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16화 (16/123)

16

한파가 몰아닥친 시골은 꽁꽁 얼어 있었다. 사극 분장을 마친 사람들이 불가에 모여 몸을 녹였다.

“그래서 이번엔 대사가 다섯 개나 있어요. 씹장한테 싸바싸바 한 보람이 있나 봐요.”

마지막 말은 작게 속삭이며 헤헤 웃는 명우가 손에 든 커피를 후룩후룩 들이 마시며 코를 훌쩍였다. 한동안 사극만 고정으로 한다고 수염도 못 깎고 덥수룩해진 머리가 산적 같더니 한복 입히고 갓 씌워 놓으니 제법 테가 났다.

“오디션은 잘 됐어?”

“원 래 지원 배역은 안 됐는데, 다른 배역으로 캐스팅 됐어요. 아, 이번에도 죽 쒔구나 완전 절망하고 있었는데 감독님이 이 띨띨한 녀석! 제 몸에 맞는 배역도 못 찾아간다고 면전에다 대고 욕을 한 바가지 하시더라구요. 뭐, 결국은 똘마니 2로 캐스팅 됐어요. 완전 웃기는 놈이에요, 그거. 헤헤.”

커피 잔을 든 채로 씨익 웃으며 브이를 그리는 명우의 머리를 흩뜨리려다 갓만 툭 쳤다.

학원 클래스에서도 유독 눈에 띄더니 제 갈 길 잘 찾아가는 녀석이 기특했다.

“학정 쌤은 잘 지내시죠?”

명우는 때때로 대학 특강이나 학원 특강을 나가 인재 양성에도 힘을 쏟는 학정이 클래스에서 특히 귀여워한 녀석이기도 했다.

“성 공해서 딱! 만나러 가려고 벼르고 있는데 금의환향하기엔 아직도 갈 길은 멀고… 흑흑, 이 못난 제자의 애타는 마음을 꼭 전해주세요. 영화 주연 따내는 날! 제가 꼭 찾아 뵐 거라고. 꽃가마 까지는 아니어도 술 한 마지기는 대 드릴 수 있다구요.”

시상식에서 상을 받고 그 소감으로 꼭 학정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는 게 명우의 꿈이었다.

학 정이 받아 불을 지피고 쏟아 부은 열정의 불기는 어느 곳에나 존재했다. 꺼뜨려진 곳도 있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곳도 있고, 바람에 흔들리는 곳도 있고, 채 피지 못한 곳도 있었지만 이처럼 피우기 만을 기다리며 스스로 불을 내는 곳도 있다.

“학정 쌤이 형 걱정 많이 하시더라구요.”

복 귀하고 얼마 후에 명우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5년 만에 걸려온 전화는 스스럼이 없었고 친근했으며 유쾌했다. 번호를 따로 돌리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연락을 해온 명우의 뒤에는 예상대로 학정의 마음씀이 있었다. 날이 가고 달이 찰수록 학정에게는 갚을 수 없는 마음의 빚과 씻을 수 없는 죄가 쌓여만 가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형, 그… 연락 안 됐을 때도 다달이 전화해서 연락 온 거 없냐고. 학정 형한테까지 연락이 안 되면 저도 안 되는 거 뻔히 알면서도 그러시더라구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요, 형. 힘내세요. 학정 쌤 속 좀 그만 썩이시구요.”

아 무 것도 모른 채 말을 건네는 명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명우도 사정을 알게 된다면, 눈가를 문지르는 희완이 고개를 저었다. 십장의 호명에 마시던 걸 탁 털어 넣고 쪼르르 달려가는 명우를 보다 다시 눈가를 문지른다. 이게 무슨 짓이냐, 연희완. 스스로 밝힐 용기도 없으면서 뭐하는 짓이야.

연 극판에서의 일이 학원 출신의 명우에게까지 전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희완은 안도했었다. 사심 없는 호의를 받아 가면서 제가 벌인 짓과 그로 인해 벌어진 일들을 감히 밝히지도 못하는 주제에, 명우의 호의를 재는 건 못난 짓이다.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문지르던 희완이 소집 호령에 전립을 뒤집어쓰고 불가를 뒤로 했다.

모처럼 기분이 좋아 보이는 누이는 희완의 손을 잡고 계속해서 수다를 떨었다.

