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머무는 계절 (Just Smile)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그린의 미간으로 짙은 주름이 그어져 있었다. 옆에서 바삐 파우더를 두드리는 스텝에게 얼굴을 맡긴 채 가만히 서 있던 희완이 흘긋 그린을 돌아보았다. 비슷비슷한 사진이 여러 장 동시에 떠올라 있는 모니터를 유심히 살펴보던 그린이 썩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한 번 더 찍었으면 좋겠는데, 희완 씨 괜찮겠어?”
“네.”
“이것도 나쁘진 않은데 말이야, 옷만 너무 튀니까 이상하잖아. 그럴 거면 그냥 마네킹 가져다 놓고 찍으면 된다구. 분위기가 안 사는데, 전혀 감을 못 잡겠어?”
“…어렵습니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솔직하게 답하는 희완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린이 훅 한숨을 쉬며 목소리를 높여 잠시 끊어가자 했다.
“미스터 연도 좀 쉬어, 난 담배 한 대 피우고 올 테니까.”
머리 좀 식히고 오겠다는 그린이 촬영장을 나서는 길에 눈치도 없이 따라붙는 스텝을 쉭쉭 위협해 뿌리치고는 문 밖을 나선다. 희완이 먼저 고개 숙여 사과를 했고 좀 더 정신 차리고 촬영에 임하겠다고, 부족하지만 열심히 하겠다는 희완에게 무어라 말을 꺼내려던 그린은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로 그새 퍼석퍼석해진 머리칼만 잡아당기고 있었다.
안 그래도 강영희에게 욕을 푸지게 얻어먹은 참이었다. 위약금 폭탄 맞을 작정 아니면 알아서 기라는 반 협박은 드높은 프라이드에 상처를 입히기도 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알았다며 신경질을 부리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 멍한 얼굴에다 대고 사과할 생각을 하니 아침에 촬영장으로 오는 게 곤욕이었는데 희완 쪽에서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 입장 참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 맥 빠지고, 헛웃음만 나오고, 싫은 소리 한마디 못하는 모델은 바보 같기만 해서 어거지가 아니라 이젠 정말 화낼 마음조차 사라져 버린 직후였다.
고 하룻밤 새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겨 이러는지는 몰라도 열심히 한다니 그린으로서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계약서를 흔들며 서늘하게 웃던 강영희의 최후통첩을 받은 뒤로는 그린이야말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저 모델 하나 데리고 이 촬영을 끝마쳐야 했던 것이다. 저런 놈이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 가 짜증스러운 그린이 두 번째 담배를 연달아 피는 동안 희완은 세트장을 돌아보며 동선을 살펴보고 있었다. 잘 모르겠으니 열심히 들여다보기라도 할 셈이었다. 그러는 게 맞았다.
이른 새벽에 몸이 만져지는 느낌에 잠을 자다 설핏 눈을 떴었다. 익숙한 손길은 남자였고 갑자기 동하기라도 하여 그러는가 싶어 동조하려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키는데 희완의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날 것 없다고 가볍게 밀어 다시 눕혔다. 성욕이 동해 그런 게 아니라 차게 식은 제 몸에 열기가 돌도록 주물러 주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는 잠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닷새를 그렇게 정욕을 쏟아 놓고서 남자는 한참 희완을 가만 끌어안아 주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희완은 정확히 정의하지 않아도 닿은 가슴의 온기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었다. 남자가 순간이라도 자제하지 못하면 만신창이가 되는 것은 희완이었다. 처음엔 잘 몰랐었고 점차 몸을 섞는 것에 익숙해져가면서 남자가 자제하는 것을 알아갔다. 닷새 동안 그 자제는 찾을 수 없었다. 희완이 적극 동의하여 벌인 일이긴 했어도 거의 난도질을 해놓은 것과 같이 너덜너덜해진 밑을 보며 한참 말이 없던 남자는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하듯 희완을 끌어안았던 것이다.
그 후유증이 꽤 오래가서 당황한 희완 만큼 남자도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더 자라고 도로 누인 희완이 눈을 감고도 계속해서 찬 몸을 주물러주던 남자의 손등으로 희완의 손바닥이 겹쳐졌었다. 마디가 굵은 손은 항상 희완의 손 밑으로 가득 들어찼다. 이제 된 것 같다고, 그만하고 주무시라고 하니 슬쩍 시계를 들여다보곤 별말 없이 희완의 곁에 누웠다. 그대로 자는 줄 알았는데 반듯하게 누웠던 희완을 끌어다 옆으로 누이고는 등 뒤를 진득하게 문질러주었다. 원래도 이렇게까지 찬 몸은 아니었는데 한동안 꾸준히 먹었던 한약으로 나아지는가 했던 냉증이 다시 도지고 있었다. 그 품에서도 좀처럼 열기가 오르지 않는 몸을 얌전히 맡기며 희완은 어깨너머로 동이 터오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까지 괴로워할 까닭이 없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남자가 주는 것들을 괴로워하며 받을 까닭이 없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쉬운 소릴 하지 않아, 남자에게 말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매서운 감정이 스쳐 지나가던 강영희의 눈을 떠올리곤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 저 하나만 제 몫을 잘 해내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을. 한심하다, 연희완. 속으로 한숨을 쉬다 깜빡 졸았고 남자가 일어서는 기척에 희완도 완전히 날이 밝은 창을 올려보며 눈을 떴었다.
