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머무는 계절 (Just Smile)
내민 물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희완이 눈가를 이지러뜨린다. 그리고 침대에 다시 몸을 누이려는데 커다란 손이 뒷목을 잡고 그대로 고개를 뒤로 젖히게 했다. 입에 대어지는 차갑고 딱딱한 감촉에 절로 벌어지는 입술 새로 시원한 냉수가 흘러들었다. 반 정도 되는 것을 다 비울 때까지 물을 먹여주는 승도가 목울대가 일렁일 때마다 일그러지는 희완의 관자놀이를 내내 문질러주었다.
“얼마나 마셨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진 어떻게 왔습니까.”
“걸어, 택시, 어- 잘 기억이 안 납니다.”
하며 고개를 젓는 희완이 멀거니 남자를 올려본다.
좀 걸으면 술이 깰 것 같아서 걸었는데 오히려 술기운이 올라 중간에 기억이 흐렸다. 택시를 잡아 탄 것도 같고, 누군가 한산한 인도를 터벅터벅 걷는 희완을 끌어다 뒷좌석에 앉힌 것도 같은데, 돈을 지불한 기억이 없다. 그러나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냉수를 먹고도 화끈한 속이 가라앉지 않아 손바닥으로 문지르던 희완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하였다.
그 꼴을 잠자코 지켜보던 승도가 물 컵을 내려놓고 그 뒤를 쫓았다. 채 닫히지 못한 문틈으로 희완이 속을 게워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지경에도 도움을 청하지 않는 희완의 웅크려진 등짝을 쳐다보다 손을 뻗어 협탁 위에 자리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번호를 누르고 신호음이 한 번 가기도 전에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완 몰래 붙여 놓은 보안업체 직원이 즉시 전화를 받아 자초지종을 털어 놨다.
길에서 헤매고 있는 걸 많이 취한 것 같아 일단 데려다 놓기는 했는데 너무 이른 시간이라 보고는 못했다는 말에 흘긋 시간을 확인한다. 새벽 다섯 시가 조금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희완에게 직접 모습을 드러낸 걸 마음에 걸려하는 직원에게 되었다며 통화를 마친 승도가 더 들려오는 소리가 없자 열린 문을 활짝 밀어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막 변기 물을 내리고 입을 헹구고 있는 희완의 굽어진 등이 눈에 보였다. 한차례 속을 게우고 나니 좀 편해진 건지 한결 멀끔해진 얼굴로 욕실을 나서는 희완의 눈이 그나마 선명해져 있었다.
“정신이 듭니까.”
“……네.”
물에 젖은 뺨을 닦아내며 그렇다고 답은 하는데 까만 눈동자는 여전히 흐리게 충혈 되어 있었다.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내는 희완이 문득 시선을 내려 승도의 손목을 쳐다보았다. 좋다고 발목을 꽉 붙잡은 희완의 손을 떼어 놓고 위쪽으로 끌어올리니 다음엔 승도의 손목을 꽉 붙잡고 놓질 않았었다. 속이 불편해보여 재우더라도 일단 물이라도 먹여 놓고 재울 생각으로 몸을 일으키니 그 손을 붙잡고 놓질 않아서 부엌까지 같이 왕복을 했다. 우두커니 서서 내민 컵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침대에 앉혀 놓고 물이 먹이려 하면 자꾸 드러누우려는 통에 몇 번을 실패하고 나서야 겨우 물 컵을 비울 수 있게 했다.
욕실 앞에 서서 멀끄러미 승도의 손목을 내려다보고 있던 희완이 다시 고개를 젖혔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올라서 있는 승도의 눈을 한참 응시하는 눈이 습하게 젖어 있었다. 머릿속을 꽉 억누르고 있는 듯하던 압력이 서서히 개이며 술기운이 가시는 듯도 했다. 아니, 확실히 사리분별 할 정도는 되었다. 술주정을 했다는 자각이었다. 그래서 손바닥으로 이마께를 문지르며 멋쩍게 시선을 떨어뜨리던 희완이 차게 늘어뜨렸던 손을 더듬더듬 내밀어 승도의 팔을 붙잡았다.
머뭇거리던 것과는 달리 잡고 싶었던 게 손 안에 들자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을 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손에 힘을 준다. 미세한 근육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는 팔뚝을 손끝에 새겨 넣기라도 하듯 오래도록 어루만지다 주륵 미끄러뜨려 관절이 도드라지는 손목을 감싸 쥐었다. 손 안에 충분히 차는 손목 아래 역시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럽게 문지르다 천천히 손을 미끄러뜨려 이번엔 그의 손을 마주 잡는다. 마디가 굵고 굳은살이 많이 박혀 딱딱한 손은 박력 있는 그의 외모와 무척 어울리는 듯도 했고 그렇지 않은 듯도 했다. 깍지를 끼니 겹쳐지는 손가락 마디가 욱신거릴 정도로 승도의 손은 억세고 단단했다. 생각해보지 않은 것들이었다. 남자 역시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왔겠지만 희완에겐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물끄러미 제 손 안에 잡힌 승도의 손을 들여다보며 매만지던 희완이 시선을 들었다.
가볍게 밀쳐지는 등으로 딱딱한 벽이 부딪쳐왔다. 가슴을 가만 누르고 있는 손바닥이 넓게 펼쳐지며 희완의 심장을 움켜쥐기라도 할 듯, 도드라지는 뼈대를 발라내듯, 천천히 어루만져온다. 위협적이기보다는 아슬아슬하고 진한 욕망이 희석되어 차라리 애틋하다 할 수 있는 눅진한 손길이었다.