부 모님이 돌아가시고 대신 희완을 부양했던 누이는 대학을 마다하고 바로 중소기업 경리로 입사했다. 협력 업체 사원으로 회사를 들락거리던 엔지니어와 사랑에 빠졌고 2년 연애 후 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복사꽃 흐드러지던 봄날에 회사 후원에서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프로포즈를 받던 날 누이는 하늘을 날 듯 행복해했다. 희완이 기숙사에서 나와 누이 집에 들를 때마다 매번 빼놓지 않고 들려주던 이야기 중 하나였다.

지금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때 되면 회사에서도 성환 씨 능력을 알아줄 거야. 그이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데, 곧 우리 아기도 태어날 테고, 머잖아 승진도 하게 되면 우리 동생 등록금이고 뭐고 이 누나가 다 해결해줄게.

성환은 호탕하고 유쾌한 성격이었으나 반면 비관적이고 비판적인 성향도 강했다. 회사의 먹이사슬 구조에 순응하면서도 불만이 많았고 그로 인한 부조리에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면서 불신을 조장했다.

누 이는 성환의 뒷면을 보지 못했다. 보고서도 감싸 안으려 했던 건지 희완은 알지 못했지만 누이는 천애고아에 동생까지 딸린 저를 받아준 성환에게 감사했고 일종의 마음의 빚까지 진 듯 했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희완은 그들이 보여주고자 했던 행복한 신혼부부의 모습만을 보고 있었다.

“딸 기가 먹고 싶었는데, 글쎄 근처 마트도 문을 닫고 시장도 문을 닫고, 새벽 2시에 말이야. 파는 데가 있었겠니? 그래도 너무너무 먹고 싶은 거야. 말도 못하고 끙끙 거리고만 있었는데 어찌 알았는지, 네 매형이 글쎄 그 시간에 저 멀리 도매시장까지 가서 사온 거 있지. 그게 어찌나 달고 맛있던지.”

경 제 한파가 몰아닥치며 윗선에서 밉보였던 성환은 정리해고 일순 위에 이름을 올렸다. 산달을 두 달 남기고 성환은 해고 됐고 결혼 후부터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희완의 학비는커녕 생활비조차도 변변히 부치지 못해 몸 둘 바를 몰라 하던 누이는 외려 대학 진학 후 고학생으로 알바를 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희완에게 손을 벌리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십 만원이 이십 만원이 되고 이십 만원이 삼십 만원이 되고, 산달을 앞둔 임산부를 써주는 데도 없어 폐휴지라도 모아 공과금이라도 벌어보려 했던 누이는 결국 산통으로 구급차에 실려가 한 달 일찍 아이를 낳게 되었다.

보 호자가 없어 당장 수술을 못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희완은 수업을 듣다 말고 뛰어 가 성환 대신 그 옆을 지켰다. 성환의 실직 이후 밀리기 시작한 공과금을 낼 여력도 없어 해지시킨 보험료로 생활비를 충당했다는 사실을 그 때 알았다. 희완은 통장에 있던 돈을 모두 털어 밀린 공과금을 해결하고 월세를 해결하고 병원비를 해결했다.

누 이의 팔과 얼굴에 든 멍자국을 보고 할 말을 잃었었다. 간호사의 말로는 몸에도 맞은 흔적이 있다고 했었다. 무거운 몸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여기저기 부딪쳐서 그렇다는 누이의 변명은 억지로라도 믿어 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퇴원 수속 하는 날에야 겨우 얼굴을 비친 성환은 술과 담배에 찌든 몸으로 아이와 누이를 껴안고 엉엉 울었다.

같이 가자. 누나 저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 안 돼.

희완아, 저이 나 없으면 안 돼. 그리고 우리 아이는 어쩌고. 아비 없는 자식으로 키우고 싶지 않아. 우리 아이만은 멀쩡한 부모 밑에서 번듯하게 키울 거야. 약속했어, 앞으로 정신 차릴 거라고 우리 아이 걸고 나하고 약속했어.

누나… 맞았잖아.

한 번, 한 번 실수였어. 나보다 저이가 더 가슴 아파했는걸. 취직도 안 되고 직장 다닐 때 간도 빼줄 것처럼 굴던 친구들도 나 몰라라 하고 시부모님 돌아가신 이후로는 아주버님하고도 연을 끊었는걸. 나마저 저이 버리면 더 못 살아.

나는, 누나… 나는.

