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5화. 저항하는 자 (4)
“…고백은 고백이고 그걸로 당장 뭘, 어떻게 해 달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형이 왜 그렇게까지 하냐 묻길래,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대답한 거라서요. 이 편이 형이 더 빠르게 납득할 것 같았고.”
떨림을 억누르고 시작된 차분한 설명이 코 아래에서 이어졌다. 그가 말할 때마다 느껴지는 숨결에 몸이 흠칫흠칫 떨렸다. 현실감이 들어왔다가 나가길 반복한다. 머릿속이 멍하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여전히 깨닫지 못했다.
“형.”
음성이 불투명하게 들린다. 뚝뚝 떨어지던 물이 귓속으로 들어간 양 귀 안이 먹먹했다.
한건주는 고개를 들어 그런 사윤을 빤히 살폈다. 눈을 가늘게 떴다가 신음 같은 침음을 흘리며 몸을 바로 일으켰다. 사윤에게 기대다시피 옮겨졌던 체중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제가 형을 좋아할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물음에 퍼뜩 정신이 든다.
알고 있었다.
애정이 섞인 눈길을 받았을 때부터 사윤은 언젠가 이 순간이 오리라 예측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움직였던 습관대로 이 상황 역시 가정해 본 적 있었다. 그런데도 다른 때처럼 즉각적인 대처를 할 수 없었다. 계산된 행동이, 능숙한 대응이 불가능할 만큼 머릿속이 멍해질 거라는 건 상정하지 못했다.
경험 부족으로 인한 계산 미스였다.
불행에 대한 대응은 가능한데 불행인지 행운인지 모를 갑작스러운 애정에는 어떻게 대처하면 되는 걸까.
“음.”
상대가 목을 울렸다.
“혹시, 첫 키스였어요?”
어쩐지 불쾌하게 느껴지는 물음에 흐려졌던 이성이 돌아왔다. 눈동자에 초점이 바로 잡히며 건주를 흘겨본 사윤이 손가락을 그러쥐었다. 얕잡아 보인 것 같아 반박하려던 순간, 한건주가 손을 뻗어 나룻배 위쪽을 짚었다. 사윤의 머리 바로 옆쪽이었다.
앞으로 그림자가 졌다.
“정말로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그것 좀 물어도 돼요?”
자신이 겪은 혼란을 비슷하게 겪고 있는 건지, 흔들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왜 나한테 키스했어요? 날 좋아해요?”
그건 사윤이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다. 들입다 입술부터 박아 대고 고백하는 놈이 대체 세상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무턱대고 입술부터 문지른 건 자기면서 누가 누구더러 키스를….
억울함에 할 말을 곱씹다가 멈칫했다. 게이트에서 그를 내보내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키스를 먼저 하긴 했다. 그걸 왜 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그냥, 마지막이라면 한 번쯤은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차마 그리 얘기할 순 없어 화를 내려던 것도 잊고 침묵을 유지했다. 늘 이렇다. 한건주는 항상 사윤이 생각도 못 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말문을 막히게 했다.
변명할 말도, 적반하장으로 토해 낼 감정도 모두 잃고 위에서 아래로 직시하는 시선을 받아 내고 있으니 건주의 목울대가 한 번 움직였다.
“전, 형이 좋아서 키스한 거였거든요.”
돌아가는 길 없이 솔직한 직구였다. 그래서 도리어 당황스럽다. 일방적으로 알려 주는 감정에 어떻게 반응하는 게 가장 베스트일지 몰라 떠오르는 많은 문장을 모조리 무시했다. 건주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형도 다시 생각해 봐요.”
다시?
“…싫으면 피해요.”
그림자가 점점 짙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익숙한 향기가 몸을 휘감았다. 피부 위로 온기가 전해진다. 처음과 같이 굳어서 피하지 못하고 있자, 허리 아래로 손이 들어오며 뜨거운 것이 입술을 훑었다.
“……!”
사윤은 나룻배에 바짝 기댄 채로 몸을 굳혔다. 생소한 감촉이다. 혀로 아랫입술을 훑고 삼킬 것처럼 빨아 당기는 움직임을 사윤은 피하지 못했다.
못 한 건지, 안 한 건지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었다.
