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29화 (29/123)

별이 머무는 계절 (Just Smile)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맞은 철진이 빠르게 상체를 세웠다.

도대체 일처리를 어떻게 하느냐는 질책도 없이 철진을 빤히 쏘아보던 승도가 손수건을 툭 던져주며 뒤돌아섰다. 타인에 대한 기대 자체가 없는 백승도가 잘못된 일처리를 이유로 화를 내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저렇게 열 받아 하는 이유를 납득 못할 까닭도 없었다. 귀국한 뒤로는, 하나부터 열까지 희완에 관한 모든 일처리를 손수 도맡아 왔던 백승도다. 잠깐 남의 손에 맡긴 사이 병원에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마침 일을 마치고 귀국한 참이었던 승도는 일정도 미루고 즉시 병원으로 향하였다.

우연한 사고였고 희완이 사고 당사자인 것도 아니지만 그 상자더미에 깔린 게 희완일 수도 있었다는 가정만으로도 철진은 핏기가 싹 가시는 듯한 기분이었다. 모든 것에 선이 분명하고 내 것과 아닌 것에 대한 구분이 확실한 승도는 문턱이 높은 만큼 일단 안에 들인 것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

방관하긴 하였지만, 연희완을 사진 속에서 발견한 백승도가 제일 먼저 착수한 일 역시 그에 대해 시시콜콜한 것까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지난 5년간의 행적은 빤하였고 떠나 있던 일 년 역시 아마 반은 그 옆에 붙어있었을 것이리라. 연희완을 보낸 후 일체 그에 대해 관여하지 말라던 지시에도 철진은 개인적으로 사람을 붙여 희완의 주변을 돌아보게 했었다. 이쪽으론 희완의 존재를 아는 이가 전무한 만큼 그에 관한 소문 역시 깨끗했지만 철진은 생긴 것과 달리 매사 꼼꼼하고 노파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이 바닥에 새겼던 모든 흔적을 깨끗이 지운 채 내보냈어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고 철진에게 희완은 여전히 위험요소였다. 그러다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서 승도에게 걸려 된통 깨졌다. 한참 4,5 금융 뒤처리로 바빴던 시기였음에도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이쪽에서는 일체 손을 끊게 하고 직접 연희완에게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때 깨달았다. 연희완에 대한 백승도의 집착 역시 마찬가지다. 아예 처음부터 놓아줄 생각이 없었던 거다. 아니, 백승도라면 애초 마음에도 없는 일을 벌일 인물이 아니다. 보내려했던 건 진심이었지만 결국 그 진심에 무릎을 꿇고 만 것이리라.

의준의 과민반응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짐승처럼 날뛰는 의준을 가둔 방에 여자들을 처넣으면서 철진은 그가 내지르는 욕설의 대부분이 연희완을 향한 것임을 알고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정작 본인을 그리 고문한 백승도에겐 분풀이 한번 제대로 못하고 엄한 쪽으로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의준의 행태는 과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가 백승도에게 빚진 건 목숨만이 아니었다.

그 흉악한 짐승들로 가득 찬 곳에 맨몸으로 던져져 거의 산 채로 잡아먹힐 지경까지 몰려 스스로 가축임을 인정하고 사육 당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던 의준은 버러지에 불과했다. 그 흉악한 것의 일부였던 철진 역시 의준을 짓밟았고 거기에 죄책감이나 거리낌 또한 전혀 없었다. 사람이 아닌 것을 건져 올렸을 때 백승도의 표정 따윈 기억나지 않는다. 그 역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화대로 주었던 돈을 한데 모아 던져주고, 연희수의 병원비와 장례비용을 전부 지불하여 준 것까지는 순수한 호의였을 것이다. 그러나 임차인에게 손을 쓰고, 물류센터에 손을 대고, 하준우를 버려둔 채 도우진을 빼돌린 건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다. 외려 불순하기 짝이 없다. 백승도가 가지겠다는 의미는 단순히 소유권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자각도 하지 못한 어느 순간에 이미 그의 손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날개를 달아주지는 못할망정 그 날개를 꺾어 곁에 둘 생각이 아예 없었을 것이다. 그것만은 진심이었을 터다. 어쩌면, 희완이 멀쩡하게 잘 살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며 휘청휘청 절름발이처럼 살았기 때문에 승도는 이리 쉽게, 또는 신사적으로 희완을 손에 넣기로 계획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희완이 승도에게서 떨어져나가 제법 잘 살아줬다면 백승도의 그 소유욕이 어떤 식으로 작용했을지는 철진 역시 추측하지 못했다. 아무 일도 없이 과거는 묻어두고 서로 각자의 길을 갔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더라면- 아마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강제적이고 파괴적인 방법으로 연희완의 소유권을 주장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리고 철진은 일 년을 보내며 전자의 가능성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백승도의 집착은 해묵은 것이었고 언젠가는 실현될 것으로 읽혀졌고, 그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결국 희완은 승도의 손에 떨어졌다.