눈을 마주한다. 묵묵한 시선은 희완을 흔들림 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관찰하는 것도, 다그치는 것도, 강제하는 것도 아닌, 그저 시선 그대로의 시선이었다. 그것을 한참 말없이 올려보던 희완이 먼저 다가갔다. 짙은 어둠에 속해 있는 남자의 턱 부근에 입을 맞추고 지긋이 남자를 응시한다. 검은 눈이 저 깊은 곳에선 한참도 전부터 조용히 들끓고 있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그것은 육신에 관한 욕망이기도 했고 모든 것에 관한 열망이기도 했다. 이윽고 조심스럽게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붙여본다. 사포처럼 거칠 것 같은 남자의 입술은 부드러웠고 건조된 철강처럼 싸늘할 것 같은 입술은 또 따뜻했다. 매번 겹쳐왔던 감촉의 새삼스러움에 희완은 무심결에 감았던 눈을 뜨며 남자를 살펴보았다.
다른 손이 어느새 긴장으로 굳은 희완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식은 몸에 온기를 지펴준다. 제 가슴을 누르고 있는 남자의 손등에 제 손을 겹치는 희완이 그 손을 떼어내어 가만 입술을 붙였다. 빳빳한 손바닥을 스쳐 손목과 손등에도 입술을 붙이고 팔을 뻗어 남자의 목을 감싸 안는다.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눈이 마주쳤다. 말이 없는 남자의 눈길을, 희완은 역시 다 읽어내지 못했다. 확신은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저 원하고 있고,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동의를 구해 함께 하길 바라고 있다. 그의 제안은, 강요보다 지독한 구석이 있었다. 긴 밤 몸을 섞으며 희완의 마음을 완전히 가지지 못했음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도 힐난하지 않고 강제하지 않는 남자의 뜨거운 시선에 불현듯 심장 한켠이 울컥한다.
“내가, 좋습니까.”
“…….”
“나를,”
말을 멈춘 희완이 견딜 수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으며 문득 가쁘게 차오른 숨을 느리게 토해내었다. 부질없는 말이었다. 말이라는 것은, 뱉어놓고 나면 부질없이 흩어지는 연기와도 같았고, 이 안에 든 것은 단 몇 마디 말로 형용할 수 없이 무겁고 온통 불확실한 것들뿐이었다. 그 속에 든 것 역시 다르지 않으리라. 캄캄한 어둠속을 둥둥 떠다니는 듯 암담하고 망연한 심정으로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던 희완이 고개를 들었다. 목덜미를 감싸 안은 남자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와 눈가를 어루만지며 시선을 마주하게 한다. 지척에 있던 메마른 입술이 무방비 상태로 뜨였던 희완의 눈두덩을 꾸욱 눌러왔다.
“좋습니다.”
“…….”
나직이 귓가를 울리는 묵직한 음성에 느리게 반응하는 희완의 눈동자가 파리하게 젖어 있다.
“비할 데 없이,”
눈 밑을 훔치고, 콧잔등을 훔치는 남자가 그 젖은 눈을 묵연히 들여다본다.
“좋습니다.”
태어나서 이처럼 간절히 원하던 것이 없었다. 무엇도 소유하지 않겠다 했고, 무엇도 욕심내지 않겠다 했다. 누이의 주검이 남긴 건 그만큼의 구멍과 허기였으며, 죽어서도 메우지 못할 그것을 다시 채우지 않겠다 했다. 그것이 죽은 누이와 부모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공양이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승도에겐 속죄였다. 그 길에 즐거움은 사치고, 그 즐거움을 나눌 일상 역시 호사였다. 다시는 무엇을 갖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다 여겼다. 지켜야 할 것과 지키고 싶은 것, 무엇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승도에겐 갖지 않는 것이 유일하게 허락된 것이었다.
스물의 너를 곁에 두고 싶었고, 스물다섯의 너를 망가뜨리고 싶었고, 스물여섯의 너를 가득 끌어안고 싶다. 나의 부정과 나의 방황은 너의 스물과 너의 청춘을 모조리 으스러뜨리는데 적극적으로 일조하였으나 염치없는 나의 욕구는 간절히 너를 원하고 있다. 후회한다. 빛에 걸린 나비였던 너를 날개가 뜯어지더라도 움켜쥐었어야 했다. 후회한다. 육시가 되어 바닥을 기던 너를 말려죽더라도 완전히 건져 올렸어야 했다. 후회한다. 너를 인정하지 않던, 지난날의 나를, 그리하여 너의 절망과 너의 절규를 외면하여 너를 한정 없이 찢어발기던 것들에 묵인하고 동조하였던 나를 후회한다.
문대면 문대는 대로 일그러질 듯한 희완의 뺨을 묵묵히 어루만지는 승도의 뺨으로 얼음장 같은 손이 닿았다. 아무리 문지르고 주물러도 쉽게 열을 내지 않는 그 손은 스무 살 이후의 연희완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누군가 꺼뜨린 불길은 좀처럼 쉽게 타오르질 못하며 꺼질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불씨만 맺은 채로 잔뜩 웅크려 있었다. 훅 불면 날아갈 듯도 하고 훅 불면 쉬이 꺼질 듯도 한 그것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희미한 빛을 비치고 있었다.
승도는 그 불씨마저 밟아 꺼뜨리려 했었다. 어차피 꺼뜨려질 것, 제 손으로 꺼뜨려 문대 없애려 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아니라도 어차피 짓밟혀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을린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굳은 손에 선명히 남은 검은 자국을 발견했을 때, 승도는 죽은 누이의 빈껍데기를 보았다.
