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별빛달빛-10화 (10/123)

10

바람에 부딪치는 풍경소리가 희완을 깨웠다.

무 거운 눈꺼풀을 끌어올려 미색 천장이 익숙해질 때까지 멍하니 누워 있던 희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이곳이 어딘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벽 한 면을 다 자치하고 있는 장지문과 발이 달린 둥근 창, 그리고 백색 도자기 화병에 꽂힌 매화 한 송이와 난을 쳐 올린 액자가 벽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방은 희완을 더욱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미 간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기던 희완이 불현듯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옷이 갈아 입혀져 있었고 한결 개운할 걸 보니 씻겨 진 것 같기도 했다. 머리맡의 경대를 가져다 얼굴도 살핀다. 꿰맨 상처는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고 붓기나 멍이 있던 자국들도 며칠 지난 것처럼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며칠이지.

거 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급하게 핸드폰을 찾으려다 현재 제 수중엔 아무 것도 남은 게 없다는 걸 깨닫곤 다소 허망한 기분으로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그 손으로 얼굴을 덮고 문지른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소줏집에서 학정을 본 것도 같은데, 그 뒤로는 전혀 기억나는 게 없었다.

벨소리.

제 발치에서 밝은 빛을 내며 쉼 없이 울어대던 벨소리를 기억해낸 희완이 이불을 젖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멈칫했다. 몸이 지나치게 가벼웠다. 만약 하루가 아닌 며칠이 지난 것이라면 변제 일을 넘겼을 수도 있었다. 생각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 같아 옷매무새도 챙길 겨를도 없이 방을 나서려던 희완이 오히려 뒷걸음질을 쳤다.

막 문을 열고 들어서던 남자가 그런 희완을 발견하곤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닫은 문을 가로 막고 서서 입었던 코트와 재킷을 벗으면서도 그 기색을 부러 감추지는 않았다.

“도망이라도 갈 참입니까.”

“그런 게….”

말을 잇던 희완이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제대로 머리가 돌았다.

하지만 어떻게….

벗은 것을 대충 걸어 놓고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희완을 훑은 남자의 눈빛이 일견 사나워졌으나 혼란에 빠져 있던 희완은 미처 목격하지 못했다.

“업종변경이라도 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요즘 꼴이 볼만합니다.”

적 나라한 지적이 마치 꾸짖음 같이 느껴져 어색한 기색으로 마주친 눈을 피하던 희완이 다시 시선을 들었다. 어느새 성큼 다가온 남자의 커다란 손이 희완의 이마와 눈을 다 덮었다. 고작 며칠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에게서 맡아지는 메탈 향이 오랜만인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열을 재려던 것뿐인지 목적을 달성하자 바로 손을 거둬가는 남자의 노골적인 시선이 희완의 목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당장 달려들어 무슨 짓이라도 벌일 것 같던 남자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방을 가로질러 반쯤 내려진 발을 들어 올리고 창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킨다. 머잖아 찬 공기가 그를 타고 넘어 희완을 덮쳤다.

“집, 안 무너집니다.”

창 문 밖의 수려한 정원을 배경으로 등을 기대고 앉아 담뱃불을 당기던 남자가 툭 내뱉었다. 늘 깔끔하게 빗어 넘겼던 머리카락이 부는 바람에 흐트러졌다. 평소와 조금 달리 보이는 그의 느슨한 모습을 낯설게 바라보던 희완이 다시 이부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어떻게 여기와 있는지 모르겠다. 애를 써도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눈썹을 모으다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담배 연기가 맡아지지 않아 이상하다 싶더니 그는 물었던 담배를 꺾어 문갑 위에 올려놓고 희완을 쳐다보고 있었다.

몽 연하게 눈을 놓고 있던 희완은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역광으로 음영이 진 그의 뚜렷한 이목구비가 더욱 삭막하고 단단하게 느껴졌으나 말없이 그의 뺨과 거친 턱을 매만지던 희완이 입술을 겹쳤 다.