의자에 앉아 깊이 잠든 희완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승도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이불을 젖히고 그 옆에 누우니 얼마지 않아 주변의 온기를 느낀 희완 스스로 승도의 품으로 기어들어온다. 가슴에 안기는 것을 어깨를 둘러 안고 반듯한 이마를 한참 내려다보다 입술을 그 위에 붙인다. 별 거 없는 감촉이었지만 승도는 짙은 희락을 맛보았다. 그것을 음미하듯 입술을 미끄러뜨려 콧잔등을 훑고 인중을 스쳐 슬쩍 벌어진 입술 위에 겹친다. 보풀이 일 정도로 메말라 있었지만 그 부드러운 감촉만은 일품이다. 붙였던 걸 떼어놓고 그 위를 배회한다. 뱉어지는 숨이 거슬거슬한 입술 위로 번지는 걸 눈으로 그리듯이 응시하며 준수한 윤곽을 더듬는다.

농밀한 키스만으로도 희완의 단정한 눈썹을 이지러뜨릴 수 있다. 맘먹자면 난잡하게 놀 수도 있는 바닥에서 이런 몸을 하고도 용케 숫총각으로 남아있던 희완은 엄밀히 말하자면 승도의 취향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았다. 이 바닥에 발을 들인 이후로 여자를 안지 않았고 남자 역시 필요에 의한 것 외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승도에게 섹스란 체온을 나누는 것이 아닌 폭력의 연장선에 불과했다. 크게 가리지 않았지만 여자처럼 낭창낭창한 몸보다는 거친 행위에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는 몸을 선호했고 그럼에도 때때로 터지는 그 신음이 듣기 싫어 주먹으로 얼굴을 갈기고 베개에 얼굴을 처박아 놓고 뒤집어 치대길 반복했다. 승도에게 여성이란 강제로 헐거워진 누이였고 남성이란 정복과 지배의 대상이었다. 때때로 섹스란 건 가장 치욕적이고 굴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폭력의 정점이기도 했다. 당시의 승도는 상대를 무릎 꿇릴 수만 있다면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았고, 날 것의 고통을 주기 위해서라면 사람 같지 않은 짓도 서슴없이 저질렀다.        

여자처럼 낭창낭창하지도, 늘상 부러뜨려왔던 그들처럼 단단하지도 않은 희완의 몸은 상상 이상으로 매혹적이었다. 머리로부터 받아들여 순종적인 몸은 그러나 승도의 손이 닿을 때마다 움찔움찔 떨며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드러내면서도 벌리면 원하는 대로 벌어졌다. 첫날은 어땠던가. 엉망이었다. 승도는 이성을 잃었고 희완은 숨이 넘어가도록 인내하다 혼절하길 반복했다. 성질대로라면 주먹을 갈기거나 발길질을 해서라도 희완을 깨웠을 것이다. 때리면 때릴수록 조임은 강해진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승도는 늘어진 희완을 허벅지 위에 앉힌 채 사납게 발기한 물건을 뿌리까지 삼키게 하는 것으로 그 안의 폭력성을 잠재웠다. 정신도 차리지 못하는 걸 발갛게 헐도록 물고 빨며 깨어나길 기다렸고 깨어남과 동시에 활화산처럼 터지는 욕망을 채우려 야수처럼 달려들었다. 사흘 밤을 꼬박 새우는 중간에 주치의를 불러서까지 깨우며 희완을 짓씹었다.