반복되는 과오에 어리석은 짐승은 겨우 건진 것을 또 다시 저 밖으로 내던지고 있었다. 너를 위해 그러했다는 비겁한 변명은 구차하고 옹색했다. 지켜내지 못할까 겁을 내었다. 나라는 놈의 곁에서 결국 너를 상처 입힐 수 있는 건 나라는 짐승이기에, 제 혈육조차 무참히 내버린 냉혈한에게 너라는 불씨는 그저 하찮은 것이어서. 무시하고 흠집 내고 으스러뜨리다 못해 너에게 책임을 지우며 등을 떠밀어 내버렸다.
와들와들 떨며 비에 젖어 웅크려 있던 너를 품에 안고도 마음 아프지 않았다. 혼자서는 제대로 서지 못하는 너를 외려 기꺼워했다. 짐승의 마음이다. 교활하고 무자비한 악인의 마음이다. 이 파렴치한에게 고맙다며, 미안하다며, 머리를 조아리고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너의 무너져가는 귀퉁이를 기꺼이 받아 목구멍으로 삼켰다. 저 깊은 허방으로 떨어지는 그것은 부서지지도 흩어지지도 않은 채 그 안에 석상처럼 굳어 있다. 내 속의 황량한 모래바람과 매서운 삭풍에도 좀처럼 부식되지 않는 그것은 오롯이 너였다. 그것은 너였다.
얼굴 곳곳을 어루만지던 손이 머리칼을 파고들며 엉거주춤 맞댄 몸을 더욱 가까이 당겨 안는다. 빈틈없이 맞닿은 가슴에서 미지근한 열기와 뛰는 심장의 맥박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제 시선을 따라 조용히 눈길을 옮기는 희완의 긴 속눈썹에 다시금 입을 맞춘다.
이것으로 되겠습니까. 정녕, 이것으로.
흰 뺨을 미끄러뜨려 간신히 입술을 묻는 승도의 등과 허리로 희완의 팔이 꽉 감겨들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그것.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겨우겨우 붙들고 있던 그것. 이것이라면, 그 한 조각을 기꺼이 내어주겠다는 희완을 끌어안고 승도는 가까스로 붙인 입으로 계속해서 뜨거운 숨을 불어 넣었다.
좋습니다. 나는, 연희완이, 좋습니다. 처음부터 원하지 않았던 적이 없고, 단 한순간도 연희완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알량한 이것만으로도 나에게 그 한 조각마저 기꺼이 내어주겠다면 백번이고 천번이고 말하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좋습니다.”
비록 꺼내어지는 즉시 흩어지고 닿는 즉시 증발해버리는 부질없는 것이라도, 네가 원하는 것이 이것이라면, 결코 흩어지고 증발하지 않는 것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끊임없이 속삭이지 못할 까닭이 없다. 오히려 이런 네가, 빈한한 너의 바람이, 나의 회한에 찬바람을 들이치게 한다.
“좋아하고, 있습니다.”
스산한 고백이었다. 귓가에 내려앉고 심상에 스며들어 형체도 없이 녹아들어가는 그것은 남자의 온기만큼이나 빈한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족하다는 생각에 희완은 그를 껴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어 그를 당겨 안았다. 더 어찌할 수도 없을 만큼 그를 가득 끌어안았다. 맞닿은 입술로 뜨거운 숨결을 담은 살덩이가 밀려들며 텅 빈 입안을 가득 메운다. 아득하게 미혹을 이끌어내며 서서히 떨어져나간다. 희완이 응했다.
“좋습니다.”
이젠 정말 모든 것이,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좋습니다.”
가까이 맞닿은 입술에서 토해지는 숨결이 섞이며 붉은 살갗을 가르고 나오는 살덩이가 섞이고 본디 한 몸인 것처럼 맞붙는다. 이지러지는 희완의 눈가로 승도의 검은 그늘이 가득 드리워졌다. 빛은 한 줌이었다.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열린 커튼을 통해 밝게 비쳐드는 빛살을 받고 있던 희완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눈가를 비볐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 아래쪽은 새벽녘 쏟아 놓은 점액질로 끈적끈적하였으나 나른한 몸을 좀처럼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잠이 덜 깨기도 해서 정신이 들 때까지 좀 더 앉아 있기로 한 희완이 문득 왼쪽 어깨를 움츠리며 반쯤 감았던 눈을 도로 떠내었다.
“그만 일어납시다.”
왼쪽 어깨에 가볍게 입을 맞춘 승도가 물 컵을 입에 대어 주며 현재 시간을 알려주었다.
오후 한 시가 넘어가는 시간. 촬영도 무사히 마쳤고 극단도 오늘은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긴 하였지만 희완은 저녁 연습에라도 참석할 생각이었다. 학정이 주말은 내내 쉬어도 좋다고 했어도 늦어진 촬영에 집중하느라 일주일이 넘게 극단에 가지 못하고 있었다. 성희와 석주경, 철민, 그리고 도연과 은성들이 보고 싶기도 해 대학로를 가로질러 극단에 얼굴을 비추려던 계획을 맞추려면 지금 준비해야 얼추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승도가 먹여주는 물을 바닥까지 비워내자 다가온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내어준 희완이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밀어 올리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잠을 좀 더 빨리 깨기 위해 그런 것이었는데 숙취로 오해한 승도가 눈살을 찌푸리며 제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러준다.
“원래 이렇게 술꾼입니까.”
“…그 판이 좀, 술판입니다.”
아니라고는 않는 희완이 멍하니 승도를 올려보다 어쩐지 목이 마르는 느낌에 목울대를 쓸어내리며 슬쩍 시선을 내렸다. 조금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편한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승도의 목덜미에 선명히 남은 붉은 울혈을 발견하곤 뒤늦게 귓불을 붉힌다. 승도와 몸을 섞을 때면 항상 제정신이 아니기는 했지만 새벽녘에는 끝까지 가지 않았음에도 극도로 흥분해 입에 닿는 그의 몸 곳곳을 물고 빨고 난리도 아니었다.
