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22화 (22/123)

별이 머무는 계절 (Just Smile)

비밀번호 바꿔놨으니 누가 들이닥칠까 걱정 말고 집에서 푹 쉬라는 학정의 당부에 고개를 주억거린 희완이 통화를 마치며 입가를 문질렀다. 회식이 있어 늦을 것 같다는 말에 밥은 안 굶겠네, 술 작작 먹고. 하던 학정의 덧붙임에 괜히 따라왔나, 란 후회가 들었다. 입사한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고 수습 딱지 떼려면 또 한참이 남았으니 처음부터 유난하게 보이기 싫어 무리해서라도 가능한 모든 조건과 요구를 맞추며 지내왔다. 그런데 오늘은 시작부터 분위기가 영 수상했다.

늦게 잔업을 마치고 떠들썩한 퇴근길에 회식 소식을 듣고 따라 붙겠다는 관리과장과 사무실 남직원들은 두 팔 벌려 환영해놓고 경리 미스 정을 호통 치다시피 해서 떼어 놓은 건 룸에서 여자를 부르겠거니 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평소처럼 단골로 가던 고깃집이나 술집으로 가겠거니 했는데, 1차도 건너뛰고 한 시간 반이나 걸려 도착한 곳에 내리고보니 한 눈에 보기에도 건물 자체가 남다른 거대 나이트클럽이었다. 자체검열 한다고 입구부터 보안이 철저할 텐데 대책 없이 얼굴부터 들이 미는 아저씨들을, 심지어 작업복도 채 갈아입지 않은 제 꼴을 난감한 심정으로 내려다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입구서부터 막혀 입장 자체를 아예 못하고 쫓겨났다.

여기가 본인이 잘 아는 데라며 큰소리 뻥뻥 치던 관리과장이 보기 좋게 체면이 구겨진 얼굴로 항의를 시작했고 상사 눈치 보던 사무실 직원들이 합세하고 그 와는 별개로 본래 성격이 걸걸한데다 무시당했다고 여겨 흥분까지 한 동료들이 그 분위기에 휩쓸려 입구를 지키던 어깨들과 실랑이가 붙었다. 평소라면 에이, 똥 밟았다 하고 퉤 침이나 뱉고 줄행랑을 쳤을 위인들이 오늘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죽자고 달려드는 모습들이 이상하기까지 했다. 점점 험악해지는 어깨들의 기세가 살벌했다. 그래서 마지못해 그들 사이로 끼어드는데 저쪽에서 덩치 큰 사내 한 명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윗사람인 듯 어깨들이 실랑이를 멈추고 깍듯이 인사를 하는 사이 한쪽으로 일의 주동자인 관리과장을 끌어낼 수 있었다.

“아니, 내 돈 주고 내가 술 처먹겠다는데 씨발새끼들이 사람도 가려서 받느냔 말이다, 우리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냐 이 새끼들아!”

“과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니 진정하시고….”

“진정은 무슨! 내가 말이야! 이래봬도….”

“실례가 많았습니다. 동생들이 버릇이 없어서, 들어가십시오. 사과의 뜻으로 술과 안주는 서비스로 올리겠습니다.”

이렇게 되니 오히려 당황한 건 이쪽이었다. 꾸벅 허리를 숙이며 무섭도록 정중하게 예를 차리는 사내들을 질린 얼굴로 쳐다보던 것도 잠시 그새 기가 살아 큼큼 헛기침을 하던 과장이 보란 듯이 앞장서며 의기양양하게 클럽입구로 향하였다. 쭈뼛쭈뼛 거리던 동료들 사이에 낀 희완도 우르르 그 틈에 휩쓸려갔다.

건물을 보자마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입구에서 쫓겨나겠구나 했었는데. 한참 하준우의 손에 이끌려 업소를 드나들 때 지나친 기억이 있는 건물은 후줄근한 작업복에 싸구려 잠바나 걸치고 있는 희완과 일행들이 이리 쉽게 입장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의사도 묻지 않고 테이블이 아닌 룸으로 안내하는걸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어 멈칫, 뒤따르는 사내를 돌아보는데 칼자국이 선연한 얼굴로 수더분하게 웃으며 눈치 빠르게 답을 한다.

