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당 혹스런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비서를 질책어린 눈초리로 응시하던 의준이 시계를 내려다보며 복도를 가로 질렀다. 무게감이 남다른 목재 문을 밀어 젖히며 안으로 들어서니 초초한 기색으로 소파에 앉아 있던 사내가 벌떡 몸을 일으키는 기세가 읽혀졌다.
“어디 간 거요.”
“연락도 없이 이렇게 무작정 들이 닥치시면,”
다짜고짜 묻는 말에 시선을 들던 의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꼴이 그게 뭡니까, 김학정 씨.”
“어디 간 거냐 묻지 않소!”
온 몸엔 피칠갑을 해갖고 머리에는 붕대를 둘둘 감고 있는 학정을 보고 말문이 막힌 의준이 방심한 사이 성큼성큼 걸어온 학정이 그 멱살을 틀어쥐며 소리를 높였다. 이럴 때마다 진절머리가 난다. 아주 작은 키가 아님에도 때때로 악력에 밀리길 반복했던 의준은 덩치가 산만한 학정의 손에 붙잡혀 발끝이 들리는 것을 감지하고 사납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래서 이 남잘 찾아가는 것을 반대했던 것이다.
“손 놓으십시오. 옷, 구겨집니다.”
아 주 질색이라는 표정에 흥분해 있던 학정의 얼굴이 멍하게 풀리는가 싶더니 이내 와락 구겨진다. 그러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멱살을 콱 틀어쥐다 곧 그것을 놓았다. 현재 칼자루를 쥔 건 의준 쪽이란 것을 뒤늦게 인정한 것이다. 사안의 경중을 가릴 줄 알고 문제의 앞뒤를 가릴 줄 아는 남자였다. 반면 다혈질이기도 한 학정이 이 정도로 흥분해 날뛸 이유야 많겠지만 여기까지 찾아올 이유는 하나 밖에 없을 터였다.
“무슨 일입니까.”
형식적인 질문이었다.
구겨진 셔츠 깃을 펴고 옷매무새를 다시 잡은 의준이 자리를 권하며 저도 상석에 앉았다.
“업자들이 찾아왔었소.”
“연극판에 말입니까?”
“희완이 놈을 데려갔단 말이오.”
흠. 크게 놀라지 않는 의준을 빤히 쳐다보던 학정이 벌떡 일어나 이젠 아예 잡아먹을 기세로 그를 노려보다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그 자리에 도로 털썩 앉는다. 그 길로 테이블을 타고 넘어와 주먹이라도 갈길 줄 알았는데, 성격만 나쁜 곰은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 정도 흥분을 가라앉힌 학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알고 있었군.”
“내가 아는 건 아주 많습니다.”
“그 놈들이 희완을 데려 간 것을 알고 있었어.”
아 주 단정적으로 말을 하는 학정에게 굳이 부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의준이 뜯어진 넥타이를 당겨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머리를 굴렸다. 알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치들이 움직일 수밖에 없게 만든 게 바로 이쪽이니 말이다. 그 사실을 알았을 리 없음에도 여기까지 쫓아온 학정을 탐색어린 눈빛으로 훑어본다. 감이 좋은 사내였다. 단지 그 한 번의 만남으로 희완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게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서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수작질이야.”
날 카롭게 치뜬 눈에도 기 하나 죽지 않고 치고 들어오는 학정이 상체를 넘겨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씹어 삼킬 듯이 그 면면을 샅샅이 훑었다. 사사로운 꼼수나 얕은 수 따윈 전혀 통하지 않을 똑바른 눈이었다. 대쪽 같은 게 아주 재수가 없었다. 의준은 천성적으로 이런 타입과는 상성이 맞지 않았다.
