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33화 (33/123)

별이 머무는 계절 (Just Smile)

미팅은 순조로웠다.

학정 소속이긴 하였으나 전문 매지니먼트가 아닌 극단이었기에 따로 이런 걸 관리해주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희완은 혼자 나와 있었다. 정식으로 계약을 맺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준우 때는 말 그대로 돈으로 팔려간 거나 다름이 없어서, 희완은 제대로 계약서를 확인조차 못했었다. 업자들이나 남자와의 관계는 말할 것 없고. 실질적으로 돈이 오가는 계약서를 직접 육안으로 확인하고 설명을 듣고 재차 의사를 타진하고 설득 받고, 그런 절차를 밟아 계약을 맺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마치 그런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하는 듯, 역시 혼자 나온 영희 역시 꼼꼼하면서도 알아듣기 쉽게 계약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6개월 단기 계약, 약관 확인 후 동의하고 날인하면 계약금 일억 오천 일시 지급, 브랜드 메인 화보집 광고 계약만으로 받는 금액이었다. 촬영 기간은 하루 최대 일곱 시간씩 5일, 촬영에 관련된 모든 부대비용은 광고주 측에서 부담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쯤 되면 업계에서도 실로 파격적인 대우랄 수 있겠지만 그쪽 생리에 익숙하지 않은 희완이 실감할 리 없었다. 안 그래도 신상품 피크로 바쁜 시즌에 카탈로그 촬영에 일주일씩이나 할애해가며 하루 최대 일곱 시간밖에 촬영을 않겠다는 소리는 사람 피 말려죽이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지만 그쪽에서 정확히 짚어 요구해온 사항 중 하나였다. 말로는 모델에게 최상급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라지만 우리 애 쓸데없이 고생시키지 말란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게다가 이제 첫 광고를 찍는 무명 배우에게 차후 보상 조건 없이 계약금 일시 지급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대형 기획에서 검증 안 된 모델을 기피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가 언제 어디서 스캔들이 터질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증권가 찌라시가 괜히 있는 게 아니고 연예계 엑스파일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계약서엔 그에 관한 보상 조건이 전혀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막말로 희완이 사고를 쳐서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받고 그 명성이 실추가 된다 해도 6개월 광고는 변함없이 유지되며 모델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자칫하면 독박 쓰는 결과가 될 수 있음에도 개발 2부장의 지휘 아래 허 팀장은 계약을 진행 시켰다.

뒷조사로 나온 희완의 과거 행적은 아직까진 쏘쏘 정도였다. 이런저런 뒷소문이 도는 것 같기도 했지만 실질적으로 드러난 문제나 논란거리가 될 만한 소스가 마구잡이로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 좁은 연극판에서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 또한 철수에겐 골칫거리였지만 고작 광고 하나 따주겠다고 어마어마한 돈을 들이는 인물이 스폰서였다. 그 흔한 생색조차 내지 않는다. 천박하게 돈 바리바리 싸들고 쫓아와 계급으로 찍어 누르기나 하는 여느 스폰서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번 일도 얼마든지 압력을 주어 모델만 갈아 치우는 식으로 안하무인일 수 있었는데 부서에도 당근을 던져주었다. 당근이 아니라 당근 밭이다.

대리인이랍시고 찾아온 변호사가 일일이 짚어 계약서를 작성한 말미에 눈에 띄는 특별대우는 바라지 않는다는 말에서 많은 걸 읽어낼 수 있었다. 이 터무니없는 후원이 동의하에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과 키다리 아저씨 흉내 내는 게 누구든지 간에 무명 배우 욕 안 먹이려고 상당히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스폰서가 붙으면, 거기다 그 스케일이 남다르기라도 하면 그 수혜자는 콧등을 머리에 이고 다닌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행실이 좋은 인물을 몇 보지 못했고 그로 인해 먹은 욕이라면 단명할 인물이 하나 없었다. 화무십일홍이라고 그것도 끈 떨어지면 소용없는 걸 아는 몇몇은 그래도 여우같이 굴기도 해 나중에라도 아주 찬밥 신세는 면하는데, 그게 또 흔한 타입도 아니었다. 쉬운 일도 아닐 테고. 돈 많고 빽 좋은 놈이 어화둥둥 내 새끼 싸고돌고 주변에서는 다들 알아서 설설 기는데 멘탈 멀쩡할 인물이 어디 있겠나. 그 대표 격인 도우진과 같은 소속 출신이라니, 이쪽도 보통 인물은 아닐 것 같고.

“지금 당장 계약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전문가와 의논할 시간을 가지셔도 좋고, 좀 더 생각할 시간을 가지셔도 좋습니다.”

