며 성감이 좀 더 뚜렷이 다가온다. 동시에 일부 흐려졌던 성적 긴장감이 목 뒤를 넘겨 몸 전체로 번졌다. 발기해 있는 것의 밑을 엄지로 훑어 올리며 입술을 적시던 희완이 고개를 숙였다. 벌린 입으로 묵직한 살덩이가 가득 밀려들어온다. 볼이 부풀도록 크게 삼킨 음낭을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빨고 우물거리는 희완의 머리카락으로 긴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젖은 머리칼이 뒤로 살짝 당겨져 턱을 들게 된 희완의 입에서 음낭이 툭 떨어졌다. 빨간 살점을 보이던 혀가 그대로 귀두를 핥아 추읍, 선정적인 소리를 낸다. 나른하게 뜬 눈으로 짙은 그늘이 져 있는 승도의 턱 부근을 올려보던 희완이 끝까지 빼어 문 혓바닥으로 우둘투둘한 음경을 길게 훑어 내리고 반대쪽 음낭도 입에 물었다. 쭉쭉거리며 물컹한 살덩이를 열심히 빨고 손에 그득 찬 음경도 꽉꽉 주무르며 훑어 올리는 손가락 사이로 희미한 열기가 피워 올랐다.
“으음.”
담았던 것을 토해놓고 입술을 핥던 혀로 불거진 귀두를 에워싼 소대를 가볍게 핥는다. 이윽고 귀두부터 삼킨 입술이 벌어질수록 자취를 감추어가는 음경 하단부로 진득한 침이 주룩 흘렀다. 기분이 좋은 듯 낮은 숨결을 뱉어내던 승도가 머리칼을 쥔 손으로 이마께와 귀 뒷부분을 문지르다 고개를 숙여 희완의 눈 밑이 입을 맞추었다. 아니, 살이 딸려 올라갈 정도로 세게 빨았다. 그 틈에 반쯤 남은 걸 죄다 삼켜내는 희완에게서 그윽, 숨통이 막히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어느새 일부 건조된 음모 위로 질척한 침이 줄줄 흘렀다. 그래도 뱉어내지 않고 목구멍까지 넘어간 것을 마른 침을 삼키듯 그득 삼키며 혀를 찰싹 붙이고 볼을 홀쭉하게 만드는 희완의 숨이 거칠어졌다. 짧게 토해낼 때마다 승도의 음모 위로 훅훅 번지는 숨이 말초신경을 자극해 안에서 쑤욱 그 부피를 늘려가게 한다. 덕분에 건드려진 목젖이 천정으로 눌리며 와락 얼굴을 구기는 희완이 삼켰던 것들 죄다 토해놓았다.
“우욱, 쿨럭, 쿨럭, 헉, 헉.”
헛구역질을 하며 음모가 엉겨있는 치골에 이마를 박고 발작적으로 기침을 해댈 때마다 바로 옆에서 뺨에 비벼지던 음경 끝이 입술을 툭툭 쳤다. 기침이 잦아들길 기다렸다 머리칼을 잡은 손으로 고개를 젖히게 하는 승도가 헐겁게 벌어진 입술에 문대던 것을 쑤욱 귀두까지만 밀어 넣었다.
“끝까지 안 넣어도 됩니다.”
동시에 가느다랗게 떠는 혀를 누르고 목젖 직전까지만 주욱 밀려든 살덩이가 빈 공간을 꽉 메웠다.
“잘했습니다.”
하며 콧등을 씹듯이 입을 맞춰준다. 이제, 빱시다. 귓불을 빨며 흘려 넣는 속삭임에 간신히 숨을 잦힌 희완이 홀린 듯이 구음을 시작했다. 다 들어가지 못한 뿌리 부분은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담은 것만 집중적으로 빨며 고개를 당겼다 빼는 희완의 목덜미가 붉었다. 그 아래 등은 물 밖에 나와 있어 창백한데 목덜미와 귓불, 그리고 눈에 띄게 팽창된 얼굴을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샤워볼을 당겨 온도를 맞춘 승도가 따뜻한 물을 희완의 등에 흘려주었다. 목 아래와 가슴, 그리고 머리칼에도 물을 흘려주며 손등으로 불룩 솟아오른 턱 아래를 툭 친다. 그에 동조하듯 고갯짓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희완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음낭을 주무르고 뿌리 끝을 빠르게 훑으며 속도를 높이는 희완의 얼굴색이 더욱 짙어지며 쿨쩍쿨쩍 잔뜩 젖은 마찰음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다 간간이 입 밖으로 새었다. 오로지 남자의 성기를 빨고 애무하고 안에서 부피를 늘려가는 것을 깊이 받아들이는 것에만 열중하여 거의 몰아지경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렀던 희완이 목구멍을 조여 승도의 것을 뿌리 끝까지 무리하여 넣었을 때였다.
“허억.”
넣었던 것을 쑥 빼낸 승도가 쓸어내리던 머리칼을 잡아 뒤로 당기며 붉어진 얼굴 위로 사납게 발기한 물건을 올려놓았다. 요도구를 통해 울컥울컥 쏟아지는 정액이 붉은 피부를 희게 물들이며 얼룩처럼 흩뿌려졌다. 조금 놀란 듯 멍해진 얼굴에 긴 사정을 마친 승도가 제 음경을 잡고 귀두 끝을 천천히 문댄다. 점성 짙은 점액질이 엉겨 붙은 눈썹과 콧날, 그리고 뺨과 입술을 차례대로 또는 두서없이 눅진하게 문지르며 머리채를 잡은 손을 뒤로 좀 더 당긴다.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턱을 드는 희완이 코끝으로 스미는 정액 냄새와 샅 냄새에 점차로 당황하는 동안 얼굴 곳곳에 제가 싼 것을 녹여 넣듯 진득하게 문지르던 승도가 묵직한 것을 놓았다. 툭 떨어지는 음경이 희완의 턱을 건드리며 쑥 멀어지고 이윽고 말캉한 혀가 쑥 다가왔다.
“으음, 읏.”
스윽, 스윽, 허리를 숙여 얼굴을 맞댄 승도가 내민 혀로 희완의 얼굴을 구석구석 핥았다. 제가 문지르고 바르고 녹여 넣다시피 한 것을 다시 제 혀로 빈틈없이 핥아 깨끗하게 먹어치운다. 짐승의 영역표시와도 같고, 흡사 어린 새끼를 핥아주는 수컷의 애정표현인 것도 같은 그것은 흰 점액질이 한 방울도 남지 않았을 때 그쳤다. 마치 가능만 하다면 당장이라도 희완을 삼켜 씹어 먹고 싶은 듯한 욕망이 그를 내려다보는 검은 눈에 짙게 서려 있었다. 동시에 이것을 어찌 다뤄야 좋을지 번민하는,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제 욕망을 온전히 채울 수 있는 방법을 가늠하는 짐승의 뺨으로 흰 손이 닿았다. 물 끝에 닿아 젖어 있었고 미지근하게 식어 있는 손이었다.
“넣어도,”
“찢어집니다.”
“늘리면….”