“소품으로 가져다 놓은 건데 소리가 제대로 날지 모르겠네요.”
데면데면한 얼굴로 회벽 구석에 세워져 있던 통기타를 흘겨보며 말하던 스텝이 저쪽에서 부름을 받고 기다렸다는 듯이 희완의 곁을 스쳐 지났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도 않고 드러내는 스텝은 그 뿐만이 아니었으나 희완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더 그러는 줄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희완은 딱히 개선의 여지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문제는 으레 시간에 맡기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한편으로는 기껏해야 아흐레를 남긴 시점에 일일이 타인의 감정에 휘둘릴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쉬는 시간을 틈타 간단히 장비 정리를 하고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러 가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러 가기도 하느라 스텝들이 대거 촬영장을 빠져나가는 바람에 남은 건 희완과 구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두어 명의 남녀 스텝이 전부였다.
퉁퉁, 오랜 만에 기타 줄을 튕겨보는 희완이 먼지까지 쌓인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기타 넥을 가만 쓸어 보았다. 살갗을 누르고 오는 기타 줄의 팽팽함이 낯설던 것도 잠시, 곧 그 투박한 익숙함에 가슴 한구석이 희미하게 녹아내려가는 것을 느낀 희완이 답답할 정도로 꽉 조여 있던 넥타이를 당기며 기타를 낚아 채 안았다. 근처 앰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내친 김에 끝까지 꽉 잠겨있던 셔츠 단추를 두어 개 더 풀어내리니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바디를 끌어안고, 퉁퉁, 가볍게 줄을 튕기고, 줄감개를 조절하며 음을 맞추는 희완의 몸이 절로 느슨해졌다. 값비싼 커프스가 달린 소맷단이 거추장스러워 양 소매를 팔목까지 걷어 올리는 희완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음률을 차분히 되새기며 기타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스텝의 말대로 소품용이었던지 튜닝을 하고도 소리는 뭉툭했지만 아주 못 쓸 정도는 아니어서 희완은 조심스레 연주를 시작했다. 퉁, 퉁, 퉁.
고등학생 때 멋모르고 연극반 선배에게 잘못 배워 안 좋은 습관이란 습관은 죄다 가진 희완에게 제대로 기타를 가르친 게 학정이었다. 어려울 땐 음악학원 기타 강사로도 땜질을 했다던 학정의 연주 실력은 가히 프로급이랄 수 있었다. 이마가 빨갛게 붓도록 툭툭 맞아가며 배운 보람이 있었는지 희완 역시 어느 정도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그 뒤로는 술자리 백뮤직 역할을 도맡아 했다.
파릇파릇하게 싱싱한 애한테 우중충하고 고리타분한 노래만 가르친다며 타박을 멈추지 않던 경성도, 멀끔한 얼굴로 시답잖은 농담을 툭툭 던지며 낄낄거리던 우진도, 밤새 달려 숙취로 엎어져 있던 필영도, 오래된 악보를 손수 챙겨주며 창틀에 앉은 우진의 곁에서 길게 담배연기를 뿜어내던 학정도, 희완이 연주를 시작하면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노랫말을 흥얼거렸었다. 활짝 열어 놓은 연습실의 낡은 창을 통해 사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고운 아침햇살이 가벼운 미풍에 실려 왔었다.
한 곡을 끝내고 또 음률을 떠올리기라도 하는지 낮게 뜬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희완이 퉁 기타 줄을 튕겼다. 드물게 니코틴이 당겨 기타 줄을 놓고 시선을 드니 때마침 누군가 창틀에 올려놓고 간 담뱃갑과 라이터가 눈에 띄었다. 어쩔까 잠시 고민하다 결국 손을 뻗어 담배 한 대를 빼어 문다. 라이터를 켜 불을 붙이고 깊이 숨을 들이쉬니 오랜만에 호흡기를 타고 넘어가는 알싸한 맛에 한웅큼 남았던 긴장마저 저 밑으로 죄다 쓸려갔다. 두어 번 담배를 당겨 빤 후 다시 기타 줄을 잡는 희완이 그러는 중에도 생각하고 있던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자욱한 연기가 깔리듯 기타소리가 깔린다. 학정과 우진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희완에게도 애창곡이 되었고 질린다고 타박을 하면서도 경성과 필영 역시 가사를 죄 외고 있는 노래였다. 가만 듣다보면 산문시 같은 운치가 있다며 술자리에서 학정이 먼저 읊조리기 시작하면 그 위에 희완이 기타소리를 덧입히는 식이었다.
