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30화 (30/123)

별이 머무는 계절 (Just Smile)

은인이다.

괴물이다.

찢어 죽일 놈이다.

살려 죽일 놈이다.

날 검은 구덩이에서 건져 올린 은인이다.

내 검은 구덩이 밑바닥을 훔친 괴물이다.

푹신하게 몸뚱이를 감싸는 소파에 앉아 나른한 눈을 홉뜨던 의준이 찰랑이는 액체가 든 글라스를 흔들며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가랑이가 헐거워진 고무줄처럼 헤프기 그지없다. 안 가져본 놈이 없고, 이젠 가지길 원하는 놈도 없단다. 그 고고한 프라이드 바닥에 떨어지기까지 안 거쳐 본 놈이 없다는데 이 3류 포르노 영상물이 의준의 가치와 동급이었다.

혀끝이 아릴 정도로 독한 액체를 음미하듯 머금으며 목울대를 울리던 의준이 키득거리며 들고 있던 글라스를 거꾸로 뒤집었다. 줄줄 쏟아지는 노란색 액체가 그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여자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흐으으윽. 여기저기 맞고 터져 찢어진 환부 위로 독한 술이 스며드니 앓는 소리를 내는 여자의 아구로 힘이 들어갔다. 왈칵 얼굴을 찌푸리는 의준이 머리채를 잡아당기자 여자의 입에서 발기한 물건이 쑥 빼어진다.

돈값 못하는 쓰레기라는 생각이다. 돈 오천에 제 발로 기어들어와 놓고 몇 번 갈기니 울며불며 제발 내보내 달라 애원하는 여자를 벗겨놓고 팼다. 베토벤의 월광을 틀어 놓고 골프채를 휘둘러 본격적으로 육질을 다듬고 약을 놓으니 고분고분해지는 게 그나마 쓸 만하다 했는데, 빠는 것 하나 제대로 못하는 천치일 줄이야.

하얀 이를 드러내놓고 웃는 의준이 크리스탈 재떨이로 손을 뻗었다. 쓸모없는 건 깨부숴 줄 생각이다. 의준에게 필요한 건 말 잘 듣는 충견이지 주인한테 이나 드러내는 개새끼가 아니다. 위험스럽게 번들거리는 눈동자에서 의준의 속내를 읽은 여자가 바들바들 떨며 흐느끼는 소리를 내었다. 부어터진 눈에서 피에 섞인 눈물이 줄줄 흘렀다. 얼굴에 번진 노란 양주 자국 위로 눈물이 길을 텄다. 찢어져 겨우 피가 멎은 이마 속 붉은 살을 번뜩이는 눈으로 노려보던 의준이 다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여자의 입에 재떨이를 끼워 넣고 주먹질을 하려던 것을 관두고 대신 양주병을 통째로 그 얼굴 위에 들이붓는다. 콸콸 쏟아지는 액체에 숨이 막히는 얼굴을 하면서도 감히 달아날 생각도 못하는 여자가 흐윽, 흐윽, 짐승 같은 소리를 내었다. 키득키득,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웃는 의준은 여자에게서 다른 얼굴을 보고 있었다.

사교모임에서 이 여자를 봤을 때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었다. 그 희고 단정한 얼굴이 딱이었다. 무대 위에서 밟히고 깨지고 으스러져가던 이 얼굴을 의준은 바로 밑 객석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허공으로 튀는 핏물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머리채를 붙잡혀 무대 위를 빙빙 돌며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도록 야만적인 폭행을 지켜보며 의준은 슬며시 웃었던 것도 같다. 아니, 웃었다. 그 안의 괴물이 기뻐 날뛰던 것이 생생하다. 백승도가 최초로 관심을 보인 물건이다. 그 짐승이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눈길을 뒀던 물건이다. 그것이 부서지고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건 의준에겐 희열이고 쾌감이었다.

승도에게 직접 보여주지 못한 것이 한이다. 그때 이 손으로 움켜쥐었어야 했는데. 다른 이의 손에 으스러져가는 걸 보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이 손으로 직접 그 살이 뭉개지고 뼈가 부러지고 질질 피가 새는 꼴을 지켜봤어야 했다. 돼지를 부추기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차츰 흐려지던 의준의 눈으로 다시 초점이 잡혔다. 그 무명 배우와 닮은 얼굴을 바라보는 눈이 다정한 것으로 바뀐다.

“당신을 구해준 이가 나 또한 구해준 것을 압니까.”

흐으으, 이상한 소리를 내며 거의 눈을 뒤집으려는 여자의 지저분한 뺨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는 의준이 그리 겁낼 것 없다는 듯 어르며 그 붉은 피가 줄줄 새는 귓구멍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수조억 날린 것으로 값을 치른 것이라 치부하면 아까울 것도 없었다. 독한 놈이니 한번 보내기로 한 것을 다시 찾지 않으리라 믿었다. 아니꼽고 배알이 뒤틀렸지만 의준은 손해 본 셈 치고 욕이나 거하게 날렸다. 백승도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무엇에 집착을 하는 건 균형을 깨뜨리는 거다. 가진 것 없는 놈이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이었겠나.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개떼처럼 달려드는 놈들 목을 따던 짐승이 사람의 소리를 낸다. 아니 될 말이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 이 쌍년아.”