드그극, 머리 옆에서 나무를 긁는 소리가 났다. 한건주가 짚고 있던 나무를 손톱으로 긁으며 고개를 비틀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넘어온 혀가 치아를 두드렸다. 통나무처럼 굳어 있다가 말고 저도 모르게 입을 여니 급하게 안쪽을 파고들었다. 입천장을 쓸었고 안쪽의 살덩이를 휘감았다. 입술을 여러 번 열었다 닫는 사이 거친 숨이 쏟아져 나왔다.
혀를 얽으면서 점점 체중을 기대 오는 이에 사윤은 어느 순간 배 위에 누운 자세가 되었다. 허리를 감았던 손이 마른 배를 더듬는다. 나무를 긁던 손을 내려 사윤의 귓불을 매만지던 건주가 입술을 한 번 세게 물었다 놓더니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눈도 감지 못하고 열기를 받아 내던 사윤은 긴 속눈썹이 올라가는 순간, 흑안에 담긴 깊은 열망을 엿보았다.
심장이 가파르게 뛴다. 사윤의 위로 완전히 올라탄 채 숨을 고르던 건주가 무릎과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몸을 일으켰다. 의식적으로 허벅지가 사윤에게 닿지 않도록 하반신을 물린 이가 신음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덩달아 거칠어졌던 사윤의 호흡이 조금 되돌아왔을 때 건주의 젖은 입술이 열렸다.
“왜….”
속삭이듯 말한 남자가 근육이 보기 좋게 자리 잡은 배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왜 안 피해요?”
이번에도 직설적인 물음이었다.
조금만 돌려 주면 이쪽도 답하기 편할 텐데 우직하다 싶을 만큼 고집스럽다.
고집은 이쪽도 만만치 않은 편이라 대답하지 않으니 배꼽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온 손이 사윤의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안쪽의 여린 점막이 드러나며 입술을 잡아당긴 엄지가 슬쩍 젖었다.
“…내가 싫어요?”
영악한 질문이었다.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혀를 저딴 식으로 놀린다. 사윤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켠 다음 쏟아지는 감정을 마주 봤다. 허락하면 당장이라도 다시 입술을 부벼 댈 눈빛이다. 키스가 나쁘진 않았으나 낯선 기분이라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있었다.
망설이면 그걸 핑계로 다시 맞붙을 것 같아 입을 열었다.
“당장 뭘 어떻게 해 달라는 소리가 아니긴 뭐가 아니야? 곧 죽을 듯 보채면서.”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덧붙인 말에 한건주가 입술을 감쳐물었다. 자기 듣고 싶은 말 안 해 줬다고 거슬려 하는 티가 여기까지 났다. 숨길 수 있으면서도 저러는 게 뻔뻔하기 짝이 없다.
다 알고 있으면서 뭘 물어봐.
자신이 그에게 약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 저렇게 굴 수 있는 거다.
그럼 이미 답 나왔지.
“하여튼 피곤하게 구는 새끼.”
“뭐라고요?”
“손도 많이 가고 까다롭고, 성질머리는 또 겁대가리 상실한 만큼 더러워선….”
기대했던 대답이 아닌 힐난이 쏟아지자 한건주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처음에는 의문을 품었다가 갈수록 짜증 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감정 변화가 볼 만했기에 피식 웃은 사윤이 제 위에 올라탄 이의 가슴팍을 밀어 냈다. 한건주는 순순히 물러나며 자리에 바로 앉았다. 사윤은 조금 전보다 진정한 눈동자를 응시하며 담아 둔 걸 토로했다.
“너 때문에 저항하는 자 활성화했어.”
“…네?”
갑작스러운 선언에 삐진 것도 잊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사윤은 그 얼빠진 얼굴을 바라보다가 제 옆에 뜬 알림창을 힐끗거렸다. 저항하는 자 알림창이 구석에 떠 있었다.
“굳이 성향 활성화 안 하고 쉴 수 있었는데. 너 때문에 기어이 활성화해서 그 게이트 빠져나왔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
“너도 나도 서로한테 저당 잡힌 거야.”
사람 인생 한 치 앞도 모르는 거라더니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사윤은 곱씹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지금의 상황이 기가 차 머리를 헝클였다.
“넌 어떻게 굴러들어 온 복을 발로 차냐. 내가 죽으면 내가 가진 게 다 누구한테 돌아가는데. 재산이고 아이템이고 길드고 다 너 주려고 계획해 놨더니 지가 지 복을 발로 차.”