쓸쓸하면서도 사색 짙은 가사와 음률은 인파가 싹 빠져나간 대학로 좁은 골목길 위에 휘영청 걸린 보름달과도 같았고 한편으론 비가 온 다음날이면 줄줄이 빗방울이 맺힌 복잡한 전선줄 너머의 맑은 하늘같기도 했다. 바람 좋은 날, 문지방에 나란히 앉아 햇빛을 쪼이며 누이와 함께 부르던 그 노래가 새삼스레 저 끝으로 젖어든다.
어둠이 개이고 아침이 오며는 눈부신 햇살이 머리를 비추고…,
노랫말을 읊조리던 희완이 문득 시선을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을 죄다 가리고 있던 카메라를 느리게 떨어뜨리는 그린이 빤히 희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뒤로 어수선하게 펼쳐 서서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스텝들에게서 기묘한 열기를 읽어낸 희완이 안고 있던 기타를 내려놓으며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어, 담뱃재가 떨어지는 것을 급히 옮겨 재떨이로 사용한 깡통에 눌러 끈 희완이 의아한 얼굴로 그린을 돌아보는데 푸핫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그에게서 허탈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곤 불쑥 한마디를 던지는데 좀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내가 멍청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정신없이 찍어 넘긴 사진들이 수천 장 넘게 찍힌 카메라 액정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는 또 작게 소리 내어 웃는다. 이렇게 쉬운 것을. 이렇게 단순한 것을.
“미안합니다. 이제 알았으니까 우리 앞으로 정말 잘해 보자구요.”
하며 성큼 다가와 악수를 청하는 그린의 손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희완이 순순히 그 손을 맞잡았다.
“오늘 밤샘하고 싶은데, 괜찮겠어요?”
싱긋 웃으며 묻는 얼굴이 모처럼 해사하고 후련해서 희완은 거절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감각이란 것을 깨우는 게 가장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런데 그게 왜 어려우냐, ‘감각이란 것을 깨우는 작업’ 굉장히 난해하지 않습니까?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 말,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대번에 이해되지 않는 말. 그것은 바로 죽은 언업니다. 연기 또한 같습니다. 연기란, 굉장한 노력과 세심한 연구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지만 연기만큼 단순한 것 또한 없습니다. 보는 이를, 상대방을, 단번에 이해시키는 언어, 또는 몸짓, 그것이 바로 좋은 연기라는 겁니다. 감각을 깨운다, 그것은 너에게 나를 이해시킨다. 너에게 나를 준다. 너에게 나를 보인다. 너에게 나를 드러낸다. 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진심이란 것은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다면, 이 몸뚱이로 표현해내지 않는다면 때때로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연기는 사는 것입니다. 연기는 연애고, 싸움이고, 화풀이고, 사랑이고, 미움이고, 고통이고, 기쁨이고, 벅참입니다. 그것을 다 드러내 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연깁니다. 즉, 연기 또한 사는 것에 불과합니다.」
강연의 마지막에 학생들의 극성에 못 이겨 노래 한 곡을 걸쭉하게 뽑아내는 학정에게 쏟아지는 박수소리를 뒤로 하고 강당을 빠져나온 희완이 로비를 돌아 대기실로 통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복도를 통해서도 끊이지 않는 박수소리가 들려 빙그레 미소를 짓는 희완이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땀으로 흠뻑 젖은 이마를 닦아내며 생수 한 통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는 학정이 보였다.
“단장님.”
“어, 희완이 왔냐.”
하며 화장대에 굴러다니던 찹쌀떡 하나를 휙 던져준 학정이 아무데나 벗어뒀던 재킷을 걸치며 성큼 문밖으로 나섰다. 그 뒤를 쫓는 희완이 포장지를 벗겨 입에 문 찹쌀떡을 우물거리며 학정과 속도를 맞춰 옆에서 같이 걸었다. 후끈 아직 식지 않은 열기가 물씬 풍겨지는 학정이 담배를 꺼내 물고 필터만 씹어대며 로비를 가로질러 흡연구역에 서서야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절루 가라.”
“저도 한 대 주세요.”
웬일인지 군말 없이 담배 한 대를 꺼내 물려주는 학정이 손수 불까지 붙여주며 희완의 입가에 붙은 떡 가루를 툭툭 털어 주었다.
“촬영은?”
“잘 마쳤습니다.”
일정보다 나흘 일찍 마친 촬영은 어제가 마지막이었다. 엿새 동안 급속도로 살가워진 그린과, 손바닥 뒤집듯이 단숨에 호의적으로 바뀐 스텝들과, 마지막이라고 언제 또 보겠냐며 자정을 넘겨 새벽까지 회식을 하는 바람에 희완은 귀가가 늦었었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남자가 주는 냉수를 받아 들며 술김에 어설프게 웃었던 것도 같다. 원래 컨셉은 제대로 소화를 못했지만 어느 순간 방향을 틀어 촬영을 진행한 그린 덕에 눈살 찌푸리지 않을 정도로는 결과물이 나와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통장에 돈 넣은 거 다시 보냈으니까 확인해라.”
