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머무는 계절 (Just Smile)
오랜만에 복귀한 촬영장의 온도는 전보다 좀 더 낮았다. 스텝들은 여전히 희완과 거리를 두며 뒷말을 해댔고 희완은 혼자 동떨어져 말이 없었고 그린은 그림이 나올 때마다 성깔을 드러내며 혼자 히스테리를 부리곤 했다. 나아진 게 없다고, 오히려 더 형편없어졌다며 모델을 앞에 두고 제가 찍은 사진을 쓰레기라 부르길 서슴지 않는 그린의 히스테리는 다른 관계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쳐 희완의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들었으나 누구도 대놓고 무안을 주거나 하지는 못했다. 대단한 거물이 뒷배라는데, 감히 그럴 수 있을 리가. 스폰서에 관한 루머 덕에 욕을 먹고 배척당하면서도 그로 인해 또 실질적인 피해는 받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데드라인 이제 열흘이야, 열흘! 너,”
말을 끊은 그린이 짜증스런 눈으로 희완을 노려보다 영어로 욕지기를 뱉으며 홱 돌아섰다.
첫 번째 충돌이 있은 후 그 날 바로 촬영 딜레이 소식을 통보받았다. 스폰서를 잡은 모델이라면 중간 중간 촬영은 뒤로 젖혀두고 스폰서와 밀월여행을 가거나 흔히 여기저기 불려 다녀 펑크 내는 전적이 많았기에 그린은 딱히 신경질을 부리지 않았다. 더구나 본인 입으로 어떻게든 그 작자와 해결을 보고 오라고 하지 않았나. 그게 온리 토킹 어바웃일 거라 추측할 만큼 순진하지가 못하다.
어쨌거나 그 때까지만 해도 일말의 기대감은 있었다. 루머나 평판이 사실이라도 그런 걸 시치미 뗄 요령도 없는 모델의 멍청한 얼굴을 떠올리며 미간을 일그러뜨리긴 했지만, 실체만 놓고 보자면 훌륭한 모델임은 사실이었다.
어딘가 모자란 모델 잘 구슬러서 좋은 작품 내놓는 것도 능력이라며 대놓고 저를 구슬러 오는 강영희의 로비를 받으며 그린은 촬영장을 싸구려 포르노 현장으로 바꿔 놓았던 모델의 어처구니없는 행각을 떠올렸다. 싸구려 포즈를 잡거나 역겨운 표정으로 그 난리를 만들어 놓은 게 아니다. 사실 모델은 별 거 한 게 없는데도 그가 흘리는 분위기와 눈빛, 그리고 몸짓이 그러했다. 대번에 못 쓰는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 때 촬영 접었어야 했는데. 그린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계속해서 모델을 찍느라 정신을 놓고 있었다. 이윽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그림을 확인했을 때의 그 황당함과 불쾌감이란.
“강영희, 당장 전화 안 받으면, 나 이 건 엎는다.”
세 번의 전화에도 응답이 없는 강영희에게 보이스메일을 남기고 소파에 핸드폰을 내던지며 쾅, 쓰레기통을 걷어찬다. 그 때에 비해 조금도 나아진 구석이 없다. 아니, 오히려 악화일로일 뿐이다. 날짜를 20일이나 떼어 먹었으면 적어도, 빌어먹을 적어도!
“씨발, 왜 전화를 안 받아!”
그제야 울려대기 시작하는 핸드폰을 받으며 버럭 소리를 지른 그린이 상대 쪽에서 뭐라 하기도 전에 연거푸 고함을 질렀다.
“꼴랑 열흘 남겨 놓고 저 따위 걸 어떻게 써 먹으라고!”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고 나올 때부터 접었어야 했다. 젠장맞을, 내 발등 내가 찍었지. 그 망할 투자금이 뭐라고.
“나, 내 커리어에 이 딴 쓰레기 절대 못 집어넣으니까, 모델을 바꾸든, 아예 나를 바꿔 치우든! 니 꼴리는 대로 해!”
참아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빌어먹을, 20일 만에 모델을 파인더에 담았을 때 그린은 저건 못 쓰는 거다라는 확신만 더했다. 어째 그 전보다 못하다. 생기가 조금도 없었고, 실체 없이 투명인간이라도 된 것 같고, 건드리면 우수수 잿더미로 화해버릴 만큼 존재감이 희미했다. 무슨 사단이 나긴 났는데, 그린으로서는 알 바가 아니었다. 사진만 잘 찍으면 되는데, 저 똥만도 못한 물건은 20일 만에 아예 정신줄을 놓고 나왔다.
칸막이만 빙 둘러 임시로 만든 사무실 안에서 세트장 한쪽에서 등만 보이고 있는 모델을 매섭게 노려보던 그린이 홱- 재킷을 걷어 현장을 빠져나갔다. 울화통이 터질 것 같다. 강영희에게 말은 그렇게 해놨어도, 선불로 받은 투자금은 이미 다 써버린 후였다. 이쪽에서 멋대로 관둘 수 있는 일이 못된다. 모델 훌륭하다는 말에 한번 보지도 않고 덥석 일을 받은 내가 등신이지. 스스로를 탓하며 휑한 복도로 나선 그린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뭐가 문젠지 모르겠다. 어떤 식으로든 동의를 했으니 이 딴 식으로 얻어갈 건 얻어가는 게 아니겠는가. 일개 무명배우가 뒷배가 아니라면 언감생심 명품 브랜드 원탑 모델이 가당키나 하냔 말이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무명배우가 갑자기 톱 배우 행세하며 아파트 씨엡만 팡팡 찍어대는 것과 다를 게 뭐 있나 싶은 씨추에이션이고, 이건 또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랄 정도로 황당한 섭외였다.
그렇게 굴러들어왔으면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 할 것 아닌가. 건성이라거나 싸가지의 문제가 아니다. 몸값으로 이만한 걸 요구할 정도라면 보이는 마냥 뻔히 순진한 놈만도 아닐 텐데, 저 망할 놈의 모델은 대체 왜 찍으면 찍을수록 더 망가져만 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야하거나 천박함의 문제 역시 아니었다. 보이질 않았다. 파인더 너머로 저 모델 자체가 보이질 않았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찍냐고. 어떻게. 투명인간이라도 찍으란 소리야? 이 내가? 젠장. 워커발로 다 부서진 시멘트벽을 툭 차는 그린이 한숨처럼 담배연기를 뿜어내었다.
