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23화 (23/123)

별이 머무는 계절 (Just Smile)

“영화제 수상, 축하드립니다.”

벌써 세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며 눈썹을 모으던 우진이 차장에 팔꿈치를 기대며 독한 연기를 길게 뿜어내었다.

“뭘, 내가 받은 것도 아닌데.”

중얼거리는 듯한 음성엔 아무런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따로 환기를 시키지 않아 연기로 자욱한 차 내부 어딘가를 몽롱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우진이 뒷좌석 창문을 내리며 다시 필터를 당겨 빨았다. 도톰하면서도 날렵한 입술이 바짝 말라 보풀이 일어 있었다.

“너, 다음 주부터 해우로 나와.”

“…죄송합니다.”

“뭐가, 그 좋은 재주 두고 꼴같잖은 작업복 입고 설치는 게? 아니면 내 제안을 거절하는 게.”

“저, 학정 선배님께 신세지고 있습니다.”

“그 인물 신세 안 진 놈 손으로 꼽아 봐라, 몇이나 있나. 내가 그것도 모르고 여기로 찾아왔을까봐?”

“다른 짓 못합니다.”

“다른 짓? 왜, 내가 너한테 엄한 짓 시킬 것 같아?”

“선배.”

“하준우 그 새끼가 멀쩡한 새끼라고는 말 못하지. 너도 몇 번 당했다며? 등신, 돈 달란 소리를 못해 그 꼴을 당해? 왜, 한물 간 놈이라 그 정도 도움도 못 될 것 같더냐? 니가 그리도 애 닳아 하는 김학정 뒤통수 치고 간 놈이라 곧 죽어도 아쉬운 소리 하기는 싫더냐? 새끼, 그 인간 뒤통수 칠 거면 차라리 나한테 말을 하지, 기르던 개만도 못한 짓을 해? 낯짝도 두꺼운 놈, 뻔뻔한 새끼, 갈아 먹어도 시원찮을,”

“우진 선배.”

부들부들 떨리는 우진의 손을 꽉 쥔 희완이 벌겋게 충혈 된 그의 눈을 보았다. 다 타들어가는 담배를 쥔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던 우진의 갈빛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필터까지 태워 살갗에 닿기 직전인 담배꽁초를 받아 눌러 끄고 우진의 손을 꽉 붙잡은 희완이 다시 그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여기까지, 혼자 오신 겁니까.”

“……왜, 운전도 못하는 병신일까봐?”

“눈이, …많이 피로해보입니다. 잠은-,”

“좆 까고 있네.”

제 손을 잡은 희완을 밀어내며 가볍게 뿌리치는 우진의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찌푸려졌다. 아직도 떨림이 남은 손으로 담뱃갑을 뒤져 다시 한 대를 입에 무는 우진을 말없이 보고 있던 희완이 먼저 담뱃불을 당겨 주었다.

“눈 좀 붙이고 가십시오.”

“눈? 왜, 너도 내가 정신병자 같냐? 미친놈 같아? 환자 같아? 꼴좋지.”

자조 섞인 웃음이 화사하지만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가득 번졌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빨다 왈칵 얼굴을 구기고 다른 손으로 담배를 옮겨 꽉 쥐던 우진이 탁, 운전대를 내리쳤다. 통제가 안 되는 몸을 주체할 수 없어 날카로워진 모습이었다. 한참 운전대에 얼굴을 처박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던 우진의 손가락 사이에서 태우다 만 담배가 툭 떨어졌다. 재빠르게 그것을 낚아 챈 희완이 그것도 재떨이에 비벼 끄고 뒤에 창문을 올렸다. 시리게 불던 바람이 차단되며 냉기가 돌던 차체로 히터바람이 돌았다.

구김이 별로 없는 고급 양복과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는 머리카락 등 우진의 모습은 성공한 배우 그대로의 모습이었지만 지극히 불안정해 보이는 행동에 희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재기에 성공했다고 들었다. 작년 해우의 이름으로 올린 연극을 큰 성공으로 이끌어 재기의 발판을 다지고,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는 흥행에는 실패했으나 국제 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아 이슈가 되기도 했었다. 이젠 대중들도 마약 이라는 단어 뒤에 역시 연기파 배우, 화려한 재기에 성공한 배우, 세계에서도 인정받은 배우로 도우진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불안해 보였다.

