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20화 (20/123)

20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무대 위에서 희노애락에 취해 울고 웃던 배우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희완의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여전히, 어딘가 부서졌어도 그 흔적은 오롯이 남아 언제든지 불을 내길 기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 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저를 올려보는 희완을 끌어다 이부자리에 앉혔다. 불을 지폈어도 창틀로 새는 바람은 찼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급격히 흐려지는 눈을 보고 승도는 이부자리에서 내려와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벽으로 한쪽만 열린 채 덜렁거리고 있는 다락문이 눈에 들었다. 코앞에 두고 괜히 애꿎은 요릿집만 뒤집어 놓았다. 정신이 나간 건 이쪽이다. 인정해야 했다. 이불에 눕혀놓고 가랑이를 벌릴 생각이 아니란 걸 알아챈 듯 차분해지는 눈이 빤히 승도를 쫓았다. 그것을 통째로 입안에 넣고 굴리고 싶다. 격렬한 욕구였다. 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승도에게 욕구와 필요는 별개였다. 가벼운 흥미로만 남겨뒀다. 발길을 끊고 잊었다.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사진 한 장에 모든 게 바뀌었다.

“오늘부로,”

천 천히 들리는 눈썹이 반듯하게 휘어졌다. 습관이다. 일 년을 안으면서 승도는 자연스레 희완이 가진모든 습관을 알게 되었다. 웃는 걸 본 적 없고, 우는 것도 몇 번 본 적 없다. 고통스레 짓이겨지던 눈이나 빨개진 얼굴 가득 퍼지던 자괴감 또는 두려움 따위가 전부다. 그런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스며드는데 일 년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아니, 오 년은 너무 긴 시간이다.

“연희완 씨의 변제금은 모두 상환되었습니다.”

“…….”

“맞게 들으셨습니다. 다신 이쪽으로 안 오셔도 됩니다. 돌아가셔서 하던 일 하며 사시면 됩니다.”

아 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희완을 묵묵히 응시하던 승도가 미간을 찌푸렸다. 희완이 제 손으로 제 뺨을 후려치고 있었다. 다시 그러는 걸 막으려 팔목을 붙드니 그대로 휘청하며 딸려 온다. 붉게 달아오른 뺨을 보니 우악스럽게도 내리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꿈,”

“아닙니다.”

그래도 꿈같다는 얼굴이다. 오히려 꿈이었으면 하는 얼굴이다.

“지장, 찍었습니다.”

“태웠습니다.”

“어떻게,”

“그쪽에서 다시 연희완 씨를 찾아갈 일 없습니다.”

믿을 수 없다는 눈이 파르라니 번져갔다. 기쁨이 아니다. 안도도 아니다.

“갈 데가… 갈 곳이 없는데 어떻게,”

모든 걸 버리고 왔으리라. 지장을 찍으며 홀로 남은 누이와 눈을 감아도 선한 거리를 다시 볼 일 없다 하며 억지로 밀어냈으리라.

희 미한 분노와 아득한 상실감이 아연하게 번지는 눈동자에서 괴로움이 읽혀졌다. 혼란으로 가중되는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승도가 붙든 팔을 당겨 가까이 붙여 놓았다. 말라서 도드라지는 골격이 팔 안에 들었다. 한 쪽 다리를 세워 공간을 더욱 비좁게 만들었다. 이렇게 달아나는 건 희완에게 좋지 않다. 희미해지려는 정신을 붙들어야 앞으로라도 제대로 살아갈 수가 있다.

“연희완 씨.”

“…….”

“내가 누굽니까.”

“……백, 승도.”

“연희완을 산 사람입니다.”

차츰 원래대로 돌아가는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승도가 다른 사실을 말했다.

“5년 전의 나를 기억합니까.”

“…….”