이런 등신 같은 놈이.
그린이 남긴 보이스메일을 듣자마자 강영희가 뱉은 말이었다. 내가 어쩌자고 이런 놈을 섭외해서! 이런 융통성 없는 놈을 둘씩이나! 어째 이번 일은 사방이 지뢰밭이라는 소감에 절로 늙는 기분이라 영희는 거울을 찾아 볼 수밖에 없었다.
어휴, 쌈 싸 먹을, 이제와 무를 수도 없는 일이고. 둘 중에 하나를 갈아 치워야 한다면 그린을 치우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또 그린만한 인물을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 아, 눈가에 주름. 하며 손끝으로 피부를 팽팽하게 당기는 영희가 한숨을 포옥 쉬며 가방을 찾아 챙겼다.
밤이면 밤마다 전화해서 그린 땡강 달래는 것도 일이고, 날이면 날마다 닦달 해대는 허철수 그 인간 얼굴 보는 것도 일이었다. 이 사단의 근본적인 원인이 모델인 것 같아도 얼마 전에 그 뒷배의 실체에 가까운 엄청난 인물을 알게 된 후로 영희는 더 운신의 폭이 좁아져 버리고 말았다.
누구한테 말할 것도 못돼서 그린에게도 매번 입 닥치고 알아서 기라는데도, 씨알도 안 먹히니 돌아버릴 것 같다. 이 애물단지들을, 욕지기를 뱉으며 차를 출발 시키는 영희의 미간엔 어느새 굵은 주름이 콱 박혀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촬영에 임했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뜨거운 것이 뱃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앉아 열기를 뿜어내는 것만 같은 착각에 몇 번이고 몸서리를 쳤는지 모르겠다. 주변의 감춤 없는 냉대와 배척도, 이제는 완급 조절도 않는 그린의 윽박지름도, 그때마다 뚝뚝 떨어져가는 촬영장의 온도도 희완에겐 별개의 일인마냥 멀게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당장이라도 저 낡은 철제문을 박차고 나가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갈망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숨이 막히는 기분에 차갑게 질려가는 몸뚱이가 실제로도 얼음장이었다.
-정신이 듭니까.
실신 끝에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희완은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욕조에 잠겨 있었고 미세하게 출렁이는 물살은 나른하게 몸을 감싸며 짙은 피로감을 한시적으로나마 씻겨주고 있었다. 뒤에서부터 완벽하게 등을 덮은 남자의 체온이 몸 전체로 번져가는 걸 방관하며 희완은 힘겹게 눈을 깜박였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방만하게 벌어진 가랑이 사이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탁한 점액질과 희미한 핏물이 엉겨 나오는 걸 멍하니 내려다보고 겨우 밑이 완전히 헐었다는 것을 알았다. 감각이 없었으나 앉아 있는 것은 고역이라서 엉덩이를 반쯤 남자의 허벅지에 걸쳐놓고 있던 중이었다.
커다란 손이 그의 흔적으로 울긋불긋한 살갗을 훑으며 마사지를 하듯 부드럽게 주물러왔다. 그조차도 큰 자극이라 희완은 남자의 손이 닿을 때마다 흠칫흠칫 몸을 떨며 촘촘한 속눈썹을 잠자리 날개처럼 이지러뜨려야 했다. 그래도 좋다는 기분이었다.
행위를 마치고 정신을 차리고 나면 남자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난 뒤였다. 드물게 그의 곁에서 눈을 뜨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 역시 위안이 될 것은 아니었다. 완벽하게 몸을 사고파는 관계에 불과했다. 마땅히 쉴 곳 없이 한뎃잠 자기 일쑤에 끼니도 일정치 않아 한참 몸이 좋지 않던 시기였고 그 몸으로 남자에게 시달려지고 나면 항상 중간에 의식을 잃게 되는 것이다. 눈을 뜨면 그 넓은 침대에, 방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 만신창이가 된 몸을 추스르며 쉼 없이 비어져 나오는 어떠한 감정들을 모른 척 흘려 넘겨야만 했다.
비참함이 비참함이어선 안 되었고, 괴로움이 괴로움이어서도 안 되었고, 서글픔이 서글픔이어서도 안 되었다. 그런 걸 감당하기엔 심신이 너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외면해야 살아갈 수 있었다. 딛는 발에 무너지지 않고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제대로 봉합되지 않아 흐물흐물했던 환부의 입구는 금방이라도 감당 못할 어떠한 것들을 게워낼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무너져선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포기하는 건 너무 쉬웠는데 붙잡고 있는 미련들이 너무 많았다. 누이와 함께 훌쩍 떠나기엔 신세진 사람이 너무 많아서.
학정을 떠올리니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아 몸을 움츠리니 등 뒤에서 남자의 체온이 더욱 바짝 당겨졌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는 물음이 새삼 낯설었다. 많은 대화가 오고 가지 않은 관계는 몸을 섞는 것만이 유일한 소통이었다. 겨우 그에게 익숙해졌을 때, 희완은 그와 몸을 섞으며 어렴풋이나마 남자의 감정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지난 며칠 밤의 남자는 지독히 흥분해 있었고, 지독히 이성적이었으며, 동시에 지독히 비이성적이기도 했다.
제정신이라면 도저히 못할 짓들을 서슴없이 해오는 남자를 받으며 희완은 차라리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리는 것을 택했다. 짐승처럼 덮쳐오는 남자에게 짐승이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그럼에도 비참함이 섞이지 않는 것이 의아스러웠고 동시에 그 빈 공간을 해일처럼 밀고 들어오는 심신의 벅차오름에 머릿속에서 점멸하는 사고를 감지했다. 눈물을 핥아주는 혀가 지독히 달았다. 쑤시지 않은 곳 없이 욱신거리는 몸 곳곳이 환부라도 되는 듯 세심하게 핥아오는 남자에게 위로라는 것을 받는 기분이었다.
