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머무는 계절 (Just Smile)
잔뜩 찌푸려져 있던 미간을 움틀 거리던 우진이 눈을 떴다. 커튼을 닫아놓아 어두운 방안이 익숙해지도록 오래 눈을 뜨고 있다 시선을 돌린다. 머리맡에서 팔짱을 끼고 앉은 희완이 꾸벅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동그란 정수리에 든 가마까지 확연해지고서야 상체를 일으키는 우진이 마른 목을 더듬었다. 기분이 오락가락 하는 시기였다. 괴팍해져간다는 게 더 맞겠다. 어젯밤 희완과의 설전은 엉망이었다. 니 탓이니, 내 탓이니, 니가 그랬느니, 내가 그랬느니, 네다섯 먹은 애들도 그리 유치하게는 싸우지 않았을 터였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은 우진이 색색거리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꼭 저같이 잠들어 있는 희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큰 소리 내는 걸 오랜만에 본 것 같다. 숫기 없는 놈이 자리만 깔아주면 신명나게 뛰노는 것이 신기하고 재밌어 내내 시선을 놓을 수 없었다. 그리 좋으냐, 물으면 땀에 젖어 해사해진 얼굴로 하하 웃는데 이는 바람이 참 청명하다 싶었다.
뭘 해도 수더분한 놈이, 차라리 이 바닥에 들지 않았으면 그럭저럭 살아갔을 놈이, 그 안의 신을 제대로 활개 한번 쳐보지도 못하고 꺾여 틀어진 모습을 보자니 속에서 천불이 이는 것도 같았다. 이 바닥에 기어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차라리, 검은 물이라도 조금 들여 놓았더라면, 그리 꺾이더라도 화득하게 꺾이지는 않았을 텐데. 오냐오냐 애지중지 한 탓이 컸다. 그럴 능력도 없는 주제에 너무 바르게만 키워놔서, 그 대가를 희완이 치르고 있는 것이다. 당연하다. 본인의 선택이니 본인이 그 책임을 지는 게 맞는 일이다. 그러나 희완 같은 녀석에게 학정이란 환경은 좋지 않았다.
“물을 들여 놓을걸 그랬지.”
잠 귀 밝은 놈이 그새 눈을 떠서 우진을 본다.
“여기서 왜 이러고 있냐.”
“……잠이, 안 와서.”
“너도 잠자리가 곤욕인가 보지.”
물끄러미 아직 초점에 채 맺히지 않은 눈으로 우진을 빤히 응시하다 손끝으로 눈가를 문지른다.
“꿈을 꿔.”
“시커멓고, 캄캄하고, 막막하고, 아득하지.”
“견딜 만 해.”
“언제까지 견딜 만 할 것 같으냐.”
약은 싫다고 했다. 버틸 때까지, 끝까지 버텼다. 제정신으로 늙은이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건 할 짓이 못되었지만 다음날 멀쩡히 배우 도우진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견뎌야 했다.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곳에서 웃고 울고 떠들면 약간의 피로가 가셨다. 원해서 온 자리였지만 우진은 단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뒤에서 손가락질을 하고 욕을 하면서도 앞으로 돌아 나오면 그렇게들 나긋나긋하고 친절할 수가 없다. 그런 것들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어수룩하지도 나약하지도 않았다. 병신들, 냉소하며 더욱 고개만 빳빳이 쳐들었다.
네가 주는 돈은 내가 나자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받지 않겠다. 우진의 후원을 단칼에 거절한 학정에게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개새끼. 죄책감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우진은 성공하고 싶었고, 그 무슨 짓이 용납이 안되는 게 학정이었다. 오래전부터 충돌이 있었다. 그 사건은 그저 계기에 불과할 뿐이었고 우진은 어쩔 수 없다면 스스로 물들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것이 강간으로 시작되었지만 종반엔 우진도 반항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제 위에서 헐떡이며 지껄여대던 하준우의 베갯잇 송사를 흘리며 우진은 좀 더 높은 곳을 그렸다. 어차피 더럽게 시작된 마당에, 더 얌전빼고 있을 까닭이 없었다.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우진은 저에게 좀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뒤도 안돌아보고 달려가 안겼다. 더럽게 뒹굴었고, 그에 대한 어떤 도덕적 회의나 가책 따위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왜 그랬더라.