“나는 연희완 씨를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떠 올리지 않는다 해서 잊었다는 건 아니다. 2년 전 서류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연희완을 찾아낸 순간 승도는 그것이 한심한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 눈에 알아보았다. 사람 꼴이라고 할 수 없는 그 꼴을 보고도, 알아보았다. 기억한 순간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했던 것들이 일시에 떠올랐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내 안에 남긴 흔적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엔 만남이 너무 짧았다. 만남이랄 것도 없는 스치는 인연 중 하나일 뿐이다.

“연희완을 알면서도 모른척했습니다.”

색이 진한 눈으로 멀거니 그를 응시하던 희완이 눈썹을 이지러뜨렸다. 붙들리지 않은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언제부터,”

낮지만 정확한 음성에 눈을 떼지 않고 희완을 들여다보던 승도가 귀를 기울였다.

“언제부터 모른 척을 했다는 겁니까.”

“병원에서 나를 본 건 기억합니까.”

“…사겠다고, 돈을 지불하겠다고,”

왜 이런 걸 묻느냐는 얼굴이다. 꼼짝없이 업자들에게 끌려들어가려는 걸 돈을 지불함으로써 건져주었다. 그럴 까닭이 없는데 그리 했다. 줄 것이 몸 밖에 없었다. 원하는 건 몸 뿐이었다. 간단한 산술이다. 돈을 주었으니 몸을 대었다. 그로 인한 비참함과 자괴감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는 희완을 구해주었다.

“적정가를 지불하겠다고 했습니다.”

“……기억, 합니다.”

“나는 연희완 씨를 알고 있었습니다.”

“…….”

“업자들이 연희완에게 한 짓 또한 모르지 않았습니다.”

“…….”

“싼값으로 연희완 씨를 사들였습니다.”

이용가치가 있었다. 업자들이 댄 줄을 파고들수록 드러나는 명단에 의준은 차갑게 눈을 빛냈다.

원 하는 것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다. 연희완을 돼지우리에 처넣으면 된다. 그를 이용하는 게 좋다. 승도 역시 동의했다. 그러나 승도는 돼지우리에 희완을 처넣는 대신 그 발에 족쇄를 채웠다. 이용할 것도 아니면서 그를 굳이 자유롭게 놓아주지도 않았다. 변제금을 미끼삼아 매일 밤 그 스스로 자신을 찾아오게 만들었다. 어딘가 망가져 있고 그것이 서서히 확대되어 가는 걸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욕구에 충실했다. 갖지 않겠다. 갖지 않은 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너는 아무 것도 아니다.

“지불 금액은, 적정가는, 제가 정했습니다.”

“변제금 총액을 말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럴 이유가, 그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당신은, 백승도 당신은, 나한테… 아무 것도 아닌데,”

희 완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아무 것도 아닌데,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희완에게 돈을 주었다. 몸을 주고 그 돈을 받았다. 거의 매일을 안겼다. 학정에게 돌아가기 전까지는 혼자 잠든 날이 드물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진 게 몸뚱이 밖에 없는데 그걸 맘에 들어 해서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매일 밤 불안에 시달리며, 갑자기 찾아왔던 것처럼 또 갑작스럽게 저를 버릴까 거의 매일 밤 불안에 시달리며 그에게 충실했다. 아무 것도 아닌데, 몸을 원했다. 몸만 원했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뒤로 물러나는 희완을 내려다보며 승도는 말을 맺었다.

“물리도록 안고 버릴 생각이었습니다.”

팔목을 붙든 손을 놓아주며 희완과 벌어진 거리를 가늠했다.

철 진이 내민 서류를 들여다보며 승도는 냉소했다. 미련하고 어리석다. 어쭙잖은 정에 이끌릴 것이 아니라 악착같이 도망가야 했다. 진창을 뒹굴어도 사람답게 살려면 그러는 게 옳다. 한 장을 다 채우지도 못하는 희완의 23년을 훑으며 승도는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무대 위에서 끌어내려진 배우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비참했고 어리석었고 초라했다. 성가시게 찾을 필요가 없었다.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떠올랐다고 건져내어 일부러 들춰볼 필요가 없었다. 의준의 말이 맞다. 이용가치가 있다면 쓰고 버리면 된다. 스물셋의 연희완에 스물의 연희완은 더 없었다. 기억은 보잘 것 없다.

