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별이 머무는 계절 (Just Smile)
뜨거운 것이 몸속을 떠돌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뜨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간지럽고 저릿저릿하기도 하다.
목울대를 문지르는 손이 턱 선을 타고 올라가 입술을 매만졌다. 바짝 메마른 입술이 뭉개지도록 문지르다 뜨거운 눈가를 더듬고 다시 가슴을 쓸어내리며 하복부로 손을 뻗었다. 애가 닳는 기분에 사타구니로 미끄러지는 골반 근처만 배회하던 손끝이 움찔움찔하며 검은 수풀로 기어들어갔다. 동시에 바르르 떨리는 몸이 왈칵 반대로 뒤집혔다. 사타구니로 미끄러지던 손이 뻗어 나와 콱, 이불을 움켜쥐었고 뜨거운 숨을 토해내는 입술이 눅눅해진 베갯잇으로 마구 문질러졌다. 악몽이라도 꾸는 듯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축축해진 머리칼이 갈퀴처럼 엉겨들었다. 한참을 끙끙대며 고통스레 뒤틀리던 몸 위로 뒤늦게 환히 불이 밝혀졌다.
“희완아.”
“…….”
“연희완.”
악몽에 시달리는 희완을 흔들어 깨운 학정이 인상을 찌푸렸다. 헉…. 숨을 몰아쉬며 부릅뜬 눈을 빠르게 깜빡이는 희완의 정신이 차츰 돌아오는 게 보였다. 정말 괜찮은지 찬찬히 살펴 보고나서야 일어서는 학정이 냉수를 떠와 희완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금세 무슨 상황인지 깨닫고 귓불을 붉히던 희완이 얌전히 내민 사발을 받아 찬물을 꿀떡꿀떡 잘도 넘겼다.
“뭔 놈의 꿈을 그렇게….”
징하다는 생각에 무심코 말을 뱉던 학정이 입을 다물었다. 곤혹스런 표정이 눈에 밟혔다. 환히 불을 켰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실 구석구석에 처박혀 코를 골고 있는 녀석들을 괜히 한번 돌아보고는 빈 사발을 받아 어슬렁어슬렁 부엌으로 향한다. 설거지 거리가 쌓인 개수대에 사발도 얹어 놓고 베란다에 널어놓은 티 하나를 끌어다 희완을 주려는데 날이 차서 옷이 꽁꽁 얼어 있었다.
힐끔 베란다 밖을 보니 펑펑 내리던 눈은 그쳤는데 휭휭 부는 바람이 칼이었다.
티를 도로 빨랫줄에 걸어 놓고 서랍장을 뒤지는 학정이 쯧, 혀를 찼다. 그냥 대충 뭉개고 같이 살자는 말에 흰 얼굴로 고개를 젓더니 자취집이 수도관 동파로 물난리가 나서야 겨우 며칠 신세 지겠다며 찾아온 녀석이 괘씸하다기보다는 안됐었다. 뭔 놈의 인생이 저리 되는 일도 없이 기구하기만 한지.
워낙 연락도 없이 드나드는 인간들이 많아 가정집이라기보다는 거의 민박집 수준으로 전락한 낡은 아파트나마 희완을 들인 기념으로 삼겹살에 소주나 한잔 걸치자는 생각에 장을 봐 왔더니 저 미친놈들이 먼저 자리를 깔고 앉아 병나발을 불고 있었다.
일 년 만에 보는 희완을 보곤 잠시 놀라는가 하더니 그 손에 들린 삼겹살 뭉치를 보곤 환호성을 지르며 통째로 불 앞에 앉혔다. 오히려 얼떨떨한 반응을 보인 건 희완이었다.
그동안 어디 가 있었냐. 머리 깎고 수도승 되었다더니, 얼어 죽을, 잘난 상판은 여전하구나. 요새 하는 일 없으면 우리 극단 와서 일 좀 도와라 너만치 얼굴 값하는 놈들이 없다. 미친놈! 아무리 인생은 인터셉트라지만 이 딴 반칙은 상도에서도 어긋나는 일이다, 연희완이, 하는 작품마다 족족 말아 먹는 저 놈 보단 우리 쪽이 더 낫지 않겠냐, 오면 주연은 따 논 당상이다, 다 너 해라.