폭력에 가까운 행위였지만 승도는 그로부터 오랜만에 절정을 느꼈고 쾌감을 느꼈고 강한 소유욕에 불이 지펴지는 것을 목격했다. 이 몸을 누구에게도 건네줄 수 없다. 나 이외엔 어떤 짐승에게도 이 몸을 물려줄 수 없다. 너는 내 것이다. 부서질 것이라면 내 안에서, 내 손으로 으스러뜨려질 것이다. 그럼에도 본능적인 욕구를 그저 욕구로만 해석하여 깊이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희완은 망가지면 언제든 바꿀 수 있는 물건이어야 했다.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음으로써 그에 따른 책임 역시 지지 않으려 했다. 5년을 혼자 맨바닥을 구르며 살고자 발악하는 희완을 방관만 했다. 몸을 취함으로써 던져준 알량한 화대 얼마가 승도 본인이 매긴 희완의 가치였다.

신기할 정도로 경험이 전무 해 백치에 가까운 몸은 쾌락과 자극에 약했고 놀랍도록 민감한 몸은 승도의 손에서 개발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입맛대로 길들여졌다. 느슨해진 입술을 혀로 핥아 올리는 승도가 그 사이로 살덩이를 밀어 넣었다. 치아를 건드리니 자연스레 열리며 파고드는 살덩이에 순순히 속살을 맡긴다. 희었던 귓불이 금세 달아오르는 걸 보며 빨아들였던 살덩이를 풀고 입천장을 더듬는다. 치열을 훑고, 일시의 자유로 갈팡질팡하던 것도 잠시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살덩이를 다시 당겨 강하게 옭아매니 희열하듯 바르르 떨어댄다. 내가 길들인 몸이다. 나 이외엔 감히 깊숙이 범하지 못한 몸이다. 저도 모르게 거세어지는 기세에 잠결에도 움츠러드는 몸을 감지한 승도가 손바닥을 펼쳐 부드럽게 어깨를 쓸어준다.

그런 것치고 뜻대로 안 되는 몸이기도 하다. 헛껍데기만 가질 거라면 승도는 이미 희완을 가졌었고 계속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마음, 이 머리, 이 내면을 온통 나라는 것으로 채우고 싶다. 아니, 위악은 잠시 집어치운다. 아껴주고 싶다. 빈 껍질만 남아 되돌아온 누이를 수습하며 들였던 검은 악기가 희완을 안으면 옅어져가는 것을 느낀다. 너를 지키고 싶다. 곁에 두고 누구도, 무엇도, 다치게 하지 못하게 만들어 너를 쉬게 하고 싶다. 엉망으로 으스러뜨리고 싶은 충동과 부드럽게 안아 어르고픈 충동이 시도 때도 없이 충돌한다. 결국엔 상충하는 두 욕구 모두가 승도 본인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덫을 놓았지만 스스로 걸어 들어오기를 바란다. 어딘가 부서진 너는 나라는 짐승을 정상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테지만, 혼자 서지 못하는 너는 결국 나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 선택에 회한을 섞지 않겠다. 후회하며 몸부림치는 일이 없도록, 나는 너를 온전히 갖겠다. 그 기다림은 오히려 달다.

벌어진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번들거리는 침을 닦아주는 승도의 손가락이 매끈한 턱을 문질렀다. 찡그려졌던 눈가가 서서히 펴지는 걸 보곤 승도 역시 잠을 청하려 눈을 감는다. 그러다 다시 눈을 떠서 제 안에 깃든 희완을 내려다본다. 이대로 밤을 지새워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갈증으로 번뇌하던 눈이 한결 잔잔하게 가라앉는다.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고 모양이 예쁜 귀에 입술을 바짝 붙여 무어라 나직이 속삭이니 작게 반응을 보이는 희완이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잠이 가득한 눈으로 몽롱하니 승도를 올려보다 스륵 감기는 눈꺼풀 위로 입술이 눌려진다.