제가 다 아까워 혀를 차며 말하는데 상대의 반응이 없었다. 무언가 이상해 확인해 보니 한건주가 돌이라도 된 것처럼 가만히 굳은 채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사윤을 보고 있었다.
“…한건주?”
“제가, 뭘 좀… 잘못 이해한 것 같은데요.”
드물게도 말을 더듬은 이가 탄성을 흘리더니 주변을 마구 돌아본다. 사방이 강이고 숲인데 볼 게 뭐가 있다고 그리 바쁘게 둘러보는지. 사윤은 당황스러워하는 건주의 어깨를 잡고 미간을 좁혔다.
“머리도 빠르게 돌아가는 놈이 갑자기 뭔 소리야?”
“뭔가 이상하잖아요. 혹시 뭐 정신 계열 디버프라도 걸린 거 아니에요?”
“넌 여기서 디버프가 걸릴 것 같니.”
“근데 왜 말을….”
“내 말이 뭐.”
“형이 하는 말이 꼭, 살겠다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말하면서도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사윤은 저를 사기꾼 보듯 응시하는 눈동자에 허탈함을 느꼈다.
내가 그렇게 못 할 말을 했나.
살라고 울며불며 매달릴 때는 언제고 사람 참 황당하게 만드는 새끼였다.
“살겠다고 한 거 맞는데 갑자기 뭔 개소리야.”
“뭐라고요?”
“네가 나 살려 보겠다며? 그거 한번 해 보라는데 왜 갑자기 지랄이야? 이제 와서 철회라도 하고 싶니.”
“…….”
협박하듯 말하고서야 거짓말이나 장난 따위가 아니라는 게 실감 났나 보다. 계속 당황만 드러내던 한건주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숨을 멈췄다. 갑자기 호흡하지 않는 이에 놀라 손을 뻗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진 남자가 투명색 물방울을 만들어 냈다. 사윤은 호흡을 체크하기 위해 뻗었던 손을 건주의 눈가로 가져갔다.
“아니 씹. 왜 갑자기….”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 주는데 무슨 한 방울 닦아 줄 때마다 두 방울씩 떨어트리니 효과가 없었다. 손가락이 흠뻑 젖어 두 손으로 닦다 말고 인상을 쓰며 건주의 머리를 확 끌어안았다. 우는 소리가 들린다. 누가 보면 제가 그를 찼다고 생각할 정도로 서러운 울음이었다.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우느라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황당한 심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이가 사윤의 가슴팍에 얼굴을 문질러 눈물을 닦은 다음 한참을 있다가 벌게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다 울었냐?”
놀리듯 물으니 인상을 구긴 이가 무어라 구시렁거린다. 대충 들어도 꼴 받는다 뭐 그런 얘기인 것 같았다. 낯선 분위기가 다 흩어지고 익숙한 분위기만 남아 낄낄거리며 웃자, 잠시 후 물기가 남은 눈가를 손등으로 문질러 정리한 이가 인벤토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럼 일단 이것부터 써요.”
뭔가 싶어 받아 드니 S급 계약서였다.
“형은 말을 자주 바꾸는 편이니까 서류상으로 남겨 두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혹시 몰라 준비했는데 쓸 날이 생각보다 빨리 와서 다행이네요. 제 이름은 미리 적어 놨어요. 형만 사인하면 되는데 펜은 이거 써요.”
혹시라도 제 마음이 변할까 싶어 빠르게 이어지는 설명을 들은 사윤은 자신이 한건주와의 계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 한건주가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 한다는 조항이 야무지게 적힌 계약서를 읽다가 두통을 느꼈다.
시발 진짜. 애를 다 버려 놨네.
누군지는 몰라도 별 희한한 걸 가르쳤다. 사윤은 속으로 험담하며 계약서에 사인했다. 종이 쪼가리 하나로 영향을 받을 결심이 아니었기에 쓰든 말든 상관없었다.
빠르게 서명을 쓰고 넘기니 계약서를 확인하는 한건주의 눈이 빛났다. 드문 광경이라 지켜보다가 픽 웃었다.
무거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생각보다 더….
문득 든 생각에 눈을 감았다. 숨통이 트였다.