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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66)화 (266/266)

제266화. 저항하는 자 (5)

“그럼 이제 우리 무슨 사이예요?”

계약서를 품 안에 고이 접어 넣은 건주가 사윤의 눈치를 보았다.

“무슨 사이냐니.”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연인, 뭐 고용 관계 그런 거….”

말끝을 흐리며 목덜미를 주물럭거린다. 손가락 위로 드러난 귓등이 붉었다. 목도 서서히 붉은 기운을 머금고 있어 사윤은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저 물음을 조금 전 제게 키스한 남자가 했다고 생각할까. 셔츠 아래 맨살을 쓸어내릴 땐 언제고 이상한 곳에서 귀엽게 구는 면이 있었다.

“왜 사귀는 사이라는 말 듣고 싶어서?”

“…….”

정곡이 찔린 건지 말이 없다. 사윤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손으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렸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폭소했다. 나룻배를 탕탕 쳐 가며 웃으니 불퉁한 얼굴이 된 건주가 표정을 구겼다. 사윤은 한참을 웃다가 나룻배에 늘어졌다. 하도 웃은 탓에 입가의 근육이 땅겼다.

“너 그런 거 물어보고 사귀니. 뭐 우리 무슨 사이야, 이런 거? 이야, 풋풋하다 풋풋해.”

새삼 애새끼라는 게 실감이 났다. 비웃듯 얘기하자 건주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뭘 그렇게 웃어요? 저도 다른 사람 같으면 안 물어봤죠. 근데 상대가 형이라서 물어본 거잖아요.”

“내가 왜.”

“형은 조금 불리해지면 제가 멋대로 착각한 거라고 말하고 도망칠 것 같거든요.”

“얼씨구. 지금까지 뻔질나게 도망친 게 누군데?”

“솔직하게 말하기 싫어서 일 꼬이게 만든 사람은요?”

“한 마디를 안 지고 대들지.”

혀를 차며 씁 소리를 내자 상대가 황당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이유를 듣고 보니 또 나름 타당해 사윤은 한쪽 다리를 꼬곤 구두 신은 발을 까딱거렸다.

확실히 옛날이면 저렇게 말했을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거든.

“네 눈엔 내가 네 인생 저당 잡아 놓고 도망칠 놈으로 보이니.”

“…….”

“어쭈.”

“…그냥 좋아한다, 우리 사귀는 사이 맞다 한마디 하면 될 건데 뭘 그렇게 돌려서 얘기해요?”

“그럼 너도 그 얘기 듣고 싶다고 말하지 뭘 떠보듯 이야기해? 너도 그 말버릇 고쳐야 한다, 예쁜아. 알아들어?”

“맨날 나보고만 고치라 하지.”

“뭐?”

“아 그래서 무슨 사이냐니까요.”

이거 봐라 불리하니까 약점부터 파고들려 한다. 어디서 영악한 것만 배웠다며 괘씸하게 바라보다가 입을 달싹였다.

시발 입술도 맞댔고 네 인생 내 거란 선포도 했는데 굳이 그런 말까지 해야 하나.

솔직히 낯간지러웠다. 말을 하지 않고 입가만 매만지고 있으니 건주가 입꼬리를 따라 그리는 사윤의 손가락을 시선으로 좇았다. 그의 눈동자가 일순 가라앉는다. 놓치지 않고 장면을 포착한 사윤이 제 엄지로 입술을 찍어 내렸다.

“왜. 입술 퉁퉁 부어서 나가려고?”

“…그냥 본 거예요.”

“퍽이나 그러겠다.”

틈만 나면 붙어먹으려 하는 게 어리긴 어린 모양이다. 계속해서 탐하려 드는 게 제 감정을 이제 막 알아차려 욕구를 자제하지 못하는 애새끼 같았다. 경험도 있다더니. 언젠가 받았던 한건주 보고서의 내용을 기억한 사윤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건주가 영문도 모르고 주춤 다가왔다.

“왜요.”

물어보며 몸을 숙이는 이의 멱살을 붙잡았다. 거칠게 끌어당기자 저항도 못 하고 이끌려 온 남자가 눈을 크게 뜬다. 사윤이 건주의 입술을 삼켰다. 키스보단 마킹을 하는 것에 가까울 정도로 잇자국을 내고 씹어 삼킬 듯 물었다. 건주가 작은 비음을 흘린다. 듣기 괜찮아 멱살 쥔 손을 목덜미로 옮긴 사윤이 셔츠 뒤쪽을 잡아당겨 하얀 피부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으음….”