제대로 단련된 몸이라 필사적으로 매달려도 미끄러지기 일쑤였던 그 몸이 그리 쉽게 흔적이 남고 깨물려지는 것인지 처음 알았다. 물론 그만큼 희완도 호되게 주물려져 눈에 보이는 곳곳만 해도 멀쩡한 구석이 없었다. 세게 붙잡혔던 팔뚝은 그의 손자국이 고스란히 남은 채 파랗게 멍이 들었고 목 아래는 그가 남긴 흔적들로 수채화가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촬영을 마쳐 다행이라는 생각이었고 정작 희완 본인이 애가 닳을 정도로 희완을 갈구하던 승도의 모습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싸늘하게 식으려는 가슴을 불쑥불쑥 치고 올라왔다.
“약을 발라야겠습니다.”
무심코 제 몸을 쓸어보던 희완이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음성에 새삼 잇자국이 남은 가슴과 피가 보일 정도로 울혈이 잡힌 옆구리 등을 발견하곤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이라면 혼자라도 할 수 있겠는데 뒤는 말할 것도 없고 밑은 행여 누가 보기라도 할까 겁날 수준이었다. 직접적인 삽입 없이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희완과 격정적으로 일을 치른 승도는 혼자 멀끔한 얼굴로 침대에서 내려서는 희완을 끌어안다시피 부축해왔다. 사정을 여러 번 해 기운이 없긴 했어도 저번처럼 서지도 못할 정도로 시달려진 것 아니라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도 승도는 거리낌이 없었다. 발가벗은 희완의 맨 허리를 가만 문지르며 붉게 드러난 귓불에 입을 맞추는 승도가 욕실 문을 손수 열어주며 마침 생각 난 듯 새로 달여 온 한약을 꾸준히 챙겨먹으라 한마디 던진 후 문을 닫아주었다.
넓은 욕실에 혼자 덜렁 남겨진 희완이 멍하니 서 있다 샤워기를 틀어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머쓱하니 눈가를 문지른다. 단련에 가까운 승도만큼은 아니어도 극단을 다니며 꾸준히 몸 관리를 해왔던 희완이라 이상스레 약해진 몸이 달갑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큰 문제가 없다던 병원 진단이 아니었다면 내심 크게 걱정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긴, 반 년 간의 무자비한 폭력을 겪고서도 멀쩡한 몸이었다. 야매 의사를 대동해 놓고 벌인 일이긴 하였어도 그 끔찍한 시간들을 버틴 게 용하다는 생각이었다. 지쳐 쓰러지면 코 밑에 약을 대어 의식을 깨우고 또 매질을 하고, 가벼운 쇼크가 오면 업자들과 같이 포커를 치던 의사가 너덜너덜한 라텍스 장갑을 끼운 손 가득 희석시킨 승압제를 묻혀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 희완을 강제로 깨웠다. 욕지기가 절로 치밀 정도로 진저리 쳐지는 짓 중에서도 가장 싫은 것이었다.
승도의 손에 주물러지고 입안의 점막으로 세게 빨려지고 굴려지며 나오지 않을 때까지 실컷 쥐어 짜여진 성기를 깨끗이 닦아내는 희완이 몇 번이고 귓속에 듬뿍 퍼부어주던 수많은 말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좋습니까. 좋습니다. 어디가 좋습니까. 여기가 좋습니다. 좋지 않은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습니다. 쌀 때마다 움찔거리며 조여지는 이곳도, 질끈 감기면 발개지는 이곳도, 만져질 때마다 파들파들 떨리는 이곳도, 어디 하나 좋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연희완이 똥통에 빠지더라도 두 손으로 건져 올려 샅샅이 핥아 먹어치울 만큼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막 사정한 귀두에, 이지러진 눈가에, 판판한 아랫배에 차례로 입을 맞춰주며 나직이 속삭이던 승도는 회음부를 더듬어 꽉 다물린 항문을 핥으며 그리 말했었다. 더럽다는 생각보다는 어쩐지 서글프다는 생각에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위로 끌어올려 그대로 입을 맞췄었다.
그도, 저처럼, 정상적인 관계를 맺어본 것이 희박했으리라는 늦은 이해에 넓게 펼친 손바닥으로 몸의 일부인 양 똬리를 틀고 있는 검은 문신을 더듬었다. 우둘투둘 크고 작은 흉터가 수없이 들어차 있는 등을 어루만지다 그의 뺨을 감싸 안았다.
좋습니다. 나 역시, 견딜 수 없이 좋습니다.
작게 속삭이며 혀를 섞었다. 어깨 너머로 동이 터오고 있었고 얇게 빛이 새는 커튼 자락을 아득히 올려보며 승도를 더 끌어안을 수 없이 벅차게 끌어안았다. 내도록 뱃속 깊은 곳을 차지하고 있던 소스라치게 차가운 무엇이 더디게나마 스르륵 녹아가는 것을 느끼며 지척에 닿은 그의 귓가에 입술을 묻었다.
이렇게, 좋습니다.
빠짐없이 약을 바르고 늦은 점심을 하고 나오던 길에 눈이 맞았다. 현관 벽에 밀어 붙여진 채로 헐떡거리다 그의 손에 말간 점액질을 한 번 쏟아내고서야 겨우 문밖을 나설 수 있었다. 같이 문대며 정신없이 사정하느라 쏟아낸 그의 것과 제 것으로 버린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데 그렇게 목 뒤가 화끈할 수가 없었다.