낮게 코를 고는 소리에 운전대에 기댄 그의 머리를 조심스레 붙잡아 좌석에 기대게 한 희완이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막 숫자가 3시 30분에서 31분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있자니 언제까지 차 시동을 켜 둘 수 없고 학정의 아파트로 데려갈 수도 없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잠든 우진을 내려다보았다. 윤곽이 선명하고 화려한 얼굴 곳곳이 검게 그늘 져 있거나 희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보풀이 일고 살갗이 갈라진 입술과 핏기가 없는 뺨을 말없이 훑던 희완이 불현듯 시선을 들었다.

퉁, 퉁, 허리를 숙인 학정이 운전석 밖에서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일하느라 피곤한 놈이 청소는 뭐 하러.”

우진을 업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는 동안 말 한마디 없던 학정이 깨끗한 집 안을 보곤 타박 아닌 타박을 했다.

“가만히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말입니다.”

“일찍 디비져 잠이나 자지. 거기, 안방 문-.”

우진을 어디다 눕혀야 할지 잠시 갈팡질팡하는 희완의 방향을 잡아 준 학정이 열어준 문을 밀치고 안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18평 아파트에 안방이라고 해봤자 침대 하나에 옷장 하나 들여 놓으면 꽉 찰 정도로 덩치 큰 사내 셋이 들어서니 그렇게 비좁을 수가 없었다.

“선배님은 어쩌시려구요.”

“밖에 소파는 괜히 있냐.”

“제가 소파에서 자겠습니다. 작은 방에서 주무세요.”

“됐다, 티브이 볼 거야.”

희완의 제안을 한마디로 일축하고 우진을 업느라 흐트러진 웃옷을 훌렁 벗는 학정이 씻는다며 욕실로 향했다.

“연희완!”

“네, 네!”

학정이 대충 던져 놔 불편한 자세로 누운 우진을 바로 눕히던 희완이 퍼뜩 답을 하며 방문을 나섰다. 칫솔을 입에 문 학정이 욕실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인상을 쓰고 있었다.

“너, 여기도 청소했냐?”

“아, 네.”

“너 몸종으로 부리려고 데려 온 줄 알아? 앞으론 이런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손 하나 까딱 하지 마! 일을 열세 시간씩이나 하고 오는 놈이, 니가 무슨 용가리 통뼈냐?”

“별 거 아닙니다. 그리고 청소를 안 하면 너무 더러워서….”

“그 결벽증은 여직 못 고쳐서, 아무튼, 이 짓 할 시간 있으면 잠이나 더 자. 뭐 해? 안 가고.”

“……네.”

자기가 불러 놓곤 제 할 말 다 했다고 무안을 주는 학정을 멀끄러미 올려보던 희완이 뒤늦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안방으로 향하였다. 옛날에도 본인 손으로 청소는 안 하면서 청소 하면 꼭 이렇게 혼내키곤 했었다. 그게 청소한 거라는 걸 나중에 알고 경악하긴 했지만. 정말이지, 변한 게 없는 사람이었다. 학정은.

거실 불을 켜 놓고 열어 놓은 문틈으로 새는 불빛에 의지해 우진을 똑바로 눕히고 재킷과 넥타이, 그리고 셔츠 단추 몇 개를 차례로 풀어 주었다. 그나마 좀 편해보이는 얼굴색에 벗긴 것들을 챙겨 방문을 나서려다 도로 든 것들을 의자 위에 걸쳐 놓고 우진의 양말을 벗기던 희완이 흠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무심코 향한 눈길이 길쭉하게 뼈마디가 도드라진 우진의 발가락 사이로 가 닿았다.

“…….”

잘못 본 건가 해서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발가락 사이사이에 뚫려 있거나 뚫려 있었던 구멍은 분명 주사바늘 자국이었다. 한두 개가 아니라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희완이 고개를 들었다. 마른 수건으로 젖은 머리칼을 대충 문대고 있는 학정이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사람 구실 못하게 된지 오래 됐다.”

소파 한 쪽에 앉아 습관적으로 담배를 문 학정이 손가락 마디로 라이터를 돌리며 콧잔등을 일그러뜨렸다. 제대로 말리지 않아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고이는 맨 어깨를 말없이 보던 희완이 라이터를 받아 채어 담배 끝에 불을 붙여 주었다.

“약을 못 하면 하루도 제정신이기가 힘들다고 하더라.”

언제부터, 왜, 어째서, 그 중 하나도 묻지 않는 희완의 반듯한 얼굴을 사나운 눈길로 응시하던 학정이 한숨을 뱉듯 길게 담배 연기를 뱉어내었다.

“여기 찾아오기 시작한지는 꽤 됐는데, 한 달에 한 두 번이 전부다. 니가 저 놈 꼴 보기 싫다면,”

“괜찮습니다.”