“저도 다시 넣을 겁니다.”
“돈 없어서 죽도록 고생한 놈이 뭐 하러 그런 짓을 해.”
“단장님 소개로 간 일 아닙니까.”
어거지에 마땅히 할 말을 못 찾은 학정이 딱 입을 닫고는 애꿎은 담배만 뻑뻑 피워댔다. 마주 서서 감히 맞담배를 피우는 희완은 의외로 학정의 눈치를 살피는 기색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학정이 던져준 일이긴 했지만 그건 실제로 남자가 던져준 일이었다. 그걸 알고 있는 희완도, 학정도, 상대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끝내 입 밖으로 꺼내 말하지는 못했다. 없어서 산 입에 거미줄 치게 하는 돈이란 게 들어오니 계륵이었다. 결국 한숨을 쉬듯 담배꽁초를 눌러 끄는 학정이 못마땅한 얼굴로 역시 꽁초를 버리는 희완을 보다 먼저 뒤돌아서 까마득한 계단을 내려갔다. 그새 따라오는 발소리가 바로 또 지척이었다.
“그 돈 별로 필요 없습니다.”
학정에게 대든 것처럼 느껴졌는지 그새 시무룩해진 음성으로 변명을 해오는 희완에게서 희미한 메탈향이 풍겨졌다. 어디서 맡았던 거더라.
“이젠 빚도 없고, 처음부터 극단 몫으로 생각,”
“순대국밥 먹을 테냐?”
“설렁탕이요.”
규모가 작은 캠퍼스를 빠져나오자마자 바로 눈앞에 보이는 국밥집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학정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수육도 있다. 여기 순댓국하고 설렁탕 한 그릇씩, 그리고 수육 중자로 하나 주시고,”
소주 한 병을 시키는 학정의 앞에 물 컵과 수저를 밀어준 희완이 뒤늦게 맞은편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으며 벽에 걸린 메뉴판을 살폈다.
“먹을만 해.”
“올해만 벌써 다섯 번째 오신 거라던데, 맞습니까.”
“뭐, 그렇게 됐나.”
이제 겨우 4월인데 같은 대학만 벌써 다섯 번째라면 기억할 만도 한데 부러 모른 척이라도 하는 건지 물 컵만 꿀꺽꿀꺽 비우는 학정이 밑반찬으로 먼저 나온 깍두기를 하나 집어넣으며 우걱우걱 씹었다. 앞치마를 두른 아줌마가 내민 소주 한 병을 공손하게 받아 뚜껑을 돌려 깐 희완이 채워주는 잔을 받으며 또 깍두기 하나를 씹던 학정이 눈살을 찌푸린다. 그래, 그 놈이다. 그 놈 냄새다.
“일요일까지 쉬고 월요일부터 강명 선생한테 갔다가 오후에 극단으로 나와. 명성에서 이번에 극 하나 올린다더라.”
“거기도 공모작 출품 안 한답니까?”
“작품 수두룩한데 뭐 하러, 이번에 스폰서 하나 붙었다더라.”
“정말입니까? 잘 됐네요, 무슨 작품입니까?”
“술취한 다락.”
얼마 전 사무실을 굴러다니던 너덜너덜한 극본 제목이 그거였던 것 같다.
“장오 단장님께서,”
“그 놈이 쓰지 그럼.”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었는데요.”
“너 배역 하나 준다더라.”
“무대 안 오른 지 오래 돼서,”
“평생 안 오를 것도 아니잖냐.”
“네.”
“그냥 흥만 봐. 뭐 하나 더 배워오면 좋은 거고, 아니면 또 아닌 대로 좋은 거고.”
“단장님은 남의 집에 모자란 물건 맡기면서 그렇게 태평하십니까.”
학정이 덜어주는 건더기를 꾹꾹 씹어 삼키며 하는 말에 별스런 대꾸도 않는 학정의 잔으로 맑은 술이 채워졌다.
“안 모자란 물건이 있긴 하나.”
물마시듯 소주를 마시는 학정이 생기 없이 희기만 한 희완의 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떻게든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녀석은 정작 고인 물처럼 고요하기만 해서 그 속을 들여다보기가 어떤 때는 답답하도록 캄캄할 때가 있었다.
“어딘가 부러진 것 같냐.”
먹기 좋게 적당히 식은 국물을 후후 불어가며 떠 넣던 희완이 이미 크게 한 술 떠서 우물거리던 쌀밥을 꿀꺽 삼켰다. 반쯤 비운 물 컵을 입가로 가져가 텁텁한 입안을 축이고는 잘 모르겠다는 답을 한다.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예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든 것이 모조리 다 부러진 게 아니라 으스러진 것 같기도 하고, 가끔씩은 아무렇지 않기도 하고, 그래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부러진 건 다시 세울 수 있고, 으스러진 건 다시 모아 주울 수 있다.”