그 후로도 철진은 성실하게 희완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데미지를 입은 채로 군에 입대한 희완은 의외로 적응을 잘해나가고 있었으나 지나치게 말이 없고 폐쇄적인 성격으로 주의를 끌었다. 외박도 나오지 않고 휴가도 나오지 않고 면회 역시 받아본 적 없다. 걸쇠에 매달려 피곤죽이 되어 있던 모습이 파르라니 깎인 머리칼과 야위었으나 여전히 반듯한 옆모습, 그리고 조금 길어 앞이마를 덮은 머리칼이 보이지 않도록 군모자를 푹 눌러쓰고 업자를 만나던 모습으로 바뀔 때까지 승도는 관두라는 말도 없이 철진이 꼬박꼬박 갖다 바치는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무대 위에서 스스로 빛을 내던 연희완을 향한 격렬한 욕구를 이제 스물넷이 된 연희완에게선 느낄 수 없었다.

의 준의 생각에 동의했다. 연희완에게 집착하는 업자를 구워 삼기엔 의준의 명함이 좋았다. 흥정을 붙여 관료에게 갈 연희완을 이쪽에서 사들이기로 했다. 사들여서 관료에게 선물로 안기고 정보원으로 쓰려 했다. 죽어가는 누이를 볼모로 삼는다면 불가능한 계획은 아니었다. 변제금을 갚아주고 업자에게서 벗어나게 해준다면 연희완 역시 받아들이리라 확신했다. 대신 그 몸을 짐승처럼 굴려야 했다. 지장을 찍지 않을 뿐, 이쪽에서 연희완에게 바라는 것 역시 업자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짓이었다.

갑 자기 격렬하게 치솟는 불길에 승도는 인상을 썼다. 연희완이 다른 이에게 안긴다. 연희완을 돼지우리에 던져 짐승처럼 뒹구는 것을 구경만 해야 한다. 한번 던지면, 승도는 그게 무엇이든 결코 그것을 제 손으로 건져 내지 않을 것을 알았다. 연희완이 다른 이에게 가랑이를 벌린다. 연희완이 커다란 구멍처럼 벌어져 돼지들의 오물을 받는다. 연희완이, 다른 이의 손에서 완전히 으스러뜨려진다.

욕구는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었다. 그 본능대로 움직여 승도는 희완을 가졌다.

으 스러뜨려야한다면 다른 손을 거치게 하지 않겠다. 너를 벌리는 것도 너를 굴리는 것도 모두 내 차지다. 오물을 받아야 한다면 내 것을 받게 하겠다. 짐승을 받아야 한다면 너는 나라는 짐승을 받아야 할 것이다. 어차피 망가질 거라면, 완전히 으스러진 널 버리는 것은 내 몫이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어차피 버릴 몸이었다면, 나는 스물의 너를 가졌어야 했다.

“일부러 연희완 씨를 업자들의 손에 두었습니다.”

다리에 힘을 풀고 앉아 거리를 둔 희완이 빤히 승도를 올려본다.

“얼마든지, 연희완 씨를 벗어나게 해 줄 수 있었습니다.”

무 슨 생각을 하는지 느리게 굴러가는 눈동자가 승도의 얼굴을 훑다 가슴, 어깨, 그리고 다시 눈을 마주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가 하는 말들이 전부, 변명 같다. 그렇다면, 왜 이런 변명을 저한테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아무 것도 아닌데, 처음부터 버릴 생각이었다고 했는데, 변제금이 모두 상환되었다며 이제 더는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연희완 씨, 나는 연희완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버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연희완을 진창에서 구르도록 버려두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넘기지 않는다고도, 했습니다.”

“내 밑에서 가랑이를 벌리며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아무 생각도.”

“내가 게걸스럽게 당신을 탐할 때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하지 않았습니다.”