제가 꺼내놓고서 너무 노골적인 단어에 흠칫한 희완이 눈썹을 이지러뜨린다. 그걸 빤히 내려다보던 승도가 뺨을 당겨 입을 맞추고는 말간 물을 끼얹어 번들거리는 얼굴을 헹궈준다. 젖은 속눈썹이 약간의 열기를 품고 있다. 그것은 매혹이고 자각하지 못하는 성적 충동질이었다. 그렇게 당해놓고서도 지각이 없는 녀석이다. 원하는 대로, 지금 당장 넣으면야 저 깊은 곳에서 기승을 부리는 것은 환장을 하겠지만 애초 오늘은 직접적으로 삽입할 생각이 없던 터였다.
좋다는 한마디에 흥분을 했다. 밑에서 벌어지면서, 숨통이 죄이도록 헐떡거려지면서, 정신적 육체적 한계의 끝에서 겨우 몸을 떨며 좋다는 말만 되뇌는 희완을 안으며 전혀 자제하지 못했다. 받아들인 순간 이미 적당히 할 생각은 아니었으나 꼬박 닷새를 운신하기 힘들 정도로 만신창이를 만들 생각도 아니었다. 후유증은 3주 가까이 갔고 처음 양일간은 혼자서는 서지도 못해 화장실에서도 붙어 있어야 했다. 바르르 떨리는 허벅지 사이에서 달랑거리며 오줌줄기를 제대로 뱉어내지도 못하는 것을 붙잡아 부드럽게 마사지를 해주면 간신히 말간 걸 내비치곤 했다. 심신의 회복이 더뎌 당시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저에게 모든 걸 의지하던 희완을 크게 벌린 아가리로 집어 삼켜 다신 꺼내놓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출렁- 물이 넘치며 승도의 손에 딸려오는 희완의 몸이 반쯤 일으켜졌다. 뒤를 보이게 하고 등을 누르니 앞으로 숙여지는 희완의 상체가 욕실 벽에 닿아 기역자로 붙여졌다. 지난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흰 엉덩이를 이쪽으로 완전히 드러낸 채 엎드린 희완의 가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좌우로 벌리니 순순히 벌어진다. 그 새로 축 늘어지는 동그란 음낭과 발기 후의 음경이 발간 살점을 드러냈다. 그것들을 말아 쥐듯 한손으로 한데 감아쥐니 타일 벽에 댄 팔뚝에 이마를 누르고 있던 희완이 어깨를 움찔하며 힐긋 뒤를 돌아본다.
봉긋 솟은 볼기에 입술을 붙인 승도가 혀를 내밀어 진득하니 빨아 당겼다. 그에 반응하여 미세하게 번져가는 떨림을 쫓듯 입술을 옮기며 울긋불긋한 게 희어진 살갗을 도로 붉게 물들인다. 손에 쥔 것을 부드럽게 주무르니 다시 발갛게 속을 보이는 살점이 비죽 솟아올랐다. 둥그렇게 굴국이 진 살점을 따라 내린 입술로 회음을 누른다. 혀로 깨끗이 핥아 올리니 낮은 신음을 흘리는 희완이 은근하면서도 끊임없는 자극에 일그러진 얼굴을 팔뚝에 문질렀다.
“좋습니까.”
“…좋, 아!”
뜨겁게 쏟아진 숨결이 집어삼킨 곳은 다름 아닌 이제 다시 발기하기 시작한 희완의 성기였다. 앞에서 덜렁거리던 것을 뒤로 당기는 승도가 고개를 숙여 가랑이 사이로 얼굴을 밀어 넣는다. 덕분에 더욱 벌어지는 허벅지가 눈에 띄게 떨리기 시작했다. 쭙, 쭙, 귀가 붉어질 정도로 적나라한 소리는 희완의 것을 입에 물고 쭉쭉 빨아 당기는 승도에게서 나는 소리였다. 커다란 손에 죄다 들어오는 음낭을 따 듯이 주물거리며 입에 담은 것을 살갗이 딸려 나오도록 세게 빨고 진저리 쳐지도록 강하게 애무하던 승도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희완의 허벅지를 가만 쓸어 올린다.
“읏!”
“움직입시다.”
제 것을 입에 물고 말을 하는 통에 희완은 그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알아들었으나 뇌가 제대로 걸러내지 못했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의식하지도 못한 채 조금씩 허리를 올려붙이고 있던 희완이 찡그린 눈가를 꾸욱 문댄다. 너무 크고 생경한 자극이었다. 뒤에서부터 얼굴을 밀고 들어와 오럴을 하는 탓에 한껏 뒤로 당겨진 음경이 음낭을 압박하며 허리 끝이 빠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무릎을 내리려하면 단단한 팔이 허벅지를 받치며 바로 세우길 반복해서 희완은 그냥 그대로 견디기로 했다.
쿨쩍쿨쩍, 허리가 들썩일 때마다 남자의 목구멍을 찌르는 귀두 끝이 안에서 부드럽게 닿는 점막과 살점들에 희열을 하며 머리를 세운다. 슬슬 사정을 해도 좋을 것 같은데 따뜻하면서도 기분 좋은 압력에 파묻혀 안달을 하는 성기는 조르듯이 남자의 입속을 쑤셔대며 경도를 높여간다.
“읏, 읏, 하! 아, 윽.”
영악하다는 생각이었다. 고작 살덩어리에 사고능력이 있을 리가 없는데도 나오기 싫다는 듯 조르고 조르며 남자의 애무를 보채던 것이 느지막이 탁 하고 터지는 순간 희완이 무릎을 떨며 하체를 휘청거렸다. 경련에 가까울 정도로 떨며 무릎을 제대로 세우지도 못하는 희완의 허벅지를 단단히 잡아 세우는 승도가 가랑이에 밀어 넣었던 얼굴을 쑤욱 빼낸다.
축축하게 젖은 손으로 양쪽 볼기를 바깥쪽으로 잡아당기고 드러나는 좁은 비부로 퉤- 마구 엉긴 점액질을 뱉어낸다. 희완이 그의 입안에 쏟아낸 것이었다. 일부 남은 것은 혀로 깨끗이 긁어모아 목구멍으로 삼킨 승도가 회음부로 주륵 흐르는 점액질을 도로 스윽 밀어 올려 촘촘하게 주름이 져 있는 항문 주위로 치덕치덕 발랐다. 겨우 사정의 여운을 잦힌 희완이 훅 하고 숨을 들이킨다. 정액을 가득 묻힌 손가락 하나가 비좁은 구멍을 뚫고 쑥 들어왔다.
“네 개까지 넣어 보고,”
“흐읏.”
정확한 숫자를 들먹이자 그 과정이 절로 연상되어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흘려낸 희완이 저도 모르게 아래쪽은 긴장 시킨다.
“늘려지면 넣읍시다.”
속삭이며 붉어진 엉덩이에 가볍게 입술을 붙이는 승도가 넣은 손가락을 가만 돌려본다. 잔뜩 수축되어 손가락을 집어 삼킬 듯이 쭉쭉 빨아들이는 내벽의 점막들이 꼭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휘 돌리면 와르르 밀려갔다 또 도로 와르르 몰려들며 손가락을 죽죽 잡아당긴다. 그런 감각을 충분히 음미하며 안을 헤집던 승도가 손가락 하나를 늘렸다.