문득, 허탈감이 밀려들기라도 할라치면 스스로 늙은이에게 기어 들어가 인간 편육이 되곤 했다. 이렇게 대가를 치르는 거다. 원하는 게 있으니 가진 걸 내어주면 된다. 멋대로들 지껄이라지. 나는 내가 내어주는 만큼만 가져가는 거야. 그렇게 학대하듯이 스스로를 쌓아갔다. 결국은 갉아 먹히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로. 우진은 끝없이 떨어지기 위해 오르고 있었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꾸는 꿈은,”
잠시 말을 멈춘 희완이 앙상한 뼈마디를 드러내고 있는 우진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길쭉하고 날렵해서 무척 보기가 좋은 손이었었다. 그걸 떠올릴 수 없이 볼품없어진 손을 내려다보다 다시 입을 연다.
“그 사람하고는 관계가 없어.”
오히려,
“형, 나는 그 사람을 밀어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어.”
이렇게 편한데, 원하는 걸 조금이라도 더 이룰 수 있는데, 날- 원한다는데.
“어딘가, 이상해진 거지?”
흰 얼굴로 스친 불안함을 읽어낸 우진이 말없이 어두운 표정을 드러낸다.
“그 짓을 하고나면, 이틀은 제정신으로 돌아오기가 힘들었어. 적어도 이틀은 말이야.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좋아지기는커녕 악화되기만 해서 어느 순간부터는 그 짓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일만큼 스스로가 조절이 안됐었다.”
자금운용이 어려워진 이후로 발길이 뜸해졌던 한물 건설 사장은 그나마 양반에 속했다. ST 백화점 이사는 태 그룹 손녀로 말버릇이 고약한 이상성벽자였고, EL신문사 회장은 술만 처먹으면 우진을 불러다 골프채며 벨트며, 손에 잡히는 대로 휘둘러 며칠씩 병원신세를 지게 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총수 늙은이는, 관음증에 환장한 쥐새끼였다. 처음엔 한 명으로 족했다. 이 길로 들어선 뒤 오랜만에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다 생각하며 우진은 제법 즐기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하나가 서넛으로 늘고, 서넛이 열댓으로 늘고, 화간이 강간으로, 또 그 강간이 윤간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심신이 엉망이 되어갈 수록 늙은이가 지불하는 화대 또한 어마어마해져만 갔다. 제 이름으로 된 외제차를 받았고 건물을 받았고 증권을 받았고 주식을 받았다. 눈앞에서 쌓여가는 현물을 보며 우진은 허탈하게 웃었다. 쓸 곳이 없었던 탓이다. 받아주는 곳도 없고, 원하는 곳도 없다.
사창가에서 싸구려 창녀와의 씬을 찍던 중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지 못해 속을 게워내고도 한참을 화장실 구석에 처박혀 나오질 못했었다. 처음으로 약을 받고 개처럼 굴려지고 난 후였다. 걱정스런 얼굴로 우진을 찾아왔던 스태프를 맞닥뜨린 우진은 더 사고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괜찮냐고 물으며 요사스럽게 휘어지던 눈매가 혼탁한 시선으로 엉겨들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스태프가 누군가와 키득거리며 우진에 대해 늘어놓던 음담패설들만 단편적으로 기억할 뿐이었다. 얼마나 고귀한 좆이기에 높으신 분들이 껌뻑 죽는지 한번 맛이라도 보고 싶다고 했었지.