스폰서가 그런 걸 걱정할 정도로 성격적 결함이 있다거나 인격이 쓰레기 같아 보이진 않으니 더 까다롭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됩니까. 하며 테이블 위의 계약서를 가져가 자세히 들여다보는 희완의 반듯한 이목구비를 응시하던 영희가 슬쩍 이맛살을 찌푸린다. 설마 플라토닉 사랑이라든가 그런 건 아니겠지. 저 부은 입술이 단순히 피곤해서 그런 거라든가. 하긴 그 키다리가 아저씬지 아줌만지도 파악이 안 된 상황이었다. 왜인지 정재계 거물급 인사가 스폰서로 튀어나와도 하나 놀랄 게 없다는 생각까지 드는 영희가 생긋 웃으며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를 권했다.

“커피가 다 식었네요. 이런, 따뜻한 걸로 새로 주문하는 게 좋겠어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실 것 없다며 서버를 부르려는 영희를 만류한 희완이 계약서를 내려놓고 커피 잔을 들었다. 미지근해서 맛이 없을 커피를 물처럼 꿀꺽꿀꺽 넘기고 내려놓은 손으로 습관처럼 목덜미를 문지르는 희완의 움직임을 은근히 주시하는 영희의 시선이 떨떠름했다. 눈에 띄게 패악만 안 부린다면야, 까짓 거 어느 정도 비위는 맞춰줄 수 있겠다 했는데, 이건 뭐 멀쩡한 외모만 차치하고 본다면 그냥 그 나이 대의 평범한 대학생 같다. 연극판 출신 특유의 넉살과 뻔뻔함은 어디 국 끓여 먹기라도 했는지 일순 냉담해 보이는 얼굴로 순진하게 웃기라도 하면 넘어갈 여자들이 수두룩이야 하겠지만 브랜드 정장 모델에게 요구하는 완숙미와 관능미를 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근처 어디서 몰래 지켜보고 있을 철수도 같은 의견일 게 뻔했다. 이거 여자라도 붙여줘야 하나. 경을 칠 생각까지 하는 영희가 생긋 웃었다.

“만나는 사람은 있어요?”

충동적으로 던진 질문에 의외로 유연한 반응을 보이는 희완을 보는 눈이 새삼스러운 것으로 바뀌었다.    

    

전문가라는 단어에 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그 자리에서 굳이 계약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에 양해를 구하고 하루 말미를 받은 희완이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며 입술을 눌렀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는데 부어 있던 입술에서 약한 통증이 느껴져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떼어 놓고 혀로 얼얼한 곳을 핥는다. 그러면서 계약서를 내려다보는 눈길은 여전했다.

학정에게 먼저 보여주고 결정을 내릴 일이었다. 일억 오천이면 건물 월세를 낮출 수도 있고 한동안은 월세 걱정 없이 지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계약금을 두고 제가 쓸 생각은 않고 극단에 쓸 생각만 하는 희완이 혀로 핥던 입술을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기어이 오늘 아침에는 피를 보고 말았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혓부리를 빨아 당기던 남자의 품에서 정신을 쏙 빼놓고 있었다. 양치질을 하던 중이었고, 어느 중에 출근 준비를 마친 남자가 욕실 문가에 서 있다 다가와 등 뒤에 바짝 붙어 섰었다. 입을 헹구게 했고 알싸한 치약 맛이 채 가시기도 전에 턱을 붙잡혀 그대로 파고드는 살덩이를 받아들여야 했다. 시도 때도 없는 입맞춤에 이제 희완은 거의 반사적이었다. 조금이라도 얼굴이 기울어지면 스스로 입을 벌렸고 혀를 내어주고 헤집어지는 것에 낮게 신음했다. 오늘 아침에도 그러했고 부은 입술이 터져 피가 난 것도 그것을 혀로 핥아오는 남자에 의해 알았다. 멍하니 있다 때때로 이런 것이 화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화급히 귓불을 붉히기도 했다.

어디, 밤일이라도 나가십니까. 피곤해서 그런 줄 알고 걱정스레 묻던 승원의 말에 쉽게 넘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야 괜찮지만 더 부어오르기라도 한다면 대사를 칠 때도 문제가 될 게 뻔했고, 보기에도 썩 좋은 모습은 아닐 터였다. 게다가 촬영에 들어가게 된다면. 흰 얼굴로 난감한 기색이 스친다. 이 진한 스킨십이 입술에서만 끝나는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좋을 지. 금세 귓불을 붉히며 후드를 뒤집어쓰는 희완이 버스 알림판을 올려보았다. 기다리는 버스가 도착하려면 아직 5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오후 시간대 임에도 오가는 차들로 북적거리는 빌딩 밀집지역 중앙선 버스 정류장은 또 다르게 한산했다. 약속 장소를 이쪽으로 잡고 한동안 발길을 두지 않았던 빌딩숲으로 들어서면서 희완은 조금 생경한 감정을 익숙하게 느껴야 했다. 무채색 계열로 무장해 입은 성인들이 무표정하거나 냉랭한 얼굴로 바쁘게 돌아다니는 공간은 대학로와는 확실히 공기가 다른 장소였다. 스스로가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기분은 당연했다. 대학로로 돌아왔던 초반 무렵 남자에게 종종 불려다니기도 했던 때에도 느꼈던 감정이라 낯설진 않아도 어색한 건 여전했다.

