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수 첩에 빼곡하게 적어 놓은 숫자들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던 희완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리 셈해 보고 들여다보아야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시간 날 때마다 수첩을 꺼내놓고 숫자를 반복해서 적었다 지우고 죽죽 줄을 긋는 건 이제 거의 습관이 되어 있었다.
일 정표를 열람하니 벌써 반이 지난 이 달 그에게 불려간 날이 세 번이었다. 제대로 한 것이 두 번, 한 번은 오십. 알바로 충당한 것이 팔십, 생활비 제하고, 병원비 제하고…, 이번엔 머릿속으로만 셈을 하던 희완이 눈썹을 들었다.
눈 이 오고 있었다. 첫눈처럼 싸리눈이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니 모자 아래로 떨어지는 눈송이가 그대로 녹아 살갗을 적셨다. 수첩과 핸드폰을 챙겨 일어선 희완이 그 사이 어둠이 내린 공원을 둘러보다 곧 후드를 뒤집어쓰고 지하철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어 떻게든 맞춰는 줄 터였다. 그럼에도 그에게 연락이 오지 않을까 걱정을 하는 스스로가 초라하고 불편하고 볼품없었다. 마비된 이성이다.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려 했다. 돈을 받고 파는 게 단지 어디에도 쓸모없는 이 몸뚱이일 뿐이다. 한 달 이자만큼의 가치도 없는 제 몸을 그가 기꺼이 사주고 있는 것이다.
뱃 속에서 울컥 솟으려는 불길을 애써 억누르며 지하철 화장실로 들어간 희완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팬티와 바지를 한번에 무릎까지 끌어내렸다. 뒤돌아 거울에 비친 것을 보니 아침보다는 한결 나아져 있었다. 학정에서 나온 후 피팅모델 대타를 뛰던 도중 입은 바지에서 피가 묻어 나와서 난감했었다.
양 해를 구한 후 디자이너가 기꺼이 내어준 구급상자에서 약을 꺼내 바르려고 거울에 비친 환부를 보고는 한숨밖에 나오질 않았었다. 갈수록 아프더니 정오 무렵에는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는데 엉덩이고 허벅지고 시퍼렇게 멍들다 못해 부푼 살이 터져 피가 새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처리를 하고 나오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선배들이 많이 엄한가 봐요? 하고 묻는 디자이너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였었다.
약 국에서 값을 치른 연고를 짜서 환부에 넓게 펴 바르고 하의를 도로 올려 입은 희완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피해 바깥으로 향했다. 오늘은 공연이 쉬는 날이라 무대일이 없어 그 시간에 명우에게서 영화 현장 일을 받았다. 야간 촬영이라 지금 출발하면 소집시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초 코바를 하나 사서 공복을 채우고 지하철에 오른 희완이 가방에 반으로 접어 넣었던 대본을 꺼내 읽었다. 주어진 대사는 읽을수록 유쾌하고 재기 넘쳐 절로 입에 붙었지만 단장의 바람대로 항시 대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희완의 시간은 다른 이에게 묶여 있었다. 대학로로 복귀하기 전에는 24시간이 스탠바이였다. 자다가 불려 가는 건 예사였고 일하는 중에도, 심지어 두어 번은 수술 중에 그가 보낸 차에 몸을 실은 적도 있었다.
어 느 정도 시간의 여유를 가지게 된 지금도 본질은 바뀌지 않았고, 희완의 시간은 본인의 것이 아니었다. 밤낮 구분 없이 대학로를 오가며 쓰는 시간도 엄밀히 말하자면 그가 지불한 시간을 빌려 쓰는 것이었다. 도무지 언제 불려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단장의 호의를 덥석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가 다른 사람을 통해 무심히 들이밀어 주는 오디션에 참석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입이 떨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다른 이의 손을 통해 전해준 것이었지만 단장이 이 대본을 보고 저를 떠올리고 석주에게 던져주기까지 오갔을 고뇌 따위를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다.