“잘… 안됩니다, 그게.”
“그러는 데 학정과 우진이 놈이 문제가 되는 것 같냐.”
“……제 문젭니다.”
그건 아니라는 희완에게 또 푸짐한 건더기를 옮겨주는 학정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먹자.”
애 먹는데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에 재차 식사를 권하는 학정은 그새 그릇의 반을 비우고 있었다.
집에서 고기 구워 먹기로 했다며 저녁 먹고 가라는 학정의 뒤를 따라 낡고 비좁은 아파트로 들어선 희완을 소파에 앉아 배꼽을 잡고 있던 우진이 반겼다. 바꾼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만인에게 공개되다시피 한 비밀번호 덕에 잠시의 소강상태 후 도로 복작대기 시작했던 학정의 집은 우진이 들어앉은 후에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 돼버리고 말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어도 지긋지긋한 놈들 속이 다 시원하다 하는 학정은 때때로 단원 몇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기도 했었다. 우진도 자연스레 섞여 들었고, 거지꼴이나 다름없는 우진에게 날을 세우고 해묵은 옛이야기를 들먹이기보다는 투박한 농을 던져가며 극단 이야기들로 자리를 메우곤 했었다.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 앉아 한 놈은 개그 프로 보며 낄낄 거리고 다른 한 놈은 주방을 딱 차지하고 서서 제 집 마냥 도구란 도구는 다 꺼내 쓰고 한 놈은 안방 침대에 퍼져 대차게 코를 골고 있었다. 39년 간 정육점 아들이었던 덕분에 칼질에는 일가견이 있는 필영이 부엌에서 고기를 다듬는 동안 미리 술상 차려 놓고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던 우진이 거실에서 굴러다니던 귤 하나를 까서 희완의 입에 물려주곤 안방 문을 뻥 걷어찼다. 거 노친네 일어날 시간 됐다며, 관 짜고 들어가 누우면 평생 잘 잠이 뭐 그리 좋냐고 깐죽거리던 우진이 비몽사몽을 헤매고 있는 경성을 기어이 끌고 나왔다.
“3년 동안 단 한 번도 펑크 낸 적 없이 천이백삼 회나 되는 공연을 혼자 소화해냈다는데, 대물이 따로 없다더라. 왜 학정이 너는 청주 내려가서 한번 봤다고 했었지? 올 봄에 서울에도 올린다더니 5월 초로 날이 잡힌 모양이더라고. 전에 못 보던 인사들이 연습실 찾는다고 뱅뱅 도는 걸 붙들고 물었더니 그 집안사람이더라. 마침 끼니 전이라 소줏집 들어가서 국밥 한 그릇씩 말아 먹으며 말 들어보니 당초 계획으론 올 1월에 상경하려 했는데 제작자 측에서 차일피일 미루더니 한다는 소리가 저작권을 넘겨야만 공연장을 내어준다는 개소리를 한다는 거야. 그래서 노발대발한 그 집구석 들고 일어나서 집어 치우라고 판 엎고 발품 팔아 겨울 내내 공연장 알아봤다는데, 그게 잘 되겠냐고. 이미 소문은 소문대로 들고 나서, 씨발, 남의 밥에 침 질질 흘리는 그 망할 종자가 누군가 했더니, 지 버릇 개 못 준다고, 하준우 그 새끼더라. 어디 가 나자빠졌는지 코빼기도 안 비치는 그 놈 없어지니 술술 풀리는 게 일이라 겨우 공연장 계약하고 부랴부랴 짐 싸들고 올라와 연습실 찾는 중이라고 하는데, 얼굴이 화끈 거려 견딜 수가 있어야지.”
소주를 병째로 나발을 불며 역정을 내는 필영이 씹어 먹을 듯 하준우에게 이를 갈며 하는 소리에 베란다 문을 열어 놓고 그 옆에 붙어 담배를 태우던 우진이 별스럽게 웃지도 않았다.
“거 공모전은 어디서 툭 튀어 나온 거야? 넌 뭐 들은 거 없냐?”
거의 초토화 되다시피 한 술상에서 다 타 말라붙은 고기 한 점을 집어 투둑투둑 씹어 먹는 경성이 요즘 영화판에서 구른다고 노숙자 꼴을 하고 있는 필영에게 묻는다. 호기롭게 연극판에 뛰어 든 제작사라고 생판 처음 들어 보는데다 이 바닥 몇 년을 굴러먹은 놈들도 도통 아는 놈들이 없는 인물들로만 구성된 구석이라 연극판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모양이었다. 어디 또 하이에나 사촌 같은 놈들이 들러붙어 붕어 똥만도 못한 촌놈들 삥이나 뜯으러 들어온 건 아닌가, 절로 드는 의심이 과민한 것도 아니라, 그 좁은 연극판이 들썩들썩 하는 것이었다. 당선 시 부상도 부상이거니와 최소 3년 꾸준히 투자하겠다는 조건은 미워도 다시 한 번, 속아봐야 본전, 밑바닥 정신을 자극하며 가난한 극단 곳곳을 뒤숭숭하게 만드는 것이다.