팔뚝을 끌어당겨 화장실 벽 구석으로 몰아넣고 입술을 물어뜯었다. 풍만한 가슴을 터트릴 것처럼 주물럭거리며 바지를 끌어내렸다. 반항하는 듯하던 여자가 동조하는 걸 느낀 순간 그대로 뒤집어 벽에 얼굴을 눌러 놓고 시커멓게 발기한 것을 음부에 밀어 넣었다. 전희 없이도 젖어 들어간 음부에의 삽입은 손쉬웠다. 흥분해 엉덩이를 흔들던 여자의 머리채를 휘잡아 고정시키며 닥치라고 했다. 입술을 깨물고서도 끊임없이 흘리던 그 교성이 마치 제가 흘려내는 것만 같아 듣는 귀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음부에 처넣던 걸 뽑아내고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 밑으로 끌어내려 그 신음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입에 살덩이를 처넣었다. 그래도 컥컥거리며 질척거리는 소리. 닥쳐, 닥쳐, 닥쳐, 닥치란 말야! 뺨을 맞은 여자가 겁에 질린 얼굴로 울먹거리며 우진을 쳐다보다 화장실을 뛰쳐나갔다. 그걸 붙잡지도 않고 채 사정도 하지 못한 좆을 두 손으로 붙들고 우진은 자위를 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상태에서 정액이 튀어나올 때까지 소리를 죽이지도 않고 짐승처럼 절정을 탐했다.
강간당했다고 주장했던 여자 스태프는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영화촬영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고 그 후로도 촬영장에서의 섹스 행각은 계속되었다. 남자, 여자 가리지 않았고 더 바뀔 스태프들이 없을 지경이 되어서는 촬영을 중단하고 직접 업소로 찾아들어갔다. 촬영장 분위기는 최악이었고 출연배우는 물론 감독도 필요한 말 외에는 우진에게 말 한마디 붙이지 않았었다. 우진의 대기실이나 벤에는 콩고물이라도 떨어지길 바라는 사람들로만 득시글거렸고 우진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화대로 받은 돈들이 하룻밤 만에 소진되었고 화류계 종사자들 가랑이 사이로 기어들어갔다. 그러다 늙은이에게 불려가 영혼까지 부서져 나오길 수없이 반복했다.
“몸이 길들여지면 제대로 된 사고조차 어려울 정도로 머릿속은 개판이야.”
원하지 않아도 타인의 몸을 원하게 되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몰아붙여지는 끔찍한 쾌락에 중독되어 스스로 가랑이를 벌리며 허리를 흔들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강간이나 윤간이 아니라 화간이 되어 그 짓에 환장한 몸 걸레가 되는 셈이다.
“그 짓이 좋으냐?”
“…….”
“그 자식이랑 하는 그 짓이 좋아 환장하겠어?”
“응, 그런 것 같아. 그 사람 생각만 나. 시도 때도 없이, 그런- 생각만 해.”
솔직한 답변에 잠시 말문이 막히는 듯한 얼굴을 하던 우진이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목소리만 떠올려도, 흥분해. 키스만으로도 가버릴 때도 있어. 원래, 이런 거야?”
“…….”
“내가, 이런 짓을 많이 해서 몸이 저절로, 제 멋대로 반응하는 거야? 난 잘 모르겠어. 다른 사람하고 자 본 적이 없으니까. 이런 반응이 정상적이지 않은 건지, 난 몰라. 형 말대로 그 짓이 좋아, 환장한 거라면, 다른 사람하고도 이런 반응을 보여야 맞는 거지?”
참담한 음성이었다. 그 말대로라면,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하고 몸을 섞어보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차마 그 짓은 못하겠다는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희완의 팔뚝으로 앙상한 손이 뻗어왔다.
“그 자식이 좋아?”
가만 고개를 가로젓는다.
“좋지 않을 이유가 없어.”
무뚝뚝하고 무신경하고 냉담한 것 같지만 이제 그 손이 다정하다는 것을 희완도 모르지 않는다.
주고받고 하는 관계라 이런 감정들이 왜 중요한지 모르겠지만, 남자가 바라는 것 같아서, 희완은 좋아해보기로 했다. 도무지 똑바로 서지 못하겠는 바닥이라, 사실 남자를 필요로 한 건 희완이었다.