“서비습니다, 서비스.”

괴이쩍은 일이었다.      

어깨들의 대우에 한껏 기가 살은 일행에게 말을 건넬까 하다 분위기 깨는 소리 하지 말라, 된소리만 들을까 도로 입을 다물고, 바짝 뒤따르는 사내들이 순순히 보내줄 것 같지도 않아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희완이 어서 가지 않고 뭐하느냐는 눈초리에 얌전히 복도를 걸었다. 저 험악한 얼굴로 생글생글 웃는 걸 보니 작정하고 골탕을 먹일 셈인 것 같은데, 희완이라고 이제와 나설 구실이 없었다. 객쩍은 오기와 야릇한 기대감으로 똘똘 뭉친 상사와 일행들을 억지로 끌고 나갈 수도 없고,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성을 뚜렷이 느끼지도 못하겠다. 기껏해야 바가지 씌우는 수준일 테니,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도 내심 있었다. 괜한 분란을 일으킬 생각 역시 없었다.  

여길 오자고 밥도 못 먹고 끌려온 덕에 빈속을 문지르며 룸으로 들어서는 희완이 흘긋 닫히는 문틈을 보았다. 룸까지 에스코트 아닌 에스코트를 한다고 따라온 덩치 큰 사내들의 옆모습이 곧 문밖으로 사라졌다. 이런 델 다시 올 거란 생각은 안 했는데, 어영부영 여기까지 휩쓸려 온 걸 한심스러워하며 학정에게는 자세하게 말하지 않는 쪽으로 결심을 굳힌 희완이 넓은 소파 한쪽을 차지하고 앉았다. 피로로 뻐근한 눈가를 문질렀다. 오늘 한 턱 거하게 쏘겠다고 큰소리를 탕탕 치는 과장을 말없이 보며 그가 손에 쥐고 흔드는 카드만 올려보고 있는데,    

하하하하, 역시 과장님이 함께 하시니까 이런데도 다 와보고, 저희가 참 호강합니다아. 안 그래도 내 자네들 앞에서 면이 안 설 판이었는데 저 자식들이, 머리에 똥만 차가지고 말이야, 사람도 잘 못 알아보고! 아니 그런가? 그럼요, 그럼요. 한 때 이 일대를 주름 잡으시고 지금도 알만 한 사람들은 다아 아시는 분을, 저런 쫄개들이 못 알아본 탓인 거죠. 크하하, 그렇지? 짜식들이 말이야, 서울 시의원도 내 앞에서는 기를 못 펴는데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말이야, 그 자식이 내 까마득한 후배라고! 에헴. 민망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며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무리들을 뒤에서 지켜보던 길만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형님, 요즘 물 안 좋다고 위에서 말 많았던 거 아시잖습니까, 저런 치들 들이면 손님들 사이에서도 말 나오는 거 모르잖으시면서, 아니, 하다못해 작업복이라도 벗기시던가!”

“입 닥쳐, 위에서 내려온 지시다. 오늘이 어떤 날인데 저런 것들 하나 처리 못하고, 극진히 모시고 값은 알아서 후려치라는 분부시다. 룸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못 나오게 잘 지켜.”

그럼 그렇지. 가끔 주제도 모르고 기어 들어와 안 들여보내준다고 행패를 부리는 놈들 버릇 고치는 데에는 이만한 약이 없었다. 아주 바가지를 박박 씌워서 벗겨 먹을 대로 벗겨 먹고 나면 혼쭐이 나 다시는 이쪽으로 발길 두는 일이 없을 터였다. 하고 있는 꼴도 돈 몇 푼 없어 보이고, 오늘따라 행사 뒤풀이로 VIP 고객들이 줄줄이 행차하시는 바람에 정신없기도 해서 곱게 보내주려 했는데 마침 그걸 누가 보고 한소리 한 모양이다.    