피부 밑의 어딘가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기분이기도 하고 세포 하나하나 혈관 하나하나까지 씻김을 받으며 다독여지는 것 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남자를 받을 때마다 희완은 더욱 또렷해지는 그 감각들에, 그 감정들에 어찌할 바를 몰라 내내 고개만 돌리고 있었다.
빨리 마음이 편해지고 싶었다. 스스로 준비가 안 되어 있음을 가장 잘 알면서도 그저 편해지고만 싶어 남자를 채근하여 살을 섞는데 선명해지는 것들에 덜컥 겁을 집어 먹고 오히려 숨어들고만 있었다. 그러면 남자가 깊이 입을 맞춰 주었다. 몸 안 깊숙이 밀어 넣은 것을 더 넣을 수 없을 만큼 꾸역꾸역 밀어 넣고 심신을 완벽히 밀착시키며 몇 번이고 입을 맞춰 주었다. 각인이 아닌 확인이었다. 이곳에 있으니 더는 어디로 가지 말라는. 그 다정하고도 뜨거운 몸짓에 희완은 남자 역시 필사적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얼핏 화기가 스치는 것 역시 그 필사적임에서 비롯되는 인내의 이면이라는 것을 알고 불현듯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원하고 있다는 말은 육신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너의 모든 것, 너의 모든 것. 너의 모든 것을 원하고 있다는 말이 새삼 부드러운 빗줄기가 되어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당신 역시 서툰 것 아닌가, 하는. 원한다는 말 외엔 아는 단어가 없어 그러리라는 생각에 울컥 가슴속이 뜨거워졌다.
유일하게 아는 것이 남자의 몸이었다. 희완이 그에 대해 아는 것은 몸이 전부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했다. 과연 그것으로 충분하였는가.
일어설 힘도 없이 남자에게 끌어올려져 욕조를 빠져나가는 동안 희완은 질척질척하게 따라붙는 물 자국을 흘려 보았다. 그가 희완에게 남긴 자국이었다. 결코 선명하지 않고 명확하지도 말끔하지도 않은, 그러나 짙기만 한, 너무 짙어 가끔은 질식할 것만 같은. 그러한 남자에게 안겨 젖은 몸으로 다시 침대를 뒹굴었다.
가슴에 얼굴을 묻는 남자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흐린 시선을 올렸다.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것 같았으나 남자에 의해 헤퍼진 몸은 금세 달아올랐다. 벌어진 몸으로 파고드는 대신 한참을 물고 빠는 남자의 턱 께를 더듬으니 위로 올라와 오랜만에 입을 맞춰 주었다. 뜨겁고, 화득하고, 아주 시린 것들이 단전에서부터 혈관을 타고 온몸 가득 번져갔다. 가슴을 뜨겁게 치고, 머릿속을 차갑게 친다. 이러한 감정들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알지 못했다. 여전히 알지 못 한다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희완은,
“진심이에요?”
살짝 날이 선 음성에 불현듯 상념에서 빠져나온 희완이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수수하고 실용적인 옷에 비해 화려한 인상의 여자는 입체적인 외모로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무척 미인이었다. 그러나 희완은 그러한 소감만 있을 뿐 그녀에게서 어떠한 이성적 매력도 감지하지 못했다. 화장품 냄새에 섞인 은은한 향수가 코끝을 스친다. 그런 것보다는 이제 거친 살 내음과 희미한 메탈 향에 반응을 하게 되었다. 제 앞에 덩그러니 놓여 진 검은 커피 속을 의미 없이 들여다보던 희완이 다시 시선을 들며 답을 했다.
“계약금은 전액 돌려드리겠습니다.”
“지금,”
잠시 말을 멈춘 그녀의 실룩거리는 입매에서 채 억누르지 못한 화기가 고스란히 읽혀졌다. 나름대로 진정을 하느라 구겨진 얼굴 일부는 그럼에도 화사했다.
“장난하는 겁니까? 이 일이 그렇게 우스워 보여요? 굽신 굽신 있는 비위 없는 비위 다 맞춰 주니까 사람 정말,”
“낙하산으로 들어와서 충분히 제 값을 못합니다. 그래도 잘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안되겠습니다. 좀 더 빨리 결정을 내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계약 위반으로 고소하겠어요.”
“그런 조항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남자의 팔에 안겨 계약 조항을 하나하나, 그 깊은 목소리로 짚어주는 것을 하나 빠짐없이 듣고 숙지하고 이해했다. 읽기 귀찮다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아무렇게나 대강 읽고 해치우는 거 아닙니다. 그러다가 인생 말아 먹은 놈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니 졸린 얼굴 말고 잘 들읍시다. 이상하게 졸려서 저도 모르게 꾸벅 고개를 떨어뜨리니 목덜미를 가볍게 쓸어오며 그렇게 깨웠었다.
감정을 깨달아갈수록, 안되겠는 게 너무 많았었다. 가능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희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있는 게, 오히려 더 줄어가는 기분이었다. 종반에는 모른 척 몸을 파는 것도 못하게 되어 버렸다. 온통 희완에게만 유리하게 만들어진 조항 하나하나, 그것을 익히고 소화하며 희완은 또 모르겠다 했다. 내가 몸을 주니까, 받는 것들이라고, 그가 나를 원하니까, 받는 것들이라고, 우린 서로 주고받는 것일 뿐이라고.
“기존에 섭외를 고려했던 모델이 따로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억측이네요.”
“제가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까.”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희완을 바라보는 영희의 시선이 다른 빛깔로 바뀐다.
면밀히 관찰하고, 가늠하고, 무게와 색깔을 재어보는 눈이다.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니라 모른 척 하고 있다는 사실을 두 번째 만남에서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때도 의외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과연. 만만치 않겠구나, 하는 생각에 빠르게 입장 정리를 하는 영희의 맑은 눈이 아무런 감정도 제대로 떠올라 있는 게 없는 흰 뺨을 훑는다.
20일간 무슨 변화가 있긴 있던 모양이다. 더욱 형편없어졌다고 난리더니, 달라진 구석이 있긴 있다. 확실히,
“연희완 씨 꽂아주는 조건으로 받아먹은 게 보통이 아니라서요.”
“…….”