진담을 농담처럼 하고 또 농담을 진담처럼 하는 놈들 틈에 섞여 정신없이 고기를 굽고 술을 따르고 받고 넘기던 희완의 곁에 털썩 주저앉은 학정이 아파트 주인 자격으로 그 모든 로비를 한마디로 정리했다.
씹새끼들, 애 작작 부려먹고 곱게 술이나 처먹어라, 한 번만 더 침 흘리면 엄동설한에 발가벗겨 쫓겨날 줄 알아.
우우- 야유도 아랑곳 않고 희완에게서 집게를 뺏어 든 학정이 고기 굽느라 한 점도 입에 못 넣은 희완의 앞으로 토실토실하게 잘 익은 것들만 골라 죄다 밀어 주었다. 어리둥절한 기색으로도 하늘같은 선배들만 있다고 다리 한 번 제대로 못 펴고 열심히 봉사하며 거절 한 번 못하고 받은 술을 죽죽 마셔댄 희완의 귓불이 금세 달아 있었다. 잘 안 취하는 놈인 건 알지만 가볍게 기침을 하던 게 맘에 걸렸다. 얼큰하게 취해서 별 놈의 욕을 다하고 있는 놈들 틈에 끼어 고생 말고 들어가서 좀 쉬라는 말을 하려던 찰나에 벌컥 현관문을 열고 학정 단원들이 들이닥쳤다.
일순 왈칵 인상을 쓰던 학정이 싱글싱글 웃으며 느지막이 들어서는 경성을 보곤 낭패스런 얼굴을 했다. 소줏집으로 오라는 말에 희완이 놈 재워야 돼서 안 된다 했더니 그걸 그냥 못 넘기고 애들 죄다 끌고 온 모양이었다. 에라이 저 화상. 오늘은 배불리 먹이고 푹 좀 재우려 했더니.
아이고, 희완 선배님! 아이고, 희완이 형! 어, 이 자식 연희완이! 등등등, 줄줄이 희완에게 달려드는 시꺼먼 놈들 틈에 낀 흰 얼굴이 놀라 뒤집어지기 직전이었다. 이런 환대는커녕 이놈들을 단체로 볼 거라고는 전혀 예상했을 리 없는 녀석을 멀뚱히 앉혀 놓고 하나씩 들고 온 소주병을 깔 별로 늘어놓는 놈들이 본격적으로 술자리를 시작했다.
희완이 업자들에게 끌려갔다는 전화를 받고 병원에서 치료 받다가 뛰쳐나온 학정이 난장판이 된 연습실 구석에 처박혀 분하고 원통해서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새끼들을 발견하고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희완이 형 없다고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는데 때마침 그 때 희완이 형이 왔었다, 그 개호로자식들이 생글생글 거리면서 희완이 형 끌고 갔다, 경성 선배 조폭판인 줄 알았다, 어찌 그리 재수가 없으시던지…, 아무튼 붙잡고 매달리려고 했는데 실은 무서워서 꼼짝도 못했다, 우리 쳐 맞는 거 보고 희완이 형 그 잘생긴 얼굴이 흙빛이 됐다, 그대로 넘어가시는 줄 알았다, 근데 얌전히 끌려갔다, 그 깡패새끼들이 지장이 어쩌고저쩌고 했는데 피 묻은 각목이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니 꼼짝을 못하겠더라, 그 새끼들이 낄낄대면서 그나마도 빈곤한 연습장 완전히 박살내고 가고도 한참 뒤에서야 정신 차리고 찔찔 짜면서 전화 걸었는데, 쪽팔려 죽겠습니다, 단장니임, 희완이 형 큰일 난 것 같습니다. 경찰이 신고도 안 받아줍니다. 다 큰 놈들이 애새끼처럼 꺼이꺼이 울어대는 걸 우르르 병원으로 보내놓고 그 길로 성의준을 쫓아갔었다.
“씻으려고?”
“네, 일찍 나가봐야 해서 말입니다.”
인제 새벽 네 신데, 땀에 젖은 거 갈아입으라고 건넨 티를 정중히 마다한 희완이 욕실로 향했다.
옷 몇 벌 챙겨왔다며 신경 쓰지 마시라고, 좀 느긋이 씻어도 될 걸 쫓기듯이 씻고 나와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희완이 현관에 섰다. 못 본 새 머리가 좀 길었나 했더니 그것도 또 모자를 뒤집어쓰니 못 알아보겠다.
“무슨 일이기에 이 꼭두새벽부터 나가는 거냐.”