허락한 겁니다.

결국은 같이 살겠다는 다짐이다.

의자에 멀뚱히 앉아 촘촘한 속눈썹을 느리게 깜빡이는 희완의 입가로 머쓱한 웃음이 스친다.

맞은편에 앉아 일장연설을 하던 성희가 침 튀기던 것을 멈추고 그런 희완을 어처구니없다는 눈초리로 쳐다본다.

“야 인마! 웃음이 나오냐?”

“어어, 안 웃자니 그것도 어색해서.”

급하게 부르기에 무슨 일인가 묻지도 않고 뛰어 왔더니 여간 민망한 상황이 아니다.

남극 새파란 신입들을 모아놓고 고로, 잘생긴 얼굴의 표본이란 이런 것이다. 하며 희완을 들이밀었을 때의 그 황당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얼굴만 잘났느냐, 183에 64, 범인들은 꿈도 못 꿀 환상의 바디라인에 백옥 같은 피부, 그뿐이냐? 얘는 뼈까지 잘생겼다, 하며 면 티셔츠를 당겨 빗장뼈를 보여주는데 희완은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멋대로 2센티 높여 부른 키는 그렇다 쳐도 몸무게는 또 어찌 알았는지 근사치까지 말하는 성희의 눈썰미에 놀랄 새도 없이 학정에서부터 졸졸졸 뒤따라온 석주경이 한술 더 뜨고 난리였다.

황단 누님, 누님, 우리 희완 선배님은 연기도 잘하시지 말입니다. 노래도 잘 하고 춤 출 땐 또 어찌 그리 섹시하신지, 보고 있자면 남자인 저도 코피가 퐝 터질 지경입니다. 거짓말 아니고 정말 다 가지셨습니다. 다아-! 아, 아닙니다, 체력이 조금 부실하긴 한데 그것도 요즘 특훈 중이시라 나아지고 있으니, 우리 희완 선배님은 정말 완벽하십니다!

결론은 우리 형 킹왕짱! 인데 희완은 지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하는 녀석들을 조금 복잡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어서 이 우매한 놈들 앞에서 한 바퀴 돌아봄으로써 너의 우월함을 뽐내라는 성희의 진지한 요구에 아, 진짜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결국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저를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는 일면식 하나 없던 남극 신입들의 레이저빔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마지못해 한 바퀴 도는 희완의 얼굴이 화끈하였고 키득키득 거리는 동기들의 웃음소리에 뒤통수가 뜨끈해졌다.  

안 그래도 청소하다 말고 와서 후줄근한 꼴이 말이 아닌데 정말 된통 걸렸다는 생각이다. 수고했다는 성희의 손에 이끌려 근처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은 희완은 거 좀 생겼다고 지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은 현실의 쓴 맛을 봐야할 필요성이 있다며 던지는 말들이 농담인 줄 알았는데 죄다 진담이라 정말로 당황하고 말았다.

“뭐야, 너 놀리자고 한 말인 줄 알았어? 애들 앞에 세워 놓고 내가 그런 영양가 없는 짓을 뭐하러 하냐?”

“맞습니다, 황단 누님. 희완 형은 정말 본인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니까요. 저번에도 연습 중에 피버스 역할 맡기니까, 그거 말고 콰지모도 하겠담서 단장님도 황당해하셨는데 그마저도 훌륭하게 소화해내서 필영 선배님이 짜증내면서 대본 집어 던졌다니까요? 이 얼굴로 못생긴 꼽추 역할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황단 누님! 대사가 말이 되냐고요!”