몇 배는 뻥튀기 되어서 나올 전표를 두고 바락바락 성질을 낼 걸 상대할 생각에 인상이 찌푸려지다가도 종내는 속옷까지 탈탈 털어 대금을 치르고 절절매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 꼴을 생각하니 그제야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길만이 킁 코웃음을 쳤다. 된통 당해봐야 다시는 얼씬도 못하지.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었다. 웨이터가 내민 전표에 개 거품을 무는 과장과 놀라서 변변한 항변 한마디 못하고 있는 동료들 틈에 서서 전표를 확인한 희완이 미간을 찌푸렸다. 천 육백이라니, 말도 안 되게 엄청난 바가지다. 딴에는 호기롭게 들어앉았어도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 그리 노래노래 부르던 아가씨들도 안 부르고 밴드도 없이 저들끼리 마이크 돌려가며 서비스로 내 준 안주와 술만 홀짝이다 그도 눈치 보여 안주와 술이 남았음에도 테이블을 한 번 간 게 전분데, 정말 터무니없는 가격이었다.

“이거 계산 잘못된 거 아니요??”

“이 양반들이 지금 누굴 사기꾼으로 모는 겁니까? 계산 정확하다 아닙니까, 로얄 샬루트 하나에 발렌타인 30 하나, 테이블 하나 추가에, 밴드에 아가씨까지 부른데다가 달랑 열 명이서 특실 하나 잡고 뽕을 뺐으니 천 육백이면 우리도 밑지는 장사다 이겁니다.”

“아니, 이보쇼! 우린 아가씨랑 밴드는 부른 적도 없고 여기, 이 방이랑 기본 테이블은 서비스라고,”

“서비스? 서어비스? 어허! 이 양반들이 정말 큰일 날 양반들이구만! 우린 뭐 땅 파 먹고 장사한다 그겁니까? 서비스 같은 개소린 들은 적도 없고, 룸 하나 잡으면 밴드와 아가씨는 기본에 원래 추가비용까지 받는데, 보아하니 신세도 빤한 것 같으니 천 육백만 내놓고 썩 꺼지란 말이쇼!”

“허! 허허허허! 에이라 이 날도둑놈 같으니라고! 배 째! 못 내! 어디서 바가지도 이런 바가지를! 우린 먹고 죽을래도 그런 돈 없으니까! 다시 가서 계산 정확히 해서 내오라고 이 자식아!”

“술값, 못 내겠다는 겁니까?”

“못 내! 안 내! 마담 나오라 그래, 마담! 씨부럴, 여기 사장이 누구야!! 경찰 불러! 경찰!!”

기분 내러 와서 술을 들이킬수록 괜히 기분만 더러워져 애꿎은 현장 동료들을 갈구며 술잔만 비워내던 과장은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살벌해지는 웨이터의 기세도 읽지 못하고 강짜를 부리는 과장을 한쪽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던 희완이 막 셔츠를 올려 배를 드러내고 누우려는 과장을 만류하며 웨이터에게 말을 붙였다.

“죄송합니다, 소란을 피우려는 건 아니고. 다시 한 번만 전표를 확인해 주셨으면 해서 말입니다.”

“어허, 알만한 양반까지 이러시깁니까? 계산 정확하다고요. 정 못 믿으시겠으면 저 양반 말대로 경찰 부르시든가. 우리야 말로 무전취식으로 신고해야겠고만 어디서 적반하장입니까?”

그러게 감히 주제도 모르고 기어 들어와서 꼴좋다, 라는 업신여김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말투와 눈초리에 쓴웃음을 삼키는 희완이 내색은 않고 가만 전표를 들여다보았다. 경찰까지 들먹이는 걸 보니, 부른다 해도 이쪽 편이 아닐게 확실했고 이런 식으로는 해결이 나지 않을 게 뻔했다. 전표에 찍힌 금액도 몰랐을 뿐, 그들이 말한 비용과 비교해보자면 틀린 점이 없기도 해서 더 발을 빼기가 힘들었다.