“수 작질이랄 게 따로 있겠습니까. 전에도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연희완 씨 가족이 사채를 썼고, 무책임하게 죽거나 병신이 돼버렸고, 자동으로 연희완 씨가 변제의무를 지게 되었다. 법적 효력은 없으나 어디 사채꾼들이 그런 눈치를 보겠습니까. 데려갔다니, 연희완 씨 역시 그 가족들처럼 변제의무를 이행할 책임감은 부족했나 봅니다. 너무 걱정은 마십시오. 칼을 댈 거였으면 진즉에 처리했을 겁니다. 달리 상환 방법을 제시했을 테고 동의했으니 연희완 씨도 얌전히 따라갔을 게 아닙니까. 적응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리겠지만 뭐, 한 번에 갚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닙니다.”
물론, 이쪽에서 그렇게 놔둘 리 없겠지만 의준은 곧이곧대로 말해줄 의향이 없었다.
처음부터 백승도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백승도 역시 의준의 의견 따윈 안중에도 없었으리라.
이해관계랄 것도 없이 의준은 그에게 빚이 있었다. 의무를 지우진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 질이 나쁘다. 차라리 다른 승냥이 떼처럼 의준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요구했다면 이처럼 그 수족노릇을 자처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이 젠 숫제 경멸이 두드러진 눈으로 저를 노려보는 학정을 심드렁하게 넘겨보던 의준이 푹신한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감정이 고스란히 표출되는 상대는 외려 그 속이 음험한 상대보다 껄끄러운 면이 있었다. 소위 진심이란 것들을 맹종하는 부류인데 의준과는 상극이었다.
“차라도 한 잔 하실 게 아니라면,”
의도적으로 말을 멈추고 더는 귀찮게 하지 말라는 속내를 감추지 않는 의준이 말을 맺었다.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벌 떡 일어난 학정이 탁- 의준이 앉은 소파 등을 잡았다. 숙여진 상체에 의해 드리워진 그늘 아래 잠긴 의준이 눈살을 찌푸린다. 덮쳐지면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사나운 기세에 주눅이 들만도 하건만 의준은 담담했다. 기껏해야 주먹 한번 휘두르는 게 고작일 것이고 현재 학정은 본인이 아쉬운 입장이란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불 법 따위에 책임감 운운하는 그쪽 대가리도 알만하군. 그 놈이 얌전히 끌려갔다는 것까지 알 정도면 꿍꿍이가 있어도 단단히 있다는 건데, 까지 마라 새끼야. 망할 혈육의 정 못 끊어 같이 진창으로 끌려들어간 게 그리 죽을죄냐, 끊어냈어도 억지로 이어 붙여 애 만신창이로 만든 놈들한테 얌전히 끌려가지 않으면 뭔 수가 있어, 나쁜 선택도 아니야? 죽기보다 나은 일이었으면 그 가족들이 왜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겠냐, 안간힘 써서 버틴 놈한테 뭐가 부족해? 좆 까라 새끼야. 입만 연다고 니들이 사람새끼냐, 그렇게 사람 하나가 우스워? 애먼 놈 하나 잡아서 인생 조지지 말고 늬들 일은 늬들끼리 해결하란 말이다. 씨발 좆도 다 같은 깡패새끼들이. 뭔 꿍꿍이속으로 그 지랄들을 하는지는 몰라도 너 이 새끼, 다달이 돈지랄하면서 희완이 놈 엿 먹일게 아니라 니 새끼가 단번에 갚아줬어야지, 제대로 걷지도 못할 만큼 애 굴려 놓고 돈만 던져줄 것이면 애당초 날 찾아올 게 아니라 그 사채꾼들 포주 노릇이나 거하게 시켜줄 것이지 왜 그나마도 없는 놈 더 비참하게 만드느냔 말이다. 아주 끝까지 가지고 놀다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새끼야, 지금이라도 제대로 원상복구 시켜서 멀쩡히 살아가게 해주는 게 그나마 머리 달고 있는 놈의 도리라는 거다.”
언성 한 번 높이지 않고 줄줄이 억지에 욕을 쏟아 붓는 학정이 불똥이 튀는 눈으로 의준을 노려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씨발, 니 위엣 놈한테 전하시라고.”