“몸이 식었습니다.”
잘 모르겠는데, 밑이고 어디고 그가 닿은 곳곳은 이처럼 뜨겁고 열이 오르기만 하는데, 과연 몸이 식었다는 승도는 샤워볼을 끌어다 따뜻한 물을 머리에서부터 흘려주었다. 쏴아아 쏟아지는 물줄기가 몸의 굴곡을 따라 주륵 흐르며 온기를 더해주었고 안에 찔러 넣은 손가락은 넓게 벌어지며 좁은 곳을 꾸준히 늘려갔다.
“손가락이 완전히 파묻혀서,”
말을 하는 승도가 샤워볼을 머리맡에 걸어두고 도로 오므려진 볼기를 옆으로 주욱 벌렸다.
“보이질 않습니다. 이렇게 좁은 곳이,”
벌려져 훤히 드러난 곳으로 두꺼운 손가락 두 개를 꽉 물고 있는 주름을 축축한 혀로 길게 핥아 올린다.
“내 것을 받을 때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지는 걸,”
욕실 벽에 팔뚝을 짚고 엎드려 있던 희완의 허리로 긴 팔이 감겨진다.
“보여주고 싶습니다. 절경이지 않겠습니까.”
벽에서 떨어지는 희완의 몸이 난간에 걸터앉은 승도의 허벅지로 내려앉는다. 가슴과 등을 바짝 붙이며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붙이는 승도가 밑에서 쑥 빼낸 손가락을 앞으로 돌려 입에 물게 했다. 쉽게 벌어지는 입속으로 손가락 세 개가 한꺼번에 밀려들며 곧 쩝쩝 거리는 소리가 물소리에 섞여들었다.
반쯤 일어서 있던 음경이 희완의 엉덩이와 승도의 뱃가죽 사이에 눌려지며 완전히 기립했다. 등허리로 선뜩하게 와 닿는 그 감촉에 흠칫하면서도 입에 넣은 손가락을 꼼꼼히 빨고 핥는데 열중하는 희완의 몸이 돌려 앉혀진다. 주룩- 빠져나가는 손가락에 잔뜩 엉긴 침이 길게 딸려나갔다. 얼굴을 마주보고 다시 허벅지에 앉혀지는 희완의 가랑이가 넓게 벌어졌다. 동시에 더욱 비좁아지는 양쪽 볼기 사이에서 비죽 새는 점액질이 꾸욱 쥐어 짜여지듯 밑으로 길게 늘어졌다.
“자제하는 게 어렵습니다.”
움푹 파인 미골을 스쳐 등골을 길게 훑어 올리며 한 손으로는 가득 차는 엉덩이를 주무르는 승도가 미세하게 일그러진 입술로 희완의 빗장뼈를 긁는다. 닿은 곳이 뜨겁다.
“들립니까.”
지금 이 순간도 스스로의 광기를 억누르는 듯한 음색은 어둡고 컴컴했다. 드문드문 드러나는 그의 본성이었다.
“살만 닿아도 쑤시고 싶어 미쳐 날뛰겠다는 검은 것의 아우성이.”
희완은 문득 젖은 몸이 시리다는 생각을 했다. 위에서 쏟아지는 따뜻한 물이 등 뒤를 적시고 있음에도, 남자의 체온이 이렇게 가까이 맞닿아 있음에도, 문득문득 서리는 한기는 어쩌면 그의 본성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제어 불능의 그 어떤 것.
늘어뜨린 두 팔로 승도의 등과 머리를 감싸 품에 앉는 희완이 그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당신이 좋습니다.”
처음부터, 당신과의 관계는 나를 상처 입히고 무자비하게 벌어지게 하고 춥게 내버려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탓이 아닙니다. 내가 원해서 받아들인 관계였고, 내가 필요해서 받아들인 관계였으니, 그것에 당신의 책임은 없습니다. 당신이 안아주면 좋고, 당신의 것이… 그래, 당신의 것이 내 밑을 쑤시고 들어오면 나 역시 미쳐가는 듯이 좋습니다. 어쩌면 광기와도 같은 그 행위가 우리에겐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나를 다치게 하는 것이 걱정되는 겁니까.”
오래된 흉터가 길게 이어져 있는 귀 뒤를 타고 어깨너머로 입술을 미끄러뜨리니 사납게 치 뜬 검은 짐승의 눈이 희완을 노려보고 있다.
“나는 당신의 것이 떨어져나가 혼자 춥게 되는 것이 더 두렵습니다.”
그것을 어루만지듯이 상처뿐인 살갗에 입술을 부비는 희완이 눈을 감았다.
“넣어서,”
불현듯 심장이 떨리듯 지끈 거려온다.
“이 빈곳을, 가득 메워주면,”
남자의 등을 꽈악 끌어안는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런 것을, 이렇게 깊고 텅 빈 것을, 남자가 아니라면, 누가 채워줄 수 있겠는가.
겨우 허리를 세우게 하면 희완의 몸은 무너지기 일쑤였다. 결국 엎드려 놓았던 희완을 거꾸로 돌려 바로 눕히는 승도가 양 다리를 위로 밀어 젖히며 허리 밑으로 베개를 끌어다 받쳤다. 그리고 제 것이 들어서는 바람에 더 헐거워질 수 없이 느슨하게 벌어져 있는 그곳으로 굵은 음경을 빈틈없이 주욱 밀어 넣었다. 하윽. 동시에 고개를 휘젓는 희완에게서 짙은 울림이 번져 나온다. 남자의 무게까지 가중되어 깊숙이 밀려드는 것이 직장을 벗어나 다른 장기까지 건드리는 기분이었다.
“너무, 깊습니다.”
말과는 달리 외려 승도의 목을 껴안아 바짝 당기는 희완의 입술이 먼저 그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멈추지 말고 계속… 계속.”
더 들어와 달라는 희완의 목소리가 더 새어나오지 못하고 거친 숨만 화득하게 몰아쉬어졌다.
“밑이, 완전히 붙었습니다.”
더 들어갈 수도 없게, 뿌리 끝까지, 한 점 빈틈도 없이, 그렇게.
“연희완.”
질끈 감은 눈으로 아무것도 보지 않고 오로지, 제 안에 가득 들어차 있는 그것에만 집중하고, 그것이 주는 쾌락과 같은 고통에만 집중하고 다스리려하던 희완이 이지러졌던 속눈썹을 펴며 승도를 올려본다.
“이래도 상관없어.”
묻는 남자를 멍하니 응시하다 눈가를 이지러뜨린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계속 들어와 줘….”
그 한마디를 끝으로 희완은 더 말이란 것을 뱉어내지 못했다. 그 비슷한 것들이 내내 벌어져 있는 입을 통해서 내뱉어지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저 안달하는 신음이고 매달리는 비명이며 토해지는 흐느낌에 불과했다. 몸을 섞는다는 것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무엇을 채우기 위한 필사적인 행위와도 같았고, 동시에 해갈하지 못하는 굶주림과 갈증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서로를 물어뜯고 빨아 당기는 행위 같기도 했다. 이렇게 치열하고 허기지는 것이 그럼에도 좋다는 것은 맞닿은 살에서 전해지는 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 빈 곳을 시리게 덜렁 놓아두지는 않겠다는 몸부림, 그리고 받아들임이었다.