“잘 했겠는데, 뭐. 실제 올리는 거였다면 분장술의 힘을 좀 빌려야했겠지만 말이야. 것보다 너, 얘가 이러는 거 다 너네 잘못이라는 것만 알아둬라. 얘가 까까머리 중딩 때부터 학정 선배 좋다고 졸졸 쫓아다니면서 공연은 물론 자투리 출강이란 출강까지 안 쫓아다닌 데가 없었는데 그때마다 학정 선배 레파토리가 뭐였는지 알아? 신은 모든 걸 주지 않는다는 거였어. 안 어울리게 달변가라 어쩌고저쩌고 블라블라 말이 많긴 했는데, 한마디로 얼굴 하나 믿고 나대는 놈들 까불지 말고 연기공부나 더 해라. 뭐, 요점은 그거였는데. 이 자식이 얼마나 순진했던지, 잘생긴 놈 니콜 연기 못하는 놈이라고 머릿속에 콱 박혀서는, 완전 이 얼굴이 콤플렉스인 티를 팍팍 내고 다니는데. 아마 내가 그때 이놈 친구였으면 뒤통수를 까기만 하냐? 아주 그냥 엉덩이를 까서 혼쭐을 내줬을 거다. 학정 선배만의 잘못이 아닌 게 얘 입단했을 때 거기 선배들이 얼마나 잡았었냐? 애 성격도 모르고 잘생겼으니까 무조건 콧대가 안드로메다에 가 있을 거라고만 생각해서 잘난 건 죄라는 공식을 얼마나 세뇌시키고 각인 시켰었냐고! 특히, 필영 선배 말이야, 필영 선배!”

잘 몰랐던 히스토리를 줄줄 읊어주는 성희의 이빨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는 석주의 곁에 있던 주경이 키득거리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저는 연습할 때 필영 선배가 콰지모도 한다고 나설 줄 알았는데 절대 손 안 드시더라고요. 외모로만 따지면 딱 싱크로율 백프론데요. 목소리 걸걸하고 체구도 그렇고요. 단장님도 그래서 그 부리부리한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보셨는데 끝내 모른 척 하시더라고요. 으흐흐흐 그런 얼굴도 연극인에게는 선물이라며 풀 죽어 있던 중석이 어깨 두드리던 게 엊그젠데요.”

하며 까르르 웃는 주경을 아주 예뻐 죽겠다는 듯이 쳐다보는 석주에게로 붕 헛손질이 나간다.

“이것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꽁냥꽁냥, 꽁냥질이야?”

“어어어? 황단 누님! 우리 안 사귄다니까요?!”

“어어어? 황단 언니! 우리 안 사귄다니까요?!”

에라이, 삼척동자도 안 속겠다! 콧방귀도 안 뀌는 성희가 옆에서 아하하, 소리 내어 웃는 희완을 흘긋 돌아보았다. 학정에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는 소리를 듣고도 긴가민가했는데 여기저기서 출몰했다는 이야기에 그런가보다, 하고 납득을 했다. 그 집안 내력인지 요 좁은 동네에서도 여기저기 골목골목 떠도는 걸 보니 그 습성 어디 안 가겠다 하며 한편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언제는 바람 잘 날 있었나 싶었지만 요새 연극판이 심상찮게 뒤숭숭했다. 도우진에 관한 소문도, 하준우에 관한 소문도, 학정에 관한 소문도, 무엇하나 확실하지 않은 뜬소문 중에서 그나마 하준우의 지휘 아래 진행 중이던 공연 두어 개가 연달아 엎어졌다는 소식에 그 집구석 망해가고 있다는 소문이 아예 거짓은 아니구나 넘겨짚을 뿐이었다. 워낙 자금구조가 탄탄하지 못한데다 엉성하게 얽혀있는 바닥이라 어디 하나라도 넘어지면 그 타격이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쳐 요즘 분위기가 예전만 못했다.

가뜩이나 경제 한파로 불황인 공연계에 제법 큰 프로모션이 연달아 두 번이나 엎어지고 나니 배고픈 바닥에 더 찬바람만 부는 것이다. 아무리 미운 놈이라도 하준우가 공연계에 기여한 바는 분명히 있었고 들어오는 돈 대부분이 그 놈 주머니로 들어갔다지만 공연 하나가 히트를 치면 그 상승세를 타는 기류도 무시 못 할 바는 아니었다. 해우 단원들도 자금줄이 끊겨 끈 떨어진 연 신세로 수그리고 다니는 거 보면 안쓰럽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워낙 악명이 자자한 집구석이라 남들만큼 동정이 가지는 않았다.