그 일 년 간 국외를 나돌아 다닌 것이 아니라는 걸 안 순간 의준은 경계를 달리해야 했다. 본능의 소리였다. 위험하다. 이러는 건 좋지 않다. 너 때문에 내가 다시 그 개떼들의 소굴로 기어들어갈 순 없다. 너 때문이다. 너 때문에 미쳐가고 있다. 너 때문에 내가, 개새끼들에게 엉덩이를 들이밀고 발밑에 엎드려 바닥을 기었다. 짐승이 어찌 사람이겠나. 아니 될 말이다. 차라리 너라는 살점을 물려주어서 다시 짐승의 이를 드러내게 하는 것이 낫다. 나는 다시 그 바닥으로 끌려갈 수 없다.

눈깔을 뒤집으면서도 용케 기절은 않는 여자를 질질 끌어다가 걸쇠에 매달아 놓는 의준이 젖은 손을 닦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구석에 처박혀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하준우를 보았다. 이놈을 찾자고 철진이 들인 공을 모르지 않는다. 그 공에 배알이 뒤틀려 제 손으로 처리하겠다 직접 하준우를 채어 왔다. 백승도의 속은 알 수 없지만 철진은 의준을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어쩌다 떠맡게 된 골칫거리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준은 적당히 성깔을 부리고 적당히 웃음을 흘리며 적당히 어울려주고 있었다.

사흘 밤을 쉬지 않고 윤간을 당해 널브러진 의준의 눈초리가 맘에 안 든다며 너클을 낀 주먹을 휘둘러 생니 다섯 개를 부순 놈이 철진이었다. 병이 옮는다며 뒷구멍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침을 뱉는 철진 대신 늘어진 곳을 쑤시던 놈들과 낄낄거리며 간수에게 받은 3류 포르노 잡지를 뒤적거리던 놈이었다. 크래커, 국, 니거, 스픽, 이드, 가릴 것 없이 수챗구멍으로 내돌려지던 의준이 하룻밤 단잠을 대가로 경비견 좆 맛까지 봤을 때 면도날을 던져준 것도 철진이다. 버러지 같은 놈, 죽으라는 소리였다. 의준은 대신 제 위에서 신나게 좆을 흔들어대던 백인 쓰레기의 허벅지에 면도날을 꽂았다. 그리고 다시 독방으로 끌려가 목구멍으로 좆물이 올라오도록 갱뱅을 당했다.

의준의 손에서 오늘밤에만 벌써 다섯의 여자가 고깃덩이가 되어 걸린 꼴을 제정신으로 본 하준우에게 비웃음을 날린 의준이 정면에 펼쳐져 있는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준우가 보험용으로 소장하고 있는 도우진의 포르노 영상이었다. 총 스물여섯 개였고, 거의가 윤간에 약을 놓은 화간이었다. 개새끼 좆 맛까지 있었으면 더 볼만 했겠다 하는 의준이 재킷 단추를 잠그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대외적으로는 차기 후계자로 알려져 있지만 총수였던 조부의 모든 자산이 이미 의준의 소유였다. 그리고 그것의 실질적인 주인은 백승도였다.

멍청한 영감, 개새끼를 부린다는 것이 괴물을 제 발로 들였다. 제 손으로 대문을 열어준 격이다.

관 속에서 땅을 치며 후회할 조부의 때깔 좋던 얼굴을 떠올린 의준이 히죽 웃었다.

잘 죽었다. 영감탱이.

“늦었습니다.”

“아니, 내가 일찍 왔습니다. 거기 앉으시죠.”

직원의 안내를 받아 룸에 들어서는 상수를 맞이한 철진이 자리를 권했다.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소파에 걸어두고 철진의 맞은편에 앉은 상수가 연이어 권하는 술잔을 마다하지 않고 받았다.

“이번 일은 면목 없게 됐습니다.”

“자른다고 했을 때 못 자르게 한 것도 이쪽이고 일부러 낸 사고도 아니니 사과할 것 없습니다.”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뻔 했는데 그 분이 대처를 잘 해줘서 인명 사고 없이 잘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응급처치가 괜찮았다 들었습니다.”

“네, 잘못 건드렸으면 영 허리를 못 쓸 뻔 했는데 처치가 좋았습니다. 사례라도 듬뿍 해드렸어야 했는데.”

“그 정도 챙겼으면 됐습니다.”

수습도 안 뗀 퇴직사원 퇴직금 챙겨주는 게 말이 안 되는 소리라 우수사원 형식으로 소정의 상여금만 전달했을 뿐이었다. 소장이라도 권한에는 한계가 있으니 그만큼 챙겨준 것도 성의를 보인 것이었다. 그거 조금 더 챙겨주겠다고 긁어 부스럼 만드느니 상수의 처신이 훨씬 영리하긴 했다. 물류센터를 살펴보는 중에 상수가 본사 한직에 머물러 있는 걸 보고 작은 그림을 그린 게 철진이었다. 전 소장 라인을 맨 윗줄까지 밀어 내고 새 줄을 세운 것까지는 백승도의 작품이었다. 중간에 용역 일로 국외로 나가야했던 백승도는 자르는 건 안 된다 했다. 해서 승급 형식으로 작업장이 아닌 사무실 직원으로 올리려던 중에 그런 사고가 난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사고 책임자도 전 소장 라인을 타고 낙하산 입사한 명퇴직원이었다. 속 편하게 핸들이나 돌리며 다달이 돈 받아 가려다 크게 일 쳐 그 사단을 만든 것이다.