물 끓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소파에 앉아 봄 색깔의 빛살이 내려앉은 유리 테이블을 멍하니 응시하던 희완의 목덜미로 길고 억센 손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귓불에 입을 맞추며 막 끓인 물을 부은 유자차를 테이블에 내려놓는 남자가 손을 스치듯 떨어뜨리며 맞은편 소파에 가 앉는다.
한 번에 그쳤던 삽입은 다만 내도록 깊이 들어 앉아 뱃속은 아직도 그의 것이 들은 듯 묵직하고 아릿하고 동시에 허전했다. 한동안 제 뱃속을 차지하고 있을 그 이물감을 가만 느끼고 있던 희완이 컵에 든 유자차를 후 불어 입에 대었다. 따뜻한 것이 들어가니 나른하게 풀어져 있던 몸으로 겨우 혈액이 돌며 안의 기관이 느리게 작동하는 기분이 들었다.
유자차 대신 담배를 입에 문 남자를 건너보니 손을 뻗어 빛이 묻어 있는 뺨을 툭 건드리고는 몸을 일으켜 베란다로 나간다. 두터운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있음에도 남자가 라이터를 켜는 소리, 불을 붙인 담배를 당겨 연기를 뱉어놓으며 흩어지는 숨소리,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에 메탈 향이 날리어지는 소리가 선명히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고즈넉한 일요일 아침이었다. 희완은 지난밤의 그 불길 같던 열기가 고스란히 남은 육신의 노곤함이 희석되는 것만 같은 기분에 후 불어낸 찻물을 입에 담으며 뱃속의 뜨거운 것을 다시 가만 들여다보았다.
[별수 없다, 그런 독한 놈한테 걸려놓았으면.]
[암만 생각해도 그놈의 귀신이 내 몸뚱이 어디에 숨어 있는 거여. 그렇지 않고는 내게 오는 사람마다 옮겨 붙을 리 없지.]
[걱정마라, 나무란 건 뿌리만 성하면 안 죽어.]
한바탕 열기가 휩쓸고 지나간 연습실은 후끈한 공기로 느적느적하였다.
마른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목을 축이던 희완이 사무실 안에서 저를 부르는 손짓에 생수병을 은성에게 넘기며 그리로 향하였다.
“그래, 알았다. 지금 바로 출발하면 얼추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거다. 다섯이라고.”
문 앞에 선 희완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을 한 학정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헝클어진 책상 위에 올려놓은 술 한 병을 가리켰다.
“내일 갈 때 들고 가라. 딴 건 가져가도 안 받으시니까 저거면 될 거다.”
강명 선생 드릴 걸 미리 챙겨놓은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희완도 무얼 들고 갈까 고민하다 흔한 인삼으로 타협을 봤는데, 다른 건 받지도 않는다니 준비한 걸 학정에게 주고 저 걸 들고 가는 쪽으로 결론을 본다.
“이게 뭡니까.”
“국화주. 그거 아니면 입도 안 대셔.”
어이없게 까다로운 양반이지. 하며 적색 항아리에 든 술을 서랍을 뒤져 찾아낸 치킨집 종이가방에 넣어준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어디 가십니까?”
“파주.”
종이가방을 받으며 묻는 말에 재킷을 걸쳐 입던 학정이 열린 문을 통해 단원 몇 명을 호명해 불러들였다.
“촬영 간다. 따로 준비할 건 없고, 추우니까 옷이나 두툼하게 입어. 30분에 출발한다.”
30분이라면 겨우 10분이 남았다. 영화판 나간 필영에 더해 경성도 드라마 촬영지원 나가서 따로 통솔한 인원이 없으니 학정이 직접 내려갈 작정인 셈이다.
“무슨 촬영입니까?”
“영화. 너도 알지? 고성민이. 무대뒷일 연결해준 놈.”
“아, 예. 그때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는데… 잘 지내신답니까.”
“못 지낼 이유가 없지. 너 안부 묻더라.”
무대뒷일에 이어, 그 무대 연출과의 일까지 한꺼번에 기억을 떠올리게 된 희완이 조금 어색한 얼굴로 안부를 전하며 눈가를 문질렀다. 그걸 조금 이상하다는 듯이 흘깃 넘겨보던 학정이 시계를 내려다보곤 곧 책상을 돌아 나와 사무실 밖으로 향하였다. 이미 준비를 마친 단원들은 벌써 계단을 내려가 있었고 제가 운전하겠다고 차 열쇠 받으려고 남은 정열이 손을 내민다. 됐다고, 지금 가면 밤샘은 따 논 당상이니 가는 길에 눈이라 붙이라며 정열도 먼저 내보낸 학정이 마무리 청소 중인 여타 단원들의 인사를 뒤로 하고 극단을 나섰다.
“정리하고 들어가라.”
계단 밑으로 따라 내려오려는 희완을 밀어 만류하는 학정이 뭐 또 다른 말을 하려다 이내 입을 닫고는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섰다. 그 산발인 머리꼭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희완이 운전 조심하시라 하니 손만 흔들어 알았다 하고는 훌쩍 계단 밖으로 사라졌다.
오늘은 죄다 이런저런 일로 단원이 빠져 연습도 거의 말단이나 아랫기수들 만으로 채워졌었다. 희완의 동기들도 필영과 경성을 따라 죄 나가 있었고 그나마 남은 짬밥 실한 놈들도 학정을 따라 나간 차였다. 올해 막 들어온 신입들과 이제 1년 차를 넘긴 녀석들을 데리고 정리를 마친 희완이 마지막으로 문단속을 하고 극단을 나섰다.
양일간 집을 비우겠다는 남자와는 정오 즈음 짧게 나눈 통화 외에는 별다른 연락을 취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괜찮겠지, 라는 생각이었다. 제 집도 아닌 그 큰 집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는 것도 어색했고 어제 그 일이 있고서도 오늘 우진을 집에 혼자 두는 게 걱정이 되는 건 학정뿐만이 아니었다.
계단을 내려서기 전 저에게 무어라 하려던 말을 관두고 내려서던 학정은 가끔 이런 식으로 희완으로 하여금 남자와의 관계를 상기시키게 했다. 예전이라면 별스럽지 않게 희완을 아파트에 내려놓고 우진을 부탁했을 것이었다. 그리 편하게 대하지 못하는 이유를 희완은 저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남자의 존재를 아는 이상 학정에게도 일정 부분에선 남자와의 관계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분명한 위치를 언급해주어야 학정이 저를 대하는데 있어서도 어느 기준을 적용할 지 판단할 수 있을 거였고, 희완을 유일한 매개점으로 하고 있는 남자에 대한 입장도 명확히 할 수 있을 터였다.