“제기럴, 그러다 돈 안 된다고 앗 뜨거 하고 도망칠 놈들이야 뻔하지. 꼭 찍어 먹어봐야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이 가나.”
탁 침을 뱉듯 뱉은 필영이 꿀꿀한데 노래나 한 곡이라 걸쭉하게 뽑아 보라며 희완에게 기타를 떡하니 안겨 주었다.
마음속에 핀 아름다운 이 꽃은 밤하늘에 핀 별을 잡은 기분이야
어떤 슬픔도 이 기쁨 이기지 못해 어떤 슬픔도 이 기쁨 이기지 못해,
향그러운 꽃길로 가면 나는 나비가 되어 그대 마음에 날아가 앉으리
아~ 한마디 말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되고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그대 위해 노래 부르리
그대는 아는가 이 마음 주단을 깔아 논 내 마음 사뿐히 밟으며 와주오 그대는 아는가 이 마음,
그대 없는 나날들이 그 얼마나 외로웠나 멀리 있는 그대 생각 이 밤 따라 길어지네
하얀 얼굴 그리울 때 내 마음에 그려보며 우리 다시 만날 날을 손꼽으며 기다렸네
우 우 풍문으로 들었소 그대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그 말을
우 우 풍문으로 들었소 내 마음은 서러워 나는 울고 말았네,
나 비록 도태된 삶이 버린 헌신짝이라도
이 세상살이 속에서 늘 밑진다 하여도
굳게 다문 입술에 품은 배짱 하나로 오늘도 내일도 간다,
연달아 네 곡을 원곡보다 빠른 비트에 맞춰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듯이 열창을 하던 필영과 경성이 낄낄 대며 연주 값으로 희완의 잔에 새로 깐 소주 한 잔을 그득 담아주며 원샷을 주창했다. 그것을 단숨에 털어 넣고 안주를 받아먹는 동안 소리가 나간 기타 줄을 조이는데 필영이 먼저 노래 한 가락을 걸쭉하게 뽑아내기 시작했다. 돼지 멱따는 소리가 따로 없다며 삿대질을 하면서도 운치가 도는지 술기운이 오른 얼굴로 그 굵직한 노랫가락을 가만히 듣던 경성도 이내 입을 열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위로 기타소리가 덧입혀지고, 툭툭, 추임새가 곁들여졌다.
바람결에 부딪히는 사랑의 추억 두 눈에 맺혀지는 눈물이여
이제와 생각하면 당신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찾아와
사랑했어요 그땐 몰랐지만 이 마음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했어요
돌아서 눈감으면 잊을까 정든 님 떠나가면 어이해,
언젠가 모두 헤어질 텐데 나에게 조금 더 빨리 온 거고
이런 생각 달래보지만 마음 가눌 길이 없네,
야윈 어깨 너머로 웃음소리 들려 돌아다보니
아무도 없고 차가운 바람만 얼굴을 부딛고 밤이슬 두 눈 적시네,
툭, 툭, 툭, 툭.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가고 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 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 거야,
학정에 우진에 희완까지 한 목소리로 고성방가를 하고서야 긴 노랫가락이 끝을 맺었다.
불 꺼진 좁은 거실 한 가운데 우두커니 앉아 무겁게 감은 눈을 천천히 밀어 올리는 희완이 차가운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새벽녘까지 이어진 술자리는 네 시가 넘어가서야 완전히 파장이 났고 토끼들 껴안고 친정집 나들이 갔다는 마누라 덕에 간만에 외박한다던 경성은 필영과 함께 소파 밑에서 사이좋게 구겨져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고 있었다. 아무리 취해도 맨 바닥에서는 잠을 안자는 우진은 방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학정은 소파에 팔짱을 끼고 앉아 깊이 잠들어 있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든 사이 누가 덮어줬는지 허리 맡에 고여 있는 담요를 멍하니 내려다보던 희완이 그것을 움켜쥐고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이 센 편이라 웬만해선 잘 취하지 않는데 요 근래 몸이 안 좋기도 했고, 이틀 연달아 술자리를 갖기도 했고, 많이 마시기도 해서 평소 주량보다 못 미쳤는데도 잠깐 필름이 끊긴 부분이 있었다. 들고 있던 담요를 나란히 엎어져 있는 경성과 필영에게 덮어주고 하나를 더 꺼내와 학정에게도 덮어준 희완이 물끄러미 잠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술자리의 끝은 으레 그렇듯이 극단이나 연극판, 그리고 앞으로의 행보, 계획, 등등 결론이 나지 않는 이야기들로 흘러가며 무겁게 가라앉았다.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창작극을 찬밥 취급하는 투자자들의 행태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경성의 목소리를 끝으로 기억이 없었다. 돈 많으면 이 고생도 안 하지. 너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너 이 자식, 너도 그렇고. 하며 곁에 앉은 학정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 거칠한 뺨을 툭툭 치던 경성의 시뻘건 얼굴을 떠올렸다.