“중간에 귀국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유학비용을 충당할 형편이 안돼서 말입니다. 한국 와서 학업 마치고 바로 이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연줄도 돈줄도 없어서 고생만 하다 본부장 눈에 띄어 초고속 승진을 밟다 그 본부장이 미끄러진 후 같이 한직으로 밀려난 상수는 미국 유학시절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인연으로 철진과 얽혀 있었다.

“요즘도 약 합니까?”

“옛 일입니다. 정신 차린지 꽤 됩니다.”

멋쩍은 표정으로 답하는 성수가 남은 술을 한 번에 털어 넣고 철진의 잔에 술을 따랐다.

유학 당시 그 구역을 관리했던 철진은 질 좋은 약으로 상수의 유학비용 대부분을 탕진시키기에 이르렀었다. 보통 초반 한두 번만 질 좋은 약으로 물주를 낚아서 그 후로는 질 낮은 약을 같은 값에 후려치는 방식으로 장사를 했는데 동향이라 그랬는지 상수에게는 꼬박꼬박 질 좋은 걸 대주곤 했었다. 물론 약값을 못 대면 여지없이 아구창이 날아가고 총구멍이 들이대어지긴 했지만 늦게나마 약을 끊을 수 있던 것도 질 좋은 것만 준 철진 덕분이기도 했다.

“다른 게 아니라.”

신변잡기는 이 정도면 됐으니 본론을 꺼내겠다는 철진에게 이목을 집중하던 상수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진심입니까?”

“투자자가 붙을 겁니다.”

“그쪽으로는 공부한 게 전혀 없습니다만.”

“상경대 수석으로 졸업한 거 알고 있습니다. 다 죽어가던 계열사 살린 인물이 박 소장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공부야 하면 되고, 아주 돌빡이 아닌 바에야 투자금 회수할 일은 없을 테니, 박 소장만 잘하면 됩니다.”

“그럼 또 오신다는 분이,”

“투자자.”

올 때가 됐는데, 하며 시계를 내려다보던 철진이 시선을 들었다. 때맞춰 열린 문을 통해 쫙 빼입은 의준이 들어서고 있었다. 스위스 명품 시계를 찬 손목을 내려다보는 의준이 안 늦은 것 같은데, 하며 싱긋 웃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승도가 불을 켜고 안쪽을 단번에 훑어보았다. 넓은 거실과 복층 계단 위의 서재, 베란다와 주방까지 인기척이 보이지 않는 실내를 동선으로 살핀 승도가 재킷을 벗으며 안방 문을 열려다 걸음을 돌렸다. 다용도실 맞은편의 온실에서 기타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어딜 갔나 했더니.

온실 구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낡은 통기타를 안은 희완이 기타 줄을 튕기며 작게 노랫말을 읊고 있었다. 기타 줄을 튕길 때마다 비죽한 팔뚝에 잡힌 미세한 근육이 잘게 튀고 관절마디가 섬세하게 도드라졌다. 반바지 아래로 툭 튀어나온 동그란 무릎도 그 모양이 좋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온실로 든 것인지 대충 말린 게 역력한 머리칼은 멋대로 흐트러져 있고, 흰 목덜미와 어깨는 물론 마른 골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슬리브리스 한 장만 걸친 채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희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승도가 조용히 유리문을 열었다.

무얼 그렇게 열심히 불러주나 했더니 승도는 들어본 적 없는 사랑노래였다. 야밤에 큰소리 내는 게 신경 쓰여 그러는지 거의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었는데 방음이 잘 돼 있는 건물에서 쓸데없는 노파심이다 싶으면서도 승도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제법 그윽한 목소리가 낡은 기타소리와 어울려 운치가 있었으나 그 노랫말이 퍽 유치해 부르고서도 멋쩍은 듯 큼큼, 헛기침을 하던 희완이 잘 자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문설주에 팔짱을 끼고 기대 선 승도를 발견한 희완이 돌아서다 말고 멈칫 움직임을 달리 했다.

당혹스런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멀거니 서 있던 희완이 들고 있던 기타에 닿는 시선에 아, 불현듯 입술을 열었다.

“노래를 불러주면 더 잘 자란다기에,”

꺼내놓고 보니 변명이 좀 이상해서 말을 멈춘 희완이 난감한 얼굴로 코끝을 문지른다.

오래 된 기타는 소줏집에 들렀다가 주인에게 얻어온 거였다. 마침 쓸 만한 게 들어와서 그거 길들이느라고 놀리던 거라며 있던 기타를 던져주던 주인은 정말 요즘 연애 사업이 잘 되는 건지 때깔이 고와져 있었다. 몇 년째 고수하던 까끌까끌한 수염을 말끔하게 밀고 온 날 이거 정말 이러다 국수 먹는 거 아니냐며 수군수군 대던 게 바로 엊그제였다.

아무튼 사양 않고 감사히 받겠다며 꽤 재질이 좋은 케이스에 담긴 피크와 악보도 몇 장 같이 업어왔다. 오늘은 귀가가 일러 말끔하게 정리 된 아파트를 돌다 말라 있는 잎사귀들을 보고 화분에 물을 주고 샤워를 하다 누군가 식물도 교감을 한다는 소리가 생각나 그 김에 기타를 들고 와 몇 곡을 연달아 뽑던 차였다. 이상한 짓이라는 자각은 있어,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던 희완이 시선을 들었다.