오후 무렵의 햇빛이 쨍 내려쬐는 빌딩 실내 커피숍에 앉아 영희를 기다리며 희완은 그 사무실로 뻗어 있던 복도를 떠올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던 저를 성가시다는 듯이 쳐다보던 여비서의 눈빛이 떠올랐고 한겨울의 것이라기엔 너무 밝고 눈부시기만 했던 햇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길게만 느껴지던 복도를 걷던 일을 기억했다. 무릎을 꿇고 남자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으려던 찰나 떨어지던 음성에 덜컥 제 심장도 같이 떨어진 것 같았었다. 그 무렵 그런 행위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어도 한낮 사무실에서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일 정도로 단련되었던 건 아니라서 더 무안해 하기도 했었다. 물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받았던 오십 만원은 희완에겐 단비였다.  

잠자리를 가지면 단순히 아래를 대주는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 산 채로 잡아먹혀지는 기분이었다. 일주일은 옷을 벗고 돌아다니지 못할 정도로 몸에 남긴 흔적이 많아 곤혹스럽기도 했었다. 그런 남자가 키스만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일체 다른 곳엔 손도 대지 않고 오로지 키스만으로 희완을 들었다 놓고, 스스로의 만족을 찾고 있었다. 오히려 이따금씩 아랫배가 뜨거워지는 희완 본인이 민망할 정도로 신사적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정중한 키스도 아니라, 잠결에 받다 발기라도 해서 사정 직전 눈을 뜨기라도 하면, 정말 딱 죽고 싶은 정도로 부끄러웠다. 다행히 자리를 피해주는 남자가 아니었다면 터지기 직전인 물건을 붙잡고 그 앞에서 정말 비참한 심정으로 자위를 했을 터였다.

한두 번 몸을 섞은 게 아닌 희완에게 남자와의 섹스는 익숙하고 감내해야할 의무인 건 사실이었지만 목석처럼 누워있거나 감흥 없이 벌려져 배출구 역할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때때로 진저리가 쳐질 만큼 한계까지 몰아붙여져 마치 일방적으로 전쟁을 치르는 듯 치열하고 극한의 행위에 가까웠다.

관계의 끝엔 항상 온몸이 욱신거렸고 힘없이 벌어진 아래는 남자의 것으로 흥건해 속을 눅눅하게 만들었다. 특별히 거칠게 시작하지 않아도 항상 끝은 비슷했다. 쾌감과 고통에 얼버무려져 정신없이 매달리는 희완을 강하게 안아오는 완력은 화강암처럼 단단하고 불길처럼 뜨거웠다.

불현듯 고개를 든 희완이 턱 끝을 당기며 손끝으로 입술을 덮었다. 아랫배가 저릿해졌다. 갑자기 왜.

물 흐르듯이 흐른 생각이 다다른 곳에서 퍼뜩 정신이 들어 마침 들어오는 버스에 서둘러 올라타며 미간을 찌푸린다. 당황스럽다. 엉거주춤 다행히 한가한 버스 뒤쪽으로가 좌석에 앉은 희완이 허벅지 위로 가방을 올려놓았다. 꼴불견이다. 대낮에 이게 무슨,

더할 수 없이 붉어진 귓불의 열기가 뺨으로까지 번졌다. 한손으로 후드를 눌러 내리며 고개를 숙이는 희완이 난감한 얼굴을 감추었다. 이대로라면 설 것 같다. 계속 떠오르는 남자의 뜨거운 손길과 숨결, 그리고 저를 눌러오던 관능적이고 육감적인 몸을 애써 떨쳐내려는 희완의 얼굴이 울상이었다.

애국가를 부르고 외우던 극본을 읊조리고 가나다라도 외워본다.

결국 두 정거장도 못가서 내린 희완이 가장 가까운 건물 로비를 가로질러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잠긴 문을 등에 지고 칸막이에 몸을 기댄 희완이 지퍼를 내렸다. 뜨겁게 올라온 살덩이를 손에 쥐고 신음이 새는 입에 셔츠를 물며 눈매를 일그러뜨린다.