다만 들려오는 도우진 소식과 다들 쉬쉬하고 있지만 극단 학정을 두고 도는 심상찮은 소문은 석연찮은 구석이 더러 있었다. 그런 걸 정말 모르는지,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지 알 수 없는 녀석의 잘난 상판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성희가 툭툭 다 식은 커피 컵을 두드렸다.

“이럴 거면 뭐하러 따뜻한 거 시키냐? 진즉에 냉커피로 주문하지.”

더 식기 전에 얼른 마시라는 타박에 웃음기 어린 얼굴로 커피 컵을 드는 희완이 나뭇잎이 붙은 주경의 머리칼로 손을 뻗으려다 툭툭 그 손으로 석주의 팔을 건드리며 흘긋 눈짓을 한다. 어이구, 지나치게 바른 놈이라니까. 이만큼 뒹굴었으면 좀 느슨해질 만도 한데 말이다. 한참 비루먹은 개새끼마냥 낑낑거리며 나돌아 다닐 때 그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악질적인 소문들이 어떻게 났다 싶다가도 그런 것에 필연적인 이유나 개연성 따윈 없다는 걸 상기한 성희가 일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악의나 흥미를 가진 누군가의 입 하나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을 완전히 믿지도 않았지만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마음의 짐이었고, 희완이 이 골목을 걸을 때마다 상기할 죄책감처럼 성희 역시 다르지 않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아줘서 고맙다는 생각이다. 아예 얼굴을 안 보면 서로 마음이야 편했겠지만 성희는 그 짐이 평생 남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골목에 그녀 역시 발을 붙이고 서 있는 동안에는, 살갗을 파고든 작은 가시처럼 그리 신경질적이고 병적인 아픔을 끊임없이 유발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어느 밤에 벤치에 누워 팔을 껴안고 새우잠을 자고 있던 희완을 떠올린다. 같은 말이었다.

이러고 돌아다닐 거면 왜 돌아와서. 갈 곳이 없었다는 희완의 메마른 목소리가 심상을 울린다.

지금은 어디 마음 붙일 곳이 있나, 가만 들여다보는데 저 준수한 얼굴은 여전히 잠잠하다.

스무 살의 희완도 이랬었나. 순한 성정이긴 하였지만 꽤나 밝고 쾌활하기도 했었는데, 스물여섯의 희완은 구석구석이 많이 닳고 녹이 슨 느낌이었다. 나름 운치는 있지만 그 푸릇함이 지나치게 짧아 안타깝기도 했다. 학정의 밑에서 순리대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갔다면 지금쯤이면 빛을 보고도 남았을 존재라 저 얼굴에 스치는 신산함이 유독 눈에 밟히는 까닭이다.

계단 문턱에서부터 솔솔 풍겨지는 고소한 냄새에 코를 킁킁거리던 석주경이 피자다! 만세를 부르며 다다다다 세 계단씩 밟고 올라갔다. 그 뒤를 멀찍이 따르던 희완도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며 안으로 들어섰다. 오후 연습시간에 맞춰 집합한 단원들이 빙 둘러 앉아 가운데에 빈틈없이 깔아놓은 피자박스에서 각자 입맛대로 하나씩 골라 맛을 보고 있었다. 막 세 개를 겹쳐 한 입 크게 밀어 넣는 중석의 이마를 까던 도연이 가까이 다가온 희완을 끌어 옆에 앉히고는 단호박 피자 두 개를 겹쳐 입에 밀어 넣어준다.

“얼른 먹어, 서른 판 왔는데 벌써 거덜 난 거 봐라. 어디 갔다 왔냐?”

“황단한테. 웬 거야?”

“예의 그거지 뭐. 누군지 몰라도 덕분에 요즘 입이 호강이다. 밥값도 굳고, 비록 술값으로 빠지긴 하지만 이게 어디냐, 끼니마다 종류별로 도시락 배달에, 간식까지 꼬박꼬박 넣어주니, 이게 횡재 아니면 뭐가 횡재겠냐?”