스폰서, 동거인, 섹스파트너, 연인. 남자를 어느 카테고리에 넣어야 맞는 건지 가능한 관계를 하나하나 떠올리고 제해가던 희완이 버스에 올라타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일곱 시가 넘어가는 일요일 저녁의 대학로는 웃고 떠드는 인파로 인해 가득 붐볐다. 앳된 얼굴들이 많이 눈에 띄었고 길을 찾지 못해 이정표를 찾아 헤매는 초행자들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우스꽝스런 분장으로 현재 러닝 중인 극을 광고하며 장난스런 호객행위를 하는 극단원들이 눈에 스치며 차선으로 진입하는 버스가 곧 복잡한 대학로 거리를 빠져나갔다.
그냥 아는 사람. 말도 안 돼. 고개를 젓는다. 만나서 이야기만 하는 건전한 관계와는 전혀 거리가 머니 범주할 수 있는 관계라곤 저 위의 것들이 최선이었다. 희완 본인은 물론 심지어는 학정까지 어렴풋이나마 모두가 스폰서로 이해하고 있는 관계. 그러나 이제 다른 무언갈 말할 수 있는 관계. 좋다는 말을 해주던 남자의 목울대를 떠올리던 희완이 슬쩍 귓불을 문지르며 정체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동등하길 바랐지만 그건 현재로선 요원한 일이었다. 남자에게 의지하고 있는 부분이 너무 많았고 희완으로서는 그 부분들을 해결할 능력이 되지 못했다. 또한 그에게서 받은 것들을 달리 다른 방법으로 갚을 주제 역시 아니었다. 좋다라는 말은 그만큼 많은 함정이 서린 말이었다. 그에게서 받는 것들은 좋음과 동시에 무척이나 싫기도 한 것들이었다. 이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길들여져 버린 육체적 쾌락과 그가 주는 물질적, 인과적인 것들에 대한 상실감은 균형을 잃은 채 언제든 어느 쪽으로든 와르르 무너져버릴 것들이었다.
자포자기식으로 주는 마음은 일절 받지 않겠다던 남자에게 쏟아낸 좋다는 말들이 희완은 이제 제 안에서 쌓인 걸 내려다보았다. 타협도 안 되고, 포기도 안 된다던 남자에게 먼저 쏟아낸 말. 그것은 진심이었고, 그래야 했다. 관계를 정립하여 나아가길 바란다면 희완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많은 것들을 떠올리며 희완은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스스로를 다그쳐 그와의 관계를 파국으로, 제 안에서 전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몰아치지 않기로 했다. 제가 좋다는, 그의 말을 믿었다. 그가 좋다는 스스로의 말처럼.
안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어 결국 비밀번호를 눌러 도어락을 해제한 희완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등 뒤에서 저절로 잠기는 문소리에 떠밀리듯 안으로 들어서던 희완이 신발을 벗으려다 현관을 차지하고 있는 검은 구두 한 켤레를 발견하곤 눈썹을 들었다. 못 보던 것이었고 그냥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고급 수제화였다.
불현듯 지난번 닫히는 문 앞에서 욕지거리를 뱉으며 돌아나가던 남자와 그 당시 안방 문에서 새어나오던 열기와 신음소리들을 연달아 떠올린 희완이 이번에도 그런 것인가 하여 다소 경직된 눈길을 안방으로 보내었다. 다행이랄지, 안방에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또 그 정적이 이상해 벗던 걸 마저 벗고 안으로 들어선 희완이 들고 있던 걸 바닥에 내려놓으며 안방 문을 두드렸다. 반응이 없어 한 번 더 문을 두드리려다 불을 켜지 않은 거실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빛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이윽고 문고리를 잡고 방문을 여니 침대에 앉은 우진의 옆모습이 보였다. 그 너머로 진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는 붉은 장미꽃이 시선을 끈다. 자욱한 장미향만큼이나 진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화려한 꽃바구니에서 시선을 옮겨 우진의 창백한 뺨을 응시하던 희완이 방문을 좀 더 열어 젖혔다. 넓어지는 시야로 침대 발치에 의자를 끌어다 앉은 이방인의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가 바로 현관을 차지한 수제화의 주인임을 확인한 희완은 때마침 자리에서 일어나 저를 돌아보는 남자의 낯선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런, 여기서 이렇게.”
뜻밖의 조우에 놀라움을 표하였으나, 곧 별 거 아니라는 듯, 빠르게 표정을 바꾸는 남자가 준수한 얼굴 가득 친근한 미소를 드리운다.
“반갑습니다. 드디어 뵙게 되는군요.”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를 성큼성큼 좁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먼저 손을 내미는 남자를 희완은 기억하지 못했다. 제 기억엔 없는 인물이 지금 이곳에서 저를 반기는 상황이 이상스럽게 여겨져 선뜻 그 손을 마주잡지 못하고 우진을 넘겨보는데 다시 그의 음성이 시선을 끈다.
“성의준이라고 합니다. 백 대표 친구이기도 하고, 항간에는 연희완 씨 스폰서로도 알려져 있기도 하더군요. 현재 주석그룹 기획본부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백 대표와 스폰서라는 단어에 차례대로 반응을 보이는 희완을 말없이 올려보던 의준이 싱긋 웃었다.
“금시초문인가 보군요. 백 대표 그 친구 일처리가 원래 그렇습니다.”
하하, 가볍게 소리 내어 웃으며 재차 악수를 권하는 성의준의 스스럼없는 태도에 희완은 약간의 위화감을 느껴야했다. 그의 등 뒤에서 이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입을 꾹 닫고 있는 우진과 그런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로 상냥하게 웃고 있는 성의준을 번갈아보던 희완이 뒤늦게 악수를 받았다.
“연희완입니다.”
“오늘은 도우진 씨 일로 찾아뵀습니다. 한 다리 건너 일을 처리했더니 역시 지지부진해서 말입니다. 백 대표 그 친구가 메신저 역할에 충실한 것도 아니거니와 또 워낙 독단적이기도 해서, 기회만 엿보다가 오늘 겨우 시간을 맞출 수 있게 되었지 뭡니까.”
마치 남자의 부재를 알기라도 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며 거실로 나와 먼저 자리를 권하는 성의준은 사람을 대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무언가 정신을 놓고 있는 듯한 우진을 말로써 흔들어 침대 밖으로 나오게 한 것도 그였고, 제 집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것 마냥 희완과 우진에게 자리를 먼저 권하고 마지막에야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은 후에도 우위에 있는 듯한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넓게 벌리고 앉았던 다리를 꼬며 흘긋 비좁은 아파트를 훑던 그가 권하는 차를 거절하며 다시 말을 건넸다.
“이런 곳에서 지내는 걸 아시면 권 회장님 마음이 많이 아프시겠습니다.”
저에게 건넨 말임을 알고서도 대꾸도 않는 우진은 내내 꿀 먹은 벙어리였다. 그걸 보고도 별 다른 속내를 보이지 않는 희완은 그저 상석에 앉은 성의준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웃고 있지만 호의적이라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정중한 어투와 예의바른 언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간 내내 권 회장님께서 많이 애를 태우셨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와도 된다하셨는데, 이야기 못 들었습니까?”
묵묵부답인 우진을 한참 응시하던 성의준이 하- 역시, 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래서 내가 백 대표를 못 미더워하는 겁니다. 이렇게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줄이야.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정말 무슨 사단이 나고도 남았을 겁니다.”