우 리 희완이 한테는 누나가 정말 미안해. 대학 마칠 때까지는 누나가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부모 없이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던 나를 아무 조건 없이 받아준 사람이야. 이제와 나까지 저 버릴 수 없어. 우리 아이도 그걸 원치 않을 거야. 미안해, 희완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대부분이 고학생이라 알바를 마친 늦은 시각부터 새벽까지 이어진 연습을 마치고 자취집에 들어서던 희완은 가로등 옆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던 인영을 발견하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 했다.

만 취한 상태에서 허리띠를 빼어 든 성환은 제 발목을 붙잡고 애원하던 누이를 기절할 때까지 때렸다 했다. 잠이 든 틈을 타 아이를 들쳐 업고 무작정, 무작정 올라왔는데 갈 데가 없더라. 희완에게 만큼은 정말 이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갈 데가 없어서.

소 리도 못 내고 우는 누이에게 희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작 데리고 왔어야 했는데, 억지로라도 끌고 올라왔어야 했는데, 희완의 무관심도 누이가 이 지경까지 오는데 한 몫 한 것이다. 사는 게 고단해서 그랬다는 변명은 틀렸다. 희완은 충분히 행복했고 즐거웠다. 단지 누이에게 좀 더 깊은 관심을 보일 정도의 의지가 없었던 것뿐이다.

자 기 아이를 임신한 아내를 전혀 돌보지 않은 사람이다. 오히려 주먹을 휘둘렀고 발길질을 했으며 아이를 낳고도 이틀이 지나서야 얼굴을 내민 사람이었다. 희완은 그런 사람에게 누이와 아이를 남겨두고 온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 저 평범하게라도 살아보겠다는 미련을 놓지 못해 어리석은 선택을 고집했던 누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희완을 붙잡고 오열을 했다. 미안해, 미안해 희완아. 미안해. 왜 사과해, 뭘 잘못했다고. 누나 잘못 아니야. 누나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나랑 살아. 나하고 있어. 내가 막일을 해서라도 누나하고 아이 먹여 살릴 수 있어. 여기 있어. 그 사람한테 가지 마. 누나, 누나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누나. 울지 마.

한 달을 같이 살았다.

그 리고 성환이 찾아왔다. 그 또한 엉망이었다.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당시엔 알 수 없었지만 삐쩍 말라 걸인 보다 못한 행색을 하고 나타난 성환은 아이를 안고 주저앉은 누이를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누이의 얼굴을 못 본 척하고 싶었다. 측은지심과 원망, 연민과 미움이 뒤섞여 엉망인 누이의 눈이 문간에 선 희완을 향하였다. 성환은 애걸하고 있었다. 내가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내가 잘못했어. 너 없이 못 사는 거 알잖아, 희수야, 내가 죽일 놈이야. 내가 죽일 놈이야. 가련할 정도 흐느끼는 성환을 한 팔로 끌어안는 누이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안 변할 거야. 누나, 모르겠어? 절대 안 변할 거야.

희 완은 차마 그 자리에 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수렁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누이를 가만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힘없이 딸려오는 몸에 주먹을 날리고 발길질을 하고 고함을 지르며 누이를 이렇게 만든 성환에게 악을 썼다. 꺼져! 꺼져! 꺼지란 말이야! 무슨 낯짝으로 여기까지 기어들어와! 무슨 염치가 있어 여기까지 기어들어와! 못 보내! 안 보내! 혼자 가! 혼자 가란 말이야! 눈물 마를 날이 없어! 하루도 편한 날이 없어! 당신 때문에, 당신 때문에! 그만 해, 그만 해! 그 지옥으로 누나까지 끌고 가지 말란 말이야!

“희완아.”

제 손을 잡은 쭈글쭈글한 누이의 부름에 시선을 들었다.

거의 오열을 하며 깔아 눕힌 성환의 멱살을 붙든 희완의 등을 껴안아 올 때도 누이는 저리 불렀었다.

“꿈을 꿨는데, 복사꽃이 흐드러지더라.”

수액을 들이는 손끝으로 희완의 관자놀이를 애닮게 그리던 희수가 톡톡, 맞잡은 손을 도닥여주었다.

“다음엔 우리 완이도 같이 가. 잘못한 게 많아서, 누나가 너무 미안해.”

“누나.”

“응.”

“복사꽃 흐드러지는 걸 누구랑 같이 봤어?”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던 희수가 꺄르르 간지러운 웃음소리를 낸다.