“그런 위험부담은 전혀 지고 싶지 않은 상대라서요.”
이번엔 좀 더 노골적인 답변을 던진 후에 한참을 뚫어지게 상대를 보는데, 조용히 앉아있던 끝에서야 조금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희완이 창백하게 식은 손을 내려 배 부근을 꾹 누른다. 탈이라도 난 건가. 그러고 보니 낯빛도 지나치게 허옇고 몸에도 생기가 없다. 그린 이 자식, 이래서 그 생난리를 친 거야. 환자도 못 알아보고.
“원래 몸 아프면 사고가 제대로 되지 않는 법이에요.”
“그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하는 말이 모두 진심이시다?”
“그러는 쪽이 모두에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문제없게 뒤처리만 잘 해준다면야 영희로서는 나쁠 게 하나도 없다. 그런 터무니없는 계약조건 따위 지키지 않아도 되고, 맘에 드는 모델로 교체할 수도 있고, 너무 큰 호박 넝쿨째 홀랑 집어 먹고 배탈 난 얼굴로 내내 뭐 마려운 똥강아지마냥 오가는 허철수 꼴 안 봐도 되고, 지랄 같은 그린 성격 일일이 주름 펴가며 안 맞춰줘도 되고. 그러나 문제없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겠는가. 눈앞의 모델도 확답할 수 없는 일인 바에야. 백이면 백, 이런 일은 잡음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못들은 걸로 하겠어요, 희완 씨 덕분에 우리가 아주 좋은 투자를 받고 있습니다. 만약 희완 씨가 여기서 관두겠다고 하면,”
말이 없는 희완의 눈이 차분하다. 정중하게 운을 뗐지만 속을 떠보는 말이라는 것을 아는 눈에 영희는 그만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좀 전에 바로 만만치 않을 거라 판단해놓고 그새 또 우습게보고 허튼 수를 쓴 거다. 그래도 필요한 절차였다. 확답이 있어야 영희도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입장이었다. 물론 이것 역시 희완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결국 본론을 꺼내놓게 되었다.
“그 투자금을 받는 조건이 연희완 씨를 기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는 내용이겠지만,
“그 투자금을 포기할 수 없는 우리로서는 연희완 씨가 끝까지 촬영을 마쳤으면 합니다.”
책임이란 단어는 어쩐지 분위기를 더욱 경색시킬 것 같아, 순간적으로 촬영으로 대체한 영희가 물끄러미 희완을 응시한다.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희완이 촬영에 대충대충 임했어도 이쪽에서는 태클 한 번 걸지 못하고 대신 시끄러운 그린을 갈아치우는 쪽으로 조용히 마무리를 지었을 터였다. 그 성격에 영희에게 이럴 정도라면 희완에게도 곱게 만은 안했을 그린을 알면서도 그를 당장 갈아치우지 못한 건 실력이 좋아서였다. 원래부터 내정자였고 공들인 상품을 감각적으로 곱게 포장할 기술이 뛰어난 보기 드문 아티스트였다. 상성이 맞으면 대단히 좋은 작품을 내놓을 거라는 기대에 부응하기는커녕, 이 정도로 상성이 안 맞을 거라곤 미처 예상을 못해 내심 당혹스런 부분도 있었다.
“원하신다면, 작가 교체도 가능합니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혹시, 저 개 같은 성깔의 작가와는 절대 일 못한다는 말을 이처럼 돌려 말하나 싶어 또 떠보는 말에 담담히 답하는 희완이 식은 커피로 목을 축인다. 그 역시 이 상황이 못내 곤욕스럽다는 기색이 뚜렷이 비추어 지나갔다.
“제가 원하는 건 모델은 관두는 것뿐입니다.”
솔깃한 이야기다. 오랫동안 공들인 기획이었다. 이 상황에서 괜찮은 퀄리티라도 뽑아내기 위해서라면 멀쩡한 사진작가를 자르느니 제 몫도 못하고 있는 쓸모없는 모델을 자르는 게 훨씬 합리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 후환을 누가 감당하겠느냔 말이다. 공들여 꽂아놓은 물건 동의도 없이 멋대로 잘랐다가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그럴 경우엔 이쪽에선 그 어떤 책임도 질 생각이 없으니 네가 지겠느냐, 이렇게 에둘러 묻는 것인데,
“할 수 있는 것 역시, 그뿐입니다.”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는 희완을 바라보는 영희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결국은 관두겠다, 그렇지만 그 뒷일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다. 그런 뜻인 셈이다.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 참. 이 따위 어리광을 더 상대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다.
“이러는 거, 그쪽도 알고 있어요?”
더 감추고 모른 척 할 필요성도 못 느껴 영희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내었다.
“연희완 씨 후원해주시는 분이요.”
알 리가 없다. 흔히들 하는 착각이라 희완 역시 다를 바가 없다는 것만 재차 확인하는 영희였다. 스폰서가 떠받들어주니 제 몸이 제 것이라는 착각, 정말 제멋대로 모든 걸 휘두를 수 있다는 착각, 누구든 착각은 착각으로만 끝내는 게 본인과 그 주변을 돕는 길이었다. 돈에 팔린 이상 주인은 값을 지불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었다.
“연희완 씨와는 계약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진작가가 맘에 안 든다면 몇 번이고 바꿔줄 의사는 있습니다. 그러니 관두겠다느니 어쩌겠다느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접어 두세요. 정말 관두고 싶다면 일단 후원자한테 허락을 받고 오세요. 허락 뿐 아니라 연희완 씨가 빠져도 회사에 약속한 투자는 변함이 없고 그 어떤 경제적 보복 또한 없을 것이라는 확답 역시 필요합니다.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거라 확신합니다. 연희완 씨가 빠져서야, 이 계약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거든요. 미안하지만, 연희완 씨가 손수 계약서에 서명을 했어도 우리가 계약을 한 건 연희완 씨가 아닌 바로 그 후원잡니다. 네, 그래서 연희완 씨가 필요한 겁니다. 단지 그 뿐이에요. 투자자인 그쪽 스폰서가 원하고 우리도 원하는데, 연희완 씨가 관둘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합의도 없이 일을 관둬서 발생하게 될 문제를 연희완 씨는 해결할 능력도 권한도 없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촬영 끝까지 마치는 겁니다. 이미 일정이 많이 미뤄졌습니다. 낙하산이라 욕먹고 있는 거 알고 있고 그런 게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라는 거 압니다. 그래도 성인이라면 자신의 일에 최소한의 책임은 져야지요. 이런 투정 받아주는 것도, 연희완 씨가 아닌 그 후원자 눈 밖에 나는 게 무서워서라는 걸, 꼭 이렇게 말로 해야 알겠어요?”