그제야 의준의 차가운 얼굴에 균열이 갔다.
그 더럽게 낡은 아파트로 학정을 만나러 간 건 의준이었다. 처음부터 내키지 않았다. 도대체 백승도의 속내를 짚어낼 수가 없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었다. 경거망동하지 않는 인간이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고작 이 따위 연애놀음이나 하자고 저를 불러냈단 말인가. 치솟는 화를 억누를 재간이 없었다.
시 큰둥한 얼굴로 저를 맞는 학정을 밀치며 그 지저분한 아파트로 밀고 들어갔다. 전했다. 백승도가 원한대로 사실을 말했다. 당신이 그리 애 닳아 하는 그 놈 정체가 사채 빚 갚으려고 몸 파는 더러운 창부라고. 단지 그 대상이 백승도가 아닌 본인, 의준이라는 사실만 달리 했을 뿐이다. 자연스러운 판단이었다. 그는 어디에도 본인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데,
만나러 갔군. 직접, 만나러 갔었어.
쨍- 하고 갈라질 듯이 얼어붙은 얼굴의 의준이 얇은 입술을 열었다.
“내 위엔 아무도 없습니다.”
“알 바 없소.”
“직접 본 겁니까.”
용무를 다 마치고 돌아서려는 학정을 붙든 음성에 냉기가 서려 있었다.
“뭘 봤습니까.”
묻 는 의준을 기이하다는 듯이 보던 학정이 주머니에서 다 구겨져 있던 명함 한 장을 테이블 위에 툭 던져 놓았다. 아파트에서 건넸던 의준의 것이 아니다. 백승도가 들고 다니는 수많은 명함 중 유일한 실명함이었다. 이름만 덜렁 나와 있는. 의준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빌어먹을, 여전히 아무도 믿지 않는군.
아니, 날 믿지 않아.
더 싸늘해진 의준을 묵묵히 내려다보던 학정이 쿵- 테이블을 내리치며 그의 시선을 끌었다.
“그 쪽 일 난 관심도 없고 흥미도 없소. 백승도고 성의준이고, 내가 아는 건 희완일 그 꼴로 만든 작자들하고 당신들도 하등 다를 바 없는 위인들이란 거요. 그러니 부탁하는 거요. 일말의 연민이라도 있었으니 희완일 여지 껏 돌봐준 것 아니겠소. 나한테까지 찾아와 희완의 사정을 알린 것 아니겠소. 아니, 그깟 연민 따위 아니라도 상관없소. 감정 따위에 호소하는 멍청한 짓은 않겠소. 내 아까 지껄인 소린 다 집어치우고, 당신네들 한 탕 놀음이라도 좋고 심심풀이 땅콩이라도 상관없으니 희완일 구해주시오. 그게 사람이오? 멀쩡한 애 잡아다가 병신 될 때까지 짓쳐 놓고 혈육 잃어버린 놈 눈에서 피눈물 빼는 게 그게 짐승이지 어찌 사람이겠소. 그런 놈들한테 끌려갔다지 않소. 저항 한번 하지 않고 따라간 속이 그게 멀쩡한 속이겠냔 말이오. 굳이 그럴 필요가 당신네들한테 있을지 내 모르는 일이오. 하지만 어쨌건 한번 품에 안아본 놈이잖소. 집 나간 개새끼도 그렇게는 안 버리는 법이오. 부탁이오, 그 불쌍한 놈 한번만 더 도와주시오.”
똥은 똥끼리 뒹굴라던 좀 전과는 달리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애걸하는 학정을 빤히 올려보던 의준이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잊었습니까? 김학정 씨 입으로 다 같은 짐승새끼라고 지껄였던 거.”
우득, 관절이 꺾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의준은 테이블 위에 놓인 핏줄 선 주먹을 흘긋 내려다보곤 낮게 혀를 찼다.