들어오기 전 룸 밖에서 싱긋 수더분한 웃음을 짓던 사내를 떠올린 희완이 난감한 얼굴로 눈가를 문질렀다. 본보기용으로 이런 바가지를 씌우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렇지 않을까 의심도 했었는데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딱히 있었나 싶어 의문스럽기만 하다. 욕 좀 먹어도 진즉 데리고 나갈 것을. 아니, 작정하고 밀어 넣었으니 그랬다고 얌전히 보내줬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피곤하다. 졸지에 평소의 반도 못 놀고 생돈만 날리게 생긴 현장 직원들을 흘긋 돌아본 희완이 흙빛이 된 그 얼굴들에 전표를 쥔 손을 내리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지배인을 좀 만나게 해주십시오.”

“아무나 만나줄 만큼 한가한 분 아닙니다.”

“부탁드립니다.”

“아, 글쎄, 이런다고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돈 없으면 카드 내놓고, 그것도 없으면 마누라든 자식새끼든 불러서 통장이라고 들고 오라고 하쇼! 열 명이면 160씩 내놓으면 딱이겠고만! 억지 그만 부리고 얼른 계산하고 썩 꺼지시라고요! 에이, 재수 없게!”

웨이터의 냉랭한 어투에 더 말을 붙일 여지가 없어 입을 꾹 다문 희완이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좀 해보라고 몸이 잔뜩 달아 저만 쳐다보고 있는 동료들과 내놓는 대책도 없이 붉그락푸르락 한 얼굴로 씩씩대고만 있는 과장을 보자니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저라고 별 수가 있는 게 아닌데.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희완의 흰 얼굴이 보안 카메라에 선명하게 잡혔다.

“여긴 무슨 용뭅니까.”

주변에 다른 놈들 있다고 경어까지 붙여주는 철진을 황송하다는 듯이 올려보던 의준이 흠, 대꾸 없이 보안 모니터로 시선을 되돌렸다. 지금쯤이면 룸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 꼴같잖은 어린놈들 우상 노릇 톡톡히 하며 수완 좋게 구슬리고 있어야 할 놈이 보안실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 직원들 업무에 지장을 주고 있는 꼴을 계속 볼 생각이 없던 철진이 의자를 붙잡아 당기려던 찰나였다. 보안 모니터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곤 눈을 치 뜨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의준을 보곤 팍 눈살을 찌푸린다.

“대체 무슨 짓을 꾸민 겁니까.”

“일 년 만에 보는데 장소 참 절묘하지 않습니까?”

아가씨 나가는 룸에 선 희완을 보고 돈 몇 푼에 몸 팔던 그 과거를 비꼬는 의준의 발언에 3구역 책임자를 호출하던 철진이 인상을 썼다.

“후줄근한 꼴을 하고 있어도 생긴 거 하나는 여전히 발군이지 말입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생글생글 참 재수 없게도 웃어대는 의준의 뒤통수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던 철진이 곧 허겁지겁 달려오는 민석을 보고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제 역할도 내팽겨 치고 보안실 구석에 처박혀 연희완의 얼굴을 훔쳐보고 있을 때부터 눈치 채긴 했지만 참 고약한 성깔이었다. 회사 동료들인 듯한 사람들과 왔다가 입구에서 막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걸 마침 들어서던 의준이 발견하고 부러 민석을 불러다 컴플레인을 건 것이다. 단단히 골탕 먹이고 보내라는 당부에 의아한 생각이야 했겠지만 그냥 손님도 아니고 최상급 VIP인데다 성격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의준의 요구니 민석도 군말 없이 시키는 대로 했을 것이다.

“얼마야?”

“천 육백입니다, 사장님.”

참 얄궂고 고약한 숫자였다. 일 년을 꼬박 연희완을 다달이 피 말리게 한 숫자를 모를 리 없는 의준의 성질 더러운 심술이었다. 아무리 그 일로 유감이 많다지만 이제와서까지 우연히 만난 상대에게 이러는 건 좀스럽다 못해 유치하기까지 했다.