“뭐가.”

“회사 근처에 집 알아보고 있습니다.”

“기어이 떠나겠다는 거냐.”

학정이야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건 연극판일 것이다.

기어이, 그렇게, 꼭 떠나야겠냐고.

모르겠다, 희완은. 거기가 기어이 가야하는 곳인지, 기어이 가서 몸을 붙여도 되는 곳인지.

그 꿈같았던 환대에도 희완은 섣불리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언제 또 그 검은 구멍이 열려 자신을 포함한 주변을 한꺼번에 쓸어갈지 몰랐다.

남자는 그냥 가면 된다 했지만, 희완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웠다.

과거는 여전히 희완의 안에서 실재하고 있었다.

“왜 너희 놈들은 다들,”

말을 끊은 학정이 한정 없이 인상을 구기다가 곧 길게 담배를 당겨 빨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자라. 회식 있었다더니, 술은 안 마신 거냐?”

“……네, 한두 잔 정도 마셨습니다.”

“잘했다, 거 뭐 몸에 좋다고 많이 마시고 다니냐, 들어가라. 나도 눈 좀 붙여야겠다.”

“선배님도, …형도 푹 주무세요.”

이제야 겨우 형 소리 들려주는 희완을 물끄러미 올려보던 학정이 휘휘 손을 내젓고는 남은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웃옷도 안 챙겨 입고 소파에 벌러덩 누워 담요를 끌어올리는 걸 보고 거실 불을 끈 희완도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겉옷을 벗고 침대에 몸을 누인 채로 천정을 올려보던 눈을 가만히 깜박였다.

같은 공간에 우진이 있었고 학정이 있었다. 6년 전에는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이었다.

학정의 구겨진 얼굴과 우진의 멍든 발가락을 번갈아 떠올린다. 망가져서 돌아온 희완이 겨우 몸을 기댄 곳이 학정이었다. 망가져서 돌아온 우진이 또 기대려는 곳이 그 학정이었다.

몹쓸 짓이라는 생각을 했다.

빚을 진 곳은 이곳이라 했었다.

남자는, 빚을 갚으려면 예전 비슷하게 만이라도 멀쩡하게 살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차게 식은 손으로 가슴을 더듬었다. 문질러도 열이 나지 않았다. 그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도대체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희완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뜨거운 손이 가랑이를 벌리고 들어왔다. 잔뜩 달아오른 살덩이를 크게 감싸 쥐고 젖을 짜듯 부드럽게 주물렀다. 말캉한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달큰하고 농밀하게 안을 휘저었다. 살덩이가 질척질척하게 얽힐 때마다 울리는 마찰음이 직격으로 뇌리를 관통하는 것만 같았다. 하반신이 뜨거워지고 아랫배가 달아오르고 가슴에서 열이 났다. 뺨을 훑는 척척한 감각에 살갗이 떨리고 귓바퀴를 빨아 당기는 적나라한 감촉에 흠칫흠칫 몸이 떨렸다. 다리를 벌려 뜨거운 것을 가득 받아 당겼다. 높이 올린 다리로 단단한 것을 가득 감아 당겼다. 밑이 뜨거웠다. 유두가 아찔아찔 했다. 사타구니가 움찔움찔 했다. 크고 따뜻한 것이 바르작거리는 몸을 덮으며 깊숙이 들어오려는 순간 시커먼 구멍이 벌어졌다.

와르르 그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몸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희완이 비명을 질렀다. 두 손을 뻗어 아무 곳에나 매달리며 발버둥을 쳤다. 싫어, 싫어, 싫어. 악을 쓰는데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시커먼 어둠이 아가리를 크게 벌린 채 희완의 발목을 잡아채고 있었다. 소리를 질렀다. 울부짖었다. 몸부림을 쳤다. 아무도 손을 뻗어 주지 않았다. 손끝에 걸리는 게 없었다. 적막했다. 너무 적막했다. 제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너무 조용하고 캄캄해 사방이 천정단애 같았다. 누가 밑에서 희완을 잡아 당겼다. 누이였다. 매형이었다. 조카였다. 아악- 절규가 메아리쳐졌다.

“허억…!!”

숨통이 조이는 기분에 번쩍 눈을 뜬 희완이 옆으로 엎어져 컥컥, 막히는 숨을 토해내었다.