“번지수 잘못 골랐습니다, 김학정 씨. 내가 아니라 백승도를 찾아갔어야 맞는 일입니다. 나는 절대, 그런 남창과 뒹군 일이 없습니다. 연민이나 집착도 품어본 새끼들한테나 가당한 소리 아니겠습니까? 김학정 씨 말이 죄다 옳습니다.”
잡 아먹을 듯이 저를 노려보는 학정의 눈에 스미는 낭패감과 절망, 또는 희미한 분노와 열기를 읽은 의준이 빙그레 웃었다. 백승도가 찾아갔을지언정 본인 소재를 알렸을 리 만무하다. 이런 멍청한 작자 하나 구워삶는 건 일도 아니었다. 직접 찾아가 그 더러운 거실 바닥에 앉아 이 한심한 작자에게 귀한 시간을 버렸다. 고작 그 배우 나부랭이- 아니지, 싸구려 남창 하나 때문에. 의준은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 내게 맡겨 놓고 직접 찾아가? 날 믿을 수 없다? 개자식. 기껏 남창 뒤치다꺼리나 하게 만들어 놓고 날 엿 먹여?
사 람을 붙였다. 극장 출입이 잦아진 직후부터 의준은 의문을 품었고 그 주체가 배우 나부랭인 것을 알고 바로 사람을 붙였다. 뒷조사는 기본이었다. 천애고아에, 나이 많은 누이는 사채 빚에 허덕여 앞길 창창한 동생 인생까지 말아 드시고 있는 중이었다. 손쓰지 않아도 알아서 시궁창으로 처박힐 놈이었다. 당시 백승도는 특별히 그에게 관심을 보이거나 흥미를 드러내지 않았다. 의준 역시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았다면 그 눈길을 알아채지도 못했을 터였다. 본인조차 자각하지 못했을 게 틀림없으니까.
의 준은 모른 척했다. 희완에 대해 알아낸 모든 사실을 함구했다. 백승도 역시 궁금해 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무대가 내려지고 이제 막 데뷔한 신인배우는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진 것에 대해 백승도는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일말의 아쉬움조차 표하지 않았다. 아예 발길을 끊었다. 특별한 일이 아니었던 거다. 일련의 사건들과 소문의 진상들에 대해 알고 있었던 의준 역시 그에게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마련한 자리에서도 백승도는 그 배우를 벗기지 않았다. 한참 달아오른 룸에서 말없이 위스키만 축내다 홀로 나온 것을 철진이 맞았다. 여느 때처럼 무심한 얼굴이었다.
의준은 분개하면서도 차마 박차고 나가지는 못하는 학정의 덩치를 올려보다 재밌는 제안 하나를 생각해 냈다.
“연희완을 구해드리겠습니다.”
시 선을 드는 학정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의준은 덩치 큰 걸 제외하고는 닮은 구석이 하나 없는 그에게서 백승도를 보았다. 「성의준, 맞습니까.」 더러운 화장실 구석에 처박혀 엎드려 있던 의준을 건져내던 그 시건방진 얼굴을 깨부수고 싶었다. 이율배반적인 감정이었다. 목숨을 빚진 그를, 때때로 완전히 박살내버리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럴 수 없으니 대리만족이라도 좋았다.
“연희완을 강간하십시오.”
서서히 일그러지는 학정의 얼굴에서 더는 어찌할 수 없는 분노와 번뇌를 동시에 읽어낸 의준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빌어먹을, 속이 다 시원했다.
쉴 새 없이 울려대는 핸드폰 액정을 내려다보던 철진은 이번에도 부재중으로 통화를 돌리며 문밖을 지켰다. 히스테릭한 그 성정이 때때로 문제를 일으키는 걸 알면서도 백승도는 그를 내치지 않았다. 그것에 대해 철진 역시 어떠한 의문도 달지 않았지만 의준을 신뢰하지도 않았다. 철진이 신뢰하는 건 오로지 백승도 하나였다.