하고 잠시 뜸을 들이던 성의준이 멍하니 시선을 놓고 있던 우진이 저를 쳐다보자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도우진 씨 뒤에 백 대표가 있다는 걸 알고 권 회장님께서 얼마나 역정을 내셨는 줄 압니까?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진 도우진 씨 찾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을 한 끝에 그 소식을 들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히셨겠습니까. 게다가 백 대표 출신이 좀 그렇습니까? 엉덩이 가벼운 놈이 기어들어가도 그런 근본도 없는 백정 놈 밑으로 기어들어가 제 얼굴에 똥칠을 해도 유분수라며 백 대표고 도우진이고 눈에 띄면 육시를 내버린다고 길길이 역정을 내시던 게 엊그젠데 솔직히 이리 애틋해 하실 줄은 몰라 나도 좀 당황했습니다.”
그 당시 상황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듯 다소 희극적인 모습으로 허공 어딘가를 더듬던 그가 희완과 우진을 차례대로 응시하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다.
“백 대표에게 몇 차례나 간청 아닌 간청을 하셨답니다. 그 대단하신 양반이, 도우진 씨 되찾고자 사회적 지위로 보나 뭐로 보나 한참이나 아래 연배인 백 대표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거듭 간곡한 요청을 하였는데, 이렇게까지 깜깜무소식이었다니. 하 참, 그러고 보면 백 대표도 난 인물은 난 인물이란 말입니다. 그 제안 다 뿌리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말입니다. 물론 제안뿐이겠습니까. 무시무시한 협박도 심심찮게 들어갔을 건데 말입니다.”
하는 순간에는 그의 번들거리는 시선이 희완에게도 잠시 향하였으나 찰나였을 뿐이었다.
“그렇게까지 하셨는데 도우진 씨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그 양반 보통 역정 낼 일 아닙니다. 안 그래도 백 대표 상대로 이를 갈고 계시는데, 혹시나 해서 와 본 게 천만다행이지 않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도우진 씨. 권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그간 했던 일은 진심이 아니셨답니다. 그 분 핏줄들이 여간내기가 아니잖습니까. 그 눈 피하느라 그러신 거라고. 이해해 달라십니다. 이제 유산 분쟁도 다 끝냈고 도우진 씨 건드릴 종자들 하나 남아 있지 않으니 마음 풀고 그만 들어오라십니다.”
미소를 띠우며 건네는 말에 우진은 말문이 막힌 얼굴을 하얗게 띠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든 게, 고작. 그 핏줄들 눈속임을 위한 것이었다고. 그 모든 게.
믿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십니다. 이번에도 우진 씨가 제 발로 안 돌아오면, 무력행사를 해서라도 안으로 들이겠다 하셨습니다. 애첩 하나 두고 그 난리를 피우는 게 체면 깎이는 일이라 생각하셔서 점잖게 일을 처리해오셨지만, 이젠 안 그러시겠답니다. 이 말 역시 백 대표에겐 전혀 전해 듣지 못했지 않습니까. 정말 너무하는군요. 도우진 씨에게 선택권 하나 주지 않은 채 이 돼지우리나 다름없는 아파트에 던져놓고 나 몰라라 방치하다니.”
쯧쯧 혀를 차는 성의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낡은 소파 팔걸이를 훑어보다 다분히 의도적인 눈길로 우진을 본다. 그제야 우진도 조금이나마 정신이 드는 듯한 얼굴이었다.
“원하는 게 있지 않습니까. 배우로서 성공하는 거, 그거 아직 안 늦었습니다. 스캔들이야 권 회장님 힘으로 무마 못할 게 무어 있고, 마약사범 일 따윈 애저녁에 무혐의로 풀려났으니 문제될 거 없고, 음성적으로 나도는 영상들도 책임지고 깨끗이 처리해준다 하십니다. 돌아오기만 하시면, 예전의 그 화려했던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이 말,”
“일 없습니다.”
“진심입니까?”
“…….”
이미 거절할 걸 예상하기라도 한 듯 크게 당황하지도 않고 바로 되묻는 성의준을 사납게 응시하던 우진이 벌떡 일어나며 급격히 가빠오는 숨을 힘들게 가라앉혔다. 더러운 깔개 새끼, 밟혀 죽으나마나, 늑대 무리에 던져 놓을 때는 언제고. 이제와, 이제와!
“꺼지라고.”
싸늘하게 내뱉는 말에 콧잔등을 찡그리던 성의준이 별 수 없지, 하는 얼굴로 쉽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 이왕 말 꺼낸 김에 말입니다.”
돌아서다, 잊은 걸 떠올린 듯 주의를 요하는 성의준이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덩달아 기울어지는 그 시선이 히죽 웃는 것 같다, 라는 생각에 미친 순간이었다.
“권 회장 그, 육시를 내버리겠다는 말은 빈말이 아닙니다. 도우진 씨도 염치가 있는 인간이라면, 잘 생각하셔야지. 권 회장이야, 도우진 씨가 백 대표 깔개 노릇한다는 생각에 하루에도 몇 번이고 눈 뒤집고 날뛰는 거지만, 내가 알고 있는 건 다르거든.”
삐딱하게 기울어진 성의준의 시선이 이번엔 우진을 지나쳐 소파에 앉은 희완에게로 향하였다.
“연희완 씨. 백 대표가 언제까지 방패막이 노릇해줄 수 있을 것 같아? 권 회장 그 양반이 운이 좋아 그 자리까지 올라간 줄 아나? 천만에, 그 양반만큼 지독한 노친네가 또 없지. 도우진 씨도 그래. 연희완 씨 어려울 땐 거들떠도 안 보다가 이제와 이렇게까지 신세지는 거 안 부끄럽나? 아무리 약에 찌들었어도 기본 머리가 있으니 알 거 아니야. 재활용도 못할 만큼 더럽게 굴던 도우진 일부러 건져 아무도 손 못 대게 꽁꽁 감춰둔 이유가 뭐겠어요. 응? 인간 백정이라는 그 백 대표가, 그렇게까지 해서 연희완 씨 환심 사려는 이유가 뭐겠어. 사랑? 그야말로 좆 까는 소리에 불과하고.
저 살겠다고 지 피붙이까지 나 몰라라 한 인간이야, 백 대표 그 친구가. 이제 갓 스물 먹은 여동생은 개새끼들한테 돌아가면서 윤간 당하고도 모자라 갈가리 찢어 죽게 생겼는데 지 알바 아니라고 팽한 놈이라고. 연희완 씨도 언제 안면몰수 당할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내 일러주는 거야. 지 딴에는 죽은 지 여동생 생각 나 그러는 모양인데, 그게 언제까지 갈 것 같으냐고. 살려달라고 울고불고 매달리는 지 동생도 그렇게 매몰차게 버린 놈이, 본격적으로 권 회장하고 붙어봐야 얼마나 연희완 씨 싸고돌겠어. 그것도 짐덩이가 주렁주렁 매달린 놈을. 아마 조금 위험하다 싶으면 냅다 내버리고 튈 게 뻔하지.