조심스럽고 간지러운 입맞춤이었다. 수줍은 연인들이나 어울릴 법한,

그 러나 그것은 곧 변질되어 희미한 색향을 풍겼다. 크게 반응하지 않는 남자의 입술을 빨고 혀를 집어넣어 조심스레 치열을 훑고 만져지는 살덩이를 당기는 희완의 귓불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살점이 뒤섞여 맞부딪치는 소리가 적막한 실내를 가득 메웠다. 남자를 만지고 빨고 당기는데 열중하던 희완의 속눈썹이 빠르게 깜박여졌다.

손 아귀에 다 잡히는 희완의 손을 잡아 밑으로 끌어내린 남자가 당혹감이 스치는 희완의 메마른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절박함이 잘 드러나지 않는 눈이다. 수치심, 격렬한 모욕감과 참담함만이 드문드문 스치는 이 눈은 때문에 그 스스로 질식해 가고 있었다. 매달리는 것에 서툴다. 그럼에도 이 얼마나 절박한 몸짓이란 말인가.

“연희완 씨는 참 형편없는 물건입니다.”

떨 어진 입술에 묻어난 핏망울을 혀로 훑어내는 남자가 2차적으로 느껴지는 쇠 맛에 미간을 구겼다. 수분 없이 갈라진 희완의 입술에 맺힌 피를 노려보다 이번엔 남자 쪽에서 입술을 겹쳐온다. 따뜻한 손바닥이 희게 드러난 목덜미를 덮었다. 격렬하지도 느슨하지도 않은 키스에 입술을 벌려 그를 받아들이는 희완의 시린 가슴이 그와 맞부딪치며 열을 내었다. 자연스레 젖어드는 안도감에 아랫배가 뜨거워진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의 체온을 더 느끼고 싶었다. 그가 아직도 저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 다.

전통한옥 구조로 지어진 곳은 고급 요릿집이었다.

몸 을 섞으며 아득하게 정신을 놓으려는 희완을 두들겨 깨운 남자가 중간에 주전부리를 시켜 먹게 하고 다시 몸을 겹쳤다. 창에 덧바른 장지를 비춘 햇빛이 사각으로 넘어가고 나서야 희완을 놓아준 남자가 자리끼로 목을 축이고 입으로 물을 넘겨주었다. 허겁지겁 그것을 받아 마신 희완이 다시 축 늘어졌었다.

이 틀 간 자리보존 하며 열병을 앓았다던 몸이 그와 배를 맞추고 그 밑에서 버르적거리며 한참 부대껴지는 동안 도로 물 먹은 솜이 되었다. 장지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병풍 앞으로 넓게 펼쳐진 좌반 앞에 앉은 희완이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쉼 없이 날라지는 음식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눅진했다.

땀 을 흘리고 그의 것과 제 것이 섞인 점액질로 뒤덮였던 몸은 물수건으로 대충 닦아내기만 해 찝찝했지만 따로 씻을 기운도 없었다. 그가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냥 놔두면 배앓이를 하게 될 것들만 직접 긁어내어주고 세숫대야에 내어진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번들거리는 몸을 닦아내어주는 동안 희완은 잠깐 졸았었다. 눈꺼풀이 태산 같이 무겁고 손끝하나 움직일 기력도 없어 무언갈 먹고 싶지도 않았지만 남자의 손에 억지로 일으켜져 장지문 너머 또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먹 음직스러워 보이나 대체로 공복이었던 위 상태로는 뭐 하나 제대로 받아낼 수 없을 것 같아 푸짐한 요리를 구경만 하고 있던 희완의 앞으로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야채죽이 내어졌다. 먹어야 할 것 같았다. 희완이 죽을 뜨는 걸 보고 내어진 음식들을 의욕적으로 먹어 치우기 시작한 남자의 육체에선 못 다 해소한 야성이 진한 페로몬으로 정제되어 위험스럽게 분비되고 있었다.