대 나무살로 덧댄 창호지문 안쪽에서 쥐 죽은 듯 침묵이 흐르더니 곧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승도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열린 문틈으로 구겨진 종잇장처럼 일그러진 중년인의 얼굴이 얼핏 스쳤다. 이야기는 순조롭게 마친 모양이었다. 무력을 불사해서라도 그렇게 마칠 예정이긴 하였다.
“안에 계십니다.”
내 민 코트를 저어하는 손짓에 제 팔에 대신 걸어 놓고 정중한 태도를 고수하는 철진이 미리 준비해뒀던 말을 고했다. 앞장서서 복도를 걷던 승도가 잠시 걸음을 늦추는가 싶더니 곧 모퉁이를 돌아섰다. 천정이 높은 대신 두 사람이 겨우 오갈까 싶을 정도로 비좁은 복도를 덩치 두 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니 공간이 터무니없이 작았다. 개의치 않는 철진은 희미한 조명에 흔들리는 그림자를 보며 좀 전에 목격한 그 광경 하나를 무심코 떠올렸다.
희 게 질린 얼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런 쪽으론 영 소질이 없는 철진은 도통 알 수 없었고 알아야할 필요도 없었다. 앞장 세워 보내는데 상당히 느린 걸음이 위태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잠시 멈춰 서서 습관인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말없는 재촉에 다시 걸음을 옮기던 그 그림자가 바람 앞 등불 같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복 잡한 복도를 빠져나와 후원을 빙 돌아 별채 마당으로 들어서던 승도가 잠시 걸음을 멈춰 섰다. 어둑한 밤이 내린 별채는 마당 입구를 중심으로 빙 둘러진 측백과 대나무 숲으로 고립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따로 거주지가 없는 승도가 호텔이 지겨워지거나 요릿집에 일정이 있을 때 종종 머무는 장소이기도 했다.
“피우시겠습니까.”
버 드나무 가지를 길게 늘어뜨려 놓고 있는 연못 근처에 서서 머리 위로 둥근 달이 봉긋 솟아 오른 처마를 올려보던 승도의 곁으로 철진이 다가섰다. 권하는 담배를 물고 깊이 들이쉬니 멀리서 풍경소리가 들려왔다. 절간출입이 잦은 요릿집 주인이 단옷날 성대한 장이 섰을 때 몽땅 사들여와 사방에 달아놓은 것이었다. 꽤나 시끄러워 일부러 떼어 놓기도 했는데 올 때마다 도로 족족 걸려 있어 승도 쪽에서 두 손을 들었다. 액운을 물리쳐 준다는 주인의 핀잔에 눈살을 찌푸린 건 철진이었다. 운이라는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을 꼽자면 백승도가 으뜸이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수재로 태어나 그럭저럭 엘리트 코스를 차근차근 밟아가던 그가 이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 것 역시 지독한 악운이 작용하면서부터였다.
“그만 들어갑시다.”
쉬 라는 말에 그의 뒤에 서 있던 철진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두 발로 선 사자상 윗면에 담배를 비벼 끄고 코트를 넘겨받은 승도가 마당을 가로질러 별채 안쪽으로 들어섰다. 바로 대청으로 들어서지 않고 왼쪽을 빙 돌아 사랑채 건너 안방으로 향하는 걸 지켜보던 철진도 그 모습이 보이지 않자 곧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재떨이 대용으로 세워 놓은 사자상은 관리가 잘 되어 있어 얼핏 보면 관상용으로 세워 놓은 것 같기도 했다. 거기에 이끼와 군데군데 눌러 붙은 그을린 자국을 빤히 노려보던 철진이 담배를 깊이 당겨 빨았다.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과거의 취미 한두 가지는 남겨 둔 승도는 귀국한 뒤로도 한두 번씩 극장에 들르곤 했다. 워낙 거추장스러울 걸 싫어해 아무도 대동하지 않고 훌쩍 자취를 감추곤 했던 그가 밤늦게 철진을 찾아온 날도 그런 날 중의 하나였다.