그러니까 도우진 씨가 잘해야 된다 이 말이야. 다 잊고 앞으로는 더 잘해주겠다잖아. 그 고집불통 양반이, 도우진 씨 하나 찾자고 들인 공 생각하면, 이러는 거 불경이야, 불경. 지 핏줄 버린 백 대표보다는 더 지조 있고, 인간적이잖아? 도우진 씨가 어디 가서 또 그런 대접을 받아, 평생, 그게 가능할런지나 모르겠지만, 아무튼- 평생 동생 덕 보면서 살 거 아닌 바에야. 그만 스스로 살 길 찾을 때도 됐어. 아니면, 정말 김학정이한테 아직도 미련 못 버리고,”
“일 없다잖아, 이 자식아. 아구창 날리기 전에 꺼져.”
음산하게 몰아붙이는 우진을 빤히 쳐다보던 성의준이 삐뚜름하게 기울였던 고개를 바로하며 이번에야말로 진짜 그 입가에 비웃음을 걸었다.
“뭐, 됐습니다. 내가 할 도린 다 한 것 같으니, 그 책임이야 이제 당사자가 지는 거겠지요. 실례 많았습니다.”
끄덕, 정중히 인사까지 하고서야 돌아나가는 성의준을 당장이라도 잡아 채 주먹이라도 갈길 듯이 노려보는 우진이 쿵 닫히는 문에서 좀처럼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빌어먹을. 굳게 닫힌 문 위로 지난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기 시작했다. 머리끝까지 뜨겁게 차올랐던 열기가 쑤욱 꺼지며 저 뱃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눈 시린 한기가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꽉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부들부들 떨던 우진이 고통스레 울컥 솟은 것을 삼키며 입술을 짓이겼다.
헛소리다. 개소리…. 굴리고 굴리고 굴리고 굴려서 결국 거기. 벼랑 끝에서 떠밀려져 끝없이 내던져지던 몸뚱이가 뒹굴던 칼 밭. 손 하나만 움틀 해도 육시가 되도록 회가 쳐지던. 거길 다시 돌아가. 거길. 생각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으며 속이 뒤집혀져 나올 것 같다. 희게 질린 얼굴을 뭉개지기라도 하듯 일그러뜨리던 우진이 혈관이 도드라지도록 쥐었던 손바닥을 펴 눈가를 우악스럽게 문지른다. 비틀거리듯 옮긴 걸음으로 거실을 가로질러 안방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곧이어 안에서 무언가가 던져지고 짓밟혀지고 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한참 후 무거운 침묵을 깨고 흐느낌과 같은 숨소리가 열린 문틈 사이로 운무처럼 번져 나왔다. 우두커니 앉아 제 발치를 쳐다보던 희완이 그 짙은 운무를 헤치며 걸음을 옮겼다. 들척들척 들러붙는 것은 뱀의 혀와 같았고, 늪지대의 축축한 갈퀴와도 같았다. 활짝 열린 문 안에서 붉은 장미향이 흐드러지며 희완을 덮쳐왔다.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서 핏물처럼 흩뿌려진 장미꽃잎을 선뜩하니 노려보던 우진이 불현듯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차갑게 식은 손목을 감으며 꽉 쥐어왔다. 그 손의 주인을 올려보는 우진의 눈이 병적으로 붉어져 있었다.
“…….”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이젠 나도 싫어. 거긴 가야하는 곳일 뿐, 돌아갈 곳이 아니다. 이미 돌아온 곳을 떠나 가야할 곳이, 거기라면- 차라리.
“안 가도 돼.”
“언제까지 갈 것 같으냐.”
“…….”
“언제까지 내가 구해질 수 있을 것 같아.”
히스테릭하게 불거졌던 얼굴로 내려앉는 것은 처연하기까지 한 체념이었다.
“내일, 모레, 한 달 후? 두 달? 반 년, 일 년, 그리고 또 일 년? 희완아.”
“장담할 수 없어. 그래도 안 돼.”
“꽃이며, 패물이며, 돈이며, 바리바리 싸들고 온 거 봐라.”
조각난 것들이 흩어져 있는 발치를 돌아보는 우진이 팔을 뻗어 통장 하나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걸 펼쳐 희완에게 보여주었다.
“미안하다면서 던져준 돈이 십억이야. 십억.”
“…….”
“돌아가면, 더 많이 안겨줄 거다. 사실 그렇게 나쁘지도 않아. 내가 이 지경이 된 건 그 양반에게 버려지고 나서부터니까. 이유를 몰라 더 절망스러웠는데 유산분쟁 때문이라니, 납득이 가. 그 양반 자식들이 날 눈엣가시처럼 여겼거든. 재활도 큰 돈 들여서 체계적으로 해줄 거고, 연극이다 뭐다 저 혼자 바쁜 김학정처럼 날 이 골방에 혼자 던져놓고 나 몰라라 하지도 않을 거다. 잘해줄 거야.”
바리바리 안겨주던 것들 순식간에 회수해 가 다른 연놈들 품에 안겨주고 죽으라고 묵정밭에 걷어 차 넣을 땐 그 잘난 얼굴 한 번 구경 못했었다. 분리수거 된 쓰레기였고, 재활용 되어봤자 또 다시 쓰레기 신세 벗어나지 못할 건 불 보듯 훤한 일이었다. 김학정은 그저 잡고자 한 흠결에 불과할 뿐이었다. 거기에 멍청하게 걸려들어 불행을 자초한 것 역시 우진 본인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영화든 연극이든 드라마든, 하고 싶은 것도 다 할 수 있고, 날 깔개, 깔창, 너덜너덜한 걸레만도 못한 눈초리로 경멸하며 무시하던 연놈들도, 이제 다시 내 발밑에서 살살 기면서 한번만 용서해 달라, 제발 잘 봐 달라 무릎 꿇고 애원하겠지. 까짓 지난 일쯤이야 무슨 대수겠어. 잘해준다잖아. 빌어먹을, 다신, 그럴 일 없다잖아. 그러니까, 돌아가는 게 맞아. 그렇지?”
돈 보고 달려든 하이에나들 수준에 걸 맞는 졸작 줄줄이 망해가며 커리어 역시 쪽박 찰 게 뻔하다. 광고며 화보며 줄줄이 들어와 봤자 버려질 때 모조리 빼앗겨 빈 몸으로 쫓겨날 것 역시 자명하였고, 사실 우진은 이제 그런 것 따위, 조금도 원하지 않았다. 밤마다 해야 할 그 짓은 넌더리가 난다. 잘못 디딘 발이 잠긴 진창의 악취가 너무 심해 되돌아오지 못하고 계속 걸어가야만 했다. 살가죽이 벗겨지다시피 껍질을 떼어주고서야 겨우 벗어난 그 길을 제 발로 가기엔,
썩어들어 가는 것들이 마구 엉킨 제 발치를 내려다본다.
“…….”
다시 두고 가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안 변해.”
희완을 올려본다.
“안 변할 거야.”
알잖아.
“언제든 형을 함부로 다룰 수 있고, 또 내킬 때마다 형을 장난감 부리듯 가지고 놀다 필요 없어지면 내팽개칠 거야. 한 번 망가뜨렸는데, 두 번 못 망가뜨려? 한 번 버렸는데, 두 번- 못 버려.”
말을 하던 희완이 주춤 뒤로 물러서다 제가 붙잡고 있는 우진의 손목을 멀리 내려다본다.