20여 년간 단 한 번도 학정을 떠나지 않고 그 곁을 지킨 건 경성이 유일했다. 떠나왔던 사람도, 떠나갔던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았겠지만 황량한 폐허와 같은 학정 곁을 지킨 건 그가 유일했다. 성공하겠다며 떠난 사람도, 가난한 이 집구석 지긋지긋하다며 떠난 사람도, 학정을 통 털어 이용해먹고 떠난 사람도, 길고 긴 무명을 더 견디지 못해 떠난 사람도, 학정에겐 다 자산이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오고, 그걸 못 찾겠다면 가고, 학정은 단 한 번도 가겠다는 사람을 막은 적이 없었다. 우진에게도 그러했고 희완에게도 그러했다. 한 번쯤 물어봐줬으면, 가려했던 사람들이 마음을 고쳐먹기라도 했었던가. 희완은 그러지 못했을 것이고, 우진 역시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붙잡아봐야 부질없다는 사실을 학정이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거다.
단장님이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더는 어려운 일 없이 힘들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사이 그의 발치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학정을 한참 올려보던 희완이 손끝으로 눈가를 더듬었다. 너도 우진이도, 이렇게 정신 차리고 제대로 살아주니 내가 다 고맙다던, 경성은 베란다 난간에 등을 기댄 채로 검은 하늘 위로 희끄먼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고 있었다. 학정이 자식은 이제 그만 좀 괴롭히라는 말은 오로지 경성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돌아오지 않을 거면 깨끗이 떠나라는 말은 경성 역시 꺼내기가 쉽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경성은 그리 했고, 주저하던 희완을 다시 이 바닥으로 끌어들였다. 어디서든 죽은 듯이 살 바엔 휘청휘청하더라도 이곳에서 사는 것처럼 살라고, 그렇게 사는 게 맞는 거라고, 주춤주춤하던 희완을 밀어, 다시 당겼다. 희완은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런 줄 알았는데, 혼자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손을 내밀면 잡아줄 사람이 있었고, 찬바람이 들면 옷을 여며줄 사람이 있었고, 바닥에 떨어지면 기꺼이 제 손을 더럽혀 가며 건져내어줄 사람도 있었다.
낮게 코를 골기 시작한 학정을 말없이 응시하던 희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열다섯에 부모를 잃었고, 학정을 만났다. 연기를 알았고 꿈이란 것에 대해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다. 부모가 남긴 보험금 밖에 기댈 데가 없던 처지에도 누이는 기꺼이 희완의 꿈을 응원했다. 열심히 했고 대학에 진학 했고 학정에 입단했다. 모든 꿈을 다 이룬 것 같았는데, 모든 것이 다 순조로웠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희완은 목 끝까지 진창에 잠겨 있었다.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가까워지는 건 바닥이었다. 입과 코를 지나 머리끝까지 잠기려는 걸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던 희완의 팔뚝을 꽉 움켜잡은 누군가가 빈 쭉정이 같은 몸뚱이를 번쩍 뭍으로 건져 올렸다.
숨통이 트였지만 희완에겐 시한부처럼 여겨졌다. 불쌍해서, 쓸 만해서, 버리기 아까워서, 희완이 정의한 이유들이다. 때문에 언제 버려질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남자의 눈치를 살피고 불안에 떨며 때때로 정신적 공황에 빠지기도 했다. 원하는 건 단 한마디뿐이었다. 괜찮다. 너를 버리지 않는다. 네가 잘못한 건 없다. 뻔뻔스러워서 단 한 번도 입 밖에 꺼내어 원해보지 못한 말들이었다. 겁에 질려 벌벌 떨며 남자에게 그 중 하나를 입 밖에 꺼내보았을 때 그는 어떠했던가. 버리지 않겠다던 남자는, 희완의 등을 떠미는 것으로 결국 희완을 버렸다. 누이처럼, 희완이라도 살려보겠다며 다 곱아든 손으로 희완의 등을 떠밀었던 누이처럼.
그런 남자의 원한다는 말은 희완을 많이 혼란스럽게 했다. 몸을 원한다 했을 때 주었고, 몸을 주겠다 했을 때 등을 떠밀려졌고, 이제 다시 연희완을 원한다는 남자에게 줄 것은 또 몸뿐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희완의 전부를 원하고 있었다. 텅 비어 폐허가 된 너덜너덜해진 곳을 겨우 여며 이제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한 그 마음을 원한다는 남자에게 희완은 아득한 단애감을 느꼈었다. 주면, 또 버려질 건데. 나는 원한 적도 없는 무엇을 준다는 핑계로 또 등을 떠밀어 저 멀리로 혼자만 떨어뜨릴 건데. 원한다는 그에게 선뜻 모든 것을 내던질 수가 없었다.