이 미 다 외운 대사가 적혀 있는 대본을 접어 도로 가방에 넣은 희완이 창에 비친 제 얼굴의 흐린 윤곽을 보았다. 한때는 반사되는 모든 것에 비친 제 모습을 우연히 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위액이 쏟아질 때까지 속엣 것을 게워낸 적도 있었다. 생리적인 눈물조차 가증스러워 손등으로 북북 문대가며 이죽이죽 솟아오르는 자기애를 꾹꾹 쑤셔 넣었다.
고 맙다고 했다. 이 몸에 기꺼이 돈을 지불하여주겠다는 그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우는 대신 스스로 관장하는 법을 배우고 오랄섹스를 연습하고 삽입섹스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려 노력했다. 하루에도 수백 통씩 날아오던 독촉문자 대신 재대출 안내 문자를 받았을 때 희완은 허탈하게 웃었다.
전 역하던 그를 부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업자 중 하나가 낡은 승용차에 그를 태우고 불에 그을린 논밭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 시골길을 달렸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부대 가방을 꽉 쥔 손에서 배어나오던 식은땀의 서늘함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시골길을 한참 돌고서도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서야 나타난 오래된 병원 건물 입구에 희완을 내려준 업자가 땀으로 축축해진 그의 손에 쥐어준 것이 그 대포폰이었다.
매 일매일 전화할 것이고, 매일매일 찾아올 것이고, 매일매일 이자는 늘어갈 것이라던 업자의 손에 등을 떠밀려 병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고 이후 친족확인이 안 돼 무연고자로 처리되었다던 환자의 머리맡에서 희완은 해가 질 때까지 목석처럼 서 있었다. 불에 지져져 고왔던 피부는 찾아볼 수도 없게 잔뜩 오그라붙은 흉측한 얼굴에서 조금이라도 제 누이의 옛 흔적을 찾기 위해 눈 한번 쉽게 깜박이지 못했다.
[형! 단장 형이 치료비 돌려줬어요!]
패 싸움 컷이라 현장에서 나눠준 청바지와 면 티로 옷을 갈아입고 현장에서 대기하며 나눠준 식빵을 뜯던 희완이 문자를 확인했다. 제 식구가 본인 행패로 다친 걸 나중에 알고 챙겨준 모양이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석주의 소매를 주욱 올려 이리저리 상처를 살피고 지갑채로 툭 던져줬을 단장의 모습이 쉬이 연상됐다. 질긴 빵이 녹도록 오래 씹던 희완이 남은 걸 마저 입에 다 밀어 넣고 문자를 넣었다. 끝까지 치료 잘 마치고, 단장님께 내일 대본 돌려드린다고 말씀드려줘.
[그럴 것 없으시대요!]
연 습 중이었던지 잠깐 텀을 둔 뒤 바로 온 문자에 눈썹을 좁히던 희완이 소집 알림에 잠시 망설이다 곧 핸드폰을 끄고 카메라 앞으로 모였다. 설명을 듣는 중에도 좀처럼 집중을 잘 못하고 멍하니 있던 희완이 십장의 고함소릴 듣고 두 패로 갈린 사람들 틈으로 섞여들었 다.
저녁 7시에 시작된 촬영은 새벽 1시가 훌쩍 넘어서야 중단되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리고 있었다.
그 추위 속에서도 공사장 근처 수도장으로 우르르 몰려간 사람들 틈에서 급하게 흙먼지를 씻어내고 옷을 갈아입은 희완도 일당을 받으러 긴 줄에 합류했다. 내일 같은 시간에 올 수 있는 분들 연락처 남기고 가라는 소릴 듣고 반 이상이 옆 줄로 빠지는 걸 보다 제 차례가 되어 돈 봉투를 받은 희완이 꾸벅 인사를 했다.