그리곤 모르는 사람을 보듯 희완을 빤히 들여다보다 맞잡았던 손을 놓고 희완의 관자놀이를 가볍게 쓸어내리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낮은 허밍소리가 적막한 실내를 메웠다.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다는 얼굴이었다. 연출은 그런 희완에게 확인사살이라도 하듯 거듭 말의 출처를 언급했다.

“하 선생한테 이야기를 듣고 반신반의하던 중에 내 유성민이한테 전화가 왔더랬지. 그 친구 인연으로 들어왔다지? 오랜만에 신변잡기를 늘어놓다 내친 김에 자네에 대해서 슬쩍 운을 띄워 봤다네. 그런 쪽으로 소질이 있다던데. 아니었나?”

아니라면 사과라도 할 기색인 연출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희완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허허.”

그제야 정말 희완이 몸값 높이려 수를 쓴 게 아니라는 걸 알아먹은 연출이 곤란하게 됐다는 표정이었다.

“당 황스러웠겠구만. 나는 소문도 그렇고, 자네 동문이라는 사람이 자네가 어려우니 도와주십사 운을 띄우기도 했고, 하 선생도 술자리 내내 그렇지 않았는가, 자네는 변명 한 마디 없었고. 내가 오해한 부분도 없잖아 있지만 자네도 그리 잘 했다고만은 볼 수 없지, 아니 그런가?”

좋 은 언변으로 교묘하게 책임을 돌리는 연출의 사람 좋은 얼굴을 마주하던 희완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문제는 일으키지 않는 편이 좋았다. 오해였다면, 오해인 거다. 정말 성민이 그랬다면, 희완이 따지고 들 수 없는 문제다. 그 역시 업자에게 피해를 본 사람 중 하나였다. 극단 간판을 내리고 영화판으로 선회한 것이 그 무렵이라 들었다.

“그럼 가방은,”

“번거로우시겠지만 버려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허허, 그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서도….”

“그 일도 없었던 일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날 아무 일도 없던 걸로.”

더는 문제 삼지도 않을 것이고 입 밖에 내지도 않을 것이라는 완곡한 말을 눈치 빠르게 알아들은 연출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자네가 참 여러 가지로 더 힘들게 될 게야. 그렇지 않은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나온 희완이 무대 뒤편으로 돌아나갔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여기는 관두는 게 나았다. 무대 감독에게 말을 건네고 어렵지 않게 절차를 밟고 희완은 무대 일을 관뒀다.

능숙하게 움직이는 손놀림을 쫓는 것인지 희완의 초점이 흐렸다.

“아픕니까?”

눈살을 찌푸리기에 그런가 해서 물었더니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다. 실밥을 다 푼 윤 박사가 비켜섬과 동시에 밝은 불빛이 직선으로 떨어져 눈이 부셨을 뿐이었다.

“예쁘게 잘 아물었습니다. 항생제는 내일까지만 복용하고 잘 먹고, 잘 자고, 잘 씻으면 이 흉도 금방 없어질 겁니다.”

“고맙습니다.”

꾸 벅 인사를 해오는 희완에게 싱긋 웃음을 보인 윤 박사가 힐금 그 얼굴을 살피고는 곧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통화를 마치고 들어온 남자가 윤 박사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응접실을 가로 질러와 희완의 턱을 움켜쥐었다. 반듯한 이마에 몇 가닥 흩어진 머리카락을 다른 손으로 쓸어 넘기고 봉합 된 곳을 유심히 살핀다.

“흉은,”

“아, 오래 남진 않을 겁니다. 아주 잘 아물었어요.”

제 솜씨를 칭찬해 달라는 건지 아주 뿌듯한 기색으로 허허 웃던 윤 박사가 무심한 남자의 시선을 받고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수고했습니다.”

“네, 아 뭐. 천만에 말씀이십니다. 그럼 전,”

전 혀 수고했다는 인사치레 같지 않아 헛소리 몇 번 지껄이고 인사를 받은 쪽에서 오히려 꾸벅 인사를 한 윤 박사가 또 쫓겨나듯이 호텔 룸을 나갔다. 그러는 사이 미처 인사할 타이밍을 잡지 못한 희완이 어색한 얼굴을 하였다. 윤 박사도 그렇지만 남자에게도 아직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고맙…습니다.”

“화대에서 제하진 않을 겁니다.”

그런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았는데 남자의 사무적인 어투에 정신이 든 희완이 곧 귓불을 붉혔다.