밤새 술을 마셨고 철진은 평소보다 배는 더 말이 없는 승도와 묵묵히 마주 앉아 대작을 해주었다. 그 뒤로 극장에 발길을 끊었다는 걸 후에 알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우연이었다.
제 도권 밖에 서식하고 있는 4,5 금융권의 실태 파악을 위해 조사를 하던 중에 철진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온돌 바닥에 수천 장의 서류와 사진들을 깔아놓고 쉼 없이 펜대를 굴리던 승도의 손이 멈춰 있었다. 그의 시선이 머물러 있던 곳은 5금융권 내에서도 질이 나쁘기로 소문난 조직의 활동이 담긴 사진 몇 장이었다.
사 채를 본업으로 하고 마약, 장기, 매춘, 도박, 등등 손 뻗지 않은 곳이 없는 조직은 외국자본의 입김이 닿지 않은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로 철진 역시 눈여겨보던 곳이었다. 4,5 금융권을 바닥부터 무너뜨려 제도권 안으로 편입시키기에는 외국자본의 유입 없이 순수 국내 유통망을 거쳐 불법을 저지른 조직이 그 시작으로 좋았다. 그러나 승도의 관심이 그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곧장 그가 뱉은 말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 사람을 찾아야겠습니다.」승도가 가리킨 사진 속에는 어느 청년이 푸줏간 돼지처럼 걸쇠에 매달려 축 늘어져 있었다.
전 형적인 피해가족이었다. 도박 빚에 시달려 사채를 쓰고 그 돈으로 또 도박을 하고 다시 사채를 쓰고 가족을 연대 보증인으로 세우고, 도망가면 잡아와 직계가 아닌 가족까지 끌어들여 협박용으로 쓰고, 사회에서 격리시킨 후 알아서 죽을 때까지 뽑아 먹을 만큼 뽑아 먹고 버리는 것이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연희완을 다른 용도로 쓰려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나이대의 남자를 매질해 흠집을 내는 것은 상식적으로 멍청한 짓이었다. 깨끗한 상태로 장기 시장에 내어 놓으면 그들이 빚진 값에 훨씬 상회하는 가격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그들은 연희완을 매달아 놓고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패고 회복시키고 또 두들겨 패기를 반년이나 반복했다. 많이 보아온 수법이었다. 짐승처럼 길을 들이는 것이었다. 문제는 무엇을 위해 길을 들이냐 하는 것이었다. 답은 어렵지 않게 구했다.
「병원에 다녀와야겠습니다.」
청 년이 군에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승도는 한참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계속 지켜보길 원했고 그 과정에서 의준의 흔적을 발견했다. 역시 승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철진은 그 청년이 과거 배우였다는 사실과 승도가 극장 출입을 그만두었던 시기, 그리고 의준이 그에 대한 조사를 마친 시기가 맞물리는 것을 보고 어떤 사실 하나를 유추해내었다. 그것을 확신시켜준 것 역시 승도였다.
짐 승처럼 길을 들인다. 업자는 연희완을 누군가의 애완견으로 들이기 위해 교육을 시켰다. 루트를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채 외 밀매를 주수입원으로 잡고 있는 업자들이 끈을 대고 있는 쪽으로 가닥을 잡자 여럿이 줄줄이 낚여 올라왔다. 연희완은 그 중 이상 성벽이 있는 고위 관료에게 갈 것이었다. 업자들이 그 관료에 댄 물건이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 관료 외에도 이런 식으로 물건을 상납 받아 은밀하게 폐기 처리한 정황이 포착되자 승도는 최우선적으로 연희완을 사들였다. 따로 용도가 있어 완납을 거부하는 업자에게 다른 줄을 대어 시간을 벌었다. 의준을 미끼로 던져 놓고 직접 병원으로 찾아가 희완을 샀다.