오 늘 수고 많으셨다는 형식적인 인사가 무색하지 않게 고생스런 현장이긴 했다. 그냥 몸싸움이 아니라 각자 연장을 들고 싸우는데다 살수차까지 대동해 막판에는 이게 진짜 연기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까지 몰아붙여지고 나서야 오케이 컷, 소리를 들었다. 날이 추워 몸이 둔해진 스턴트맨은 물론, 주조연 배우들도 심심찮게 부상을 당했고 엑스트라 중에서도 가벼운 부상자가 속출했다. 큰 부상자가 없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눈 때문에 나머지 촬영은 내일로 미루고 철수작업을 하는 현장을 비켜 돌아선 희완도 유리 파편에 긁힌 뺨을 대충 문대며 후드를 뒤집어썼다. 촬영 중에도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확인했던 핸드폰으로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 룸은 비어 있었다. 약속된 3시까지는 아직 30분이 남아 있었다.
새 벽에 부르는 일은 드물었는데 오늘은 통보도 늦어서 결국 택시를 타고 올 수밖에 없었다. 촬영 도중 빠져나와야 했던 게 아니란 걸 다행으로 여기며 일당으로 받은 출연료에서 택시비를 지불하고 올라오는데 계속 기침이 나와서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괜찮았었는데 급격한 기온 차 때문인지 택시에 오르고서부터 내내 숨을 쉬는 게 불편했었다.
생 수로 마른 입술을 축이고 가방과 옷을 벗어 한쪽에 넣어 놓은 희완이 욕실로 들어가 서랍을 열었다. 호텔엔 항상 관장약과 관장도구가 구비되어 있었고 희완은 몸 상태에 따라 그것들을 구별하여 사용했다. 몸에서 열이 나고 있었다. 관장을 하면 열도 조금 빠질 것이었다. 고무 튜브 하나를 꺼내 꼭지를 잘라내고 항문 속에 밀어 넣은 희완의 입매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두 개를 연달아 더 비워내고 욕조에 들어가 오른쪽으로 누워 몸을 웅크린 희완이 수도꼭지를 틀었다. 높이 매달린 샤워기를 통해 따뜻한 물이 쏴아- 쏟아지기 시작했다. 매질을 당한 살갗과 추위 속에서 오랫동안 눈비를 맞으며 부대낀 몸에서 해묵은 통증이 아우성치듯이 올라왔다. 두 눈을 질끈 감은 희완이 시간을 가늠하기 위해 속으로 숫자를 셌다.
그는 침대 왼쪽을 차지하고 앉아 늦은 잠을 청하고 있었다.
깜 빡 정신을 차린 희완이 화드득 놀라 엎드린 몸을 세우다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매트리스에 도로 얼굴을 박았다. 매를 맞은 뒤의 통증이 상당했다. 눈물이 찔끔 나오는 것을 참으며 통증을 다스리던 희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긴 다리를 꼬아 쭉 펴 놓고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다 문득 제 꼴을 살폈다.
욕 실에서 나와 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다 서 있는 것도 앉아 있는 것도 곤욕스러워 잠시 엎드려 있는다는 게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누웠던 자리도 옮겨져 있었고 그 때만해도 걸치고 있던 가운도 벗겨진 채였다.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던 거다. 누가 옮기고 벗겼는지 묻지 않아도 확연한 것이라서 확 얼굴을 붉히는 희완이 멈칫멈칫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그 뿐이었다. 침대에서 내려서지도 그를 깨우러 다가가지도 못한 채 몸을 앞으로 둥글려 웅크린 희완은 어둔 조명에 비친 그의 얼굴을 망연히 보고만 있었다.
깨워야 할 것 같은데, 깨울 수가 없었다.