“연희완 씨 누이가 수술대 위에 누웠을 때 연희완 씨는 내 밑에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다행이라고,”

“내게서 화대를 받아갈 때마다 연희완은 어떤 심정이었습니까.”

멍하니 그를 올려보는 눈이 흐려졌다 맑아지기를 반복했다. 한 뼘 더 물러나는 희완이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른다. 붉은 흉이 선명하게 남아 그 손끝에서 일그러지고 있었다.

“상 관할 일이 아닙니다. 모른척하는 게 당연합니다. 화대를 지불하였으니 나를 맘대로 굴릴 권한을 가진 것 맞습니다. 언제든지, 당신만 받아들이겠다는 조건에 응한 건 납니다. 그로 인해 내가 겪은 심적 괴로움은 모두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미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변제금 상환을 당신이 해주었다면, 그 각서를 당신이 태웠다면,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하겠습니다. 진창에서 구르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전에 당신이 건져 주었습니다. 나를 구한 것 맞습니다. 그들이 내게 무얼 보이고 들려주었는지 당신은 모릅니다. 익숙해져야 한다 했습니다. 개돼지와 붙어먹는 걸 보이며 언젠가 나도 저들처럼 사람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될 거라 했습니다. 발정 난 짐승처럼 아무에게나 스스로 다리를 벌리고, 엉덩이를 흔들 거라고… 아직도 내 몸을 원한다면, 드리겠습니다. 다행히 내겐 아직 내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남아 있다니, 주겠습니다. 다만 내가 이제 필요 없어 졌다면, 내겐 달리 갚을 길이 없습니다. 버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다른 이에게 날 내돌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당신이 내 몸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렇게라도 하겠습니다. 내겐 죽어가는 누이 외에는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그 누이마저 죽고 나면 어차피 버릴 목숨이었습니다. 주겠습니다. 당신이 필요하다면 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선뜩하게 굳는 눈을 보며 승도는 말을 이었다.

“연희완 씨는 내게 진 빚이 없습니다.”

“…….”

“돌아가도 됩니다.”

“없다고…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다신 이쪽으로 발길도 두지 맙시다.”

“돌아갈 곳이 없는데…!”

언 성을 높이던 희완이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다 시들어가는 누이의 흉측한 얼굴을 떠올렸다. 저를 볼 때마다 제 손으로 죽인 자식과 남편의 이야기를 하며 행복하게 웃는 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죽었어야 했다. 제 손으로 죽이고 왔어야 했다. 그래야 미련 없이 희완도 놔버릴 수 있었다. 그러다 숨이 막히는 소리를 내며 일그러진 얼굴을 문댄다. 끔찍하다. 이리 끔찍한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스스로가 괴물 같았다. 살고 싶지 않았다. 죽지 못하니 어떻게든 되어 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미워하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않는다고? 닿는 족족 살의가 솟구쳤다. 제 몸을 탐하는 남자의 손길이, 숨결이, 그 돼지들의 것과 동일시되었다. 여럿에게 다리를 벌리는 창부와 남자에게 다리를 벌리는 자신이 한데 겹쳐졌다. 화대를 받을 때마다, 찢고 싶었다. 누이를 볼 때마다 그 목을 조르고 싶었다. 그러고도 살고 싶어 발버둥치는 스스로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 돌아가고 싶어 몸부림치는 자신을 저주했다. 눈앞에서 잔인하게 짓밟힌 학정을 본 순간 더 이렇게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사람이 아니었다.

“연희완 씨 잘못이 아닙니다.”

“…….”

“힘이 없었기 때문에 이용당한 것뿐입니다.”

“…….”

“연희완 씨가 원망해야 할 건 본인이 아니라, 당신가족을 그리 만든 업자들, 그리고 당신을 철저히 외면하고 이용하고 버린 납니다.”

식은땀이 묻어 나오는 희완의 반듯한 이마 선을 따라 오뚝한 콧날과 우수가 깃든 눈을 차례로 들여다보는 승도가 단언하였다.