“물류센터에 취직해서…, 교대시간이 이른 편이긴 한데 대우가 좋습니다.”
제법 일반 회사원처럼 이야길 하는 희완을 조금 낯선 눈으로 보던 학정이 잠깐 기다리라 하곤 방에서 목도리와 장갑을 꺼내와 둘둘 둘러주었다. 조금 머쓱한 기색으로도 사양 않고 얌전히 선 희완에게 냉장고에 굴러다니던 홍삼젤릴 하나 물려주곤 퇴근 시간을 묻는다.
“잔업이 없으면 여섯 시에 끝납니다.”
“뭔 놈의 일을 열세시간이나 하냐?”
“네, 좀 일찍 가서 교대해주는 게 관례라서,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일은 무슨, 저 웬수들 오늘은 볼 일 없으니까 일찍 들어와서 푹 쉬어라. 난 좀 늦을 것 같다. 혼자 있다고 밥 굶지 말고.”
알겠다며 어서 들어가서 쉬시라는 희완을 보내놓고 담배 한 대를 꺼내 문 학정이 베란다로 향했다.
반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나갔다가 몸서리를 치며 바닥을 뒹구는 패딩잠바 하날 걸치고 나와 베란다 밑을 빤히 쳐다보았다. 뻐끔뻐끔 반쯤 피우니 저 밑에서 아파트 현관을 나서는 희완의 머리꼭지가 보였다. 그냥 갈 줄 알았더니 힐끔 위를 올려보더니 학정을 발견하곤 꾸벅 고개를 숙인다. 어서 가보라고 가볍게 손을 흔드니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 마당을 벗어났다.
저 걸 또 잃어 버릴까봐 일 년 동안 생 속을 끓이며 틈 날 때마다 희완을 쫓아 다녔다.
누이가 그 지경인 걸 사진으로 보긴 했어도 직접 보니 또 희완의 속을 가늠하기 어렵더라.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 대는 놈을 남창이라 힐난하며 개수작을 걸던 그 기생오라비 같은 놈 상판대기를 후려갈기고 나오는 길이 얼마나 시궁창 같던가. 어떤 취급을 받아왔을지, 안 봐도 그 수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갈기고 나온 후에도 정작 발길은 돌리지 못하고 다시 성의준에게 돌아가면서 학정은 그를 포함해 이름도 모르는 놈들을 몇 번이고 찢어 발겼다. 사무실 문을 걷어차고 들어서는 학정을 보고 기다렸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는 성의준의 멱살을 잡고 그 더러운 소린 꺼내지도 말라 으름장을 놓으며 희완이 있는 곳을 댈 때까지 죽도록 패기라도 할 생각이었다. 한 번만 더 건드리면 정말 연희완을 볼 수 없게 만들어버리겠다는 싸늘한 음성에 학정은 멱살을 틀어 쥔 손을 떨어뜨려야 했다.
기구한 놈이었다. 성의준이 떨구고 간 병원 앞을 서성이며, 희완 누이의 이름을 달고 있던 병실 앞을 오고가며 학정은 곤란할 때마다 얼굴을 문지르던 희완을 떠올렸다. 그렇게 빛나던 놈이었는데, 비루먹은 개새끼처럼 빌빌 거리며 나돌아 다닐 때도 사람 복장 터지게 잘났던 놈이, 수렁에 빠져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그 욕을 쳐 들어가면서도 지 변명 하나 제대로 못하고 잘못했다고 바짝 엎드려가며 독하게 버티던 놈이, 그걸 다 포기하고 따라 들어갔을 때, 그 속이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을지.
병원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그 앞을 떠나지도 못하고 희게 질려 서 있던 희완을 발견하고 숨차게 건너간 학정이 도망가려는 몸짓을 세게 낚아채었다. 이 자식, 안 된다. 그리 가면 안 된다. 정신 차려, 억지로라도 살아야 한다. 이 망할 자식, 사람 속을 썩여도 유분수지, 거기가 어디라고 따라 들어가. 거기가 어디라고 겁도 없이 막 따라 들어가. 소리도 못 내고 아이처럼 서럽게 우는 희완을 놓치지 않도록 꽉 붙들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며 학정은 후회했다. 패서라도 가게 두는 게 아니었다. 다리몽둥이를 분질러서라도 그 때 널 보내주는 게 아니었어. 너는 고작 스물이었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애새끼 뭘 믿고, 제 발로 그 시궁창으로 걸어 들어가게 놔두는 게 아니었다. 학정은 후회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 했다.