이동하는 버스에 앉아 스쳐 지나가는 거리를 빤히 응시하던 희완이 안내음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벨을 눌렀다. 아직 안 오셨다는 석주의 답에 알았다며 통화를 마친 희완은 여러 번 전화를 받지 않는 학정의 아파트로 향했다.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바로 보이는 오래 된 아파트의 낡은 외관을 멀리 올려다보던 희완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평소에도 전화를 잘 받지 않는 학정은 요즘 들어 드물게 희완의 전화를 잘 받기도 했으나 어떤 때는 아주 핸드폰을 꺼놓기도 했었다. 오늘도 그러는가 하여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지만 아직 나오기 전이라니 아파트에 들러 우진의 얼굴도 보고 오랜만에 학정과 함께 극단으로 출근하는 것도 좋겠다 했다.
좁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모퉁이를 빙 돌아 긴 복도를 걸어가던 희완이 난간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에 흘긋 시선을 돌렸다. 밑이 까마득하지는 않았으나 12층은 간담이 서늘해지기에 충분한 높이였다. 그래도 고소공포증과는 영 거리가 먼 학정은 베란다가 만원일 때면 복도에 나와 옆집 아저씨와 한담을 나누며 사이좋게 담배를 나눠 피기도 했었다.
전체 한 동뿐인 아파트는 독신자 건물이었고 입주자 대부분이 공연 예술계 종사자로 대단한 골초들이라 흡연에 대한 제제가 크게 없어 가능한 일탈이었다. 물론 그러다 아파트 경비에게 들키면 혼쭐이 나 백배 사죄를 하며 박카스 한 박스를 뇌물로 바치는 것도 예사였다. 오늘은 그런 일탈자 대신 복도 난간을 차지하고 있는 이불 빨래가 불어오는 바람에 가볍게 펄럭이며 한가로운 낮을 장식하고 있었다. 난간 너머로 멀리 보이는 복잡한 골목길과 판이하게 다른 넓은 대로변을 한 눈에 담아내던 희완이 마지막 문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익숙한 번호를 찍어 누르고 도어락을 해제하니 쉽게 문고리가 돌아갔다. 등 뒤로 문을 닫고 현관으로 들어서던 희완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집이 엉망이었다. 물론 청소에 전혀 소질이 없는 학정의 집은 평소에도 결코 정돈되어 있달 수 없었지만 우진이 온 뒤로는 그나마 돼지소굴은 면한 상태였다. 그런 집이 엉망으로 헤집어져 있었다. 뒤로 넘어간 소파 뒤로 깨진 화분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고 곳곳에 떨어진 액자와 부서진 가구들로 비좁은 거실을 발을 디딜 구석이 없었다.
놀란 얼굴로도 선뜻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차분히 안쪽을 살펴보던 희완이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마침 주방에서 나오던 학정이 잔뜩 흐트러진 몰골로 희완을 발견하곤 인상을 썼다.
“먼저 가 있어라.”
“…싫습니다.”
뒤집어진 소파를 똑바로 세우고 겨우 그곳에 엉덩이를 걸친 학정이 못마땅한 얼굴로 희완을 쳐다본다. 여기저기 긁히고 뜯겨 멍울이 맺힌 학정의 턱 끝과 뺨을 살피던 희완 역시 좋은 얼굴은 못되었다.
“우진 선배가,”
“가끔 이럴 때 있다.”
충동을 이기지 못할 때,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약물 중독에 한계까지 몰려 제정신이 아니게 될 때, 그래서 이리 말짱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난리칠 때면, 이렇게 엉망이라 하였다.
“그래도 오래 가지 않는다. 그 놈도 정신 들면 어쩔 줄 몰라 해. 이게 제정신으로 한 짓은 아니니.”
“……압니다.”
희완의 누이와 매형 역시 종종 이 같은 증상을 보이곤 했었다. 한 번은 부러진 나무젓가락을 희완의 목에 들이밀며 죽여 버리겠다고 날뛰던 성환이 때마침 볼일을 보고 돌아오던 업자들에게 끌려가 흠씬 두들겨 맞은 적도 있었다. 마약 운반을 하며 서서히 녹아든 약물로 심각한 중독 증세에 시달리던 즈음이었다. 그래도 가족이었다. 누이의 남편이었고 조카의 아비였다. 피 하나 섞이지 않은 남이었지만 그래도 가족이었다. 그러나 학정은,
“얼굴이 엉망입니다.”
“어, 그래.”
건성으로 답하며 대충 피가 맺힌 턱을 쓸어 닦는 학정이 눈살을 찌푸린다.
“형.”
“…….”
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약간량 지친 표정으로 깨진 티브이 브라운관을 응시하던 학정이 희완을 돌아보았다.
“잘못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 비싼 호칭으로 이리 사람을 겁주나 했더니 고작 들려오는 소리에 싱겁게 웃는 학정이 거칠거칠한 손으로 희완의 머리칼을 가볍게 흩뜨렸다.
“잘못했어요.”
“그래, 알았다.”
그러니 되었다는 말이다. 애초 듣지 않아도 될 말이었고 이미 들었으니 또 괜찮은 말이었다.
제대로 살지 못해서, 가슴 아프게 돌아서고도 잘 살아주지 못해서, 그래놓고선 만신창이로 돌아와 또 다시 박힌 못에 망치질을 하는 녀석들이 미울 리가 없다. 애초 학정이 제대로 버팀목이 되어 주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그냥 살고 싶다더라.”
반쯤 열려 있는 안방 문틈을 쳐다보며 헝클어진 머리칼을 대충 뭉개 넘기는 학정이 검게 그늘진 눈으로 다시 말했다.