고개를 비튼 건주가 빨라진 호흡을 뒤따라왔다. 눈을 감으니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틈 사이로 밀어 넣어 어떻게든 더 달라붙으려 하는 살덩이에 사윤은 눈꼬리를 휘며 어울렸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혀를 살짝 씹으니 놀라서 어깨를 움찔거린다. 이번엔 힘을 주어 깨물자 아예 신음을 내며 떨었다.

불안했던 건지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게 빌어먹게도 귀여웠다. 동공에 비친 공포와 흥분이 보여 숨을 내쉰 사윤이 그의 목을 꽉 쥐었다.

진짜 씹어 먹고 싶게.

희열이 전신을 감쌌을 때 체중을 기울여 온 한건주가 무릎으로 사윤의 허벅지를 짓눌렀다. 압박하는 부위가 점점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와 낮게 신음한 사윤이 목을 쥐었던 손을 올려 흑발을 휘어잡았다.

“아!”

손목에 힘을 주어 당기자 순순히 고개가 젖혀졌다. 당황한 시선이 사윤에게 닿는다.

“내 앞에서 굴러먹다 온 티 내면 뒤질 줄 알아.”

갑자기 가해진 협박에 건주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사윤은 눈에 익은 그 얼굴을 감상하다가 피식 웃으며 건주를 놓아주었다.

“그거 해, 연인.”

“네?”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할까 봐 불안하다며? 그러니까 그냥 연인으로 도장 찍어 놓으라고. 물릴 생각으로 얘기한 거 아니니까.”

그만 좀 불안해하란 투로 얘기하니 건주가 눈을 크게 떴다가 웃는다. 좋단다 시발. 사윤은 별게 다 귀여워 보인다 싶어 스스로에게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그 표정을 지켜보다가 숨을 골랐다. 그때 두 사람의 눈앞에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탈출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

[탈출 퀘스트-저승 탈출 넘버원!]

‘제 얘기 해도 될지 몰라 기다렸는데 더 늦으면 위험해서요. 출구를 찾아 저승을 탈출하세요!’

주의: 저승의 탈출구는 10분 후면 닫힙니다. 강을 건너 계단을 올라 탈출하세요!

보상: 부족한 카르마 충전

실패 시: 저승 탈출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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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슬슬 나가야 할 때가 되긴 했다. 너무 오래 있긴 했다 싶어 건주와 시선을 교환하고 고개를 끄덕인 사윤이 나룻배에 바로 앉았다. 한건주가 있는지도 몰랐던 노를 손에 쥐고 강을 저었다.

“노 저을 줄은 아냐?”

“배웠어요.”

“배워? 어디서?”

“여기서요.”

뭐?

예상치 못한 대답에 황당해하다가 내친김에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 물었다. 키스 몇 번에 마음이 풀린 한건주는 투덜거림 한 번 없이 퀘스트를 받고 저승에 도착해 왕과 나눈 대화까지 얘기해 주었다. 사윤은 왕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들었다는 건주의 말에 억울함과 괘씸함을 느꼈다.

누구는 개고생해서 들었는데 누구는 왕이랑 대면 한 번 하고 들어?

세상이 요지경으로 돌아간다며 불평하다가 아차 싶어 입을 열었다.

“내가 형이다, 예쁜아.”

“누가 뭐래요?”

음….

혹시라도 기어오를까 봐 선언한 건데 도둑이 제 발 저린 꼴만 됐다.

“형은 거기서 뭘 봤는데요.”

“뭐. 게이트?”

“네.”

한참을 돌아온 대화였다. 지치지도 않고 또 물어 대는 이에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을 마주 보던 사윤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 과거. 어쩌다가 시스템을 얻게 됐고 왜 죽지 않는 몸이 됐는지 좀 봤지.”

“그렇게 중요한 건데 안 알려 줬다고요?”

“내 과거인데 너한테 꼭 보여 줄 필요가 있냐? 나도 안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는 거지.”

당당한 정론 반박이 오히려 더 효과가 있던 건지 한건주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썹을 위로 올리면서도 그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그래도 같이 보고 싶었어요.”