뻗어온 손이 건드린다 생각했는데 귀 옆을 스쳐 열려 있던 온실 문을 닫는다. 흰 와이셔츠에 은은하게 배인 메탈 향을 맡은 희완이 잠자코 눈꺼풀을 내린다. 탄탄한 몸을 빈틈없이 감싸고 있는 검은색 베스트의 단추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 안에 든 것의 야성을 희완은 너무 잘 알았다. 그것이 점점 멀어져 등을 보이는 것을 물끄러미 보다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향이 멀어졌다. 하는 순간 돌아선 남자가 거실을 가로질러 드레스 룸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말없이 그 궤적을 쫓다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문지른다.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명확하지 않고 무어라 정의되지 못한 관계에 희완은 선뜻 발을 디밀 용기가 없었다. 이대로도 괜찮다는 생각과 화대조차 주고받지 않는 관계가 의미하는 바를 더 깊이 알고 싶지 않은 생각이 공존하며 때때로 희완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숨이 막힐 것 같은 답답함은 아니었다. 어쩌면 정말 이대로도 괜찮다는 생각이 현재 제 심정과 가장 비슷하다는 결론이 일기도 한다.

우진의 퇴원 일정이 잡혔다. 기존 기획사와는 지난 1월을 마지막으로 계약기간이 끝남과 동시에 재계약 없이 자동으로 종료가 되었다. 입원 이후 증권가 찌라시로도 돌지 않던 우진의 행적은 극단에서도 부단장인 경성과 희완, 그리고 학정만이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퇴원 후 거처는 학정의 집이 되지 않겠냐는 경성의 푸념을 귀담아 듣던 희완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었다. 그 놈이 그리 망가질 줄 누가 알았겠느냐,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정말 손 쓸 수 없었을 거라는 의사의 진단에 가장 놀란 것이 경성이었다. 돈 벌겠다고 나간 놈이 정말 미워서, 생글생글 화도 잘 안 내는 사람이, 그런 놈을 붙잡지도 매장시키지도 못하는 학정의 무능함과 미련함에 치를 떨며 주먹을 날리던 경성에게도 우진은 아픈 손가락이었던 모양이다.

마누라만 없었다면 제 집에 들였을 거라는 경성에게 토끼 같은 자식들은 잘 있고? 질문을 던진 학정이 괜히 된서리를 맞았다. 너랑 인연 안 끊으면 마누라가 토끼들 데리고 집 나간단다! 물려받은 부모 재산으로 꼬박꼬박 월세 받아먹고 사는 놈이 우는 소리는, 제수씨가 이런 걸로 뭐라 할 분은 아니고 너 또 어디에 한 눈 팔고 내 이름 팔아먹었냐? 하는 소리에 금세 또 꼬리를 말고 깨갱한다. 아무래도 또 밤낚시 귀신이 도로 붙은 모양이다, 하는 학정의 중얼거림이 정곡이었다. 바로 어제만 해도 대본 대신 월간낚시 끼고 삼매경인 것을 희완이 목격했던 차였다.

“어디 가냐?”

“소줏집에 좀 들렀다 가겠습니다. 기타 받아서요.”

“그런 거 일일이 안 챙겨도 될 건데-.”

“네, 압니다.”

그래도 맨 입으로 지나갈 순 없어 출출할 때 드시라고 좋아하는 떡 종류별로 산 걸 바칠 요량이었다. 연습 시작할 때 됐으니 얼른 다녀오라는 경성이 먼저 올라간 학정의 뒤를 따라 연습실로 향하였다. 부는 바람이 차서 종이가방 손잡이를 손목에 끼고 잠바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 넣은 희완이 걸음을 재촉했다. 푹 눌러 쓴 모자가 시야를 가려 바로 쓰고 타박타박 골목을 돌아 걷는데 환한 불빛 아래의 소란이 눈에 들었다. 주정꾼들이 또 남의 영업집에서 말썽을 부리고 있나, 하며 지나치려던 희완이 도로 뒷걸음질을 쳐 삼겹살 집 안쪽을 똑바로 보았다.

억울해서 몸을 떨고 있는 석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희완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산발이 된 머리에 씌워 주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분을 삼키느라 들썩들썩 거리는 철민과 승원에게 석주를 떼밀며 학정으로 얼른 가라 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로 희완을 거의 쏘아보던 철민이 입술을 꽉 깨물며 돌아서는 걸 보고 어물쩍 서 있던 승원이 석주를 당겨 골목을 빠져나가는 걸 보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석주와 엉겨 있던 수범이 밖을 나서고 있었다.

“싸가지 없는 놈들은 보낸 겁니까?”

석주에게 맞은 것이 분명할 상처를 보란 듯이 들이밀며 퉤, 피 섞인 침을 바닥에 뱉는 수범은 해우 소속 단원으로 희완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같은 해 출범한 학정과 해우는 기수 셈이 같았고 선후배 서열도 동일시되었다. 눈앞에서 담배를 빼어 물며 찢어진 입술에 인상을 쓰는 수범은 석주보다는 한 기수 위였고 희완보다는 두 기수 아래였다. 같이 엉겨 있던 해우 소속 여섯 전원이 수범과 같은 기수였으니 석주 녀석들이 선배에게 개기게 된 셈이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이 바닥에서 후배가 선배에게 덤비는 하극상은 있을 일이 아니어서, 도중에 끼어든 희완이 억지로 고개를 숙이게 했다. 분해서 몸을 벌벌 떠는 게 느껴졌지만 고깃집엔 해우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보는 눈이 많은데서 선배에게 덤비고도 고개 한번 숙이지 않으면 앞으로 연극 생활 꼬이는 건 순간일 터였다. 시시비비는 나중에 가리더라도 일단은 그러는 게 맞았다.