손 이 후들거렸다. 앞으로 또 얼마나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까지 격렬하고 치열했던 때가 있었던가. 모르겠다. 매번 그랬던 것 같은데. 쓸리고 빨리고 물린 젖꼭지가 쓰라려 헐렁한 옷을 앞으로 조금 잡아당겨 공간을 마련한 희완이 죽을 연거푸 떠 넣었다. 그러다 이걸로는 안 되겠어서 가짓수를 늘려 동치미도 떠 먹고 마른 반찬과 나물, 계란말이에도 손을 대었다. 생각보다 속이 불편한 것 같지는 않았다. 기름기 많은 것들만 피해 반찬수를 늘리던 희완은 생각보다 그런 것들이 많지 않다는 것을 늦게 깨달았다. 갈비찜이나 육전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위에 부담이 가지 않는 것들이었다.

이 미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남자는 딱히 가리는 것 없이 새로 떠올린 밥을 꾸준히 비우고 있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식사 예절은 예상대로였지만 그 식성은 의외였다. 그러고 보니 남자와 마주앉아 같이 밥을 먹는 게 처음이었다.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 희완은 더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다시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

“아, 아픕니다.”

아랑곳 않던 남자는 아파요. 하고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반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오 랫동안 벌어져 있어서 남자가 콘돔을 갈기 위해 빼낸 동안에도 다물린 느낌을 받지 못하던 아래에 다시 묵직한 그의 것이 밀고 들어오는 순간, 경련하는 손으로 그의 허리를 붙잡아 맨 희완이 파득 몸을 떨었다. 눈앞이 깜깜하고 맞닿은 곳곳이 욱신거리고 간지럽고 알알했다.

잔 뜩 열이 올라 퉁퉁 부은 눈시울이 매워 그의 어깨에 대고 문지르던 희완이 으윽, 목울대를 긁었다.온몸이 축축했고 허리 아래는 흥건하여 질척질척했다. 살점을 문지르듯이 다시 진퇴를 반복하는 남자의 움직임에 축 늘어져 있던 허리가 반사적으로 휘돌려졌다. 아프고 힘든데 남자가 개방시킨 육체는 어리석게도 정도를 몰랐다.

“허리 감읍시다.”

희완이 고개를 저었다.

두 번 말 하는 법이 없는 남자는 대신 희완의 허리를 끌어다 다리를 뒤집어 엉덩이를 다 드러내게 하고는 반쯤 일으킨 몸으로 거세게 하체를 박아왔다. 희완이 거의 우는 소리를 내었다.

“한 번 빼면 좀 나아질 겁니다.”

모 르겠다. 그 말을 몇 번이나 들은 것 같은데, 시키는 대로 해도 나아지기는커녕 그 때뿐, 더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지는 감각에 희완은 몇 번이나 진저리를 치며 자지러졌었다. 이제는 뺄 게 있는 지나 모르겠다. 몸속의 수분 한 방울까지 모조리 다 고갈된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신경은 활짝 열려 있어 그가 주는 자극을 기꺼워하고 칠칠찮게 벌어지며 속엣 것을 흘렸다.

뺨이 핥아 올려지는 감각에 이어 꿰맨 상처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남자가 입술을 겹쳤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윤곽이 뚜렷한 남자의 생김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까 무룩 잠이 들었다가 남자의 손에 일으켜져 물을 마시고 간단히 배를 채우고 다시 잠들 때까지 몸을 섞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의 밑에서 흔들리며 벌써 사흘을 빠지게 된 무대 일, 연출, 학정, 소줏집, 병원, 수액 등을 떠올리던 희완은 격랑처럼 떠밀리는 쾌감과 절정에 허덕이며 여러 번 생각도 놓았다. 헐어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흐느끼는 지경이 되어서야 남자는 희완을 놔주었다.

이틀이 더 지나 있었고, 채무 변제 일을 하루 앞둔 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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