첫 주는 한 번을 찾지 않았다. 그러다 주에 한 번이 두 번으로 또 세 번에서 거의 매일로 늘기까지는 겨우 두 달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 누이가 수술을 받는 중에도 연희완을 데려오라 했을 땐 철진도 내심 껄끄러웠었다. 그러나 병원 복도에 혼자 넋 놓고 있던 연희완을 봤을 때 철진은 납득했다. 그리고 백승도를 생각했다. 죽음과 같은 정적만이 맴돌던 그곳에 연희완을 혼자 두고 싶지 않았던 것이리라. 밤새 술을 마셨고, 극장에 발길을 끊었고, 한참 시선을 떼지 못했고, 참는 듯하다가 매일 밤 돈을 지불해가며 화를 내듯이 안았다. 초반엔 종종 이부자리에 피가 묻어나오기도 했었다.
백 승도는 과거에 한 번 모든 걸 잃었던 사내였다. 연희완을 인정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였고 애초 평범하게 시작된 관계도 아니다. 격렬하게 반대하는 의준을 앞세워 연희완을 사들이고 그가 저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매일 그를 강간했다. 합의 하에 벌어진 강간이었다. 연희완은 돈이 필요했고 승도는 확신이 필요했다.
시 종일관 냉담하고 무심했던 승도의 태도가 조금이나마 바뀌기 시작했던 건 한밤중에 의사를 불러들일 정도로 큰 탈이 나고 난 후부터였다. 최초의 공황발작이었고 깨진 유리그릇에 발을 베인 것도 모르고 와들와들 떨고 있던 걸 뒤늦게 들어간 승도가 발견하였다.
철 진은 사내가 무섭게 화를 내는 것을 오랜 만에 보았다. 상대가 불분명한 울분이었다.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돈을 받기 위해 자신에게 다리를 벌리는 연희완을 볼 때마다 과거 마약을 얻기 위해 아무에게나 다리를 벌렸던 여동생이 생각났을 테고, 제 아래서 무참히 일그러져가는 연희완을 볼 때마다 수많은 사내들의 밑에서 처참히 짓밟혀갔던 여린 몸뚱이가 생각났을 테다. 그렇다고 그를 안지 않을 수도 없다. 연희완은 아무 것도 아니어야 했다. 업자들의 눈을 속여 그를 사들였을지언정 승도는 연희완의 존재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야 했다. 지킬 것이 없어야 했다. 잃을 것이 없어야 했다. 아무 때고 버릴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끊어내려 하지 않았던가. 보지 않았으면 모를까 승도는 이미 절곡의 문턱에서 연희완을 보았다. 건져왔다. 그리고 안았다.
업 자들이 연희완의 자존감을 깨부수기 위해 폭력과 가족을 이용했다면 과거 조직은 백승도를 얻기 위해 야만적인 폭력으로 그 가족을 파멸시켰다. 동생을 강간해 마약에 중독 시키고 스스로 몸을 팔게 해 시궁창으로 끌고 들어갔다. 당시 백승도는 전도유망한 법학과 수재였다. 백 없고 돈 없는 평범한 집안의 수재는 누군가 눈독들이기 쉬운 먹잇감이었고 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그는 가족을 외면했고 심각하게 훼손된 동생의 시신을 제 손으로 거두고 그 충격으로 목을 맨 어머니와 몸져누운 아버지를 차례대로 여읜 후에야 제 발로 조직에 투신했다. 그리고 일 년 후 살인죄로 사형을 받았다.
별채를 돌아 나오는 승도를 발견한 철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미 재가 된 담배꽁초를 대충 던지고 급하게 뛰어가니 승도의 얼굴이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찾아야겠습니다.”
대 번에 무슨 말이지 알아들은 철진 역시 빠르게 얼굴색을 바꾸었다. 연희완을 별채에 데려다 놓은 건 철진 본인이었다.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희완은 철진을 알아보고도 의아한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이젠 정말 아무래도 좋다는 체념이 느껴져 이동하면서도 내내 기분이 찝찝하였다.