네가 그 짓이 좋은 이유는 길들여졌기 때문이라는 우진의 말을 부인할 수도 없다. 때와 장소에 구분없이 발정하는 스스로를 돌이켜보면 그 말이 사실인 것 같기도 했다. 남자가 이제껏 과분하게 베풀어왔던 호의를 단순히 화대 논리로 치부하기엔 매우 불공평하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지만 애초 대등한 입장에서 시작된 관계가 아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남자의 도움 없이는 불완전하다. 남자는 희완을 원하고 있다. 줄 수 있으니 주는 것이고 받길 원하니 받는 것이다. 이 고리를 어떻게 부술 수 있겠는가. 널 원한다던 남자의 말은 육체 외에도 모든 것을 원한다는 말로 읽혀졌으니 희완은 그러겠다 했다. 그리해야만 그의 자비와 호의를 받을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런 까닭에 좋고 싫고의 여부는 사실 아주 의미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걸 알자고 다른 사람과 몸을 섞는 짓은, 우스운 일이었다. 그게 싫어 남자에게 다리를 벌린 건데, 그걸 확인하자고 다른 사람에게 다리를 벌리겠다니,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또한 그걸 남자가 온전히 용납할지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다른 방법으로 욕구해소를 하라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진심으로 잡아먹히는 줄 알았던 게 최근이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인한 조그마한 흠집도 싫어 눈살을 찌푸리는 남자의 소유욕을 희완은 몸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가 필요해.”
왜 필요하느냐고 우진은 굳이 묻지 않았다.
도와주고 싶었다. 업자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무대에서 끌어내려졌다는 희완에게 온갖 욕설을 뱉으며 분통을 터트리던 하준우의 면상을 후려갈기고 그걸 가만 보고 있었냐고 따지기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우진은 이미 바닥이었다. 그 시커먼 바닥이 폭로될까 벌벌 떨며 하준우의 발바닥이라도 핥아야 했던 때였다. 우진이 윤간 당하는 장면을 보며 희락으로 눈을 번뜩이던 늙은이가 직접 손에 회초리를 쥐어주며 제 딸을 후려치라 했을 때 우진은 정신이 으깨어지는 것만 같았다. 치지 않으면 네놈 엉덩이를 까서 치겠다는 소리에 회초리를 들었다. 윤간 당하기 직전의 아들을 고깃덩어리로 밖에 보지 않던 늙은이에게 울며불며 매달리던 손주들을 보며 우진은 바르르 떨리는 손을 움켜쥐어야만 했다. 건방지게 굴 것 없다는 경고나 다를 바 없다. 친 혈육조차 버러지 취급하는 늙은이가 진짜 버러지인 우진을 두고 봐주는 까닭은 그 몸뚱이 하나밖에 없으니, 알아서 기라는 경고를 우진은 벌벌벌 떨리는 몸으로 절감해야 했다.
결국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우진은 충격을 받을 신경조차 남아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널 언제까지 필요로 할 것 같아.”
우진에게 하나 남은 마지막 조각까지 빼앗아들려 했다.
죽어도 안 된다 했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흠씬 두들겨 맞고, 밑창이 헐도록 폭행을 당해도 우진은 필사적으로 버텼다. 그 결과 늙은이에게 미운털이 박혀 잡것들한테까지 한바탕 내돌려지고 마약사범으로 입건되고 인간쓰레기가 되었지만 그걸 포기하지 않은 걸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그러나.
“나 때문이라면 관둬.”
어두워지는 희완의 준수한 얼굴을 본다.
“학정 때문이라면 집어 치워.”
아무런 아집도 고집도 보이지 않는 검은 눈은 때때로 가슴 뛰게 영롱한 것이어서 불이 꺼진 지금이 스산하기까지 하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살고자 하면 어떻게든 살아지는데.”
정신이 닫힌 어느 순간 학정의 이름을 불렀는가 했다. 눈을 뜨니 드물게 흥분한 얼굴의 늙은이가 학정의 이름을 언급했다.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무방비상태에서 던져진 비수는 물을 흐려놓기 마련이었다. 그놈과 엎어져 발정 난 꼴을 봐야겠다기에 처음엔 코웃음을 쳤다. 이젠 하다하다 그 산도적 같은 놈까지 상대해야겠냐며 냉소하던 우진의 손끝이 떨리기라도 했나보다. 늙은이는 집요했고 우진은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성공하고 싶어 미치겠는 거 아니면 지금이라도 관둬.”