“멋지게도, 폼 나게도, 특출나게도 아니라, 그저 하루만이라도 예전으로 돌아가 그리 살고 싶다더라.”
약에 취한 미친놈처럼, 섹스에 취한 미친놈처럼, 사지가 너덜너덜한 걸레처럼, 심신이 구정물 투성이인 헌물처럼, 그리 망가진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 하루만이라도, 예전의 그 거리를 걸어보는 것이 유일한 바람이라며 매달려 흐느끼던 우진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가만히 끌어안아주는 것뿐이었다.
“희완아.”
“네.”
“희완아.”
“…네.”
학정의 부름에 그 곁에 가 앉은 희완이 핏물이 엉겨있는 학정의 맨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돌아와 줘서 고맙다.”
난장이 되어버린 거실을 오가며 우진을 달래고 꾸짖고 같이 우짖었을 학정의 모습이 선하였다.
“이런 놈도 기댈 데라고, 딴 데 가지 않고 돌아와,”
맨 정신으로 깨어 제가 만들어 놓은 아수라장과 불길이 흩어진 학정의 눈을 마주하며 형언할 수 없는 괴로움에 심장을 움켜쥐었을 우진의 모습이 선하였다.
“곁에 있어줘서, 잘 살아줘서, 정말 고맙다.”
흩어지는 말은 바람과도 같았다. 백번이고 천번이고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면 언제고 이루어지고 마는, 깊은 바람과도 같았다. 학정의 흙발에 거미줄처럼 엉겨 붙은 핏물을 잠자코 내려다보던 희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살게요. 다시는, 어리석게, 흔들리지 않고, 더 헤매지 않고, 잘 살게. 형, 다시는, 가지 않을게. 그렇게, 엉망으로. 잘못했어, 잘못했어, 잘못했어. 목이 메어 아무런 말도 토해놓지 못하는 희완의 뒷목으로 따뜻한 온기가 덮어졌다. 한참을 그렇게 쓰다듬어 주었다.
학정을 도와 청소를 말끔하게 해치우니 오후 다섯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지쳐 쓰러지다시피 잠든 우진은 그때까지도 눈을 뜨지 않고 있어 학정과 대충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때운 희완이 빈 그릇을 밖에 내놓는 동안 욕실에 들어간 학정 대신 희완을 반긴 건 핸드폰 벨소리였다.
“어, 석주야.”
-형, 왜 여태 안 오세요!
“아직 연습 전이잖아.”
-저녁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죠! 저희 지금 다이어트 중이라 군것질도 못하고 쫄쫄 굶다 겨우 밥 때 기다리고 있는데, 형 이러시는 건 배신이에요, 배신!
“어, 그 배신 한 번만 더 때리자. 좀 전에 단장님이랑 저녁 먹었어.”
-으아아아악!!!!!
수화기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다소 과장 섞인 절규에 잠시 핸드폰을 멀찌감치 떨어뜨린 희완이 보나마나 찬물로 대충 몸을 헹구고 있을 학정을 대신해 보일러를 올리고 안방 문을 슬쩍 열어보았다.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는 우진의 그늘진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는 동안 절규를 마친 석주의 우는 소리에 다시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 안방 문을 도로 닫고 돌아서는 길에 발치에 걸리는 것을 주워든다. 화분에서 튕겨져 나온 자갈 조각이었다.
-형, 그럼 언제 오시는 거예요?
“오늘 쉬고, 단장님은 연습 전까지 가실 거야.”
-형, 오신다고 하셨잖아요!
“응, 내일 갈게. 그만 끊자, 밥 챙겨 먹고. 삐쩍 마른 주제에 무슨 다이어트야, 기아 콘테스트 나가나.
-비슷해요, 피팅 알바 들어왔는데 무대까지 서주면 세 배로 준다잖아요. 그런데 3키로 초과라 짐 단식은 못하고 식이 조절 중이에요. 철민이도 완전 눈에 독기가, 진짜 장난 아니라니까요?
“그러다 연습 중에 쓰러지면 필영 선배 사자후는 어떻게 감당하려고.”
-요즘엔 덜하세요. 하하하.
자갈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석주와 통화를 마치니 욕실을 문을 여는 학정이 보일러 켰냐고 묻는다.
“네, 좀 전에요.”
“됐다, 꺼라. 다 씻었어.”
“네.”
왔던 길을 되돌아 보일러를 내린 희완이 군데군데 찢어지고 뜯겨져 있는 소파에 겨우 엉덩이를 붙이며 탁자에 포개져 있던 극본 하나를 꺼내들었다. 돌아오는 주부터 연습에 돌입한다던 ‘술 취한 다락’이었다. 명성 단장인 장오가 쓴 극으로 재작년 공모전 대상작이었다. 멀쩡한 인간이 다락만 들어갔다 나오면 인간 말종이 되어 나온다는 것이 골자로 현 세태를 풍자화 한 희극이었다. 극단 내 오디션으로만 치러져 배역을 정하고 남는 배역이 학정에도 돌아오는 것인데 소극장용 극임에도 등장인물이 워낙 많아 가능한 경우였다.
읽었던 것을 또 줄줄이 읽어 내려가는 동안 몸을 닦고 나온 학정이 대충 외출복을 입으며 희완의 머리칼을 가볍게 흩뜨렸다.
“다녀오마.”
“네, 내일부터는 저도 열심히 다닐게요.”
“그래.”
다락 극본은 이미 죄 외웠는지 극본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운동화를 구겨 신은 학정이 현관을 나섰다. 그를 배웅하고 돌아서 무심코 벽시계를 올려보니 저녁 여섯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일곱시에 시작인 연습은 일러도 열한시가 지나야 끝날 터였다. 둘둘 말았던 극본을 옆구리에 낀 희완이 주방으로 향하며 다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전화를 걸었으나 응답이 없어 핸드폰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냉장고를 열어 반찬거리를 가늠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네.”