어떻게든 달래서 잘해보자는 요량으로 온 건데 본의 아니게 말을 하다 보니 짜증이 일어 본심을 죄다 드러내버리고 말았다. 제기랄, 그 뒷배가 주석그룹 성의준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5년 유학 끝에 총수 타계 직전 귀국한 성의준은 본부장 명함 하나 들고 있어도 엄연히 주석그룹 실소유자였다. 이런 쪽으로는 소문이 깨끗해 전혀 예상도 못했다. 사실 성의준에 관한 소문은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외부에 공개한 내용 외에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그 정체가 밝혀진 정황은 일부러 성의준 측에서 이야기를 흘렸다는 추측이 가능했다. 가볍게 데리고 놀다 버릴 일회용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사실 큰일이라는 소감은 들지 않는 영희였다. 눈앞에서 막말을 해도 그 높으신 분 귀까지는 들어가지 않으리라는 어떤 확신 때문이었다. 미주알고주알 있던 일을 모두 고해바칠 깜냥이 있었다면 촬영이 이런 식으로 엉망이 될 일도 없고 입 더러운 그린이 여지껏 멀쩡히 목 붙이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물렀다. 물러도 너무 무르다.
“왜 그쪽 회사의 위험부담을 제가 안아야 하는 겁니까.”
때문에 이러한 희완의 반응은 영희를 당혹케 하기에 충분했다.
“계약서 어디에도 내게 책임을 지우겠단 조항은 없었습니다. 굳이 계약금을 돌려주지 않고 촬영을 관둬도 내겐 배상 책임이 없다는 사실을, 강 대리님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사실이었다. 그런 위험부담을 안고서라도 일을 진행시킨 건 분명 회사 측이었다. 그렇지만 스폰서까지 끼고 광고를 따 낸 배우가 중간에 촬영을 접고 파토를 내는 건 상당히 비상식적인 일이 아닌가. 게다가 광고계에 이제 첫 발을 내딛는 무명배우다. 이대로 판이 깨진다면 스폰서 힘을 빌리는 것에도 언젠가는 한계가 생길 것이다. 무엇보다, 원해서 하는 일이라면 사진작가까지 바꿔 치워주겠다는 마당에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전혀 없잖은가. 그런데 왜,
“제가 아니어도 됐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투자금을 받기 위해 저를 선택한 건 회사 측의 결정이었고 그로 인해 주어진 그쪽의 리스크를 부담해야 할 이유가 제겐 없습니다. 책임은 계약금을 돌려주는 것으로 다하겠습니다. 그 외에 다른 문제는, 강 대리님 말씀대로 제가 끼어들 일이 아니니 알아서 해결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봐요, 연희완 씨.”
“…….”
순간 당황하여 희완을 붙들기라도 하듯 다급하게 그 이름을 부른 영희가 더욱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차가울 정도로 반듯한 얼굴로 서서히 번져가는 괴로움이 읽혀짐과 동시에 손바닥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훑어 내리는 희완이 그 손으로 뱃가죽을 꾹 눌렀다. 문대어진 식은땀이 확연했다. 이윽고 흘러나오는 음성에 참으로 오랜만에 영희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미안합니다.”
“…….”
“이 상태로는 폐만 끼칠 겁니다.”
미세하게 일그러진 눈으로 영희를 응시하는 희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정 안되겠다면 촬영은 계속하겠습니다. 그래도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저 하나 바꾼다고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말씀대로 무엇 하나 제가 확신해 드릴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연희완 씨.”
하얗게 질려가는 희완의 얼굴을 보다 못해 손을 뻗은 영희가 화들짝 놀라며 주춤 손끝을 물렸다. 닿은 손이 얼음장이었다. 놀란 영희를 빤히 마주하던 희완이 뱃가죽을 꾹 누르고 있다 도저히 안 되겠던지 찬 손으로 얼굴을 훑으며 먼저 자리를 비우겠다 했다.
“그래요, 오늘은 일단 들어가서 쉬고 이 이야긴 다음에 계속 해요.”
결국 희완과는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겠다는 완곡한 의사표현에 반듯한 이마가 이지러진다.
부축하겠다는 영희의 도움을 가볍게 밀어내고 돌아선 희완이 출입구를 나서기 이전에 화장실로 향하였다. 빈 칸으로 들어가 몇 차례 욱신거리는 속을 게워내고 그 통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계속 뱃가죽을 문지르고 있었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강영희에게 말을 꺼내기 전에 남자와 이야기를 마쳤어야 했다. 견딜 수 없다고, 갑자기 툭 내뱉어지는 말을 희완은 스스로 막을 수조차 없었다. 나아지는 게 없이 엉망이었다. 좀체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다그치듯 손등으로 툭툭 이마를 때리는 희완이 다시 변기통에 얼굴을 처박고 구역질을 했다.
힘을 주니 겨우 아문 밑이 도로 벌어지는 것 같다. 그 사이로 축축한 무언가가 새는 것 같은 기시감에 더듬더듬 밑을 더듬어 보는 희완의 얼굴이 자괴감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대등해지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와 몸을 섞고 그의 마음을 확인할 때마다 희완은 그러한 욕구에 사정없이 뒤채이며 몸살을 앓듯 남자의 정욕을 앓았다. 그러면서도 떨어지기는 싫어서, 몇 번이고 밑을 살펴보려 하는 남자를 붙잡고 계속 안아 달라 매달렸다. 창부처럼, 창부처럼, 창부처럼.
원하고 있어. 원하고 있어. 너를 원하고 있어. 귓전으로 가득 번지는 그의 음성이 흘러내릴까 겁을 내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목소리가 듣기 싫어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두 손으로 꽉 귀를 틀어막으며 고개를 숙이는 희완이 다시 연달아 속을 비워내었다.