“이거 그냥 못 넘어갑니다.”

잔뜩 벼를 작정으로 으름장을 놓는 수범을 말없이 쳐다보던 희완이 유리문 너머 고깃집 안쪽을 보았다. 패싸움이 끝나고 대충 정리된 안쪽에 다시 자리를 잡고 앉은 해우 단원들이 이쪽을 힐긋거리는 게 눈에 띄었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은근히 기대하는 심리를 문밖에서도 읽을 수 있었다.

변한 게 없다는 생각이다. 일련의 오해가 풀려 연극판 문이 헐거워졌다 해도 희완의 평판은 여전히 바닥이었고 백안시하는 눈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다. 인맥과 평판으로만 돌아가는 바닥은 너무 깊고 좁았고 한번 낙인이 찍히면 회복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앞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유리문 안쪽에서 시선을 떼어내는 희완이 수범을 보았다. 업신여기는 눈이었고 우습게보고 깔보는 눈이었다. 그것은 희완을 관통하여 그가 소속된 학정에게까지 닿아있는 것이었다. 그걸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분개하여 덤빈 석주를 억지로 끌어내어 고개를 숙이게 한 희완을 원망스레 쏘아보던 철민의 시선을 이해한다.

변하지 않을 것이다. 희완 스스로 변한 게 없으니 그를 보는 시선과 태도 역시 변할 리가 없다.

눈 감고, 귀를 막고, 여전히 마음을 세우지 못하고 변두리만 뱅뱅 돌면서 학정을 놓지도 못하는 희완의 어정쩡한 태도가 군말 없이 그를 받아들여준 학정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이 새파란 녀석들이 한데 싸잡혀 욕을 먹는 상황에 놓이게 만든 것이다.

적을 놓은 곳 없이 혼자 빌빌 거리며 돌아다니던 때와는 다르다. 희완이 학정 소속인 이상 제대로 처신하지 않으면 그 여파가 희완에게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학정은 물론 이 새파란 녀석들한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제는 바닥에 떨어진다고 혼자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희완의 책임이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휘청휘청하는 희완 대신 애꿎은 녀석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고 있는 셈이다. 그 녀석들이 희완 대신 싸워주고 있는 것이었다. 더럽히지 말라고, 함부로 씹어대지 말라고, 희완이 항변해야할 것들을 분하다고, 바르르 몸을 떨어가며 대신 싸워주는 것이다.

어쩔 거냐며, 찍 침을 뱉으며 그 앞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는 수범을 빤히 쳐다보던 희완이 입가를 문질렀다. 이제야 조금 정신이 드는 듯한 기분이다. 이 연극판을 떠난다고 희완에 대한 소문들이 완전히 사그러들지는 않을 것이다. 학정이 거론되면 언제든 희완의 이름이 거론될 것이고 우진의 이름이 거론될 것이고 그 평판이 같이 떨어질 것이다. 하물며는.

돌아왔으니 책임을 져야 했다. 가도 붙잡지 않겠다는 사람들 손을 붙잡고 다시 돌아왔으니 희완은 제 몫을 해야 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뒤늦게 던져진 음성에 입꼬리를 올리는 수범이 훅, 담배연기를 뱉어냈다.

“왜, 금전적 피해보상이라도 해줄 요량입니까? 하긴, 요즘 학정 사정이라면 이깟 병원비 따위, 껌 값도 못될 거긴 하겠습니다만?”

“비아냥거리는 게 목적이라면 그만하는 게 좋겠습니다.”

“뭐라?”

“그 딴 말버릇은 너 후배들한테나 가서 지껄이라고.”

평이한 음성에서부터 비롯된 갭에 더딘 반응을 보이는 수범의 얼굴이 구겨지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아랑곳 않고 다시 입을 여는 희완이 손을 뻗어 수범의 입에서 담배를 빼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어쨌거나 수범에겐 희완도 선배였으니 더 봐줄 이유가 없었다.  

“법대로 하겠다면 경찰 불러 쌍방 과실을 따지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합의 볼 일 있으면 보고, 시비 가릴 게 있으면 가리고, 끝내면 그만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까?”

담배꽁초를 신발로 짓이기며 묻는 말에 뒤늦게야 붉그락푸르락 하는 수범이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동네 깔개였던 희완이 이렇게 나오니 수그러들기는커녕 더 오기가 생기는 모양이다. 네 까짓 게 뭔데. 라는 시선을 고스란히 읽고서도 희완은 크게 대수로워하지 않았다. 다만 더 누를 끼쳐선 안 된다는 생각이다.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빌려 쓸 의향도 있었다. 분하고 억울해 죽겠는데, 그래도 선배라고 군말 없이 끌려 나와 시키는 대로 하고 입술이 벌게지도록 이를 악물고 있던 석주를 떠올리던 희완이 슬쩍 고개를 저었다. 잘못했다는 생각이다.

“뭐라고 시비 걸었습니까.”

“뭐?”