“변하지 않아.”
망령처럼 되살아나는 기억들을 떨쳐내듯 말을 뱉어보아도 한번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들은 끝이 없었다.
등을 떠밀고 망망대해로 혼자만 밀어내던 손짓들,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달아나도 발끝에 채이던 절곡의 아우성들.
“절대 변하지 않아.”
시선을 드는 희완의 창백한 뺨으로 서늘한 바람이 스쳤다.
간신히 건져 올린 무언가가 쿵. 내려앉는 기분에 이미 말을 잃은 우진을 응시하던 희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돌아가도, 변하는 건 없어.”
우진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로 희완에게 되돌아와 헐겁게 메어져 얇게 뒤덮인 곳을 관통하여 박힌다.
다시 고개를 젓는다.
“내일, 모레, 한 달, 두 달, 반 년, 일 년, 그리고 또 일 년. 상관없어. 거기보단 여기가 더 나아.”
“…….”
“가지 마.”
짐승도 아닌 고깃덩이 취급당하며, 그렇게 넝마주이가 되어 놓고.
“거길 또 어떻게 가.”
붙잡은 손을 당겨 쥐는 희완의 검은 눈으로 헛헛한 바람이 스친다.
기댈 곳 없이는 제대로 서지 못하는 모양새다. 아무리 의지를 똑바로 세워도 무너지는 건 타인에 의해서다. 목줄을 쥔 누군가의 악의는 이처럼 쉽게, 발을 딛고 선 바닥을 지축부터 휩쓸고 가버린다. 영원할 것 같던 호의가 악의로 바뀌는 건 순간이고, 그것이 영원하다. 희완은 장담할 수 없었다. 끊임없이 휘둘려질 수밖에 없는 처지가 새삼 가슴에 맺힌다. 이제와 벗어던질 수도 없다.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었다. 우진에게도 그런 것들이 있을 터였다. 그래서 이렇게나마 만신창이가 된 몸을 세우고 있는 것이리라. 거기로 가는 것은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이나 진배없다. 충분하다. 망가진 것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더 그럴 이유가,
“나는, 형이 가도 그 남자 곁에 있을 거고, 형이 가지 않아도 그 남자 곁에 있을 거야.”
당긴 팔에 딸려오는 어깨에 뺨을 대는 희완이 붉은 꽃잎을 내려다본다.
“듣고 있어?”
“…….”
“형 일을 알기 전에도 나는 그 남자와 잠을 잤어.”
발밑에 깔린 구겨진 꽃가지 따위들을 애써 밀어내며 우진을 다시 들여다본다.
“상관없어. 형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야.”
그러니 무엇을 위해, 원하지 않는 길로는 더 가지 말라는 희완을 말없이 응시하던 우진이 허탈하게 웃었다.
누구를 위해서라는 핑계 따윈, 애초 존재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희완과 우진은 달랐으나, 상관없다는 희완의 말엔 우진 역시 동의했다. 누구와도 관계없는 일인 것이다. 이 모든 건.
서로에게 가지는 죄책감과 부채감 따윈 때문에, 불필요한 것이었다.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가볍게 휘파람을 불던 성의준이 열리는 문을 통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켜지는 센서 등 아래서 히죽 웃는다.
개소리다. 위에서 성의준이 쏟아 놓았던 말의 절반 이상이 거짓이었다. 아니, 아홉 가지 거짓에 한 가지 진실을 섞어 신빙성을 더하는 전형적인 사기꾼의 언어였다. 이미 쓰고 버린 쓰레기에 관심을 가질 만큼 인류애가 넘치는 인물이 아니다. 도우진은 철저하게 버려졌고 권 회장은 도우진이라는 일회용을 버린 것조차 잊고 있으리라. 오히려 도우진에게 집착한 것은 권 회장의 여식이었다.
빼돌리는 조건으로 비밀 금고 열쇠를 제시하던 둘째 따님의 그 신경질적인 면상을 떠올리던 성의준이 운전석에 올라타며 시트 깊숙이 몸을 파묻는다.
스폰서라, 스폰서라, 스폰서라.
웃기는 일이다.
실제로 반듯한 입가에 웃음을 거는 성의준의 눈매가 슬쩍 비틀려있다.
어쩔 테냐, 백승도.
이번에도 날 잡아 족칠 테냐. 죽이지도, 멀리 치우지도 못할 놈이 고작 그 따위 협박에 몸 사리고 드러누울 줄 알았더냐. 내 차례는 아직 오지도 않았다. 네 놈에게 내 살점을 발라주며 약속했던 내 허증은 아직 목 한번 축여보지 못한 채다. 말라죽어가는 놈 앞에서 그깟 꽃놀이가 웬 말이냐. 그 꽃놀이도 한 철이라는데 이러는 건 반칙이지.
[성의준 입니까.]
찢어진 가랑이를 부여잡고 눈물콧물을 쏟던 제 머리맡에 삐딱하게 서서 저를 굽어보던 백승도의 비틀린 입가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쓸려가길 반복한다. 살려주면 뭘 줄 테냐. 네 이 싸구려 몸뚱이의 값어치가 얼마나 되느냐. 헐값도 못되는 널, 내가, 살려주어야 할 까닭이 있느냐. 툭- 발치로 제 턱을 치던 백승도의 무심한 음성을 곱씹어 본다.
그 무심함엔 색이 있었다. 온갖 잡놈들한테 골고루 씹히고 짓이겨져 너덜너덜해진 심신으로나마 오기로 살아남았던 성의준은 그간 필연적으로 발달한 감각으로 쏟아지는 백승도의 그 색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살의였고 혐증이었고 증오에 가까운 경멸이었다.
생판 모르는 놈이, 무채색에 그 온갖 것들을 담아 버러지를 굽어 볼 까닭이 없다. 성의준은 본능적으로 눈앞의 이 짐승이 생명줄이라는 걸 깨닫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하이에나 떼를 피해 범의 아가리로 기어들어간 꼴이었지만 그 날카로운 엄니에 제 발로 꿰여서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피와 살을 모두 줄 테니, 나에겐 딱 하나만 달라했다. 그 짐승우리를 벗어난 후 백승도의 약속은 지켜졌지만, 성의준은 여전히 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부족해, 부족해. 내게 약속했잖아, 백승도. 날 굶주리지 않게 해준다고. 내 이 시커먼 아가리에 뭐든 처박아 준다고 약속했으니,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쑥 들어간 듯 검게 그늘진 눈으로 천장과 앞 유리 경계 사이를 응시하던 성의준이 또 히죽 웃는다. 사실 상관없다. 성의준은 그저 매 순간순간이 무료하고 허덕지고 의미 없을 뿐이었다. 개새끼에게 똥구멍을 내주는 것도 나름 견딜 만한 일이다. 그래, 뭐라도 던져야 원하는 걸 건져 올 수 있는 법이었다.
눈을 감으며 어디선가 들었던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성의준의 입가로 배부른 미소가 번진다. 그 시커먼 뱃속에 잔뜩 웅크린 야만이라는 짐승의 아가리를 쩌억 벌려 놓은 건 다름 아닌 백승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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