길길이 날뛰는 우진에게로 재떨이가 날아왔다. 제 손 쓰기도 아까워 고용인들을 시켜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우진을 넝마처럼 잘근잘근 밟아 놓았다. 그 입에서 좋다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온갖 폭행을 자행했다. 그대로 딱 죽는 게 아닌가 싶은 순간 병원으로 옮겨졌다. 며칠 후 마약사범으로 입건됐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깁스도 풀지 못한 상태에서 끌려가 검찰조사를 받았다. 해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준우에게 목줄 잡힌 개처럼 이곳저곳 내돌려지며 우진은 본보기를 당하고 벌을 받는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진에게서 알았다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철저하게 굴릴 의도였다.
그렇게 잔인무도하다. 언제 어떻게 돌아버릴지 모르는 족속이었다. 지금 애지중지한다고 평생 애지중지한다는 보장 없고, 필요 없어졌다고 얌전히 돌려보낼 보장 없다.
“거기가 어디라고,”
차마 말을 끝까지 맺지 못하는 우진이 바르륵 손을 떨었다.
저야 원해서 기어들어갔지만 희완은 그런 곳이 있는 줄도 모르는 상태에서 마구잡이로 끌려 들어갔다. 그나마 버틴 것도 용하다는 생각이다. 산지옥이나 다름없는 거길 그렇게 힘들게 빠져 나오고서도 저 때문에, 정 때문에, 또 무엇 때문에 다시 기어들어온 희완을 욕할 수도 없다. 어딘가 망가져 있어야. 어딘가 망가져 있어서.
“미안하다.”
희완의 팔뚝을 잡은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기 시작했다. 희완이 아니었다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었을지 우진은 장담하지 못했다. 견디다 못해 찾아온 학정을 끌고 다시 그 시커먼 구멍으로 기어 들어갔을 터였다. 그렇게도 바라던 구원을 희완의 손을 통해 받고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비참하고 참담하다. 이렇게까지 살아야 할 이유가,
“필요 없어.”
떠는 우진을 말없이 바라보던 희완이 제 손을 겹치며 다시 한 번 목울대를 울린다.
“그런 거, 없어도 돼.”
그냥 살면 돼. 그냥 살아도 되는 건데.
“형.”
손을 뻗어 우진의 등을 둘러 안는 희완이 그 앙상함에 새삼 몸을 떨며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가지 마.”
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가지 마아.”
누이에게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어 하지 못한 말이었다.
「긴 세월 허구한 날 어느 골목을 헤매고 다녔더냐. 바람 차고 어두운 밤인들 어느 한데다 의지를 삼았더냐…….」
구부구부진 골목을 그 빈한한 몸 하나 의지처 삼아 그리 한들한들 휘청휘청, 날 짐승도 쉴 곳 있을 진데, 어디 그리 비바람 하나 피할 곳 구하지 못해 구슬피 울며 날아가더냐.
사무실 구석에 앉아 낡은 노트를 읽어 내리던 희완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 그림자를 아름드리나무처럼 드리우고 있는 학정이 푸릇한 수염이 돋아난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무어가 못마땅해 그러나 했더니 제 앞으로 펼쳐지는 손을 보고 그제야 들고 있던 노트를 그 위에 내려놓는 희완이었다.
정신없이 갈기다가 펼쳐 놓은 것도 잊고 어딜 뛰어갔다 온 학정은 그걸 보인 게 영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펼쳐져 있기에 그냥 본 건데, 본의 아니게 실례를 저지르게 된 희완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죄송하다 한다. 됐다 하는 학정이 든 노트를 책상 구석에 던져 놓고 먼저 사무실을 나섰다. 마침 오전 연습시간에 맞춰 들어서는 단원들로 인해 조용했던 연습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시끌벅적해지고 있었다.
계약서를 받아든 남자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유심히 그 내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난감하다거나 곤란한 기색도 없이 계약서를 술술 읽어 내려가던 남자가 나쁘지 않습니다. 하는 소리에 희완은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럼 이대로 진행해도 되겠냐는 물음에 빤히 희완을 쳐다보다 입만 맞춰 왔었다. 희완은 그것을 수락의 의미로 해석했다. 어쩌면 남자는 이미 이 계약서의 내용을 다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중요한 사실은 아니라는 판단이다.