“돌 아갈 곳이 있습니다. 연희완 씨가 돌아오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쁜 꿈을 꾼 거라고 생각합시다. 연희완 씨가 유일하게 진 빚은 연희완 씨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지운 것뿐이니, 갚아야한다면, 돌아가야지 않겠습니까. 뒤도 돌아보지 말고 갑시다. 붙드는 사람 없습니다. 가서, 지난날처럼은 아니더라도 그 비슷하게는 살아야 그 빚을 갚을 수 있을 겝니다. 나쁜 것들은 모두 두고, 이제 그만 가도 됩니다.”

발이 베인 것도 모르고 구석으로 기어들어가 발발발 떨던 희완을 꺼내어 품에 안았다.

안 으면 안을수록 불길이 일고 냉소가 들고 갑갑증이 올라 승도는 꽉 닫힌 안을 가르고 들이칠 때마다 더욱 사나워지고 거칠어졌다. 철저하게 남창으로만 대하겠다 다짐했으나, 제 밑에서 거의 실신을 하듯 쓰러진 희완을 보자면 울컥 치오르는 화기에 염증이 일었다. 머릿속에서 떼어 놓지 못하겠으니 안아보면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갖고자 하는 욕구가 넘치니 해소하면 그만일 거라 생각했다.

겁 내고 비참해하고 괴로워하면서도 성실하게 제 역할을 다 하며 때때로 저를 떠날까 눈치를 보고 불안해하는 모습이 비굴해 보이는 게 아니라 안쓰럽고 애처로웠다. 주사를 놓으면 짐승에게도 다리를 벌리던 누이동생을 억지로 기억하게 하는데, 그렇게 살기 싫어, 그리 바닥이기 싫어, 구명줄인양 저한테 절박하게 매달리는 희완을 처음처럼 냉대할 수 없었다. 또 버릴 것이냐. 또 버릴 것이냐. 참혹하게 난도질 된 여동생의 시신을 수습하는 승도에게 달려든 부모의 악에 바친 절규가 메아리 쳤다. 누이를 버린 자신과 누이를 버리지 못한 희완은 다른 방식으로 같은 수렁에 처박혔다.

좀 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희완을 품에 안고 발에 박힌 유리를 뽑아내자 핏물이 콸콸 쏟아졌다. 신음하며 얼굴을 제 가슴에 처박고 구명줄처럼 제 옷자락을 움켜쥐는 희완의 발을 씻기고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인정해야 했다. 가슴 한쪽을 축축하게 적시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감싸 안으며 승도는 자신이 희완에게 들이붓고 있던 감정을 인정해야 했다. 아무 것도 아닐 수가 없다. 처음 봤을 때부터 너는, 내게 아무 것도 아닐 수가 없었다.

희완을 병원 앞에 내려주고 복귀한 철진은 요릿집 앞에서 마주친 의준을 수상쩍다는 눈초리로 쏘아 보았다.

“얼굴 꼴이 그게 뭐냐.”

“빌어먹을, 곰한테 물렸다, 이 씹새꺄. 나 혼자 따돌리고 둘이서만 재미 보니 좋더냐?”

“말조심해라. 안에 혼자 계신다. 방해하지 마라.”

“열부 났네, 그 놈 하나 고이 보내주자고 추수만 남은 밭 개판으로 만들어 남 좋은 일만 시켜준 작자가 그리 믿음직스럽냐.”

신랄한 비난에 묵묵히 그를 쏘아보던 철진도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후원 구석에 서서 나란히 담배를 물어 피운 둘이 탐스럽게도 뜬 보름달을 올려보았다. 거 참, 크기도 크다.

4,5 금융권을 사정권 내에 편입시키기 위해 들인 공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었다. 무려 5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작업이었다. 국내 밀매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선 그 자금줄을 먼저 끊어야 했고 그 기반엔 일반 서민 가릴 것 없이 막무가내로 고혈을 짜내 부피를 키운 사채업이 버티고 있었다.