금전이 오가는 관계인데 너무 호의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그렇다면 화대로 받지 않겠다는 남자의 말은 맞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관장은 했습니까.”

“아, 아뇨. 아직.”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춰 와서 속을 비울 새도 없이 윤 박사를 대동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었다.

“하고 옵시다.”

“네? …호, 혼자 하,”

당 연한 소릴 한다는 얼굴이었다. 희완이 오핼 한 거다. 또 다시 붉어지는 귓불을 보던 남자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으며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침실에 욕실 두 개가 딸려 있었고 남자는 셔츠를 벗으며 오른쪽 샤워실에 들었다. 그걸 보던 희완도 곧 입을 옷을 훌렁훌렁 벗으며 욕실로 들어섰다.

항 상 관계를 맺는 곳이 좋은 곳이라 다행이라 생각했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관장액을 주입하고 조용히 시간을 세고 있는 동안 다른 욕실에서의 물소리가 들리지 않아 안도했다. 관장하는 소리가 밖으로 새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한숨이었다. 만약 그 소릴 들려주어야 했다면,

희 완은 미치게 불편한 속을 가라앉히려 엉덩이를 문질렀다. 아직 때가 아니었다. 부글부글 거리는 속을 견디며 욕실 천정을 올려보는 희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런 걸 해야만 원활하게 이뤄지는 관계라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아니, 이런 식으로 몸을 굴리며 돈을 구걸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던가.

돈 때문에 자신에게 온 희완을 환영하던 하준우는 그 경멸감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었다. 기르던 개새끼한테 손 물리는 것만큼 정 떨어지는 일은 없을 거라며, 만약 희완이 그에게도 같은 짓을 저지른다면 절대 이 바닥에 발을 못 붙이게 하겠다 호언장담을 했었다. 그리고 희완을 그 업소에 밀어 넣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건 하준우에 의해 억지로 자리에 앉혀진 직후였다.

밴 드가 흥을 돋우고 비싼 양주가 여러 번 돌았고 가슴과 하체를 거의 드러낸 여자가 야한 춤으로 분위기를 달구었다. 하룻밤 노리개로 동원된 여자와 남자 몇몇이 각자 파트너 옆에 붙어 교태를 부리고 있었다. 자리를 피하려던 희완을 억지로 붙잡아 앉힌 하준우가 웃는 얼굴로 속삭였다. 돈 필요하잖아, 정 비위 못 맞추겠다면 그림처럼 앉아라도 있어. 사람 망신시키지 말고.

그 무렵 희완은 누이 부부의 사채 빚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물론 자취집 보증금까지 바치고 찜질방과 피시방을 전전하던 때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누이의 전화로 몸살을 앓던 때였고 하루에도 수 번씩 누이와 소모전을 벌이던 때였다. 업자들이 누이가 아닌 희완에게로 전화를 걸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자 리를 지키기만 하면 단 돈 오십 만원이라도 떨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희완은 그 자리에서 견디기로 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면서 곳곳에서 살을 부비고 농밀해져가는 신음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하준우에게 떠밀려 자리를 이동해 앉은 희완은 낯선 메탈 향에 눈가를 문지르며 시선을 들었다. 이곳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얼굴로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남자가 흘긋 희완을 돌아보았 다.

“좀 더 벌립시다.”

관 장을 하면 어느 정도 풀리기는 하는데 남자의 것을 다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었다. 허리에 베개를 받치고 다리를 벌리고 누운 희완이 밑으로 손을 뻗어 항문 속으로 검지를 밀어 넣었다. 살을 당기니 벌어지는 틈으로 막 귀두 반을 삼킨 내벽이 주욱 밀려들어오는 살덩이를 빨아 붙으며 받아들였다.

“헉.”

끝 까지 들어오지 않았음에도 희완은 숨이 턱 막히는 소리를 내었다. 희완의 양 발목을 잡아 귀 옆에 눌러놓은 남자가 천천히 추삽질을 시작했다. 끝까지 넣지 않고 반만 넣었다 빼기를 반복하자 속이 간질거렸다. 베개를 받치고 있어도 허리가 반으로 접혀 저절로 얼굴로 피가 몰렸다. 체중을 실은 남자가 종아리에 이를 박아 넣었다. 살이 잘근잘근 씹히고 선명한 잇자국과 붉은 울혈이 맺혔다.

“아아.”