낄낄 거리며 또 옆에서 세 조각을 한 번에 밀어 넣는 중석의 이마를 까는 도연이 콜라를 가득 채운 종이컵을 희완 앞에 밀어주었다.

극단에 다시 나오게 된지 이제 한 달이 되어 가는데 이런 익명의 후원은 희완이 복귀하기 전부터였다고 했다. 다달이 투자금을 가장한 후원금이 들어오고 돈 새는 일이 생기면 때맞춰 건수가 생기고, 이런 도시락과 간식 배달은 이제 기본이 되어 있었다. 처음엔 감사히 받던 학정도 호의가 계속 되자 미심쩍어하며 불쾌해하다 이젠 어쩐 일인지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며칠 전에는 소줏집으로 넉 달 치 술값이 미리 지불 돼 술값까지 굳었다는 소릴 들었던 것도 같은데, 어느 놈한테 콩깍지가 쓰여 이러는진 몰라도 익명의 느님 땡큐 쏘 머치를 외치는 단원들은 요새 하도 잘 먹어 그런지 하나같이 때깔이 좋았다. 다른 극단에 남은 음식을 품앗이 해 생색을 낼 정도이니 말 다 한 거다.

언제 끊길지 모를 후원금이라도 극단 형편이 나아졌다니 희완도 한결 마음이 놓인다. 정말 빠듯한 시기에는 당장 월세 낼 돈이 모자라 단장을 비롯한 단원들이 단체로 막일을 뛰기도 했었다. 장비 대여할 돈도 없어 약 석 달간을 혼자 야간작업을 뛰기도 했던 학정은 웬만해선 단원들이 아르바이트에 시간을 빼앗기는 것을 썩 달갑잖아 해 그런 적이 드물긴 했지만, 희완은 그럴 때 빨리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간판 단 지 거의 20여 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지만 극단을 거쳐 간 단원들 중 특출 나게 성공한 인물이 거의 전무했다. 알려진 인물 몇몇은 입단을 하긴 했어도 학정 출신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게 다들 도중에 큰 기획사나 극단으로 적을 옮겨 데뷔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연극계에서는 알아주는 인사에 꽤 명문에 속한 극단이었지만 형편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잘 가르쳐 놓으면 알맹이만 쏙쏙 빼가는 드러운 놈들이라고 술만 마시면 읊어대는 경성의 18번엔 우진도 속했고 희완도 속했다. 이제 희완은 빈털터리로 돌아왔고 우진은 여전히 안개 속에 있었다. 오래도록 남는 단원은 풍운을 꺾고 일반인으로 살아가거나 가까스로 명품조연으로 반짝 이름을 날리다 자진탈선을 하고, 일찍 둥지를 바꿔 떠난 단원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드물게 예외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그러했다. 학정의 수완 부족이었고 영업의 부재였다.

일개 극단에서 한 단계 뛰어오르기 위해선 명성이나 실력과 인맥만으로도 부족한 게 분명 있는 법인데도 학정은 그쪽에 대해선 완고했다. 성상납이란 그 사전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래 전 우진을 원한 로비스트의 턱을 갈기고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비교적 사고가 유연했던 우진은 그런 학정을 유난하다고 면박을 주었었다. 그럼 평생 성공 못하고 도태될 것이라고, 그렇게까지 해서 얻게 되는 성공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밤새 설전을 벌이다 소줏집 구석에 엎어져 잠든 걸 끌고 오는 것이 희완의 몫이었다.

그런 학정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희완의 가슴을 친다. 꿈을 위해서도 팔지 않았던 몸을 고작 돈 때문에 막 굴렸던 희완에게 정작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던 학정의 그 속을 알지 못했다. 지금도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외려 그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추측하는 희완이 화드득 고개를 젓는다. 강제로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예전처럼 필요에 의해 그와 같이 사는 것도 아니다. 선택은 희완이 했으나 그와 함께 있는 이유는 희완 역시 정확히 알지 못했다. 같이 살자는 말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래야만 했다. 아아, 다르지만 결국은 필요에 의해 그와 함께 있는 것이다.