“없던 걸로 하고 조용히 돌려보내, 손님들 와계시는데 괜히 소란 떨 거 없다.”

“기본 값도 안 받고 말입니까?”

“……땅 파서 장사 하냐? 새끼야, 바가지 씌운 것만 걷어내고 받을 건 다 받아.”

크크큭, 의준에게서 터져 나온 웃음소리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알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민석이 곧 보안실을 부리나케 빠져나갔다. 뭔 일 인진 몰라도, 성의준에 사장님까지, 저 후줄근한 무리가 오늘의 계륵임은 틀림없었다.    

“백승도는 요즘도 금욕 중이십니까?”

툭 튀어나온 이름에 힐끔 바짝 긴장 상태로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보안실 직원을 흘겨 본 철진이 아예 대꾸를 안 했다.

“씨발, 한 쪽은 이렇게 지극정성인데, 저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여기가 어디라고, 새 인생 깨끗이 살라고 피 같은 생돈 날려가며 길 닦아 곱게 보내줬더니 일 년 만에 얼굴 비추는 데가 고작 이런 싸구려 클럽 보안실 카메라라니, 해도 해도 너무 합니다. 저 꼴로 살라고 그리 신사적으로 보내준 건 아닐 텐데 말입니다?”

싸구려 클럽이라는 소리에 움찔 눈썹을 치뜨던 철진이 보안실 직원에게 잠시 나가보라 눈짓을 하곤 비딱하게 앉은 의준을 못마땅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저 꼴이 어떻단 말인가, 돈 천 육백에 절절매는 궁상맞음이야 성의준 같은 로열이 아니고서야 당연한 이치이고, 그리 보내줬어도 연극판은 애초 글러먹었다 생각한 인사니 어디 자그마한 회사라도 들어가서 몸 붙이고 사는 게 저리 악평할 건 아니건만 의준은 내동 불편한 심사를 굳이 감추지도 않았다.

“몸 팔러 온 것도 아니고 회식 차 온 것 같은데 뭘 그리 신경 씁니까, 아가씨도 없이 술만 마셨다니 즐기러 온 것도 아닌 것 같고, 쓸데없는데 낭비할 시간에 가서 하던 일 마저 하는 게 훨씬 생산적이지 않겠습니까.”

“노닥거리는 건 내 맘입니다.”

철진의 잔소리를 들은 척도 않고 의자에 비뚜름하게 앉아 막 모니터를 벗어나는 희완을 말없이 응시하던 의준이 새삼스레 승도의 거취를 물었다.

“그런 거 말씀하시는 분이시냐.”

“그럴 줄 알았다, 명색이 오른팔이란 놈이 나 같으면 쪽팔려서 접시물에 코 박고 뒈지지.”

“알아도 너한텐 말 안 한다.”

“쥐뿔도 모르면서 허세는,”

의준과 말을 섞으면 꼭 애새끼를 말싸움처럼 번지는지라 아예 말을 말자 싶은 철진이 입을 꾹 닫고 보안실을 나가려던 찰나였다.

“그럼 저거, 내가 좀 가지고 논다?”

“건드리지 말라셨다.”

“좀 가지고 논다고 닳는 거 아니다.”

“분명히 경고했다.”

흠. 귓등으로도 안 듣는 의준을 빤히 쏘아보던 철진이 곧 눈살을 찌푸리며 보안실 문을 닫았다.

요 반년 간 의준의 심사가 꼬일 대로 꼬인 걸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4,5 금융권 문제가 말끔히 일단락되고 말도 없이 자취를 감춘 지가 꼬박 8개월 째였다. 제주에 있는가 했더니 홍콩에서 이태리로, 텍사스에서 말 타고 카우보이 놀이라도 하는가 했더니 멕시코, 중국 상하이를 마지막으로 연락이 두절되었다. 미국이라면 아주 이가 갈리는 의준이 텍사스에서 추적을 포기하고 손을 놓은 뒤론 실상 백승도의 종적을 아는 이가 없었다. 철진도 간간이 그가 보내오는 엽서 한 장으로 그의 생사를 가늠할 뿐이었다.