부릅뜬 눈알을 타고 식은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달래듯이 그 눈알을 핥아주던 부드럽고 따듯한 살덩이가 떠올라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엄동설한에 발가벗겨져 문밖에 내쫓긴 아이처럼 웅크려 온몸을 발발발 떠는 희완이 축축하게 젖은 매트리스에 얼굴을 문대었다. 그렇게 뜨거웠는데 가슴이 너무 찼다. 너무 차서 시려서 깨어질 것만 같았다. 침대 시트를 붙잡아 온몸으로 당기며 희완이 추위에 몸부림을 쳤다. 달달달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문질렀다. 열이 날 때까지 계속 문질렀다. 추웠다. 너무 추웠다.

간이 휴게실에 앉아 자판기 커피를 들고 있던 희완이 길게 하품을 했다.

꿈 때문에 깬 게 새벽 5시쯤이었는데 그 뒤로 도통 잠들 수가 없어 뒤척이다가 살금 방 밖으로 나갔다. 소파에 있을 줄 알았더니 학정이 없어 의아해하며 아파트를 둘러보다 조심스레 안방 문을 열었었다. 밤새 그 곁을 지키기라도 한 건지 침대 맡에 끌어다 놓은 의자에 앉아 매트리스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학정의 커다란 덩치가 한 눈에 들었다. 낮게 코를 고는 소리가 우진의 숨소리보다 더 컸다. 보일러를 켜 놨어도 외풍이 드는 구조라 맨살을 드러낸 학정이 추울까 소파 위에 혼자 뒹굴고 있는 이불을 끌어다 그 위에 덮어주고 다시 방문을 닫았다.

일어난 김에 아침 준비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냉장고 문을 열고 한참을 뒤적거리는데 나오는 거라곤 술안주와 술병과 다 썩어가는 양파 몇 개뿐이었다. 시골에서 보내준 거라며 베란다에 산처럼 쌓아 놓은 계란과 감자를 떠올리곤 일단 밥부터 앉혀야 겠다 소매를 걷어붙였다.

계란을 풀어 찜을 올리고 감자를 갈아 전을 부치고 볶고,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주방을 정리한 후 밥이 잘 된 것까지 확인을 하고 욕실로 들어서려는데 전화가 왔었다.

특근요청이었다.  

“오늘 쉬는 날인데 나와 있어서 힘들겠어요.”

“조금 졸리긴 한데, 괜찮습니다. 순영 씨야말로 주말에까지, 힘드시겠어요.”

“수당 더 주니까요.”

제 풀에 까르르 웃는 순영이 이래서 애인 없는 사람은 티가 난다니까요? 너스레를 떨었다.

“어제 회식 갔었담서요? 그 아저씨들하고 노는 거 아니라니까, 또 막 억지로 끌고 갔죠?”

그새 어제 일이 한 바퀴 소문이 돈 모양이었다. 순영이 하는 말을 들으니 그 민망하고 난감했던 경험이 어느새 영웅담으로 바뀌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아저씨들 동네 술집이나 가지 거기가 어디라고 멀쩡한 총각까지 데리고 그런 델 가서 그 망신을 다 시키고 와요? 과장님이 대책 없이 끌고 간 거죠?”

이름과는 달리 순진한 것만은 아닌 순영은 그 영웅담 뒤에 감춰진 실상을 손쉽게 파악하고 있는 듯 했다. 사실 겁도 없이 바가지 씌우는 못된 놈들 혼구녕을 내줬다는 과장의 주장은 잘 파고들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 구석이 있었다.

“근데 거기서 기도 안 죽고 상당히 능숙하게 놀았다던데, 희완 씨 왕년에 제법 놀았었나 봐요?”

“그렇다던가요? 노래 부르고 술만 마셨는데…,”

“그럼 그렇지, 저 아저씨들 순 뻥만 늘어갖고 아가씨들이 아주 껌뻑 죽었다더라고 어찌나 그리 의기양양하시던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 아저씨들이 하여간, 아무튼 앞으로는 같이 놀지 마요. 하마터면 희완 씨도 도매급으로 같이 넘어갈 뻔 했잖아요.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요. 놀기 좋아하는 그 아저씨들 희완 씨 일부러 얼굴마담으로 찍은 거니까 어설프게 놀아나지 말고 적당히 선 그어요. 아니, 근데 거기까지 가서 노래 부르고 술만 마셨어요? 하긴, 거기 들어간 것도 용하다니까?”

하며 또 깔깔깔 웃어대는 순영을 따라 엉겁결에 웃음을 짓던 희완이 눈가를 문질렀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밉보이는 일 없이 얌전히 적응하려 했는데 그게 오히려 더 역효과를 본 모양이었다. 조그마한 파도에도 휩쓸리고 싶지 않은데. 옆에 앉아 쉴 새 없이 고급정보를 흘려주는 순영의 발긋한 뺨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희완이 자판기 컵에 코를 박았다.