대신 작은 불만만 토로할 뿐이었다. 못 들어 줄 정도가 아니었기에 몇 번 웃는 거로 넘어간 사윤이 어디선가 흘러들어 오는 빛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동굴의 출구 같은 곳이 보였다.

“오, 출구.”

화제를 돌리자 건주가 사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숨을 들이켰다. 강을 완전히 건너가 출구에 닿는 건 금방이었다.

계단 앞에 서서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오를 준비를 마친 다음 먼저 내디딜 때였다.

“지나간 일에 미련은 더 안 둘게요. 그러니 형도 두지 마요.”

“…….”

대뜸 옷깃이 잡히며 고심 끝에 얘기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의 각도를 틀어 진중한 얘기를 건넨 이의 표정을 확인한 사윤이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흘렸다.

“별걸 다 신경 쓴다. 미련 둘 생각 없으니까 오기나 해.”

손을 뻗으며 얘기하자 제게 보여진 손바닥을 말없이 응시하던 건주가 그 손을 맞잡았다. 두 명이 동시에 계단을 오른다.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올라 마침내 빛이 들이닥친 순간 알림창이 떴다.

<퀘스트 성공! 보상으로 부족한 카르마를 지급합니다!>

<천만 카르마가 충전되었습니다. 카르마 상점이 강제 개방됩니다!>

<남은 카르마 1,200,829>

<침입 금지 제한 해제 아이템이 자동 구매됩니다. 500,000카르마가 차감됩니다.>

“뭐, 뭐야?”

제대로 읽지도 못할 만큼 빠르게 뜨는 알림창에 드물게 말까지 더듬으며 당황한 사윤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물러난다고 멈출 알림이 아니었다.

<조건 달성! 두 아이템이 자동 합성됩니다.>

그러더니 태어나서 처음 보는 황금빛 시스템창이 사윤의 눈앞에 들이닥쳤다.

<축하드립니다! L급 아이템 ‘예정된 탑 게이트석’을 합성으로 획득하셨습니다.>

<게이트석이 자동 생성됩니다. 어지럼증에 주의하세요! (º □ º l|l)>

“형!”

일단 수상쩍은 금빛이 허공에 떠오르자 건주가 사윤의 손을 꽉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그것이 무의미하게 황금빛이 두 사람을 집어삼킨다.

끼이이익.

저승의 출구가 닫혔다.

* * *

<예정된 탑에 오신 각성자를 세 여신이 환영합니다.>

“…….”

사윤과 건주는 시야를 가렸던 팔을 내리며 자신을 환영하는 알림창을 확인했다. 예정된 탑이라는 문구를 읽어 눈이 커졌을 때였다.

기다리고 있었어!

갑자기 어디선가 밝은 목소리가 들려 사윤과 건주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웬 종이봉투 같은 걸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당황해서 부지불식간 사위를 둘러보았을 때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재희?”

안쪽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발견한 사윤이 그를 부르자 익숙한 미소를 입꼬리에 걸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판을 엎을 때가 됐더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영문을 모르겠는 말에 둘이서 당황하고 있을 때 종이봉투를 뒤집어쓴 이가 짝! 손뼉을 쳤다.

자자, 일단 두 사람도 퀘스트부터 받고!

그 말과 동시에 건주와 사윤의 눈앞에 푸른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특별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

[특별 퀘스트 – 신들의 전쟁]

운명에 저항하고 싶은 이들은 인간뿐만이 아닙니다. 진영을 선택해 신들의 전쟁에서 승리하세요!

상세 내용: 일곱 신을 끌어내리고자 하는 다른 신들이 당신들에게 협조를 요청합니다. 동시 진행자들과 함께 진영을 골라 소속된 팀을 승리로 이끄세요.

보상: 게이트 삭제

실패 시: 소멸

동시 진행자 (3/3)

-권사윤: 저항하는 자

-한건주: 조력자

-이재희: 천기를 비트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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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는 퀘스트에 사윤은 건주와 함께 숨을 죽였다. 이재희가 그런 두 사람을 보다가 태연히 테이블에 놓인 차를 홀짝였다.

“많이도 당했으니, 이젠 반격할 시간입니다.”

그 순간 사윤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한 가지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재희의 말대로 판이 바뀌었다.

‘거기 똑바로 있어라, 개새끼들아. 언젠가 니들의 그 가짜 몸이라도 다 깨부수러 올 테니까.’

약속을 지킬 시간이었다.

빌런에게도 사연이 있다 2부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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