건너편에서 울림이 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좀 늦을 것 같습니다. 한 시까지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확신하지 못하겠다는 말에 잠시 침묵하던 남자가 알았다며 전화를 끊는다.
나오기 전까지도 딱히 외출할 기색은 아니라 오늘은 쉬는가 하였던 남자의 주변은 기묘한 소란스러움이 무언가에 인위적으로 막힌 느낌이었다. 남자가 하는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희완은 그저 일이 있겠거니 하며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 우진이 일어나면 간단히 끼니 할 거리를 찾아 냉장고에서 꺼내었다. 특별히 요리 솜씨가 좋지 못하니 흔히 만들어 먹는 계란탕에 우진이 좋아하는 버섯볶음을 할 생각이었다. 학정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다행히 냉장고에는 미리 사다 놓은 송이버섯이 야채 칸을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눈을 뜬 우진의 곁에서 깜빡 잠이 들은 모양이다. 인기척이 느껴져 번쩍 눈을 뜨니 활짝 열린 방문을 통해 주방에 우두커니 서 있는 우진의 모습이 보였다. 엎드려 잠든 희완의 발치에 떨어진 담요를 개어 올려놓고 그것을 덮어 주었을 우진에게 다가가니 막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붓던 그가 마실 거냐고 물어왔다.
“유자차 맞습니까?”
“먹으라고 족족 사다놔서 둘 데가 없어.”
그래서 마시는 거라고, 툴툴 거리듯 답하며 머그잔을 새로 꺼내 유자를 큰 술에 세 번을 덜어낸 우진이 남은 물을 마저 가득 부었다.
“버섯이 짜더라.”
“소금을 처음에 너무 많이 뿌려서,”
“다시 간봐서 볶음밥 만들어 놨다.”
“제 것도 있습니까?”
“형 밥 혼자 먹게 하는 싸가지는 또 어디서 배워왔냐.”
“안 배웠습니다. 저 볶음밥 좋아하잖아요.”
“마셔.”
“고맙습니다.”
싱크대에 나란히 엉덩이를 받치고 서서 한참 후후 거리며 사이좋게 차를 마시는 동안 반쯤 열린 베란다 문을 통해서 밖의 소음이 멀리서 밀려 들어왔다. 머그잔을 반쯤 비우고 딸려 나오는 유자껍질을 질겅질겅 씹던 우진이 마침 생각난 듯이 툭 말을 던졌다.
“가는 길에 유자 몇 통 가져가.”
“몇 통이나 됩니까.”
“보는 족족 사다놓는 걸로도 모자라 저번엔 아예 시골에서 한 박스를 들고 왔더라.”
오는 놈마다 한 통 씩 들려 보내도 또 그만큼 사다 놓는 바람에 통 줄지가 않는다며 인상을 쓰는 우진이 남은 걸 죄다 마시고 건더기까지 남김없이 우적우적 씹으며 빈 잔을 헹궜다. 희완도 남은 걸 마저 마시고 잔을 헹궈 널어놓고 식사 준비를 했다. 학정과 먹은 밥이 좀 들 꺼지긴 했으나 볶음밥이 들어갈 정도는 되었다.
같이 마주 앉아 계란탕에 볶음밥을 나눠 식사를 마치고 박살난 티브이 대신 너덜너덜한 극본이나 책 등을 뒤적이며 대사를 읊조리기도 하고 벽 구석에 세워져 있는 기타를 퉁퉁 거리며 노래를 읊조리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중에 12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문이 열리고 귤 한 박스를 사들고 온 학정이 옆구리에는 유자통 대짜를 끼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걸 보자마자 팍 미간을 찌푸리는 우진이 유자통을 받아 서랍 구석에 처박아 두는 대신 비닐봉지에 대여섯 통을 더 챙겨 넣은 걸 희완에게 내밀었다. 그걸 본 학정이 어, 그래 희완이도 몇 통 가져가라. 하며 귤 하나를 까서 우진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 사이 활짝 벌어진 귤 박스에서 실한 거 하나를 꺼낸 우진이 깐 건 희완의 입으로 들어갔다.
“택시 불렀으니까 같이 내려가자.”
“괜찮습니다, 바로 코앞인데요. 피곤하실 텐데 쉬세요. 우진이 형도 자요.”
“잠 귀신 붙은 거 같냐, 할 일 없어 또 잘 것 같긴 하지만.”
틱틱 거리면서도 잘 가라 손을 흔드는 우진이 기어이 앞까지 따라 나가려는 학정을 유난 떤다면서 붙들어 세우고 매정하게 문을 쾅 닫았다. 그걸 본 희완이 가볍게 입술 끝을 올리며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비닐봉지를 든 손이 무거웠고 묵직한 뱃속은 그래도 따뜻했다. 우진이 화장실에 가 있는 사이 남자에게 식사여부를 묻는 문자를 보내니 짧은 답문이 왔었다. 「먹었습니다.」 별 거 아닌 그 말을 괜히 몇 번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어둔 현관을 가로 질러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올라탄 희완이 다시 핸드폰을 꺼내어 그 문자를 찾아 또 들여다보았다.