이제 겨우 아물어 새살이 돋아나는 중이었다. 이제 간신히 무너지지 않는 발밑을 쳐다보지 않게 된 참이었다. 또 다시 밀려나게 된다면 회복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원하는 걸 주고, 원하는 걸 받고,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외려 괴롭기만 하고, 그에게서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고, 그러나 결국 지금의 편안은 모두 그에게서 받은 것들이고, 희완이 그에게 진 빚은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고, 그는 희완을 원하고, 희완은 그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이,
센서 등이 꺼진 복도에 우두커니 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희완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맞은편 벽에 붙은 거울에 비친 창백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술에 취해 눈앞이 가물가물하였을 때, 그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냉기에 흠칫 눈을 떴을 때, 어둠에 잠긴 좁은 거실에 앉아 희완은 그의 온기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더는 부정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어느 틈인가도 모르게 뱃속 깊은 곳에 들어와 있는 묵직한 그것을 괴롭다고, 두렵다고, 아프다고, 밀어내자면 반드시 놓아야 할 것이 있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항상 찬 것이 들러붙은 것 같은 등을 진득하게 문질러주며 열기를 내어주던 남자의 체온이 온몸으로 스미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희완은 술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몸을 열리는 문밖으로 내려놓았다. 갈 곳이 있었고, 떠오르는 그곳으로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그것을 만지고 확인하고 또 만지고 싶었다. 몇 번이라도, 몇 번이라도, 그것이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그러고 싶었다.
침대에 누워 눈을 붙이고 있던 남자가 번뜩 눈을 떴다. 피부로 와 닿는 차가운 공기에 빠르게 몸을 일으키는데 익숙한 형체가 발치에 웅크려 앉아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어둠이 눈에 익기도 전에 남자는 그 까만 형체를 알아보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늦게까지 놀다 학정의 집에서 자고 온다던 희완이 거기 그러고 앉았었다. 그제야 날카롭게 세웠던 신경을 일시에 잠재우며 고개를 숙인 희완의 정수리를 향하던 남자의 시선이 좀 더 아래로 옮겨갔다. 발끝에서 만져지는 감각이 느껴진 탓이었다.
뻗은 손으로 남자의 발목을 꾹꾹 누르던 희완이 제 손바닥을 한번 쳐다보곤 다시 남자의 다리를 꾹꾹 눌렀다. 마치 제 손에 닿은 게, 제 눈에 보이는 게, 허상인지 실상인지 확인하기라도 하는 듯한 그 몸짓을 잠자코 지켜보는데 나직한 숨소리에서 희미한 술 냄새가 섞여 나왔다.
남자의 다리를 누르던 손으로 매트리스를 탁탁 치고 다시 제 손바닥을 문지르고 그 손으로 또 남자의 다리를 누르고 몇 번이고 같은 동작을 반복하던 희완이 한참만에야 겨우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집중해 있는 희완을 방해하기 싫어 불도 켜지 않고 있던 승도는 어둠속에도 쉬이 눈에 드는 희완의 흰 얼굴과 유순한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며 숨을 죽였다.
몇 번이고 달싹여지다 굳게 다물리고, 또 달싹여지다 도로 닫히기를 반복하는 그 모양 좋은 입술선을 그려내던 승도의 눈으로 아주 잠시간 해사한 웃음이 스쳤다. 그러나 그것은 곧 어둠에 녹아들듯 사라져가며 기다란 눈 끝에 서리처럼 맺혔다.
“너무… 좋습니다.”
바닥을 더듬던 손이 다시 승도를 더듬어 온다. 그리고 겨우 뱉어진 음성이 좀 더 확연해지며 승도의 단단한 외피를 두드려온다.
“나는,”
당신이…,
“정말 좋습니다.”
이제야 후련하다는 듯, 긴 한숨을 내려놓듯, 진 고백을 내려놓는 희완의 눈빛이 모처럼 편안했다. 그럼에도 그 어둠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내는 눈동자가 습하고 애달파 승도는 선뜻 손을 내밀어 희완을 잡을 수 없었다. 다시 희게 뜬 제 손바닥을 한참 내려다보고 그 손으로 제 주변을 꾹꾹 눌러보던 희완이 먼저 승도를 붙잡아왔다.
꽉, 잡았다.
* * *
완결 전까지는 연재 주기가 불규칙할 것 같습니다, 한두 편 정도 분량이 늘어날 것도 같구요. 이 점 양해해주세요. ㅠㅠ
첫 번째 '너무'는 부정의 의미로 쓴 게 맞아요.
플레이 리스트 1 - 이 기쁨,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풍문으로 들었소, 마이동풍.
2 - 사랑했어요, 취중연가, 독백, 청춘.
모든 독자님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