아래가 뜨겁습니다. 벌리는 대로 벌어지니 들쑤셔지는 소질은 타고났습니다. 좋다고 벌름거리는 게 느껴집니까. 내 것을 이렇게 맛있게 집어 삼키는 것은 연희완 씨가 처음입니다. 이렇게 벌어져 있는데도 빨판처럼 엉겨 붙으며, 더 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끝까지 삼켜. 이젠 목구멍까지 벌려줘야겠습니까. 들쑤시는 것 말고도 방법은 널렸습니다. 나랑 놉시다.

벽에 짚은 팔등에 이마를 붙이는 희완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남자의 짙은 목소리가 뜨겁게 달아오른 머릿속을 직각으로 관통하고 있었고 부풀어 오른 가슴은 숨쉬기 힘들 정도로 두방망이질 쳐졌다.  

싸고 싶습니까. 여기가 젓가락도 드나들 만큼 벌어져 있습니다. 원래 크기대로 줄여야 싸는 걸 참을 수 있습니다. 내가 싸기 전에 싸버리면 좆물로 샤워를 하게 될 겁니다. 옳지, 이리 조여야 박는 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흐읏.”

낮게 신음을 흘리는 희완이 셔츠를 더욱 베어 물며 이마를 팔등에 문질렀다. 마른 침이 넘어가며 목울대가 출렁이고 속도가 더해갈수록 커지는 마찰음이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밖에 누군가 있을 거라는 두려움도 현재 희완에겐 아무련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오로지 남자뿐이었다. 남자가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에 남긴 흔적, 열기, 그리고 목소리뿐이었다.

어디까지 갈 것 같습니까. 그 값싼 가랑이가, 얼마나 하찮은 물건이기에.

물어뜯기고 싶어, 환장했나. 벌려. 구멍이란 구멍은 다 헐도록 들쑤셔 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같이 갑시다. 나랑 살자고. 진심입니까.

연희완.

허리가 들썩거렸다.

난, 너를 원해.

으읏. 거의 흐느끼는 듯한 신음을 흘리는 희완의 손놀림에 허리짓이 더해졌다.

키스, 합시다.

거의 오럴을 하듯 키스를 하던 남자의 뜨거운 살덩이를 떠올리는 희완이 탁탁 소리가 나도록 밀어 올리던 것을 꽉 붙잡았다.

“흐으으읏.”

울컥울컥. 간헐적으로 쏟아지는 것이 손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바르르 허리를 떨며 사정을 하는 희완이 식은땀이 묻어나오는 이마를 팔등에 문대었다. 흐릿해진 눈동자로 끈적끈적하게 엉겨 붙은 점액질이 스며들었다. 허억. 헉. 부푼 가슴을 진정시키려 가뿐 숨을 몰아쉬며 제 것으로 젖은 손을 내려다보는 눈길이 망연자실했다.

한참을 그것을 들여다보던 희완이 휴지를 둘둘 말아 손바닥을 닦아내고 바지춤을 올리고 옷매무새를 추스르며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미친 것 같다. 이 환한 대낮에, 다른 데도 아니고 공용화장실에서, 혼자 발정해서 끝내 파정까지 한 스스로가 짐승처럼 여겨졌다. 사정에 이은 허탈한 상실감과 끔찍한 자괴감에 입술을 씹어 무는 희완이 오가는 인기척이 없음에도 오랫동안 웅크려 있다 겨우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을 쭈뼛쭈뼛 둘러보고 서둘러 세면대로 가 손을 씻는 희완의 목덜미가 창백했다. 자위를 하며 떠올렸던 남자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비누칠을 하는 손끝을 떨리게 했다. 뽀득뽀득, 피부가 빨개지도록 손을 씻고 티슈를 뜯어 물기를 닦아내는 희완이 거울을 보았다. 후드가 벗겨져 드러난 얼굴은 급속도로 열기가 빠져나가 파리했고 눈 밑은 붉었다.      

문득, 귓바퀴를 타고 흘러들던 남자의 뜨거운 음성과 숨이 실제 같아 바르르 경련하는 희완이 화드득 몸을 떨었다. 주머니 속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꺼내 드니 밝은 액정으로 남자의 이름이 떠오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그것을 놓친 희완이 바닥에 떨어지고서도 부르르 몸을 떨어대는 핸드폰을 선뜩해진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희게 굳은 얼굴로 곧 곤혹스러움과 어찌해야 될지 몰라 하는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꼭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무얼 훔치다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안절부절, 그것이 아니라 서럽고 답답해 울기 직전의 어린아이 같기도 하다.

  

            

          

* * *

애가 좀 늦됐죠. (짐)승도 님 갈 길이 멉니다.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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