나도 당신을 원하고 싶어. 나도 당신을, 원하고… 떳떳하게,
“허억, 헉.”
갑자기 머리로 피가 몰려 이는 현기증에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희완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깨끗하게 물 칠이 되어 있어도 여전히 더러운 화장실 바닥에 풀썩 주저앉으며 얇은 칸막이벽에 등을 기댄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희완은 그가 필요했고, 그는 희완을 원했고, 그가 주는 모든 것들은 화대 같기만 하고, 희완은 그 화대를 거절할 수 없고. 그의 도움 없이도 잘 살아보고 싶은데, 그의 도움 없이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장면을 멍하니 올려보고 있던 희완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상한 생각이다. 이상한 생각이다. 주사바늘을 하도 많이 꽂아 넣어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던 발가락 사이들, 퀭한 눈으로 굶주린 짐승처럼 헉헉거리며 아랫도리를 벗은 밑에 하얀 가루를,
“우우욱.”
더 생각을 잇지 못하고, 제가 떠올린 생각에 구역질을 느끼고 또 변기통에 얼굴을 처박는 희완의 메마른 어깨가 한참을 들썩였다. 없었다면. 아무것도, 없었다면. 애초 누이도, 우진도, 제 곁에 아무도 없었다면. 그 생각을 차마 끝까지 잇지 못하고 연속해서 속을 뜯어내듯이 게워내는 희완이 손바닥으로 탁, 타일바닥을 쳤다.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저 똥통을 기는 구더기보다 더 역겨웠다. 시도 때도 없었다. 정신을 놓을 때마다 불뚝불뚝 솟아올라서, 갑자기 그가 주는 모든 것들이 더 견딜 수 없어졌다. 숨을 쉬기가 힘들다. 문득문득 이렇게 사는 게 고통이었다. 왜 편해지질 못하는지. 왜 편해지질 못하는지.
가까운 병원에 들러 몸에 달리 이상은 없다는 진단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성희와 마주쳐 늦은 점심을 같이 했다. 각각 국밥 한 그릇씩 뚝딱 말아 먹으며 돌고 도는 소문 따위나 신변잡기 또는 극단 살림살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새로운 연극제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협회가 아니라 기업에서 주관하는 건데 4월 공모전에 당선되면 연극제 무대에 올리고 공연지원도 해준다더라. 그 공모전도 기업에서 주관하는 거고. 마감 직전이라 극단마다 난린데 여태 모르고 있었어?”
“어, 단장님 별 말씀 없으시던데.”
“학정이야 뭐,”
무심코 말을 던지던 성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남은 얼음을 오독오독 씹어 먹는다. 뭐 좋은 일이라고 다시 꺼내나 싶은 생각이 퍼뜩 든 탓이었다. 쎄 빠지게 쓴 극본 공모전 당선작이다 뭐다 상금 몇 백 안겨주고 홀랑 집어 먹어 버린 게 한 둘이 아니라, 공모전에 우호적인 극단들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달리 빌붙을 데가 없이 열악하기만 한 바닥이니 다들 부나방처럼 달려들 수밖에 없기도 했다.
“단장님 요즘 얼굴 보기 힘들던데, 여전히?”
“출강 많이 다니신다더라.”
“거 돈도 안 되는 걸.”
“좋아하시니까.”
섣불리 달려들다 좆 되는 게 이 바닥이라고, 다소 직접적인 언어를 거르지도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학정의 강연은 제법 알려져 있어 개강 시즌이 되면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 바빴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가리지 않았고, 각 학교의 네임밸류 또한 가리지 않았으며, 학정 스스로 크고 작든 연단에 서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희완도 학정을 거기서 만났고 우진도 학정을 거기서 만났다.
“뻔한 이야길 참 뻔하지 않게 않는 재주가 있으시지. 너도 거기에 낚였잖냐.”
“뭐, 그래도 하고 싶으면 해보라시니까.”
“아주 좆뱅이 칠 작정하고?”
와하하, 소리 내어 웃는 성희의 웃음에 희완의 소리도 섞여 들어갔다.
막 신입생으로 입학 했을 때 학교 동아리도 뒷전으로 하고 학정의 뒤를 졸졸졸 따라다니던 희완을 삐약삐약 병아리 새끼라고 놀리기도 많이 놀리고 비아냥거리기도 많이 비아냥거렸는데 정작 본인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의외로 남의 시선과 뒷말에 연연해하지 않는 성격은 편견 없이 주변을 받아들여 되레 그 자신에 대한 편견을 허물었고 난데없이 늦된 일면은 그 걸출한 외모로 인한 괴리감을 어이없게 무너뜨려 희완이 학과의 아이돌로 우뚝 서기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까탈스럽게 생긴 주제에 운동도 곧잘 해 동기들에게나 선배들에게 종종 불려가 축구공 농구공 배구공 가리지 않고 뻥뻥 차대기 시작하면 기생오라비 같은 놈 쓸 만하다며 예쁨 받는 것도 순간이었다. 축제 때는 얼굴마담도 군말 없이 소화해냈고 술자리에도 곧잘 불려가 기쁨조 노릇하며 큰 사고 한번 친 적 없어 주변인들의 신뢰가 깊었다. 고작 대학 1학년생이 그랬었는데, 그 평판이 뒤바뀌기까지 역시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럼, 학정은 이번 공모전은 건너뛰는 건가?”
“잘 모르겠다. 선배님들께 들은 게 없어서.”
“아, 그래. 너 한동안 학정 문턱도 못 밟았댔지. 어디, 촬영은 할 만하더냐?”
“뭐.”
“하기사, 무대 뛰는 거랑은 또 다르겠지. 카메라랑 연애하면 되는 거라고 떠들던 정신 나간 놈이 어느 집구석 자식이더라.”
대놓고 거는 농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 희완이 한동안 못 본 철민과 석주경의 얼굴을 떠올리곤 그만 자리를 정리했다.
“촬영 마치면 술 한 잔 하자. 오래 됐잖아.”
“그래, 공모전 준비 잘 하고.”