싸움에 끼어들기 전에 주먹다짐을 하며 주고받던 악담들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하는 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사이가 나쁜 극단 중에서도 해우와 학정은 유독 악연이 깊었고 하준우가 잠적한 시점에서 학정에 대한 해우의 악의적인 음해는 도를 넘어선 정도에 있었다. 대부분의 화살은 희완과 우진을 향해 있었지만 요즘엔 학정 자체에도 그 화살이 돌아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학정에 대한 익명의 후원이 입소문을 타면서부터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것도 희완에게서 비롯된 오명이었다.

알면서도 묻는 희완이 입술을 누르며 다시 말했다.  

“뭐라고 지껄였기에 까마득한 후배가 선배 무서운 줄도 모르고 먼저 달려든 거냐고, 물었습니다.”

크게 흥분한 기색도 없는 담담한 어조에 뒤늦게 왈칵 인상을 찌푸리는 수범이 이젠 아주 본격적으로 개길 작정인지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깐죽대기 시작했다.

“낯짝도 두꺼운 걸레 같은 집구석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그 집구석 화대 받아 흥청망청, 아주 살 판 났다던데. 학정이 또 그런 재주가 있는 줄 몰랐다고 여기저기서 씹어대는 거, 정말 몰랐습니까? 왜, 떫습니까? 떫어? 내가 없는 말 지껄인 것도 아니잖아. 하준우 선배님이 그러시더라. 너도 그렇고 도우진도 그렇고 돈 앞에서는 아주 그렇게 낭창낭창하기가 씹년들 저리가라 할 정도였다며? 그러니 후원 핑계대고 바리바리 싸들고 퍼다 주는 놈들로 넘쳐나지. 뒤 봐주는 놈 있다고 너 같은 깔개도 할 말 있다 기 펴고 사는 거 아니야, 학정에도 볕 뜰 날이 있긴 있어, 씨발 걸레들 잘 둔 덕택에.”

“……그건 잘 모르겠고.”

“뭐?”

“너 입에 걸레 문 건 잘 알겠습니다.”

갑자기 바짝 들이밀어지는 희완의 얼굴에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빼려던 수범이 눈알을 부라렸다. 팔목을 붙잡혀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삐쩍 말라선 힘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는데, 의외여서 놀란 탓이었다.

“그게 그렇게 부러웠습니까.”

“무, 무슨 헛소리야! 소문난 걸레들만 있기로 유명한 집구석이 뭐가 부럽다고-!”

“원하면 자리 주선하겠습니다. 예전 하준우 선배님께서 알선한 자리하고는 꽤 급이 다르니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겁니다. 알다시피 몸 굴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거든.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너도 아예 모르진 않겠지. 나 줄줄이 업소 불려 다닐 때 너도 그 자리에 있었잖아. 하준우가 던져준 고깃덩이가 구미에 안 맞았던 모양이지? 아니면, 네가 하도급이었던가. 어느 쪽이든, 원한다면 굴려줄 의향 있다. 하준우와는 달리 난 꽤 단단한 줄을 붙들고 있거든.”

움찔하며 물러서려는 수범의 멱살을 팔목 대신 붙잡은 희완이 거의 속삭이는 정도로 빠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속이 시원하냐, 내가 이러니 십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아? 계속 해주지. 니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듣고 싶은 말 죄다 해주겠어. 그런데도 이렇게 멍청하게 굴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니 말대로라면, 대체 내 뒤에 누가 있을 줄 알고 그 더러운 입 함부로 놀리는 거냐. 네 말대로 내가 몸 팔아서 돈 많은 놈들 후리고 다닌다고 치자. 바리바리 돈 싸들고 오는 놈들이 딴 짓은 못해줄까. 막말로 내가 다리 한 번 벌리는 걸로 못 할 짓이 뭐가 있겠어. 연희완 조폭 깔이라고 떠들고 다니던 하준우가 그런 말은 않더냐. 입단속 못하고 떠들고 다니던 하준우가 지금 어떤 꼴인지. 정말 몰라 이러는 거냐.”

“너,”

“이 바닥에서 매장당하고 싶은 거 아니면, 그 입 닥치고 사는 게 좋을 거다.”  

떨쳐내듯이 대범의 멱살을 놓고 그 손을 툭 털어내는 희완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느리게 쓸어 넘겼다. 제가 들은 말이 협박이라는 사실을 소화시키는데 꽤 시간을 들이는 수범을 끝까지 쳐다보는 희완의 눈엔 흔들림이 없었다. 이런 허풍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새삼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희완이 복귀하기 전부터 이루어졌다는 익명의 후원은 학정을 꽤 시끌벅적한 위치에 올려놓았다. 그것이 희완이 복귀함으로써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르게 됐다는 걸 희완 역시 알고 있었다. 부인할 수 없으니 이용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허풍이 허풍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희완은 회의라는 감정을 들이지 않으려 했다.

건전하든, 건전하지 않든, 이 바닥에서 후원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일종의 스폰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기도 하는 바닥이었다. 그런데 유독 희완의 스캔들이 그리 지저분하게 이 바닥을 휩쓸고 다닌 까닭은 업자들의 역할이 가장 컸고 하준우의 스토리텔링도 한몫 했다. 한 풀 꺾인 도우진에 대한 소문 역시 하준우가 작정하고 푼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형, 형, 형. 연거푸 우진을 부른 희완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차라리 속이 시원하다. 이렇게나마 인정을 하고 나니 한결 살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상관인가, 다들 그러고 산다는데. 유별나게 굴 까닭이 없다. 이런 것도, 운이라면 운이었다.