연 희완을 당긴 줄을 타고 올라가니 거물이 보였다. 제도권 밖에서 사채업을 와해시킬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이었다. 와해시킨 것을 주워 사정권 내에 편입시키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누구의 주의를 끌지도 않고 조용히, 손쉽게 금융권 바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공권력을 끌어다 합법적으로 조직을 와해시키고 그들이 쥔 채권 전부를 법적으로 무효화 시키는 건 애초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금전적으로는 이쪽이 얻을 이득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했다. 음지에서 끝낼 수 있는 일을 굳이 양지로 끌어내어 공권력에 그 공을 돌려주었다.

죽 쒀서 개 준 꼴이었다. 의준이 지껄인 소리가 맞다. 배신의 역사가 길어 강퍅하고 교활한 성정이 고착화되었지만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비상한 의준은 입이 걸지언정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성질을 내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처음 연희완을 쫓아 극장에 드나들던 백승도 모르게 뒷조사를 시작하고 시치미 뚝 뗄 정도로 감 좋은 녀석이 백승도 일에는 앞뒤 안 재고 달려드는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기에 그 정도 기만이야 애교로 봐줄 만도 하다. 물론 철진이었다면 애당초 겉과 속이 다른 의준 같은 놈을 가까이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먹지도 않을 감 실컷 찔러나 본 것으로 만족하지, 그걸 도로 달아 걸겠다고 수조억을 날린 백승도를 질겅질겅 씹으며 구시렁구시렁 대는 의준의 입에 다시 담배를 물린 철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모 든 논리가 돈으로 귀결되는 의준과 달리 백승도의 사고는 달랐다. 조직에 대한 원한이 깊어 제 손으로 인두겁을 뒤집어 쓴 살인귀가 된 남자다. 수억을 들고 있어도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했다. 그가 집착하다시피 몰두한 건 복수가 유일했다. 복수를 마친 후에는 그마저도 없었다. 적어도 연희완을 알기 전까진 그랬었다.

때 문에 이번만은 철진으로서도 승도의 선택을 온전히 지지할 수만은 없었다. 연희완에게 어떤 식으로든 부채를 지우지 않기 위해 4,5금융권 채권을 통째로 무용지물로 만들어 놓고 정작 갖길 원한 물건은 제 손으로 내보냈다. 철진이라면 계획대로 넘겨받은 채권에서 연희완의 것을 보란 듯이 탕감시켜주고 그것을 빌미로 옆에 묶어 두었을 것이다. 그러는 게 더 일반적이고 편리한 방법이었다. 빚을 지우고 곁에 둔다. 전형적인 사채꾼들의 수법이었고 이 바닥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갖고 싶은 걸 소유한다. 아니, 좀 더 노골적이고 야만적일 뿐, 누구나 갖고 싶은 건 그런 식으로 얻어 낸다.

끝까지 당겨 빤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는 철진이 기우는 달을 올려보았다.

소유하지 않는 것으로 연희완을 보내기로 한 백승도의 결정은 가장 그 다운 선택이었다.

잃을 생각이 없으니 깨끗이 보내는 것이다.

제기랄, 개 같은 과거가 백승도의 등에 지운 지긋지긋한 굴레였다.

이번만은 억지로라도, 연희완을 그 곁에 두길 바란 건 오히려 철진이었다.

병원 앞에 우두커니 서서 거대한 절벽처럼 선 건물을 올려보던 희완이 눈가를 문질렀다.

열 린 문을 통해 누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여기 있을 리 없는데, 머리에 피 묻은 붕대를 둘둘 감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상 거지꼴을 하고 있는 학정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던 희완의 팔이 꽉 붙잡혔다. 언제고 항상 그가 뿜어내는 불길처럼 뜨거운 손에 단단히 팔뚝을 붙들린 희완이 터벅터벅 학정의 뒤를 따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시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이 차게 식은 손을 흥건히 적셨다. 기우는 달 너머로 떠오른 별들이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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