실 컷 불러냈더니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잠들어 있는 저를 두들겨 깨우지 않은 그가 이상했다. 관계 도중 힘들어 잠깐씩 정신을 놓은 적은 있어도 저번이나 이번처럼 몸 관리 소홀로 의식을 놓은 건 손꼽아 두 번째다. 제가 생각해도 형편없는 섹스 파트너였다. 그래서 저를 깨우지 않고, 잠든 저를 두고 룸을 나가버리지도 않은 그가 이상하고 불안했다. 설마… 하는 생각에 희완의 창백한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협 탁 위의 시계가 새벽 다섯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더 초조해져 입술을 무는 희완은 그럼에도 선뜻 아무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그를 깨우면 검게 선득한 눈이 조용히 화를 낼 것인지 차갑게 무시할 것인지 확인하기 무서웠고 그렇다고 홀가분하게 달아날 수도 없었다.
한참 웅크려 앉아 입술만 물어뜯던 희완이 결국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그에게 다가갔다. 무릎걸음으로 그 곁에 바짝 붙어 앉아 잠시 망설이다 희게 질린 손을 허리에 올려놓았을 때였다.
굳게 감겨 있던 그의 눈이 어느새 검은 동공을 드러내고 있었다.
“뭡니까.”
놀라 그를 올려본 희완의 목울대가 미세하게 튀었다. 하얗게 질린 머릿속을 거치지 않은 입으로 무어라 말이란 것이 달싹여지려는데,
“됐습니다.”
말로써 그에게 손을 내쳐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또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던 희완이 이를 꽉 악문 채 시선을 내렸다. 긴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려놓는 그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는 게 희미한 윤곽으로 읽혀졌다. 내내 등을 기대고 앉은 게 불편했던지 두둑 소리가 나도록 가볍게 근육을 풀고 일어서려는 남자의 손목으로 차가운 손이 감겨들었다.
“죄송합니다.”
“…….”
“죄송해요.”
남자가 희완을 돌아보자 떨어지는 손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니, 변명은 안 된다.
도로 입을 닫는 희완이 참담한 심정으로 목울대를 울렸다. 이대로 남자가 일어서 이 방을 나가버리면 다시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럴 것 같았다. 이 관계를 그렇게 끝내서는 안 되었다.
희 완은 돈이 필요했고, 셈할 수조차 없다. 웬만하면 장기 몇 개 떼는 것으로 해결을 보겠다는 업자들도 그 몸 남김없이 해체하여 팔아 넘겨봐야 일 년 이자도 못 갚는 수준이라며 똑똑하게 굴라 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이렇게 절박한데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스스로가 못 견디게 한심하고 어리석게 여겨졌다. 기를 쓰고 괜찮은 척 하려는 건 살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갈가리 찢겨진 자존심이라도 부여잡기 위한 최후의 방편이었다. 그러나 그 얄팍한 외피마저도 수시로 뜯겨 허공에 던져졌다. 적나라하게 잔인한 현실만이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희완은 빈 몸이었고, 억대의 빚이 있었고, 하나 남은 혈육은 반 시체였다.
초라하게 헐벗은 몸에 값을 지불하겠다는 남자가 아니었다면 업자의 손에 굴러들어가 아래위가 헐도록 혹사당하고도 채무 변제는커녕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 덩이를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을 터였다.
은인이었다. 그 사실이 비참한 건 온전히 희완의 몫이었다.
“…….”
자 신을 향해 엉덩이를 높이 치켜 올리고 상체를 매트리스에 바짝 밀착해 엎드린 희완의 웅크린 몸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은 어둔 조명 밖에 있어 좀체 드러나지 않았 다.
한 참 엎드려 있던 희완이 몸을 일으킨 건 문이 여닫히는 소리를 듣고도 얼마가 지난 후였다. 멀어지는 발걸음소리를 들으며 수백수천번씩 남자의 발목이라도 붙잡아 매달리라는 마음속 외침을 들으며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기는 것을 느껴야했다.
희게 젖은 얼굴로 상체를 든 희완이 제 몸뚱이 옆에 펼쳐진 수표 넉 장을 발견하곤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