학정을 통해 내려왔다지만, 남자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희완이 갑자기 이렇게 큰 광고를 덥석 도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후원이었다. 아마, 그럴 것이라는 추측이다. 보조출연으로 알고 찾아간 강영희 대리와의 첫 만남에서 희완은 놀라는 것도 잠시 그 상황을 빠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상냥하게 대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저를 관찰하는 듯하던 그녀의 시선도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학정을 향한 모든 후원, 남자일 수밖에 없는, 그 익명의 후원이 남자의 호의나 배려가 아니라 부담으로 느껴지는 것에도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
기다려주겠다는 남자의 뜻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하는 게 아니라 그것 역시 호의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었다. 남자에겐 인내와 시간을 들여 희완을 기다려주어야 할 까닭이 없었다. 모든 걸 원한다며 그리 내건 조건이었지만 그것 역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배려다. 남자는 마음 내키면 언제든 희완을 가질 수 있고 욕심껏 마음도 요구할 수 있다. 그가 절실하게 필요한 건 희완이었고, 희완은 이미 그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몸이 달았으니, 이 정도면 그도 납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희완은 아무 때고 그 생각에 발정하는 이 몸이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다 했다. 아무 쓸모도 없고 괜한 분란이나 일으키고 연기에도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이 외모가 희완은 끔찍하게 싫었었다. 아니, 이것이 있기에 남자에게 화대라도 받아 간간이 연명이라도 할 수 있었을 터다. 복이었다. 이것도, 복이라면.
갑자기 숨이 모자르다는 감각에 희완이 손바닥을 모아 입을 가렸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흐려지는 눈앞을 멍하니 쳐다본다.
우진에게 맞아 터진 입술을 가만히 문지르던 남자에게서 얼핏 화난 기색을 읽었다.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혀를 내밀어 그의 입술을 핥았다. 머리가 비상한 남자는 희완의 얕은 수를 알면서도 순순히 넘어가 주었다. 화를 내는 대신 또 혀가 닳도록 살을 빨리며 희완은 발기를 했고, 제 밑에서 단단해져가는 남자의 것을 의식하고 나른하게 몸을 움직였다. 서툴렀지만 그것으로도 남자의 반응은 확실했다. 비비는 것으로 남자의 절정을 끌어내고 희완도 정신없이 흔들리며 토정을 했다. 머릿속이 뜨거웠고 흥분한 몸 역시 절정의 여운을 이기지 못하고 내내 헐떡여졌다. 등을 쓸어오는 남자의 손바닥을 음미하듯 숨을 토해내며 희완은 여기서 더 하지 못할 게 무엇이냐는 생각을 했다. 이 정도로도 기분이 좋고, 몸이 안달인데, 더 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광고 촬영까지는 아직 열흘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열흘이면 남자가 남길 흔적이 사라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연습 후 회식을 마다하고 양해를 구한 희완이 일찍 귀가를 했다. 당분간 관장은 하지 말자는 남자의 목소리가 귓전에 잠시 맴돌았지만 희완은 깨끗이 씻은 밑에 관장액을 주입했다. 오랜만이라 금방 쏟아져 나오려는 것을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가며 최대한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고 20여분 만에 속을 깨끗이 비워냈다. 그간 영양상태가 좋아진 건지 관장을 하고도 아찔하다는 감각은 없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조금 새삼스럽기도 했었다. 한참일 때의 영양상태가 그렇게 안 좋았구나 하는, 그런 영양가 없는 깨달음이었다.
관장을 마치고 몸의 긴장을 풀기 위해 따뜻한 물에 샤워를 마치고 나온 시간이 밤 아홉시였다. 남자의 귀가 시간까지는 약 한 시간 정도가 남아있어 희완은 극본을 가져와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소파에 웅크리고 앉았다. 째각째각, 거실 측면에 걸린 괘종시계의 초침이 유난히 크게 들려 극본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들고 있던 걸 내려놓은 희완이 자리에서 일어나 괜히 넓은 거실을 서성였다. 찌르르, 따가울 정도로 빈 속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문지르며 온실과 복층 서재를 오가며 왜인지 초조하게 시간을 보내던 희완이 살짝 어깨를 굳혔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에 이어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거실 한쪽에 서서 시계를 올려보고 있던 희완이 현관을 돌아보았다.
검은 코트로 건장한 체구를 감싼 장신의 남자가 구두를 벗으며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 *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