“아, 씨바. 영화 찍냐? 폼 잡다 얼어 죽겠다.”
언제 깬 건지 산발을 한 경성이 내복바람으로 발발발 떨면서 베란다 문틈으로 욕지기를 날렸다.
말없이 한 대 내미니 덥석 받아 물곤 춥다고 뛰어 들어가 뒹굴던 야상 하날 걸쳐 입고 베란다로 기어 나왔다. 치직, 불이 붙은 담배를 길게 당겨 빨고 맛있게 연기를 뿜는다.
“완이 놈은 언제까지 그러고 궁상떨고 다닌다냐?”
“궁상은 무슨, 멀쩡하게 회사 잘 다니는 놈한테.”
“병신, 꼴깝하냐? 그 놈 때문에 젤 몸 달은 새끼가, 폼은. 희완이 가가 잘도 연극판 등지겠다. 아주 살 떨리게 신명내던 놈이 잘도 이 판을 떠나겠어.”
“돌아올까 모르겠다.”
“안 돌아오면? 씹새끼들, 건드리면 다 죽는다고 아주 으름장을 놓은 지가 일 년인데, 염병, 그 약발 죄 떨어졌겠네.”
“떨어진 약발이야, 채우면 되고.”
다들 독이 바짝 올라 있었다. 또 다시 그 꼴을 당하고 나니 분통이 터져 돌아버리기 직전이었다. 그 새끼 그리 싸고돌더니 꼴좋다는 소리나 들을까봐 학정도 단원들 얼굴 볼 면목이 없었다. 헌데 다들 울분을 터트린 건 업자들을 향해서였다. 눈앞에서 여 보란 듯이 끌려가는 희완을 보고도 선뜻 나서지 못한 본인들을 향한 자괴감뿐이었다. 단지 희완에 대해 분통을 터트리지 않을 뿐 그 일이 있고난 후에도 전처럼 냉랭했던 분위기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런데 그 색깔이 달랐다. 희완을 욕하고 비난하는 게 아니라 그 일을 꺼내는 것조차 고통스러워하는 분위기였다. 행여라도 술자리에서 그 꼴 들은 놈들이 한소리 거들기라도 할라치면 씨발 새끼들 꺼지라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까는 주둥이 닥치고 꺼지라고, 아주 바짝 독 오른 투견이 되어 있었다. 그 냉랭하고 팽팽했던 분위기가 한 꺼풀 꺾이고 지독한 무력감과 열패감에 빠져있던 놈들 숨통이 트이기 시작한 것은 대대적으로 언론보도가 나가고부터였다. 갈피를 못 잡던 마음들이 그렇게나마 돌파구를 찾은 것이었다.
“그게 사람이 할 짓이냐.”
베란다 난간에 기대 총총 밝은 별이 뜬 하늘을 올려보던 학정이 훅 마지막 한 모금을 뱉어 내었다.
“하긴, 우리도 뭐 크게 다를 건 없었지.”
자조 섞인 음성에 학정이 나무라기라도 하듯 경성의 뒤통수를 툭 친다.
그런다고 희완이 퍽도 좋아하겠다. 어떤 식으로든 지은 죄가 크다고 잘못했다는,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 못하는 녀석이 그 말 들으면 퍽이나 안심하고 돌아오겠다.
“춥다, 들어가자.”
그 일이 있고 정확히 한 달 뒤, 모든 언론을 통해 악덕 사채업자들의 만행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뉴스와 시사프로그램이 연일 그 사건에 대해 떠들어댔고 구체적인 사례까지 들어 경찰조사가 발표되었다. 그 과정에서 연극판에서 벌어진 사건까지 언급이 되었지만 팩트만 간략화 하여 전달하는 수준에만 그쳤었다.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희완의 사정은 다른 피해자들의 구체적인 사례들로 대체되어 충분히 대변이 되었다. 한동안 연극판이 그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알고 보니 그게 다가 아니더라, 씹새끼들, 멀쩡한 놈 인생 그리 망쳐 놓고 쇠고랑만 차고 들어가면 다냐, 지 팔자 지가 만든다지만 나라고 별수 있었겠냐 싶더라, 망할, 기분 개 같고만. 희완에 대한 악의와 비난이 동정과 안타까움, 그리고 어설픈 이해로 바뀌어가면서 저절로 희완에 대한 날 선 시선들도 차츰 사그라져 갔다. 사람 처지가 뒤바뀌는 건 그리 순간이었다.