병원까지 찾아간 희완을 벌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노려보며 폭언을 퍼붓던 우진을 떠올린다. 약을 끊은 지 보름에 접어들던 시점이었다.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던 우진은 많은 것들을 털어 놓았고 많은 것들을 쏟아 부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었고, 성공하고 싶었고, 유명해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했던 게 뭔 줄 알아? 내려놓는 거다. 날 내려놓고 스스로 몸을 열어 오물들을 받아들이면 그에 대한 대가가 돌아오는 거지. 위로 올라 갈수록 내가 내려놓아야할 건 거대해지기만 했고, 결국 내가 내어놓을 수 있는 게 없을 땐, 빈 몸으로 저 진창에 처박혀지기만 했어. 중간에 돌아 올수도 없었지. 누굴 탓해, 내가 선택한 길인데. 그래도 그만두고 싶었다. 때때로 견딜 수 없어지면 스스로 목을 졸라 끝을 내고자 하였지만 깨고 나면 지긋지긋한 현실이었어. 차마 죽을 순 없었던 거지.

하루하루 내 몸이 가라앉아 가는 걸 절감하며 내가 가장 바란 게 뭔 줄 알아? 바로 구원이야. 누가 날 구해주길 바랐어. 누군가 날 이 진창에서 건져 주길 바랐어. 그래서 난 니가 밉고 또 원망스럽다. 그게 싫으면 날 줘. 그런 운이 싫으면, 차라리 날 줘. 왜 너는 원하지도 않는데 구원이 손을 내미는 거냐. 왜 나는 간절히 원하면 원할수록 저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기만 하는 거냐.

구해주길 바랐다. 건져주길 바랐다. 아니야, 돌아오고 싶었다. 처음엔, 보란 듯이 성공해서 이쪽으로는 눈길도 두지 않으려 했었다. 그런데 이젠, 아무래도 좋으니 돌아오고만 싶었다. 하준우가 내 팔에 주사를 찔러 넣으며 웃었지. 이 몸으로 돌아갈 곳이 어디겠느냐고. 참다가, 참다가, 견딜 수 없을 지경에까지 몰리고서야 찾아간 곳이 학정이었지. 그곳이 아니라며 날 끌어내어 돼지우리에 처박는 하준우에게 매달려 개처럼 빌어도 나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네가 밉다. 내가 싫다. 학정이 원망스럽다. 나는 여전히 살아있고, 매일 죽어가고, 또 매일 살아난다. 네가 그립고, 내가 밉고, 학정이 보고 싶다. 손 쓸 수 없이 망가졌다는 걸 알면 알수록, 나는 그랬다.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무슨 일입니까.”

소파에 앉아 하릴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던 희완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귀가한 남자가 바로 앞에서 희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찬 기운이 외부에서 막 들어온 남자에게 묻어와 희완의 뺨을 식혀주었다. 멀그러미 남자를 올려보던 희완이 턱을 들었다. 남자의 손이 턱을 스쳐 목덜미로 파고들어가 구겨진 옷깃을 바로 펴주었다. 그리고선 떨어져나가는 손끝을 멍하니 쳐다본다. 희완에게서 더 용건을 찾지 못한 남자가 뒤돌아 가는 걸 말없이 보던 희완이 그의 손이 닿았던 목덜미를 문질렀다. 그리고 그 손으로 허기진 뱃속을 문지르듯 아랫배를 문지른다.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여남은 번 울리고 곧이어 닫히는 문틈으로 물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욕실 문이 완전히 닫힘과 동시에 희미해지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희완이 들고 있던 대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대사나 지문을 읽지도 않고 마냥 제목만 굵직굵직하게 쓰여 있는 표지를 들여다보기만 했다.

연습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철민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하준우에게 그 놈이 무슨 꼴을 당했는 줄 아느냐고. 그런데 어떻게 그 새끼들한테 고개를 숙이게 할 수가 있었느냐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선배님이 원망스럽기만 하다고, 하준우가 우릴 이렇게 우습게 보는 건 다 선배님들이 우스운 꼴을 보였기 때문이 아니냐고. 죄송하지만 그게 사실이지 않냐면서 휙 돌아가던 철민을 붙잡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하준우에게 끌려가 몹쓸 짓을 당할 뻔 했던 걸 운 좋게 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래도 이미 얻어터질 대로 얻어터지고 맞을 대로 맞은 뒤라서 누군가 병원에 옮겨 놓은 걸 학정이 찾아왔다고 했다.  입원한 우진을 희완에게 맡겨 놓고 학정이 급하게 빠져나가던 날이었다. 우진을 찾아와 그 쓰레기 같은 말들을 뱉어 놓고 하준우는 진즉에 석주를 끌어들일 궁리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머릿속이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 새끼, 지 욕할 때는 군소리 없다가 그 썩어죽을 놈들이 선배님 욕보이고, 학정 욕보이자마자 빡이 돌아서 그렇게 튀어 나간 거라고. 단원 하나 지키지 못하는 극단 따위가 뭐 좋다고! 이렇게 구질구질하고 빌빌대는 극단이 뭐 좋다고! 버럭 성을 내며 분통을 터트리던 철민을 붙잡지 못했다.