별 채를 샅샅이 뒤지고도 찾지 못한 둘이 요릿집으로 향하였다. 철진이 양해를 구하는 사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승도가 굳게 닫혀 있는 문을 하나씩 다 열어 젖혔다. 비어 있는 방도 있고 손님을 받아 난잡해진 방에선 비명이 쏟아져 나왔고 은밀한 거래가 이뤄지던 방에서는 고함소리가 외쳐졌다. 요릿집이 발칵 뒤집혔다. 뒤늦게 쫓아 나온 여주인이 일을 수습하는 동안 마지막 하나 남은 방까지 모조리 뒤진 승도가 후원을 빙 돌아 넓게 펼쳐진 마당을 가로지르다 잠시 멈춰 섰다.
어 딜 간 거냐. 머릿속을 정리한다. 도망갔을 리는 없다. 그 주제가 못 돼 여기까지 끌려 들어온 것 아닌가. 불안해 할까봐 일부러 익숙한 방에 데려다 놓았다. 훔쳐갈 놈도 없다. 그럴까봐 아예 드러낼 생각을 안 했다. 해주어야할 말이 있는데 찾을 수가 없다. 겨울바람이 부는 넓은 마당 한가운데 서서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던 승도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찾아보지 않은 곳이 한 군데 있었다.
별 채 다락 구석에 몸을 숨긴 희완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식은땀이 묻어 나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떨리는 손끝이 비쳐들었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왜 이 비좁은 곳에 기어들어와 이리 쫓기는 짐승처럼 웅크려 있는지 기억이 희미했다. 이런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희완은 깊이 생각해볼 여력이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매번 바닥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희완은 정말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차 갑게 식은 얼굴을 한 번 더 문지르고 메마른 입술을 훑어낸 희완이 다락문을 열었다. 넓은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었고 희완이 처음 이 방에 들여졌을 때와 달라진 것이 하나 없었다. 나가야 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저 자리에 앉아 기다려야 하는데,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반년 간 업자들이 수시로 보여주고 들려주고 흘려주었던 장면들이 소리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다 다 아문 흉을 건드린 희완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다리를 뻗어 다락에서 내려서도 자리에 앉지 못하고 한참 방안을 서성거리다 둥근 창을 보았다.
그제야 익숙한 방안 풍경이 눈에 들었다. 철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윽고 남자의 얼굴까지.
멀 리 이부자리를 두고 창틀에 등을 기대앉은 희완이 맞은편을 올려보았다. 창호지를 덧댄 격자무늬 문 위로는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입이 타서 무어라도 마시고 싶었다. 그때마다 자리끼를 입에 대어주고 남은 걸 끼얹고 깊이 저를 밀고 들어오던 남자가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다. 업자가 보는 앞에서 지장까지 찍지 않았던가. 그러고 나면 당장 세상이 뒤집힐 줄 알았다. 대신 희완은 어딘지도 모를 골방에 처박혀 반나절을 꼬박 감금되어 있었고 휘영청 달이 뜬 밤에야 누군가에 의해 끌어내어졌다.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많고 길었다.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에 대한 상상력이 고갈되고 나서야 끌어내어진 희완은 낯선 이에게 옮겨져 차에 올라 철진을 보았다.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다.
문 득 들려오는 인기척에 창호지문 위로 드리워진 커다란 그림자를 올려보는 희완이 바닥에 내려놓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문 앞에 서고서도 들어서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그림자가 불안을 응축시켰다. 도망이라도 가려는 듯 자꾸 움찔움찔 하는 다리를 꽉 붙잡아야 했다. 철진을 왜 보았던 것일까. 업자들과 연관되어 있었던 건가. 여긴 왜. 여긴. 한참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멍해지는 희완이 열리는 문을 보았다. 남자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