가볍게 손을 흔드는 성희를 가는 길에 남극 앞까지 모셔다주고 학정으로 발길을 돌린 희완이 가볍게 귀를 스치는 바람에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서늘한 바람이 남은 귓가를 문지르고 걸음을 재촉하며 좁은 골목길을 빠르게 휘돌았다.
오랜만에 오셨다고 환대하는 녀석들에게 둘러싸여 연습도 보충하고 노가리도 보충하는 동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같이 야참 먹자는 소리를 거절 않고 소줏집까지 따라갔다가 뒤늦게 합류한 학정의 얼굴도 볼 수 있었다. 지방 대학에 출강 다녀오는 길인 듯, 경성과 필영 끝에 둘러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학정이 화장실에 다녀오던 희완의 팔을 끌어다 제 옆에 앉혔다.
“촬영은 잘 돼가고 있냐.”
간단한 질문임에도 머뭇머뭇 답을 못하고 엉거주춤 자리에 앉는 희완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학정이 빈 잔을 채워주려는 필영에게서 소주병을 빼앗아 탁,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경성이 눈치 빠르게 사이다로 대신 희완의 잔을 채워주며 인상을 쓰는 필영의 입에 빈대떡 하나를 욱여넣었다.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아픈 거 아직이냐?”
불쑥 뻗어 나온 손이 희완의 이마를 짚었고 동시에 굵은 이목구비로 주름이 진다. 왜 이렇게 차. 하며 제 손바닥으로 얼음장 같은 희완의 뺨과 목덜미 등을 꾹꾹 눌러주는 학정이 막걸리 잔을 비우고 거기에 뜨거운 누룽지를 가득 부어 주었다.
“날도 안 풀렸는데 옷 얇게 입고 다니니까 이런 거 아니냐, 독감으로 한동안 꼼짝도 못했다면서 건강관리도 못해서야, 어디 제 몫이나 하고 다니겠어.”
혀를 차듯이 하는 말에 그건 학정 말이 맞다며 거드는 경성이 누룽이 한 사발을 더 주문하고 필영의 잔에도 술을 채워 주었다. 셔츠 한 장에 피코트를 겹쳐 입은 것은 춘삼월에 적당한 복장이었지만 날이 날이었다. 엊그제는 경기지방 쪽에 눈 소식까지 들리지 않았던가. 단원 대부분은 학정을 비롯해서 아직 야상이나 패딩잠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참이었다.
“요즘 독감은 진짜 사람 잡더라, 겨우 나았는데 도루묵 만들지 말고 잘 챙겨 입고 다녀. 한참 젊은 놈이 어째 우리 같은 노땅보다 더 골골 대냐.”
경성이 얹어주는 말에 옆에서 막걸리 대신 소주만 비워내던 필영이 들으라고 한 소린지 저 혼잣말인지, 그럼 그렇게 개고생을 했는데 몸이 성하겠냐. 중얼거리는 소리에 빈대떡 하나가 더 희생되었다.
그 꼴을 보고 말없이 웃던 희완이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피워 오르는 누룽지를 천천히 비워내었다. 뜨끈한 것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한기가 든 가슴속과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3주 내내 후유증에 시달리다 겨우 밖으로 나돌기 시작한 게 엊그제였다. 촬영장 쪽에는 별 다른 해명 없이 통보가 내려진 듯했고 극단 쪽에는 독감으로 이야기가 된 것을 학정과 두 번째 통화를 하고서야 알았다. 나흘째 되던 날 구석구석이 느슨하게 벌어져 누운 희완이 보는 앞에서 직접 다이얼을 돌려 강영희와 학정에게 전화를 건 남자가 핸드폰을 넘겨준 건 학정에게 만이었다. 지난밤의 통화를 기억하고 있어 형식적으로 몇 마디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전전긍긍하며 올려보던 희완은 귓가에서 바로 따뜻하게 번지는 학정의 변함없는 음성에 그런 초조함이 눈 녹듯이 녹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극단에는 언제 복귀하는 거냐?”
“열흘 남았다고 했잖냐. 까마귀 고기를 처먹었나.”
희완에게 묻는 말을 덥석 인터셉트해서 면박까지 얹어주는 경성이 생글생글 웃으며 짜증을 내는 필영의 입에 또 빈대떡을 욱여주었다. 욕지기를 뱉으면서도 가득 밀어 넣어진 것을 우걱우걱 씹는 필영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워주는 희완이 영화는 잘 되어가시냐고 물었다.
“뭐, 거기도 개판이지.”
대형 기획사고 스폰서고 끼고 든 주연 배우 등쌀에 새우등 터진다고 그 꼴 잘 못 보는 감독 덕에 촬영장에 아주 살얼음판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래서 낙하산으로 떨어진 것들은, 분개하여 열통을 터트리는 필영의 뒤통수로 이번엔 경성의 손바닥이 날아왔다. 정확히 알지는 못해도 어렴풋이나마 팔자 피고 있는 중인 현 학정의 상황을 희완의 복귀와 더불어 추측하고 있는 경성은 속으로 눈치도 없는 놈이라고 욕을 바가지로 퍼부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극단 접는 한이 있더라도 드러운 짓은 않겠다던 대쪽 같은 놈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놈이 생각을 바꾼 데에는 그만한 고민이 있었을 것이고 이 지경이 되어서도 정 굽힐 기미가 안 보였다면 아마 경성이 먼저 나서서 학정에게 펀치를 날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극단까지 접는 마당에 못 할 짓이 뭐 있겠는가. 그만큼 극단 형편이 좋지 않았었다. 익명의 후원자가 나타나기 전까진, 그게 익명인지조차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희완이 따라와라.”
이유도 모르고 발끈하는 필영에게 다른 말을 던져 금세 화제를 바꾸는 경성의 싱글거리는 뒤통수를 힐긋 쳐다본 학정이 막걸리 사발을 다 비우곤 희완이 누룽지를 비우길 기다린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담배를 물며 나가는 모습에 다들 그러려니 하며 각자 이야기꽃을 피우며 술잔을 비우기에 바빴고 희완 역시 군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촬영 끝내면 강명 선생 찾아가 봐라.”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툭 던져진 말에 희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잘못 들은 건가 했는데 학정의 얼굴을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4월 초부터 산사 들어가신다더라.”