순영의 말대로 적당히 선을 그어야 할 필요성은 어제 절감하긴 했지만 사내들이란 게 의외로 호불호가 강해서 니 편 아니면 내 편만 있는 뇌구조라 그 적당히, 에도 민감한 선이 있었다. 화려한 외모와는 달리 수더분한 성격에 철들기 전부터 시작한 오랜 연극 생활로 단련된 내공도 만만치 않아 대인관계에 큰 어려움 없이 자라왔지만 지난 오륙년이 희완의 성격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샐샐 웃으며 바른 말을 거는 것도 문제 일으킬까 걱정되어 꺼려졌고 적당히 발을 빼고 어울려주는 것도 때때로 피로하게만 여겨졌다. 이젠 이런 순수한 호의까지 가끔은 성가시고 불편하게 느껴지니 정말 몹쓸 놈이라는 생각만 는다.  

휴식시간 다 되어가니 이제 그만 슬슬 들어가자는 순영을 따라 일어선 희완이 다 마신 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었다. 불러주는 사람도, 가야할 곳도 없이 병실에 우두커니 앉아, 틈틈이 들르는 학정을 맞으며 두어 달을 멍하니 지냈다. 누이의 병세가 악화되고 있었고 봄이 짙어질 무렵엔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장례 절차를 묻는 원무과 직원을 빤히 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통장정리를 했는데 잘못 본 건가 했다. 많은 돈이 통장에 있었다. 5년 전부터 꼬박꼬박 업자에게 납입한 금액에 이자가 붙어 큰 액수가 통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죽은 매형과 조카의 목숨 값이었고 곧 죽을 누이의 목숨 값이었고 그 중엔 희완의 화대도 있을 터였다.

끔찍했다.

산소 호흡기를 떼자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던 누이의 숨이 멎었다.

남은 혈육이 없는 희완의 장례를 도운 건 학정이었다. 왼팔에 완장을 차고 앉아 죽은 누이의 사진을 빤히 올려보고 있는 희완을 대신해 상주노릇을 해주었다. 그러나 찾아오는 객도 없는 초라한 식이었다. 2일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발인을 하는 날 단원 몇이 다녀갔는데 희완은 그 때의 기억이 희미했다. 화장한 누이의 단자를 안고 이틀 동안 사라졌었다는데 희완이 기억하는 건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저를 내려다보던 학정의 무너질 듯한 얼굴이었다. 뭐가 잘못됐구나, 까닭도 없이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었는데 학정의 옆에서 어쩐지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의사는 그저 피로누적으로 인한 실신일 뿐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었다.

그 이틀간의 행적은 희완도 기억을 하지 못해 지금까지도 묘연했다. 장례대금을 치르려고 보니 누군가 익명으로 이미 대금을 치른 뒤였다는 학정의 전언에 희완은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었다. 요릿집에서 나온 뒤로 반쯤 정신을 놓고 있어 누이가 죽기까지 세달 간 병원 대금을 치른 기억이 없었다. 제멋대로 뻗어나가려는 생각의 가지를 억지로 잘라내었다. 경찰에 신고도 하고 이틀간 갈만한 곳을 이 잡듯이 뒤져도 찾지 못했던 희완을 발견한 게 누이의 병실이라 했었다. 누이의 단자를 안고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했다.

그 때 몸 안 깊숙이 남아 있던 뭉근한 열기를 희완은 애써 부정하며 기억에서 지우려 했다.

악몽을 꾸기 시작한 건 그 후였다.

작업 잠바 위에 야상을 걸치고 학정이 둘러준 목도리로 얼굴을 칭칭 감던 희완이 핸드폰 액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낯선 번호였다. 무음으로 돌려놓아 소리도, 진동도 없이 빛만 내고 있는 핸드폰을 한참 보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낯선 번호를 겁내거나 망설일 까닭이 없었다.

-연희완입니까?

이쪽에서 말을 뱉기도 전에 쏟아진 질문에 희완이 슬쩍 눈썹을 들었다.

-도우진이 그쪽 이름 대던데.

우진이 맛이 갔다며 장소를 말하는 남자의 습한 목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음울한 노랫소리와 사람 구실 못한지 오래 되었다는 학정의 참담한 음성이 한데 뒤섞였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에게 시커먼 구멍이 되었던 누이처럼 희완도 학정에게 그런 시커먼 구멍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우진은 또 다른 구멍이었다.  

* *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수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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