먹었습니다. 먹었습니까, 하고 물어왔다면 또 몇 마디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을 텐데 마냥 싱거운 문자였다. 이동 중에 입매가 풀어져 있었는지 좋은 일이 있느냐는 기사의 물음에 그냥 그렇다는 대답을 한 희완이 연극하시냐는 질문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동네에 별난 친구들 많죠, 손님도 훤칠하신데 왜 아직 티브이에서 못 봤을까, 아직 초년병이신가? 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연극판에 관한 이야기 등등, 기름밥 먹으며 귀동냥해 들은 지식들을 이것저것 늘어놓는 기사에게 몇 마디 대꾸를 하는 동안 대로변을 가로질러 아파트 단지에 들어선 택시가 곧 멈춰 섰다.
좋은데 사시네, 혹시 내가 모르는 어디 유명 배우님이신가? 하는 물음에 아니라고 답을 한 희완이 삯을 지불하고 내리며 기사에게 유자 한 통을 건네었다. 어이쿠, 좋은 걸 받았다며 싱글거리는 기사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내려서니 찬바람이 휭하니 불었다. 재킷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로비로 곧장 들어선 희완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익숙한 향이 바로 뒤에서 불어왔다.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엘리베이터 상단만 올려보던 희완이 어, 하며 뒤를 돌아보는데 등 뒤에서 불쑥 뻗어 나온 손이 손목에 걸려 있는 비닐봉지를 가만 낚아채었다.
“뭡니까, 이건.”
“유자, 어… 여긴 어떻게,”
의아한 얼굴로 묻는 희완에게 새 담배를 꺼내 보이는 승도가 곧 열리는 문틈으로 희완을 밀어 태우며 뒤따라 올랐다.
“유자 좋아합니까.”
“……아니, 그게.”
특별히 좋아하진 않지만 또 이걸 받아온 경위를 대려면 쓸데없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결국 입을 다문 희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없는 남자는 말이 많은 것도 그리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오늘은 술 안 댔습니까.”
“네.”
“흠.”
별일이라는 투의 반응에 멋쩍게 이마를 문지르며 바뀌는 번호를 올려보던 희완이 제 허리를 둘러지는 팔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귓불에 닿는 감촉에 어깨를 움츠리다 자연히 시선을 드니 입술이 겹쳐졌다. 촉, 츄읍, 쪽. 혀가 얽히고 치열이 훑어지며 입술이 떨어졌다 붙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거주층에 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서도 한참 희완을 탐하던 승도가 입술이 벌게지도록 빨던 걸 겨우 멈추고는 다시 닫히려는 문을 턱 붙잡고 희완을 먼저 내보냈다.
문득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로 울컥 치솟는 열기를 내도록 가라앉히다 아파트 내부로 직결되는 엘리베이터에서 뒤늦게 내려 불투명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거실에 우두커니 서서 등을 보이고 있는 희완의 모습이 한 눈에 들었다. 부스럭거리는 비닐봉지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성큼성큼 다가간 승도가 힘없이 늘어져 있는 팔뚝을 붙잡아 돌려세우니 순순히 따라오는 희완은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왜 그러는가 하여 진득한 눈길로 찬찬히 뜯어보는데 시선을 피하는 희완이 주춤 뒤로 물러서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때 그 까닭을 알아차린 승도가 빤히 그 뺨을 응시했다. 거진 희게 질려 있던 뺨이 당황하여 곧 희미하게 제 귓불처럼 물들어간다. 그걸 한참 음미하듯 훑어보다 희완의 등을 둘러 가슴을 붙여 안는 승도가 그 귓불에 입술을 붙였다. 그리곤 밑으로 뻗은 손바닥을 펼쳐 바지 앞섶을 뜨겁게 덮었다.
“섰습니다.”
“…….”
답이 없는 희완에게서 낭패스런 기색이 읽혀진다. 아랑곳 않고 귓전을 애무하듯 맴돌며 입으로 해줄까, 손으로 해줄까, 묻는 승도에게 아무런 답도 내놓지 못하던 희완이 결국 몸을 뒤로 빼며 달아나듯이 머뭇머뭇 욕실로 향하였다. 뒤쫓지 않고 급하게 닫히는 욕실 문을 느긋하게 쳐다보던 승도가 아직 반이나 더 남은 담뱃갑을 찾아 한 대 꺼내 물며 불을 붙였다. 베란다로 나가 담배 한 대를 깨끗이 태워내고 다시 안으로 들어선 그가 입고 있던 상의를 벗으며 거실을 가로질렀다.
잠기지 않은 욕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욕조에 몸을 담근 희완의 하얀 등이 눈에 들었다. 남은 옷가지를 빠짐없이 벗어던진 승도가 대충 몸을 적시고 이제 겨우 반이 채워진 욕조에 발을 담그니 벽에 바짝 붙어 있던 희완이 앞으로 물러난다. 그 덕에 생긴 공간을 차지하고 들어앉은 승도가 한 팔로 희완을 당겨 안으며 찬물을 뜨거운 것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빨갛게 익은 희완의 귀를 입에 담고 정성들여 빨았다. 찬물로 겨우 고개를 숙였던 희완의 것이 발기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늦어서 죄송합니다. 담엔 이보다는 빨리 오도록 할게요. ^^;
부족한 글에 장문감상 남겨주신, 눙지 님, kitty 님, tjdahr 님, 나기나기 님, Yuimpa 님, 초등학생 님, 오오 님, 꿈꾸는 아이 님, 하눌이 님, 쇼디 님, kakabiave 님, woni 님, 어두운 말 님, 쉼 님, 봄날22 님, 줄리엣 님, 해무 님, windmill 님, 마리 님, 연결 님, 라쿤 님, 赤血空間 님, 시니유 님, 하루하 님, 앙앙 님, 파천0619 님, 내가최고 님, 설리화 님, chatnoir 님, 옥무채란 님, 사자별 님. 그리고 긴 글 놓지 않고 찾아주시는 모든 독자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