안 오겠다면 불러들이면 그만인 일이었다. 연희완이라는 약발이 아직까지 통할지는 미지수였지만 의준이 알기로 백승도 만큼 집착이 맨틀을 뚫고 더럽게 독종인 놈이 없었다. 맨손으로 그 잘 나가던 조직 깨부수고 살인죄로 잡힌 놈이 멀쩡히 살아 돌아와 악몽이 된 놈이니 유일하게 맘에 뒀던 것을 그리 쉽게 놓았을 리 없다. 반 년, 아니 일 년이면 많이 참았다.

그러게 사람 따돌리는 건 적당히 했어야지 말입니다, 백승도 이 개님아.  

늦는다던 학정이 자정이 넘도록 들어오지 않아 먼저 자기도, 가만 앉아있기도 그래서 대충 집을 정리한다는 게 본의 아니게 대청소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워낙에 드나들었던 사람들이 많아 쓰레기만도 큰 봉투로 두 개가 나왔다. 마침 다음날이 휴일이라 아예 두 손을 걷어 부치고 본격적으로 청소를 시작한 희완이 다른 집에 실례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부지런히 움직여 광을 내고 나니 새벽 세시였다. 막 극단에 입단했을 때도 일주일에 나흘을 이 아파트에 묵으면서 치우던 게 있어서 손에 익은데도 얼마나 집을 안 치웠는지, 희완은 바퀴벌레가 안 나온 게 용하다고 생각했다.

추리닝에 작업 잠바만 대충 걸쳐 입고 바람도 쏘일 겸 쓰레기봉투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오른 희완이 1층 버튼을 눌렀다. 12층에서 켜진 불이 차례로 숫자를 바꾸어 가며 하강하고 있었다. 습관처럼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퇴근길에 마지막 담배를 태운 걸 기억하고 괜히 입맛을 다신다. 가끔 이렇게 못 견디게 갈증이 일 때가 있다. 주머니를 뒤지던 손으로 목울대를 한번 더듬고 가슴 언저리를 쓸어내리는 희완이 거칠한 잠바의 감촉에 눈썹을 슬쩍 들었다. 1층이었다. 내려놓았던 쓰레기봉투를 집어 들고 열리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섰다.

천 육백, 얄궂은 숫자라고 생각했다. 돈 앞에서 쩔쩔매는 기분이 오랜만이라 기이하기도 했다. 더는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 같아, 정말 열 명이서 나눠서라도 지불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나타난 사내가 적정가를 다시 따져 값을 정했다. 처음 제시했던 금액에서 엔 분의 일도 되지 않는 돈을 치르고 나오면서 가슴을 쓸어내리던 과장과 일행들을 보며 희완은 위화감을 느꼈다. 사실 그렇게 날려도 아깝지 않은 돈이었다. 연연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새삼 빈 가슴을 휑하게 쓸고 갔다.

쓰레기봉투를 내려놓고 가볍게 재채기를 한 희완이 문득 하늘을 올려보았다. 눈 내린 직후라 그런지 까만 하늘에 별이 가득이었다. 기울던 달은 다시 차오르며 잠시 구름 뒤에 숨었다. 하얗게 뿜어져 나오는 입김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새빨간 코끝을 문대고, 찬 공기에 작게 진저리를 치며 아파트 현관으로 걸음을 옮긴다.

주차장을 가로지르는데 옆에서 깜빡, 깜빡, 두 번 반짝이는 헤드라이트에 시선을 돌린 희완이 밝은 빛살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윽고 점멸되는 불빛 아래 희미하게 드러나는 실루엣을 오랫동안 응시하던 눈이 빠르게 흔들렸다. 전혀 동요하지 않은 것처럼.  

“…선배.”

읊조리듯 낮은 음성이었다.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며 담뱃불을 붙이는 우진이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 *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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