좀 더 깊이를 달리하는 남자가 밀고 들어올 때마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제 성기를 멍하니 올려보던 희완이 턱을 들었다. 속도가 달라지며 부피가 커진 물건이 끝까지 파고들었다. 불편한 자세에, 희완 본인의 무게에, 남자의 무게까지, 삼중고에 시달리던 희완은 남자의 부피와 깊이까지 더해지자 붉어진 얼굴로 앓는 듯한 신음을 내었다.

“힘들, 힘….”

배려 없이 속도를 높이던 남자가 허리짓을 늦추었다. 그제야 겨우 막혔던 숨을 끊어 뱉던 희완이 헐떡이며 애원했다.

“자, 자세를,”

“엎드리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희완이 알아서 자세를 바꿨다.

콘 돔에 문제가 생긴 건지 반쯤 박혀 있던 것을 빼내자 주륵 안에서 젤이 흘렀다. 콘돔을 새로 뜯어 바꿔 끼는 사이 자세를 바꿔 엎드린 희완이 항문이 더 잘 벌려지도록 최대한 허리를 낮추고 무릎을 넓게 벌렸다. 다시 묵직한 것이 내벽을 가르고 단번에 밀고 들어왔다. 엎드려 받으니 그 이물감이 더 선연하고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이 체위가 더 익숙하고 편해 남자를 끝까지 받아들이던 희완이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등 에 붙는 체중에 눌려 매트에 얼굴을 문지르는 희완이 헉헉거리며 밑으로 손을 뻗었다. 제 속을 거칠게 들락거리는 남자의 결합부위를 매만지니 등 뒤에서 성난 기세가 읽혀진다. 내벽이 모조리 딸려나가는 기분에 진저리를 치던 희완이 일시에 빠져나간 이물감에 허기 비슷한 것을 느끼다 정신을 차렸다. 돌아 앉아 목구멍을 벌려 남자의 것을 끝까지 삼키고 밑에서부터 콘돔을 벗겨 내었다. 툭, 뱉어내고 다시 살덩이를 삼켜 쩝쩝 소리가 나도록 정성스레 빨았다.

미 간을 찌푸리던 남자가 커다란 손으로 희완의 턱을 감싸 쥐었다. 뻐근할 정도로 입을 벌린 희완이 눈만 들어 남자를 올려보았다. 목구멍까지 넘기지 않으면 남자의 것은 뿌리까지 삼키기 어려울 정도였다. 턱을 붙들리니 더욱 어려워졌다. 희완은 깊숙이 넣었던 것을 주욱 빼내고 귀두만 물어 입술을 모았다. 막대 사탕을 빨듯이 빨고 애무하고 이로 긁고 자극했다. 초반에 비하면 일취월장한 솜씨였다. 반도 삼키지 못해 헛구역질을 연발하던 희완은 반년 간은 구음이 곤욕스러워 쩔쩔매다 혼자 연습하기도 했었다. 삽입 보다는 구음을 할 때 남자는 더 확실한 반응을 보였고 세 번 삽입을 하는 것보다는 그 중 한 번이라도 입에서 해결을 보는 게 희완으로서도 부담이 덜했기 때문이었다.

“삼킬, 삼키겠,”

진 득하게 오럴을 받던 남자가 빼려는 것을 붙잡은 희완이 곧바로 쏟아지는 것을 그대로 받아 삼켰다. 미처 넘기지 못한 것은 콜록거리며 혀로 핥아 올리던 희완의 머리채가 부드럽게 잡혀 턱이 들렸다. 음영이 짙은 남자의 눈이 희완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이처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희완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돈을,”

정 말 딱 죽고 싶다는 심정으로 입을 여는 희완을 보고 나서야 납득을 한 남자가 그대로 침대에 밀어 눕혔다. 희완은 때때로 화대를 두 배로 요구하는 때가 있었다. 변제금이 남았던가, 급한 용무가 있던가, 변제금은 대부분 남자 쪽에서 맞춰주는 편이었으니 아마 후자이리라.

스 스로 구멍을 벌려 향응하는 희완을 받아들여 기꺼이 즐기기로 한 남자가 단번에 제 것을 밀어 넣음과 동시에 벌어지는 희완의 입술을 집어 삼켰다. 파드득 떠는 혀를 빨아 당기며 집요하게 입속을 휘저었다. 희완은 키스만으로도 남자의 손에서 간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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