휴게실 대용으로 쓰이는 창고 뒤편 구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희완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열이 오르는 것 같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담뱃재가 흩어진 흙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자꾸 이상한 꿈을 꾼다. 크고 단단한 손이 몸 구석구석을 매만지고 따뜻하게 문질러 열을 내어주면 희완은 꿈에서조차 애 닳아하며 달뜬 숨을 뱉어내곤 했다. 그러다 그것이 커다란 검은 구멍으로 바뀌어 빨려들지 않으려는 희완을 자꾸만, 자꾸만 밑으로 끌어내리려 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새카만 구멍이었다. 겁에 질려 아무리 비명을 질러보아도 누구 하나 잡아주는 이가 없었다. 손을 뻗어 발버둥치는 희완을 끌어 올려주는 이가 없었다. 그 절박함과 단애감은 무엇으로도 설명이 불가했다.
“어이, 잘생긴 총각! 오늘 총각도 같이 가지?”
남은 꽁초를 비벼 끄고 작업 모자를 고쳐 쓰던 희완이 어깨를 툭 쳐오는 동료의 질문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이, 총각한텐 아직 말 안 했나 보구만, 오늘 상철이 놈 귀 빠진 날 아니라던가, 형석이 자식은 결혼까지 한다니 겸사겸사 오늘 일 치르기로 했으니 총각도 같이 가자고! 저번에 그렇게 쏙 빠져서 얼마나 아쉬웠는줄 아는가? 거기는 아가씨들도 쌈빡하니 예쁘다니 총각도 재미도 좀 보구. 하하하하, 같이 재미 보러 갔다가 우리 같은 놈들은 손가락만 쪽쪽 빨고 오는 건 아닌가 싶네!”
너스레를 떨며 크게 웃는 작업반장의 농에 붙임성 있게 대꾸를 하며 모자를 눌러쓰는 희완의 귓불이 붉어졌다. 큰 악의도 없고 하루하루 그럭저럭 사는 사람들도 퇴폐업소에 가면 놀랄 정도로 질펀하게 놀았다. 처음 술자리에 따라 갔다가 자연스레 그쪽으로 흘러가는 분위기에 희완은 시종 진땀을 뺐었다. 속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겨우 룸을 빠져 나와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쉬는 순간 정말로 속이 안 좋아져 골목 구석에 고개를 처박고 든 것을 죄다 게워냈었다. 돈을 받고 몸을 판 과거가 있어 그런지 유독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것 같다란 생각을 했다.
반장이 콕 집어서 언급한 마당에 대놓고 거절할 순 없으니 오늘은 1차에서 끝내고 몰래 빠져나가야겠다 맘먹으며 작업장으로 들어서던 희완이 눈썹을 들었다. 레일 근처에서 작업 잠바를 입은 사내 둘이 고성을 질러가며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아니, 저 인간들이! 뒤늦게 들어서던 반장이 헐레벌떡 뛰어가 말리는데도 얼굴이 시뻘게질 때까지 욕지기를 섞어가며 대거리를 하던 둘이 막 엉겨 붙어 바닥을 뒹굴려는 걸 주변 사람들이 겨우 뜯어 말렸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제대로 물건을 쌓아 놓질 않아 검수하다 무너지는 물건 밑에 깔려 크게 다칠 뻔했다는 이야기였다. 거, 박 씨가 잘못했네. 그래도 저렇게 욕지기까지 하며 어른한테 저러는 건 잘못된 거지, 아무튼 안 다쳤으니 된 거 아닌가. 여기저기서 수근 대는 소릴 들으며 어서 일들 하지 않고 뭘 하냐는 반장의 윽박지름에 희완도 얼른 제자리를 찾아 갔다.
안 그래도 나이가 지긋한 박 씨의 실수로 몇 번 사고가 일어난 참이라 곧 자리를 옮긴다느니 모가지가 잘린다느니 말이 많던 중이었다.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씩씩대며 시뻘게진 얼굴을 북북 문대는 박 씨의 변명이 희완에게도 들려왔다. 쯧, 저러다 누가 크게 다쳐봐야 정신 차리지. 누군가 뱉어낸 날 선 한마디에 몇몇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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