그새 동이 난 피자 서른 판의 흔적을 치우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단원들 틈에서 주변정리를 하던 희완이 힐긋 사무실에서 경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학정을 돌아보고는 목덜미를 슬쩍 문질렀다. 돌아오고 싶다는 말에 알았다며 희완의 머리를 쓰다듬던 얼굴에 파릇한 수염이 가득이었다. 가방 하나면 충분한 짐을 싸들고 나오는데 별 말 없이 보내주던 학정이 연극 대본을 던져준 것이 바로 다음날이었다. 극단 생활은 엄격했고 혹독하고 빠듯했지만 그로 인해 얻는 즐거움이 상당했다. 희완은 바르르 떨리는 손을 다잡았다.

벌써 석주경의 입에서 남극에서의 추태가 설파되었는지 여기저기서 낄낄 거리며 웃는 소리가 좁은 연습실을 휘돌았다. 아니, 이거 웃긴 이야기가 아니라니까요! 혼자 펄펄 뛰는 석주 보기 민망해 자진해서 쓰레기더미를 들고 연습실을 나선 희완이 휭 부는 찬바람에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어느덧 계절은 겨울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극단에 돌아왔고 정착 아닌 정착을 해서 제법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지만 희완은 아직도 가끔씩 제 발밑을 살피곤 했다.

불안한 기운이 스미면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목덜미를 쓸고 들어오는 커다란 손바닥에 희완은 악몽을 꾸기 직전 눈을 뜨곤 했다. 그러면 다시 잠이 들 때까지 옆에 누운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남자를.

매일이 이상했다. 같이 살면, 의례히 원하는 것이 그것일 거라 생각했는데 남자는 희완에게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가끔 우연찮게 부딪쳐도 심장이 불안정하게 뛰는 건 희완일 뿐, 남자는 지나치게 무심했다. 그렇다고 침실을 따로 쓰는 것도 아닌데, 조금 멀찍이 떨어져 자도 아침이면 그의 품에서 눈을 뜨는 지금이 부자연스러운 것 정도는 희완도 알고 있다.

때때로 그가 챙겨주는 아침을 먹고 다른 것으로라도 밥값을 하기 위해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니 사나흘에 한 번 불려오던 도우미가 매일 출퇴근을 시작했다. 정말 잠을 자거나 빈둥빈둥 뒹구는 것 외에는 그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희완은 되도록 일찍 집을 나서 늦게 귀가하곤 했다. 극단 생활에 충실했고 들어오는 일이라면 마다않고 대부분 소화해 냈다. 잠잘 때 빼고는 거의 얼굴 마주칠 일이 없으니 어쩔 땐 동거인이라 하기에도 애매하다.

같이 따라 나온 도연이 담배나 한 대 태우고 가자기에 같이 건물 뒤쪽으로 붙어선 희완이 주머니를 뒤지다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바로 어제 학정에게 걸려서 들고 있던 담배를 압수당해 가진 게 그거 뿐이라 피식 웃는 도연이 너도 당했냐는 얼굴로 기꺼이 제 담배를 입에 물려준다.

그거 빼앗아서 국 끓여 드신다더라, 는 소리에 하하 웃고, 졸작 공연 시즌이라 선배들 컨펌 받는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학교 후배들 싹수나, 풍문으로 도는 오디션 소식이나, 소줏집 아저씨 선 봤다는 소식이나, 이런저런 신변잡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담배 한 대가 훌쩍 짧아졌다. 으으, 춥다. 진저리를 치며 타박타박 앞서 들어가는 도연을 뒤따르는 희완도 불씨를 털어 발로 밟고 쓰레기봉투에 꽁초를 던져 넣었다. 찬바람이 들어 칼칼한 목으로 작게 기침을 하고 건물을 돌아 낡은 현관으로 들어서니 위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란스런 활기에 절로 목 아래가 따뜻해진다.

* * *

감사합니다.

* 폭력 수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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