아주 들어가진 않더라도 아침저녁으로 물살 타신다니 같이 가서 수발이라도 들면서 배울 거 배워 오라는 학정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주머니에 있던 사탕 하나를 까서 희완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극단 오는 대신 그쪽으로 출퇴근 하면 되는 일이라 대수롭잖게 덧붙이는 말에 느리게 희완의 고개가 숙여졌다. 제 앞에서 일부러 학정과 통화를 하는 남자를 보면서 확신을 하게 되었다. 학정 역시 남자와 희완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것을.
“몸 좀 잘 챙기고, 얼굴 꼴이 그게 뭐냐.”
하며 벌어진 코트 깃을 한 손으로 꽉 여며주는 학정이 불씨를 끈 담배꽁초를 낡은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드륵 미닫이문을 열고 다시 소줏집으로 들어섰다. 그 등을 물끄러미 넘겨보던 희완이 찬 손으로 얼굴 어딘가를 문질렀다. 입안에서 가만 굴려지는 사탕이 달았다. 아직 제 통장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일억 오천이라는 숫자가 무겁게 희완의 신경에 가라앉았다.
다 됐습니다. 하는 소리에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희완이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엎드린 희완의 밑에서 상처를 보아주던 남자가 자질구레한 것들을 치우며 침대에서 내려서는 게 보였다. 내내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입 밖으로 꺼내어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거절할 명분이 없어서였고, 그 명분이 필요하다는 것에 스스로 쉬이 납득되지 못해서였다. 받기만 하는 주제에 이것저것 가려 받을 처지도 못되면서. 그보다 남자가 왜냐 묻는다면 할 말이 없어서였다. 그냥 싫다는 말은 이유가 될 수 없고 사실도 아니었다. 희완은 남자에게 받는 것이라서 싫은 것이었다. 그걸 사실대로 말할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이리 망설이는 것이다.
헐은 것이 거의 아물어 가는 밑에 치덕치덕 바른 약이 마르길 기다린 후 바지를 끌어올리는 희완이 열린 방문을 통해 거실로 나갔다. 귀가가 조금 늦었던 희완이 현관으로 들어섰을 때 남자는 피트니스룸에서 한참 늦은 운동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무섭도록 건장한 몸은 선척적인 것을 제외하고도 꾸준한 운동으로 유지가 되는 것이었다. 방해하기 싫어 씻고 나오니 막 운동을 끝내고 나와 땀에 젖은 남자의 몸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역동하고 있었다. 마시던 생수병을 내려놓고 젖은 셔츠를 벗으며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가 벌거벗은 희완을 덮치듯이 입술을 훔치곤 곧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
쏴아- 닫히지 않은 문을 통해 들려오는 물소리를 듣고서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희완이 뜨거운 것이 닿았던 입술을 더듬으며 옷을 걸쳐 입고 소파에 앉았다. 물소리가 끊길 때마다 긴장을 하며 괜히 들고 있던 극본을 넘기던 희완이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남자를 마주했을 때 그는 대수롭잖게 약을 바르자며 희완을 끌고 침실로 들어갔다. 마른 침을 삼킬 새도 없이 아랫도리가 벗겨져 침대에 엎어진 희완은 밑을 벌리고 들어오는 차가운 감촉에 한참 익숙해지고서도 몸서리를 쳐야했다.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온 남자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희완을 발견하곤 의아한 눈초리를 보내었다.
“자정입니다.”
희완의 손에 들린 극본을 발견하고도 늦었으니 그만 자라, 그리 뱉는 남자가 성큼 다가와 희완의 맞은편에 앉았다. 다리를 넓게 벌리고 앉아 등을 소파에 기대는 남자의 몸을 멍하니 응시하던 희완이 뒤늦게 펴놓고만 있던 극본으로 시선을 옮기다 손바닥으로 꾸욱 입술 께를 눌렀다. 당연하게도 글자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중 안 되면 그만 들어갑시다.”
타이밍 좋게 해오는 말에 달리 대꾸할 말이 없어 결국 극본을 내려놓는 희완이 먼저 앞장서가는 남자의 뒤를 따라 침실로 들어섰다. 그 이후로 남자와의 직접적인 성관계는 없었으나 만져지고 문질러지는 것은 더 농도가 짙어졌다. 입을 맞추는 건 예사였고 몸을 비비적거리는 것 또한 일상이 되다 못해 거의 체화가 된 것 같다. 먼저 이불 밑으로 들어가 불을 끄고 들어오는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보던 희완이 제 목 밑으로 파고드는 남자의 팔에 슬쩍 고개를 들었다.
“할 말 없습니까.”
묻는 말에 입술을 달싹거리던 희완이 기어이 고개를 저었다. 불이 꺼져 있어 제 얼굴을 그가 못 보는게 다행이라 여기며 작게 한숨을 쉬는데 얇은 면 티 안으로 남자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또 가슴이라도 문대는가 싶어 살짝 긴장을 하는데 그 손은 넓게 뱃가죽을 덮으며 그곳을 문질러주기만 했다.
“아직도 탈 난 것처럼 아픕니까.”
베란다에 있는 동안 소파에 앉아 배를 문지르고 있는 걸 보기라도 한 건지. 선선히 물어오는 말에 그런 것 같다고 답하는 희완이 차가웠던 뱃속이 점점 따뜻해져오는 것 같은 감각에 느리게 숨을 뱉어내었다. 병원 갈 정도는 아니라고 하니, 봅시다. 하는 남자가 계속해서 배를 문질러주며 입을 맞춰왔다. 너무 좋았다. 희완은, 역시 너무 좋다는 생각이었다.
* * *
40분 늦어서 죄송합니다! 완결 끝이라 그런지 마음이 좀 그랬어요. 다음 편은 얼른 들고 올게요. 부족한 글 예뻐해주시는 모든 독자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
* 학정 단원들 술 자리 이후부터 봐주세요. 중간에 단락 하나 추가했습니다. ^^;
그리고 꼬리말 상단에 추가한 알림도 확인 부탁드립니다. 곧 41편으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