틀린 말이 없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학정의 평판은 우진과 희완이 끌어내린 것이다. 아니, 희완이다. 적어도 우진은 모든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학정에 돌아오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짓밟히더라도, 학정을 떼어 놓고 짓밟혔지만, 희완이 동네북이 되어 돌아다닐 때, 학정은 그곳에 있었다.

아무리 내놓은 자식이라도, 희완을 밟으며 학정을 밟은 이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누가 자신하겠는가. 그때는 그 수밖에 없던 거라 여겼지만, 끝까지 돌아오지 않았어야 옳았던 것이라고, 혼란스레 저울질을 하는 희완의 머리맡으로 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상체를 훤히 드러낸 남자가 희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샤워를 마친 직후의 그에게서 시원한 기운이 풍겨졌다. 고압적이기까지 한 근육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멍하니 올려보던 희완이 손을 뻗었다. 살짝 기울어진 그의 목을 감싸 안고 그대로 입술을 부딪치는 희완의 허리로 뒤늦게 한쪽 팔이 감겨들었다. 촉, 살갗이 떨어지는 소리에 이어 희완의 혀가 남자의 입술을 핥았다.

“…진심입니까.”

아닐 까닭도 없었다.

대답 대신 다시 입술을 겹치려는 희완의 상체를 받쳐 든 남자가 머리를 뒤로 물렸다. 닿지 못한 희완의 입술이 코앞에 있었다. 검게 불거진 눈동자 속 열망을 가늠하기라도 하듯 빤히 바라보던 남자가 감아들었던 희완의 상체를 가만히 내려놓는다. 일순 덜컥 심장이 내려앉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로, 돌아서는 남자의 넓은 등을 응시하던 희완이 손가락 마디로 입술을 눌렀다. 짧은 순간 닿았던 그의 것이 남긴 열기가 선뜩했다.

그가 걸을 때마다 흉악스럽게 움틀 거리는 검은 문신을 멀거니 바라보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는다. 없어지는가 하였던 심장이 느리게 치고 올라왔다. 점점 제 속도를 찾을 때마다 희완은 가슴이 욱신거린다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이 알량한 속셈을 남자가 모를 리 없는데. 스스로를 힐난하듯 꾸욱 얼굴을 짓누르며 느리게 호흡하는 희완이 바로 곁에서 낮은 욕지기를 들었다 생각한 순간이었다. 팔뚝을 붙잡혀 그대로 끌어올려진 희완의 몸이 남자의 품으로 와락 안겨 들어갔다.  

희완의 셔츠를 벗기는 손길이 거칠었다. 그런가 하면 날갯죽지와 등허리를 쓰는 손길은 또 부드럽기 그지없다. 거실에서 침실로 이동하는 동안 희완은 거의 승도에게서 입술을 떼어 놓지 못했다. 셔츠를 벗기다 뭐가 못마땅한지 살짝 인상을 찌푸리던 승도가 자신에게 매달린 희완을 거의 안아들다 시피해서 침실로 옮겨왔다. 벗겨낸 셔츠가 바닥에 떨어지고 승도의 허리에 올라탄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희완의 뒷덜미를 잡아챈 손이 그대로 당겨 잡아먹을 듯이 입술을 부딪쳐왔다.

하아, 헉. 급하게 들이켜지는 숨을 모조리 빼앗겨 헐떡이게 된 희완의 바지춤으로 성급해진 손이 뻗어 왔다. 아무 소리도 침범하지 못하는 곳에 혀가 엉키고 살이 맞부딪치고 서로 겹쳐지는 숨소리만이 적나라하게 울렸다. 정신없이 빨아 당겨지는 희완은 물론,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이 행위에만 열중하는 승도 역시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 오랜만에 맞닿은 살갗이었고, 오랜만에 겹치는 몸이었다. 그동안 서로 다른 이를 품은 적이 없었으니 닿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화끈할 지경이었다.

떨어지려는 희완의 혀를 당겨 빠는 승도가 두 손으로 헐렁한 바지를 끌어내렸다. 무릎을 들어 바지를 벗기는데 협조하려는 희완의 입술이 떨어졌다. 하얀 볼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침으로 범벅이 된 입술을 헐떡이듯 핥으며 팬티와 함께 바지를 끌어내리려던 희완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동시에 후두둑 떨어지는 것을 손바닥으로 받아 덮는 희완의 얼굴이 일순 멍해졌다.  

미처 그것을 살필 겨를도 없이 승도를 내려다보던 희완이 갸웃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의 얼굴이 싸늘히 식어가는 게 무섭다는 생각을 하며 제게로 뻗어오는 두 손을 낯설게 쳐다보는 희완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털썩, 승도의 품으로 쏟아지는 희완에게서 후두둑 떨어진 핏물이 그새 가슴을 흥건히 적셨다. 연희완. 급한 대로 시트를 당겨 콧등을 압박하는 승도가 축 늘어지는 몸을 추슬러 안으며 화득히 희완의 이름을 불렀다. 깜박. 눈을 뜨는 희완이 곧 눈살을 찌푸렸다.  

    

    

  

            

* * *

안녕하세요, 별빛달빛 작갑니다. 인사가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하고요, 남겨주신 감상 등은 너무 잘 받아보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현재 감기로 고생 중이라 앞으로는 연재 주기가 일정치 않을 것 같아 이리 알림글을 드립니다.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구요, 독자님들도 감기 조심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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